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50)

4화.

“합! 하압!”

칼스테인 백작의 성에서 앳된 기합이 터져 나왔다.

평소 수련을 등한시하던 칼라슈가 자원해 특별 강습 중인 것.

그 낮선 풍경에 정원 옆을 지나가던 칼스테인 백작은 걸음을 옮기다 말고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칼라슈가 검술 연습 중인 건가?”

백작의 물음에 그의 집사 델몬트가 답했다.

“예. 아침에 제인 아가씨와 어딜 다녀오고 나서부터 줄곧 훈련 중이십니다.”

“흠….”

아침 댓부터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갑자기 저리도 수련에 열중일까.

“칼라슈가 아침에 어딜 다녀왔는지 아는 바는 없나?”

“수행기사를 대동했었습니다. 한번 알아볼까요?”

집사의 물음에 아반 칼스테인이 고갤 끄덕였다.

“성장의 원동력은 라이벌 관계에서 나오지. 누군지 궁금하군. 칼라슈를 자극한 아이가 누군지 말이야.”

***

체력 단련과 더불어 이든이 매일같이 빼먹지 않고 하는 일과 중 하나.

“후우우우….”

바로 심법이었다.

강한 무인이 되기 위한 조건은 다른 것이 없다.

외공과 내공을 쌓고 또 쌓는 것.

전생에 정점이었던 그조차 손에 놓은 적이 없던 이 단순한 일과는 무도를 걷는 이라면 평생에 걸쳐 쌓아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우우웅.

운공하던 이든의 머리카락이 위로 쭈뼛 서자, 그 위로 검은 마기가 치솟는 것 같았다.

“응?”

그때, 이든이 호흡을 멈추고는 고갤 돌렸다.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것이다.

“먼저 와 있었군.”

“어서 와, 칼라슈.”

전날 대결이 이든의 잔꾀로 무마되어, 약속대로 같은 시각에 공터로 모인 것이다.

그때, 이든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칼라슈 주변에 아무런 기척이 없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오늘은 혼자 왔어?”

“누가 더 와야 하나?”

기사까지 딸려 왔으면 어떻게 한번 붙어볼 요량이었는데, 이든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쩝. 아쉽군.”

“응…?”

“아냐 아냐. 신경 꺼.”

“건방진 것은 여전하군.”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는 그의 모습에 칼라슈가 눈살을 찌푸리다 대뜸 무언가를 건넸다.

휙.

“받아.”

“응?”

거의 던지다시피 한 것을 이든이 재빨리 낚아채 잡았다.

잡은 것을 확인하던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오! 목검 아냐?”

그 모습에 칼라슈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볼 때마다 신기하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앞이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보이는 게 다가 아니거든.”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말만 해댄다.

붕붕붕!

가부좌를 풀고 일어선 이든이 목검을 몇 번 휘두르더니 이내 씩 웃었다.

“역시 쓰기엔 목검이 훨씬 더 좋군. 생긴 것은 이전에 내가 쓰던 것과는 많이 다르지만….”

“검술을 배운 적이 있나?”

칼라슈의 물음에 이든이 머나먼 과거를 회상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아주 까마득히 오래전에 말이야….”

“이제 겨우 일고여덟 살이나 된 주제에 무슨. 됐고 어제 못다 한 승부를 내자.”

잠시나마 추억에 젖어 있던 이든이 칼라슈의 말에 화답하듯 검을 바로 세웠다.

“굳은 결의가 보기 좋다, 칼라슈.”

“어제는 비등했을지 몰라도 오늘은 꽤 다를 거다.”

칼라슈가 경고하듯 말을 꺼내자. 듣던 이든이 피식 웃었다.

‘귀엽기는, 어제 이후로 줄곧 수련이라도 했나 보지?’

“간다!”

이든이 그 자신을 어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칼라슈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기합을 내질다.

파앗!

기합과 동시에 칼라슈가 바닥 차곤 높게 뛰어올랐다.

휘이익!

비록 애들 싸움이라지만, 칼라슈에게 있어 혼신을 담은 일격이었다.

하지만.

타악!!!

강하게 내려찍던 칼라슈의 검은 너무도 간단히 이든의 목검에 막혔다.

어제였다면 적잖이 놀랐겠지만,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칼라슈가 재차 검을 휘둘렀다.

“하압!”

텅 빈 공터에 칼라슈의 앳된 기합이 쩌렁쩌렁 울린다. 어제 줄곧 연마했던 가문의 기초 검술을 연달아 펼친 것이다.

휘익! 휙! 휘익!

아직 앳된 손에서 나오는 그 검술은 생각보다 매섭게 이든을 노려 왔다.

이든의 얼굴에 작게 감탄이 일었다.

‘제법인데? 하지만 이 아이가 배운 것은 그중 가장 기초일 터. 기초가 이 정도라면 가문에 전승되는 진짜배기 검술은 더욱 훌륭하겠군.’

