소설리스트

〈 172화 〉31장 - 그대를 기다리는 알코르(4) (172/182)



〈 172화 〉31장 - 그대를 기다리는 알코르(4)

운명의 검은실은 다른 능력과 다르게 마법의 완성도를 올려준다.
즉, 지금처럼 순수하게 오러로 싸우는 1대1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운명의 검은실은 제외.

그리고 나는 아연씨를 억지로 움직이는 저 상대에게 생각보다 많은 살의를 느끼고 있었다.
즉, 대상이 아연씨임에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아예 비울 수가 없다는 거다.
따라서 천마신공도 제외.

[특성: '게이머의 혼(S)'의 능력이 '사랑하는 마음 (심플월드)'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 (심플월드)
상대에게 느끼는 사랑이 많을수록, 마법에 관련된 재능이 좋아집니다.]

그렇다면 최대한의 효율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은  하나가 남는다.
본래라면 효율이 낮아서 선택하지 않았을 능력이겠지만....

'지금 상대할 대상이 아연씨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니까.'

아무리 아연씨가 강제로 움직인다고 해도, 내가 상대할 대상은 아연씨다.
그럼 아연씨에 대한 감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발동한다는 거고.
그렇다면 다른 능력에 비해서 훨씬 괜찮은 효율을 보여줄 자신이 있었다.

"흡...!"

머리를 비운다.
이제부터 떠올리는 것은 날카롭게 베어낸다는 개념이 아니다.
떠올리는 것은 내가 그녀를 사랑할 이유.
사랑하는 마음.

"네 패착은 하필이면 여름님 몸에 있었다는 거야."
"지랄하고 있네, 헛소리 할거면.... 읏!?"

아연씨, 그거 아세요?
처음 제가 아연씨를 만났을 때, 굉장히 연약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조금이나마 당신이 힘을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미래 같은 이상한 해석을 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은 알아요.
그 해석은 틀렸었다는 걸.
아연씨는 제 인생을 바꿔주는 조커픽이었고, 계속 방송하기엔 무리가 있었을 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 주셨어요.

아, 어쩌면 그 해석도 틀리지 않았네요.
아연씨는 저에게 있어서 무한한 미래를 만들어 준 사람이니까.

"천마신공, 제2식. 베기!"

파스스!
이 검에 담기는 것은 살기도 날카로움도 아니다.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고 싶다는 의지.
그리고 그 마음은 베어낸다는 개념조차 넘어서서 오러를 깨트린다.

그녀는 부서지는 오러를 급히 재구성해서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이미   오러가 부서진 이상, 계속해서 틈이 보이겠지.
방금 일격으로 확실한 주도권을 가져왔다.

-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 천마 진심모드ㄷㄷㄷㄷ
- 아니 방금 뭐임??
- 갑자기 왤캐 쌔졌냐고
- ??????
- 방금 제대로 보지도 못했음
- 와 시발
- 가짜는 용서 못하긴 하지
- 이게 진짜...?

이제는 정면으로 붙으면 밀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급하게 나와 거리를 두며 렐릭만 지키기 시작했다.
아마 최대한 시간을 끌어서 승리하려는 속셈이겠지.
아무래도 나와 붙어서 이기는 것보다는 버티는데 집중하는 게 쉬울 테니까.

"슬슬 항복하지?"
"한 번 밀렸을 뿐이야. 이제 30분 남았고, 이거만 버티면 우리의 승리야."

하지만 그것도 아까처럼 비등비등한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미 그녀의 오러는 꺾인다는 미래를 보여줬고.
심지어 나는 아직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천마신공, 제3식."

가지고 있던 스택 대다수를 사용해서 마법을 강화한다.
또한 슬슬 끝나가던 마력 심장의 마력을 새것을 써서 보충해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아연씨와 함께 보냈던 6번의 생일 방송을 떠올린다.
유툽을 해보겠다고 편집한 영상을 본 아연씨가 그려줬던 귀여운 썸네일을 생각해낸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배신 받고 상처받아도, 아무도 나를 믿지 않아도, 묵묵히 매니저의 자리에서 나를 지켜주던 그녀가 떠오른다.

방송하며 재미있는 일이 있어서 즐거웠을 때도.
좋지 않은 사건이나 적은 시청자로 힘들었을 때도.
아연씨는 항상 내 곁을 지켜주셨다.

나에게 방송을 계속해달라고 했던 그녀의 유언장을.
절대로 잊을  없는 그 글귀들을 머릿속에 되새긴다.

"...치트키!"
"씨발!?"

