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50)

1화.

무진은 눈을 떴다.

‘…죽은 건가.’

아니, 문득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마의 교주로 천마(天魔)라 불리며 무림 일대를 평정했던 사내.

평생 무림을 주름잡고 영원할 것 같았던 그의 위상도 세월 앞에선 무색할 뿐이었다.

아득한 깨달음으로 반로환동에 이르렀으나, 등선이라 일컫는 심검(心劍)의 경지를 앞에 두고 다시 찾아온 노화는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눈앞에 뒀던 자연을 초월한 경지, 이를 이루지 못하고 이승을 떠난 염원 앞에 텅 빈 육신은 한없이 애처로워 보였다.

‘죽은 거로군.’

무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오열하는 마인(魔人)들. 동료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아무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는 자신.

패왕으로 불렸지만, 결국 한낱 인간이었다.

‘아쉽군.’

생전엔 그토록 두려웠던 죽음이 막상 닥치고 나니, 별 것 없다.

그저 아쉬움만 남을 뿐.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했지만, 무진은 그 짧은 세 마디만 남기고 내려다보던 곳을 떠났다.

처음 겪는 죽음.

그럼에도 그의 혼은 본능적으로 어딘가를 향해 한없이 걷고 있었다.

저승길이라면 저승길일 것이고, 단지 구천을 맴도는 것일 수도 있다.

문득 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가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걸었는지, 한없이 작게만 보이는 이승.

그는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하였다.

‘하아…. 그래도 가야겠지.’

후회 없이 떠나려 했지만, 두고 온 미련은 사슬처럼 그의 혼을 옭아맸다.

‘시간. 내게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격동의 인생, 쏜살같이 흘러간 시간.

그에게 있어 시간은 언제나 아쉬운 것이었다.

“왜. 시간이 좀 더 있으면 자네의 그 염원이 이뤄졌을 것 같나.”

문득 한쪽에서 들려온 알 수 없는 목소리.

무진의 시야가 그곳으로 향했다.

‘누구…?’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한 인형(人形).

의아했다. 무진은 순간 ‘그’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죽은 혼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무진의 시선을 느낀 걸까. 그가 씩 웃었다.

참으로 묘한 사람이었다. 노인 같기도, 중년 같기도 했고, 청년이면서 또한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이였다.

“사람으로 태어나 후회 없이 멋진 인생을 살지 않았나. 그럼에도 한낱 인생(人生)으로 느껴지던가.”

구천인지 저승길인지 모를, 무저갱 속.

한없이 어둡던 그곳에 빛이 이는 착각마저 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코앞에 서 있는 묘한 이. 육신이었다면 격정의 소름을 느꼈을 것이다.

“자네의 염원이 허상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나. 시간이 주어지면, 인생이란 허울에서 벗어날 것 같은가.”

곧 무진은 눈앞에 있는 존재가 흔히 범부들이 말하는 신(神)이란 존재임을 깨달았다.

묘했던 이는 곧 거대하게 느껴졌다.

천마라며, 마신으로 숭배받았으나, 진짜 앞에서 그는 한없는 작은 존재였다.

근데 왜일까.

신을 앞에 두고 불현듯 무진은 꺼졌던 그의 염원이 다시금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진정 허상이었다면 이리 아쉽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압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등선하는 길이 분명 있음을!’

“…….”

간절한 그의 목소리.

그러나 신이라 생각한 그 사람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빤히 무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어두운 허공을 향한다.

그가 턱짓으로 바라보던 곳을 가리켰다.

“저곳에서 누가 날 애타게 찾는구먼.”

‘…….’

누가…?

드높던 시절, 천리 밖도 내다보던 그였지만, 신이 가리킨 곳엔 그저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신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자네도 같은 말을 하는군.”

‘…….’

“왜, 자네 같은 이가 한둘일 줄 알았나?”

‘…….’

“그리고 모두 같은 실수를 반복했지. 결국, 하나같이 남는 건 후회라 하더군.”

‘…….’

“자. 터놓고 말했네. 그럼에도 그 후회를 반복하고 싶은가?”

‘……!’

무진은 깨달았다.

신이 말하는 바의 의미를. 일생(一生)의 기회인 것을.

이곳.

허공인지, 지면인지 모를 어둠 속.

한 줄기 빛을 등진 채 서 있는 그의 앞에.

무진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었다.

