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이든은 일어나기 무섭게 간단히 빵으로 허기를 채우고는 밖으로 나섰다.
똑똑똑!
밖으로 나선 그가 곧장 향한 곳은 루디네 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누구…. 어머, 이든 아니니?”
아직 새벽 공기가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당연히 찾아온 불청객이 탐탁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찾아온 손님이 이든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잔뜩 찌푸렸던 그녀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좋은 아침입니다. 도나 부인, 혹시 루디는 아직 자고 있습니까?”
앳된 얼굴에 애 같지 않은 말투. 그 모습에 도나 부인이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으며 입을 뗐다.
“방금 일어났단다. 루디 불러줄 테니 잠깐만 기다리렴.”
도나 부인이 어디론가 발을 옮기더니 잠시 후, 루디가 여전히 잠이 덜 깬 얼굴로 나왔다.
“이든…. 무슨 일이야. 아침 일찍부터 하암…!”
“쯧.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거늘 아직도 잠이 덜 깬 거야?”
“뭐야. 그 할아버지 같은 말투는.”
“됐고. 어서 밥 먹고 나와. 수련, 아니 칼싸움하자.”
“엥, 무슨 아침부터 칼싸움이야.”
“왜. 나랑 놀자며. 놀기 싫어?”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빨리 먹고 나와.”
“어…? 이든. 네 할 말만 하는 게 어딨어!”
평소에는 말 상대도 귀찮아하더니, 대뜸 와선 자기 할 말만 하다니….
이든의 모습에 루디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잠시 뒤, 대충 허기를 달랜 루디가 집 앞 공터로 나왔다.
“왔어?”
이든이 가부좌 자세를 풀곤 옆에 있던 막대기 하나를 루디에게 건넸다.
“뭐야. 진짜 칼싸움부터 하고 노는 거야?”
“왜, 왜…. 싫어?”
“그건 아니지만, 칼싸움은 어제도 했잖아!”
“오늘 또 하면 어때. 재미… 없나?”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이든이 그답지 않게 당황했다.
“딴 거 하자. 딴 거!”
“따, 딴 거…?”
“응! 숨바꼭질 어때?”
이든 딴에는 좋다고 방방 뛸 줄 알았는데, 싫증을 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이든은 루디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알았어. 그럼 이따 숨바꼭질해 줄 테니까. 일단 칼싸움부터 먼저 하자. 알았지?”
“흠, 좋아. 알았어! 그럼 칼싸움하고 꼭 숨바꼭질도 하는 거다.”
“에혀… 그래. 알았다.”
에휴. 대련 한번 하자고 이런 짓까지 해야 해?
어렵게 루디를 구슬린 이든이 세상 다 산 노인마냥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붕붕!
본격적인 칼싸움(?)에 앞서 간단히 몸을 풀고 있던 이든과 숨바꼭질을 앞두고 들떠 있는 루디 사이로 처음 보는 소녀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가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야! 너희. 여기서 뭐 하냐?”
아는 얼굴인지, 루디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어? 너는….”
루디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기다란 금발에 피부가 하얀 소녀가 이든과 루디를 번갈아 가며 신기한 듯하단 투로 빤히 보고 있었다.
“너희 둘, 칼싸움하게?”
“어? 어어…. 근데 왜?”
“왜긴 왜야. 쟤 장님 아니야?”
“너, 너! 이든한테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
가만히 애들 대화를 듣던 이든이 고갤 갸웃거렸다.
‘뭐야. 쟤가 뭐길래. 저리 겁을 먹은거야?’
잔뜩 기죽은 듯한 루디의 반응에 이든이 의아해하는 사이, 여자아이가 톡 쏘는 투로 입을 열었다.
“어머, 너 지금 나한테 소리 지른 거야?”
“내, 내가 언제!”
“너, 꿈이 황실 마법사라면서? 나한테 괜히 밉보이면 황실은커녕 그 근처도 못 갈 텐데. 괜찮겠어?”
옆에서 가만히 듣던 이든이 비로소 이해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오호라, 관료 출신의 딸아이였군.’