극한까지 끌어올린 마음이 오러를 단단하게 만들어낸다.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마음이 내 손에 쥐어지고.
나는 그걸 있는 힘껏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 앞을 막아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야 그녀가 만든 어떤 오러도 이것보다 단단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검을 아무리 강하게 휘둘러도 그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일은 없다.
그것이 내가 이 검에 담은 의지니까.

- 돌았네...
- 아니 진짜 빠꾸 없네
- 이젠 부수지도 않아?
- 방금 그냥 베어버린 거 아님?
-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 무슨 공간 가른 줄 알았네
- 방금 연출 아님? 아니 연출도 아닌데 어떻게 검로가 선으로  그려짐?
- ?????????
- 뭔데 시발
- 이게 오러?
- 진짜 미친거 아닌가?

반항을 멈춘 그녀에게서 렐렉을 모두 빼앗아 챙겼다.
그녀는 마치 괴물을 보듯이 나를 바라봤고, 나는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 목에 검을 가져다 댔다.
예상했던 대로 내가 이겼네.

"20분이나 남았네. 엄청 여유 있게 이겼다."

뭔가 채팅창도 주변 분위기도 난리가 나서 멋쩍어졌다.
나는 이겨야겠다는 생각만 하면서 싸웠던 건데, 어쩌다 보니까 압도해버린 상황이 되어버린 게 원인인가?
그냥 안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것이 이렇게 되어버리네.

['시련발아'님이 10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 돌겠네 진짜. 이게 천마?

"크흠.... 시련발아님, 10만원 정말 감사합니다. 이건 저도 좀 당황스러운데...."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렐릭을 되찾는 것까지는 목표대로 흘러갔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아연씨를 되찾는 것이다.
나는 미리 겨울님에게 들었던 방법대로 렐릭을 조작해서 지역에 타락 효과를 발동시켰다.

전투의 후유증으로 누워있던 아연씨의 날개가 하얗게 변하는 걸 보고 나서야 좀 안심이 되었다.
일단 겨울님이랑 아연씨 몸은 우리가 챙기는 걸로 하고, 패닉 수치가 정상이 되었다면 로그아웃을 시켜달라고 연락을 넣었다.
아연씨가 아무리 수호령이라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패닉 수치를 유지했다면 정신에 많은 무리가 갔을 거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이쪽은 마무리된 것 같고.... 이제 1시간만 버티면 게이트 공략은 끝이네요."
"악마 쪽 편을 드는 게 정답이겠죠?"
"아니면 어쩔  없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람의 몸을 억지로 조종하는 진영이 이겨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리고 주현씨도 내가 믿기는 방향으로 진행을 하라고 했었다.
그럼 아마도 우리가 손을 들어줘야 하는 종족은 악마가 맞겠지.

[월드 퀘스트: S급 게이트
현재 리트라이의 세계는게이트로 침략당하고 있습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장 위험성이 높은 S급 게이트를 모두 제거해야 합니다.
조건: 종합 랭크 S급, 관련 시나리오 접촉
진행: S급 게이트 혹은 침식 제거(1/5)]

그리고 우리가 예상했던 것이 그대로 정답이었다.
모든 천사를 타락시켜 악마로 만들자, 침식 현상이 모두 사라지며 게이트가 무사히 공략되었다.
심지어 월드 퀘스트까지 갱신되었으니까 확실하겠지.

- 뭔가 머리가 어지러워
- ㄹㅇ오늘 내가  본거지?
- 스펙 인플레 미쳤냐고
- 레벨은 없는데 마지컬 차이가 극심하네
- 너무 압도적이라서 할말이 없다ㅋㅋㅋ
- 뭐야 공략 끝남?
- 주모를 찾기도 전애 이미 취해있음ㅋㅋ
- 아ㅋㅋ
- 진짜 취한 기분이네 몽롱함ㅋㅋㅋ

"으, 나도 좀 어지러운 것 같은데요?"

오러를 너무 펑펑 써서 그런 건지 살짝 멀미가 나는 느낌이 들었다.
게이트 수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좀 쉬어야겠네.
알아서 해주겠지....

"저는 그냥 빨리 심플월드 가서 로그아웃 좀 할게요. 쉬어야   같아요. 죄송합니다."

- ㄴㄴㄴㄴ신경쓰지 마세요
- 고생하셨어요
- 오뱅알
- ㄹㅇ오늘 개알찼는데 뭘ㅋㅋㅋㅋ
어깨를 펴십쇼 오늘의 얀별님은 최고였습니다
- 천마는 신인가? 천마는신인가? 천마는 신인가?
- ㅇㅂㅇ
- 별바
- 푹 쉬세요

나는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리트라이의 접속을 종료했다.