이든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대련하는 줄곧 마교의 기초 검 초식인 칠마검(七魔劍) 초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보법을 밟은 것이다.

“뭐, 뭐야. 방금 그 움직임은…!”

일순 바뀐 이든의 움직임에 검을 휘두르던 칼라슈의 얼굴이 금세 당혹으로 물들었다.

칠마검은 막 입관한 마인들이 가장 처음 배우는 기본 훈련이었다. 해서 초식이 단순하고, 그 근본인 보법도 익히기 쉽게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달라진 보법은 백팔마검(百八魔劍)의 것.

칠마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비로소 강호를 나다닐 수 있는 정식 마인들이 익히는 검법인 것이다.

휘리릭!

보법이 바뀌기 무섭게 훨씬 더 경쾌한 움직임으로 빈틈을 정확하게 노려 오는 이든의 목검.

물론 아이를 상대로 하는 대련인 만큼 직접 공격을 가하진 않았다.

뭐 그냥 시늉만…?

그걸 모르는지, 칼라슈가 이를 바득 갈았다.

“칫!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긴!”

약이 오른 칼라슈의 움직임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하체가 흔들리고, 공방의 조화를 이루던 검술이 공으로 치우친다.

아무리 안 보인다지만, 긴 세월 싸움터를 전전해온 이든이 이를 모를까.

여유롭게 목검을 피하던 이든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마구잡이식으로 휘두르다간 오히려 상대에게 빈틈을 보이는…. 음?”

자신도 모르게, 이 새파랗게 어린 후기지수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으려던 그때.

이든이 순간 헛바람을 삼켰다.

마구잡이식으로 휘두른다고 생각한 칼라슈의 목검이 허를 찔러 왔기 때문이다.

‘이크!’

애를 상대로 힘을 뺀다는 것이 방심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이든이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반격을 가했다.

빡!

“앗!!!”

손속에 신경을 쓰지 않은 이든의 목검은 어느새 칼라슈 눈두덩이를 밤탱이로 만들었다.

‘이런!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것도 아니고, 아직 어린애를 상대로….’

그나마 다행인 것은 휘두른 목검에 내력이 일절 깃들지 않았다는 것?

이든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조심히 말을 건넸다.

“크, 크흠. 그…. 괜찮아? 많이 다친 게냐? 그거 달걀로 문질르면 금방 나아…”

“이잇!”

칼라슈가 눈물을 찔끔 흘리곤, 이든이 내민 손을 획 뿌리쳤다.

“이 치욕은… 반드시… 훌쩍, 반드시 갚아주겠다. 이든!”

“어, 저기…!”

아…

참 빠르기도 해라. 벌써 저만치 멀어졌네.

이든이 채 붙잡기도 전에 칼라슈 는 이미 멀찍이 멀어진 뒤였다.

이든이 무안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얘, 얘가… 대련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성질은… 크흠!’

근데….

“그나저나 괜찮은 대련 상대였는데, 한동안 보이지 않겠구먼. 쩝….”

그 와중에 수련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부터 떠오르는 걸 보면, 나이를 허투루 먹었다는 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

“아! 아야야…!”

푸르뎅뎅한 눈덩이를 만지는 성직자의 손길에 칼라슈가 눈살을 찌푸렸다.

“참거라. 금방 나으려면 어쩔 수 없으니.”

하인들이었다면 손을 뿌리쳤겠지만, 상대는 신전에서 온 성직자였다.

그가 함부로 하대해서 안 된다는 것쯤은 칼라슈도 알고 있었다.

“네….”

칼라슈가 신성력으로 치료를 받는 사이, 칼스테인 백작이 주변에 있던 집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제 알아봐 달라 부탁했던 그 아이인가?”

아들이 심하게 다쳐 왔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담담히 말하는 것이, 평소 성격이 어떤지 충분히 보여준다.

“예, 맞습니다. 오늘 아침에 도련님과 대련 중에 일어난 사고였습니다.”

“그렇군.”

길길이 날뛰었어도 모자랄 판에, 칼스테인 백작은 칼라슈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실력이 꽤 좋은 아이군. 어디에 누구지?”

“브라운가의 이든이었습니다.”

“브라운…? 그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된 그 집?”

“네.”

백작은 아들이 다친 것보다 훨씬 더 놀란 표정을 했다.

“내 알기론 브라운의 아들은 맹인이라 들었는데, 아닌가?”

“맞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확실하답니다.”

“허….”

칼라슈가 그간 검술 훈련을 등한시했어도 또래에선 호적수가 없을 텐데,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칼라슈! 우리 아들 칼라슈가 다쳐서 왔다니! 내 아들!!!”

그때, 요란법석을 떨며 등장하는 미모의 중년 여인. 다름 아닌 칼스테인 백작의 아내, 리안나 칼스테인이었다.