‘후회를 반복할지언정.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소…!’

마치 내려보는 듯한 신의 눈빛은 묘한 슬픔을 자아냈다.

그가 자신의 골을 손가락으로 문질러댔다.

“하아,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다들 그렇게 말했지. 가고 싶으면 어서 가게.”

신이 조금 전 바라봤던 허공 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애타게 부르기라도 하는 걸까.

“저쪽에서 누가 하도 날 불러대서 골이 아플 지경이야.”

‘…예?’

“그러니 자네가 어서 가서 저기서 부르는 소리 좀 멈춰주게. 자넨…. 그렇지! 처방 약일세.”

‘……?’

“훗.”

신은 다시 씩 웃었다.

의미를 모를 웃음이었다.

그러곤 응시하던 허공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등졌던 빛이 점차 사그라들 무렵.

그가 멈춰 서 무진을 바라봤다.

“…기구하다 해야 할까.”

‘…예?’

“아니야. 자네 하기 나름이겠지. 가보면 알 걸세.”

점차 멀어지는 신.

무진이 손을 뻗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어디로 가야 하는 겁니까…!!!’

신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어디론가 향해 걸으며 점점이 사라져갔다.

죽었음에도 목청이 터질 것처럼 아이처럼 부르짖었다.

메아리치는 무진의 음성.

사라진 신, 그리고 다시 찾아온 깊은 어둠.

무진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그는 재차 부르짖으며 신을 불렀다.

그래 마치 아이처럼.

“응애, 응애!!!”

아이처럼…….

…응애?

진짜 아이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무진이 다시 눈을 떴다. 하지만 여전히 어두컴컴하다.

벌컥.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일순간 몰려오는 찬바람에 무진은 몸을 떨었다.

곧 옆에서 낮선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는 무사한 겁니까…!”

“아이는 무사합니다. 다행히 멎었던 숨이 돌아왔어요.”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그런데….”

생전 처음 듣는 낮선 언어.

“…”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저희 아이가 맹인이라고요…!?”

사내의 물음에 성직자가 고갤 끄덕였다.

“아무래도 부모 되는 분들께서 고령에 가진 아이다 보니, 그로 인해 생긴 장애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럴 수가, 어떻게 그런 일이….”

성직자로부터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말을 전해 들은 사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성직자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신성력으로 어떻게 저희 아이의 눈을 고칠 수는 없는 겁니까…!!”

사내의 말에 성직자는 고갤 저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신성력은 선천적인 장애까지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어렵게 얻은 자식이었건만, 시각장애라니…. 이럴 순 없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산다고….”

사내가 이토록 힘들어하는 이유. 그것은 갓 태어난 자식에게 닥칠 암울한 미래 때문이었다. 남들과 같이 젊은 나이에 얻은 자식이었다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자식에게 세상을 가르쳐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고령이었다.

언제까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무릎을 꿇었던 사내의 시선이 창을 통해 아내를 향했다.

아직 사실을 모르는 아내는 아이를 안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정한 둘의 모습에 사내의 눈에 절로 눈물이 맺혔다.

“저리 기뻐하는데 이 사실을 어찌 말해야 할지….”

성직자는 사내를 일으켜 세우곤 그의 더럽혀진 무릎을 털어주었다.

“이제 가장이자 아이의 아버지가 되신 겁니다. 이렇게 쉽게 쓰러져서는 안 되죠. 하나 난 저 아이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습니다.”

“예…?”

성직자의 알 수 없는 말에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기적적으로 태어난 아이입니다. 아이의 이름도 ‘이든(행운)’으로 미리 정해 두시지 않았습니까. 혹시 압니까? 브라운, 당신의 걱정과 달리 이 아이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될지 말입니다.”

성직자의 말에 내내 절망하던 브라운의 마음속에 희망의 불씨가 지펴졌다.

“정말…. 그럴까요?”

“네. 왠지 모르겠지만 전 그렇게 느껴집니다. 앞으로 저 아이에게 펼쳐질 화창할 미래가!”

***

주위를 살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설마…. 다시 태어난 건가?’

아무리 ‘그’라도 까마득히 어린 시절은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그의 본능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낮선 이에게서 느껴지는 포근함.

그는 생각을 정리했다.

‘기억은 남아 있어.’

말인즉슨 깨달음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 핏덩이 같은 몸으로 알게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다시 낮선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 얘 좀 봐. 웃고 있네?”