그때, 이든이 웃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소녀가 이든을 홱 째려보았다.
“너! 방금 비웃은 거야?”
“음? 뭐래, 귀여워서 웃은 건데?”
“무, 뭣.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귀엽다니! 눈도 안 보이면서!!!”
“…”
싸가지는 없네.
순간, 소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든과 루디의 또래 정도 됐을까. 출신이 출신인지라, 애들조차 그 아이에게 굽신대기 바빴다.
그런데 귀엽다니…?
살면서 이런 말을 가족들 말고 누구에게 들어봤을까.
하지만 당황한 것은 소녀만 아닌 듯하다.
루디가 황급히 입을 뗐다.
“이든! 제인에게 그런 말 하면 큰일 나! 쟤는 칼스테인 백작가의 딸이라고!”
“누가 제인에게 귀엽다고 했다고?”
그때.
뒤편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루디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확인하다 식겁한 얼굴을 했다.
제인과 쏙 닮은 듯한 얼굴에 옆으로 넘긴 금발 머리.
제인의 두 살 터울 오빠인 칼라슈가 옆엔 수행기사를 데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카, 칼라슈 도련님.”
루디가 급히 예를 갖췄지만, 칼라슈는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재차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어떤 미천한 놈이 내 여동생에게 귀엽다고 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말이야.”
얜 더 싸가지 없네.
제인이 귀여운 면이라도 있었다면 그의 오빠는 오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뭐 그래 봤자 이든에겐 제인이나 칼라슈, 루디 모두 다 같은 애들일 뿐이지만….
‘음?’
이든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의 기감이 칼라슈 옆, 수행기사로 향했다.
‘흠. 느껴지는 기세로 보아하니 호위무사 같은데. 백작가 자녀들의 호위니, 신분은 기사인가? 한번 겨뤄보고 싶은데.’
딴청을 부리는 이든의 모습에
칼라슈의 눈썹 한쪽이 있는 대로 치켜 올라갔다.
“너, 지금 날 무시하나?”
“응? 나?”
“이, 이 놈이…!”
나? 나아아아?
어처구니 없는 이든의 대답에 칼라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 옆에 수행기사와 제인 역시 꽤 황당한 표정이었다.
그때, 퍼뜩 정신을 차린 수행기사가 이든을 향해 버럭 외쳤다.
“이놈! 도련님께 예를 갖추지 못하겠느냐!”
“…”
하…
이것들을 죽여 살려…?
이든의 표정이 금세 뚱해졌다.
‘내가 몸이 이래서 그렇지. 내가 어!? 나이가 몇 갠데 지금!’
게다가 신교의 천마신이라 불렸던 그에게 예를 갖추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가?
그때, 칼라슈가 손을 들어 수행기사를 물렸다.
“내가 알아서 해결하지. 그댄 끼어들지 말도록.”
“예. 도련님.”
기사가 고갤 숙이곤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때, 안절부절못하던 표정의 제인이 칼라슈의 팔을 꽉 붙잡았다.
“오, 오빠. 난 괜찮으니까 그만해…!”
“제인, 너도 천한 것들에게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어?”
그때, 가만히 칼라슈의 말을 듣던 이든이 버럭 호통을 쳤다.
“쯧. 어린것들이 뭘 보고 자랐기에 벌써부터 계급을 가지고 사람을 천하다 귀하다 하는 것이야!”
“뭣…. 무슨!”
대뜸 호통에 칼라슈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퍼뜩 정신을 차린 칼라슈가 눈살을 찌푸렸다.
“감히 네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고도 네놈이 무사할 것 같으냐!”
“알지. 백작의 자녀분들인데, 모를 리가 없지. 근데 백작의 작위는 너의 아버지이신 아반 칼스테인 님의 것이지 너의 것이 아니지 않으냐.”
“그래서 지금 네놈과 내가 같은 급이라는 것이냐?”
“말귀 진짜 못 알아 처먹네. 같은 급이란 게 아니라. 네 것도 아닌 힘으로 사람들을 함부로 밑에 두지 말란 말이다. 쯔쯧….”