이미 중년에 접어들었음에도 여전히 시들지 않은 미모만큼이나 입고 있는 옷 또한 휘황찬란한 것이 칼스테인 백작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성직자님! 우리 아들은 어떤가요!? 이 잘생긴 얼굴에 흉이 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유난스러운 리안나의 모습에 성직자는 벌써부터 질려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냥 멍이 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멍이라니요. 이렇게 퍼렇게 멍이 들었는데….”

신성력으로 치유된 지 꽤 시간이 지났기에, 칼라슈의 멍은 상당히 호전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리안나의 눈엔 여전히 심각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누굽니까. 우리 아들 얼굴을 이리 만든 게!”

성격 한번 변화무쌍하다. 칼라슈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걱정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대뜸 불같이 화를 냈다. 감정이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 평소 하인들이 애를 꽤 먹을 것 같았다.

“부인, 진정하시오.”

“진정하라고요? 지금 아들의 얼굴을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셔요!”

“사내아이가 놀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법이오.”

“놀다 보면 있는 법이라고요? 당신 같은 사람들에겐 이 정도의 멍이 흔한 일인가 보죠?”

“하아….”

칼스테인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칼라슈의 멍은 대부분 아물어 가고 있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그냥…. 놀다가 그런 거예요.”

“칼라슈, 거짓말하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 네 얼굴 그렇게 만든 애가 누구니.”

“당신!”

아들한테까지 쏘아보며 추궁하는 것이 지옥까지라도 쫓아가 알아낼 기세였다.

결국 칼스테인 백작이 참다 못해 호통을 쳤다.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워졌다.

“후… 내 얼굴에 그만 먹칠하고 당신 방으로 가시오.”

“칼라슈 두고 어딜…!”

“들어가라 말했소.”

더욱 사늘해진 백작의 표정, 결국 리안나가 자신의 방으로 발길을 획 돌리다 멈춰 섰다.

“오늘은 내가 참죠. 단, 그 이상은 넘지 마세요. 괜히 저희 아버지께 노여움 사서 당신 앞날에 좋을 것 없으니까.”

“…!”

쿵!

리안나의 방문이 거칠게 닫히고, 괜히 내외간 다툼에 끼어 난감해하던 성직자에게 백작이 고갤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렵게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창피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요.”

“집안일이라는 것이 다 그런 것이지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자, 이제 다 됐습니다.”

성직자가 칼라슈의 눈에서 손을 뗐다. 푸르뎅뎅했던 멍은 신성력으로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성직자님.”

“뭘요. 저보다 더 고생인 사람은 형제님 같습니다.”

“하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인들을 시켜 신전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길에 들른 것이었으니까요. 배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배웅마저 마다하고 성직자는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예의상 성문 앞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백작에게 칼라슈가 우물쭈물하며 다가왔다.

“아버지….”

“…….”

“죄송합니다. 가문의 명성의 누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백작의 우직한 손이 칼라슈의 머릴 쓰다듬었다.

“대련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가문의 명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네가 무엇을 얻었냐는 것이지. 그 싸움에서 칼라슈, 너는 무엇을 얻었지?”

크게 혼이 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아버지가 건넨 물음에, 칼라슈는 우물쭈물하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욕심이요.”

“욕심?”

“예. 저도 아버지처럼 더욱 강해지고 싶다는 욕심이요.”

칼라슈는 예상보다 훨씬 값진 것을 얻고 왔다. 백작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내일부터 이 아비가 정식으로 가르쳐주마. 우리 가문의 진짜 검술을 말이다.”

“정말이십니까, 아버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칼라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 한 번도 검술을 직접 가르쳐준 적이 없던 아버지였기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래, 마음 단단히 먹거라. 칼스테인 가문의 검술은 쉽게 체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열받아 죽겠네!”

그 시각, 리안나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씩씩댔다.

“남편은 너무 물러서 탈이야. 천한 것들을 휘어잡으려면 본보기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몬테이!”

소리 높여 부르는 소리에 밖에서 대기하던 집사가 부리나케 곁으로 달려 들어왔다.

“마님, 부르셨습니까!”

큰 키에 삐쩍 마른 체격, 움푹 패고 치켜 올라간 눈이 델몬트와는 정반대로 기분 나쁜 인상의 사내였다.

“오늘 칼라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예. 물론입죠.”

“남편은 그냥 두라 했지만, 내 성격 알지? 밑의 것들이 기어오르려 들면 밟아줘야 직성이 풀리는 거.”

“제가 그쪽으로 전문인 놈들을 알고 있습니다!”

“잘됐네. 지금 당장 그들에게 전해. 내 아들 얼굴 그리 만든 녀석, 찾아내서 반병신으로 만들어버리라고. 돈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준다고 말이야.”

몬테이의 눈에 순간 이채가 서렸다.

“알겠습니다! 이놈이 괜찮은 놈들을 시켜. 문제없이 처리하겠습니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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