☆ ☆  ☆ ☆ ☆ ☆

"그 레일인지 뭔지는 해결했어요?"
"네, 제한 해제 아니면 괜찮다고 했는데. 언니가 그래도 절대로 안 된다고 난리라서 결국 큐브 하나 더 사서 추가했어요."

겨울님이 무사했기에 망정이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으면 설화님 반응이 어땠을지....
그나저나 아연씨는 왜 저렇게 구석에 박혀있는 거야.

"아연씨, 저 보고 싶지 않았어요? 전 보고 싶었는데."
"...저도 지한씨 보고 싶었어요."
"와, 나 여름 언니가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거 처음 보는데?"
"저도 오랜만에 보는데요."

아연씨가 내 매니저를 하던 초창기에는.
아무래도 통화 자체가 처음이라서 굉장히 쑥스러워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 6년 하면 굉장히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거라서, 나도 저런 분위기의 아연씨는 오랜만이다.

"상태는 좀 괜찮아요? 거의 하루를 끙끙 앓았다고 들었는데."
"말도 마세요. 귀신이라서 약도 줄 수가 없고, 옆에서 보고 있으면 얼마나 걱정되던지...."
"겨, 겨울아."

계속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앞에 있는데.
뭔가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오히려 너무 반가워서  말을 하지 못하겠다고 해야 하나?

"오늘만 허락해 줄 테니까. 가서 안기든 비비든 키스하든 야스를 하든 알아서 해."
"뭐, 뭣!?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에, 그런 사이 아니었어?"
"아니에요!"

나까지 당황해서 대답했다.
아니 아연씨는 겨울님한테 나를 어떻게 설명했길래 저런 소리를 하는 거야.
애초에 아연씨는 몸이 좋지 않아서 항상 병원에만 있어서 만난 적도 거의 없었다.

"이야기만 들어보면 거의 동화 속 왕자님이랑 공주님이던데. 7년을 서로만 바라보면서 살았는데 당연히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하죠."
"그  자체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서 한 말 아니에요?"
"앗."

 사람 진짜 악질이네.
생각해보니까 내가 설화님 집에 놀러 갔을 때도 악질 짓을 했던 것 같다.
악질이라고 하니까 이제까지 나한테 둘 다 이야기해 주지 않은 게 괘씸하네.

"그래서, 왜 이제까지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아연씨야 그렇다 쳐도, 겨울님은 알려주셨어야죠!"
"여름 언니가 말하지 말라고 난리를 쳤거든요? 애초에 저번에 편지 써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세요."
"그, 그건 감사하지만요! 그래도귀띔이라도 해주셨으면...."
"이렇게 서프라이즈로 직접 만나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얀별님 성격이면 언니가 수호령인 상태라면 굉장히 신경   같았거든요."
"그건...."

그건 당연한 거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몸을 빼앗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라서 엄청 미안할 것 같았다.
솔직히 지금도 죄송한 마음이 좀 있다.

"그,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지한씨가 이렇게 방송을 즐겁게 하고 있어서 오히려 기뻐요!"
"어우  잘하네."
"알았어요. 최대한 미안함보다는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갈게요."

하여튼 겨울님은 지금처럼 아연씨가 풀다이브할 수 있는 환경을 위해 큐브를 개조해왔다는 거다.
이번 일은  테스트 중에 일어났던 사고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제한해제모드는 신기능이었다 보니, 강제 로그아웃 회선까지는 신경을 쓰지못했다고 했다.

"그, 그것도 그건데. 이번에 일찍 알아차리고 구했어야 했는데.... 알아차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연씨."
"네? 무슨 소리예요. 저는 구해줘서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오히려 계속트롤만 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아연씨 의지로 움직인 것도 아니잖아요. 아연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

아연씨는 아직도 우물쭈물하면서 내 말에 반박하려고 했고.
겨울님은 그게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몰래 그녀의 뒤로 다가가더니 내 쪽으로 휙 밀었다.

"꺄악!"
"아, 아연씨? 괜찮으세요?"

어쩌다 보니까 내가 아연씨를 안아버린 상태가 되어버렸다.
나는 뭔가 자연스럽게 아연씨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는데, 아연씨는 자꾸 고개를 숙이면서 나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겨울님은 그런 아연씨를 보고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뭔가 여름 언니가 둘 있는 것 같아서 즐겁네."
"오, 그래요?"

나는 아연씨와 눈을 마주친 다음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까 지금이 악질을 처단할 타이밍인  같아.
정의 구현은  참지.

"엥?자, 잠시만요?"
"후후...."
"겨울아. 언니한테 장난쳤다는 건, 당연히 네가 당해도 괜찮다는 뜻이지?"

우리는 웃는 얼굴로 겨울님을 덮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