“이잇…!”
씨벌게진 얼굴로 흥분한 것은 비단 칼라슈만은 아니었다.
그의 수행기사 역시 금방이라도 이든을 혼쭐내기 위해 달려들 기세였다. 이든 이를 못 알아챌 리가 없다. 그때, 그가 순간 묘책을 떠올렸다.
‘계속 열 받게 해서 기사랑 한번 붙어봐?’
이든이 칼라슈에게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옆에 있는 사람은. 기사분…?”
“당연하지. 우리 가문의 수호 기사 중 한 명이다. 근데…. 그건 왜 묻지?”
능청스러운 얼굴로 생뚱맞은 질문에 칼라슈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때, 이든의 얼굴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홱 변했다.
“칼라슈, 내가 조금 전 너에게 무례하게 군 것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받고 싶지?”
“그야 당연하지. 고귀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넌 나에게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럼 저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나 혼내라고 해. 그럼 내가 사과하지 않을까? 응?”
이런 미친놈을 봤나…?
분명 여기 있는 모두가 그런 표정으로 이든을 보고 있었다.
어이없는 얼굴을 하던 칼라슈의 입술이 일순 위로 말렸다.
더 없이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칼라슈가 입을 열었다.
“너 같은 녀석. 수호기사가 아니더라도 나 혼자면 충분하지.”
응?
이게 아닌데…?
“나와 대결을 하자.”
“너랑… 대결?”
“그래. 사나이 간의 진검 승부. 네가 날 이긴다면 사과는 없었던 것으로 하지.”
이든이 잔뜩 짜증이 난 얼굴을 했다.
‘아… 자꾸 애들만 꼬이냐 이거.’
“받아라.”
이든이 속으로 툴툴거리던 그때, 칼라슈가 주변에 나뒹구는 막대기 하나를 이든을 향해 던졌다.
휙.
“…!”
“허…”
부릅뜨인 칼라슈의 눈.
그리고 역시 적잖이 놀란 듯한 기사의 표정.
당연했다.
칼라슈가 던진 막대기를 이든이 귀신같이 잡아챘으니…
뭐가 그리도 불만인지 툴툴대던 이든의 얼굴이 차츰 펴졌다.
‘그래도… 기사 양반 아들이니까. 루디보단 훨씬 실력이 좋겠지?’
그래도 금세 기분이 나아진 것인지. 이든이 환하게 웃으며 재촉했다.
“자자, 빨리하자. 덤벼덤벼!”
저 장님놈은 겁이란 게 없는 걸까….
칼라슈가 잔뜩 인상을 썼다.
“천한 놈! 맞고 나서 울지나 마라.”
“고 녀석. 아까부터 천한 놈, 천한 놈 거리는데, 내가 이기면 다시는 그런 말 말거라.”
“이잇…! 이놈이 끝까지!”
이든의 타박에 일순 흥분한 칼라슈가 이를 악물곤 먼저 달려들었다.
‘그래 봤자 고작 애들 싸움이지.’
이든은 흘리지 않고 그대로 막아냈다.
타악!!!!
‘흠…. 생각보다 힘이 제법인데?’
칼라슈의 공격은 생각 외로 매섭게 찔려 들어왔다.
이든이 사뭇 감탄한 얼굴을 하던 그때.
한쪽에서 이를 지켜보던 수호기사가 마른 침을 삼켰다.
‘지, 지금…저 장님이 도련님 검을 막은 거지…?’
“이잇!!!”
자존심이라도 상한 걸까.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기 무섭게 칼라슈가 빠르게 막대기를 회수하곤 재차 휘둘렀다.
휘익!!!
이번엔 막지 않고 흘려낸 이든이 재차 감탄한 얼굴을 했다.
‘호오, 녀석 제법 훌륭한 검법을 구사하는군. 기초겠지만, 이게 칼스테인 가문의 검법이란 말이지….’
정식으로 가문의 검술을 배운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칼라슈의 실력은 그 나이 또래의 것이라 보기엔 너무도 훌륭했다.