무슨 뜻인지도 모르니 신경 쓸 겨를도 없다. 무진의 생각은 멈추질 않았다.

‘조급해하지 말자. 시간은 많아. 기억은 그대로니 전생의 경지까진 어림잡아 약관 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생각을 정리한 무진은 천천히 천마심공의 구결을 외웠다.

작디작은 아이의 단전, 자칫 무리했다간 일생의 기회를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무진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천천히….’

품에 안긴 무진은 오로지 먹고 자는 것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운기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무진 스스로가 자신의 몸에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세월이 흐르고 무진이 일곱 살 되는 해였다.

‘재수도 없지.’

쓴 웃음을 짓는 무진.

그는 집 근처 공터에서 가부좌를 하곤 자신의 내부를 관철중이었다.

‘많고 많은 것들 중에 시각에 장애라니…’

지고했던 시절.

그에게 있어 시각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괴물과 같은 기감(氣感)으로 눈으로 보기도 전에, 몸부터 반응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난 지금은, 그만한 경지가 일단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할 수 있다.’

처음 자신이 장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적잖이 실망했다.

생의 기회를 주었던 신이 기구한 삶이 될 거라 미리 귀띔해 주긴 했으나, 설마 장님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예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어렵게 얻은 일생의 기회. 이미 이전 생에 절대 고수의 반열에 올라 무림을 제패했던 몸이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걸, 그 스스로 깨달은 바 역시 있었다.

그리고…

‘눈이야 뜨면 되지.’

응…?

남이 들었으면 뭔 개소리냐고 했겠지만, 전생의 우화등선을 앞에 둔 입신의 몸으로 알게 된 한가지.

육신의 탈피!

그것은 단순히 몸이 재구성되는 환골탈태나 반로환동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혼이 육신을 떠난다는 개념은 아니다.

인간의 몸에서 벗어나 자연초월의 신의 몸을 갖게 되는 것!

즉, 우화등선을 이루면 눈쯤이야.

얼마든지 다시 뜰 수 있단 얘기다. 물론… 등선할 경우에.

“응…?”

또냐?

무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또 왜.”

무진의 말에 옆집 남자아이 루디가 놀란 얼굴을 했다.

“어떻게 알았어!?”

“기척을 줄이고 오든가.”

“응? 기…척? 그게 뭐야?”

루디가 무슨 말인지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무진이 머릴 긁적이다가 이내 말을 돌렸다.

“아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야?”

“오늘도 그 이상한 놀이 중이야?”

“이상한 놀이가 아니라. 운공 수련 중이다.”

“키킥. 아무튼 별나다니까. 그나저나 정말 신기해. 이든은 눈도 잘 안 보이면서 어떻게 매일 내가 오는 걸 먼저 알아차리는 거야?”

“에혀….”

무진, 아니 이든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매일같이 놀러 오는 이 루디란 꼬마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요 어린놈을 때려서 쫓아낼 수도 없고…

“넌 할 일도 없냐? 왜 매일같이 놀러 오는 거야?”

“그야….”

이든의 잔소리에 루디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너 하는 게 웃겨서!”

“끄응….”

아무래도 더는 수련에 집중하기 힘들었던 모양인지 이든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그 모습에 루디는 퍽 실망한 얼굴을 했다.

“뭐야. 오늘은 벌써 끝난 거야?”

“뭐, 더는 집중하기 힘들 것 같아서.”

“치….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집에 돌아가야 하네. 심심한데.”

이놈아! 내가 네놈하고 놀 나이가 아니다.

라고 목구멍까지 나오다 참는다.

비록 보이진 않았지만, 루디의 잔뜩 실망한 목소리에 이든이 곤란한 표정을 했다.

“어이. 꼬마.”

“응?”

꼬마가 꼬마보고 꼬마라 부르니 참 아이러니하다.

이든이 집으로 돌아가는 루디를 불러 세웠다.

“그럼 나하고 놀아 볼래?”

“정말!?”

평소 그의 수련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던 루디는, 평소와 다르게 이든이 같이 놀자는 말에 꽤 신난 얼굴을 했다.

이든이 피식 웃었다.

“그래. 칼싸움은 어때?”

“칼싸움 좋지! 근데…. 이든 너, 칼싸움할 수 있어!?”

“훗. 깜짝 놀라서 울지나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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