타악! 탁!
휘리릭!
대련 중에 탄력이라도 받을 걸까.
이든이 모든 공격을 흘려냄과 동시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반격을 연습했다.
“쥐새끼처럼 도망만 치지 말고 너도 어서 덤벼!”
내내 피해 다니는 이든의 모습에 칼라슈가 신경질을 냈다.
이든이 피식 웃었다. 공격만 하지 않았을 뿐, 칼라슈는 이미 그에게 반격을 스무 회나 넘게 허용했다.
게다가 그의 대련 목적은 애초에 기감이 어찌 반응하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든이 대충 얼버무렸다.
“흠. 칼라슈, 네 실력이 출중한 탓에 빈틈을 노리기가 쉽지 않은걸.”
대충 둘러댄다는 것이, 꽤 효과가 있던 모양이었다.
“저, 정말…. 그런가?”
풉.
그럴 리가.
이든이 속으로 웃었다.
‘흠…. 애들 상대로 이기긴 그렇고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내기를 걸었다곤 하나, 굳이 애를 상대로 이길 생각은 없다. 이든이 잔머릴 굴렸다.
“앗…!”
갑작스런 이든의 외침에 칼라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갑자기 배가 아파서…! 미안하지만 승부는 다음에 내는 게 어떨까?”
“뭐어? 사나이 간에 승부를 그새 잊은 거냐!”
“똥 마려운 걸 어쩌라고. 내일 이곳에서 다시 승부를 가리자. 응? 아아아 나온다 나와!!!!”
“뭐 이런 놈이….”
내일?
사실 이는 한 번 더 불러서 써먹겠단 잔머리였다.
그걸 알 리가 만무한 칼라슈가 선심 쓰듯 막대기를 바닥에 버렸다.
“좋아. 그럼 내일 이곳에서 다시 승부를 내도록 하지.”
“그래, 그래.”
“가서 똥이나 싸라.”
칼라슈가 고갤 돌려 기사를 향했다.
“가자.”
“아, 예…! 아가씨도 가시죠.”
넋 놓고 대련을 지켜보던 기사가 제인을 불러 걸음을 옮기던 그때.
일순 칼라슈가 멈춰섰다.
“너, 이름이 뭐지?”
“나? 이든이라고 한다.”
“내일은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이든.”
천한 놈이 아니라, 제대로 이름을 부른다. 한편으로나마 자신과 진검 승부를 펼쳤던 이든을 인정한 것.
그 말을 끝으로 칼라슈는 제인과 함께 기사를 대동하곤 멀찍이 떠났다.
짝짝짝!
그들이 멀어져 가는 사이, 한쪽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이든, 정말 대단해!!! 검술은 대체 언제 배운 거야!?”
“응?”
“방금 그 검술 말이야! 칼라슈와 그렇게 대등하게 싸운 사람은 이든이 처음일걸!”
“그래?”
이든이 심드렁한 표정을 했지만,
칼라슈의 실력이 생각 외로 출중했던 덕분에 그 역시 만족스러운 수련을 할 수 있었다.
“응!!! 정말!!! 근데 이든, 이제 뭐 할 생각이야?”
“그야…. 뭐, 수련 아니겠어?”
“수련? 칼싸움 끝나면 나랑 술래잡기하기로 했잖아!”
“그건 칼라슈랑 한 거지, 너랑 한 것은 아니지.”
“그래도! 아까 칼싸움한 건 맞잖아!”
그게 왜 그렇게 되냐….
꽥 소릴 내며 우기는 루디의 모습에 이든이 한숨을 푹 쉬었다.
“에휴… 알았다. 대신 이따 칼싸움하는 거 잊지 마.”
“알았어! 자자, 그럼 내가 먼저 숨을 테니까 이든이 찾아봐!!!”
숨바꼭질하잔 말에 들뜬 루디가 재빨리 몸을 숨기기 위해 어디론가 달려간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에게 숨바꼭질이라니, 하지만 약속한 것이 있으니 안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