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그럴 줄 알았어.”
“뭐가?”
“예전에 너 우리 오빠랑 싸울 때 말이야. 기억 안 나? 그때 네가 우리 오빠 울렸잖아.”
“그, 그랬나…. 크흠!”
그, 그걸 왜 이제 와서 다시 꺼내나 쪽팔리게…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지.
그 쪼그만 애를 울리다니.
옛 기억이 떠올라 이든이 얼굴을 붉혔다.
“아마 네가 처음인걸? 또래 중에선 오빠를 이긴 거는?”
제인 옆의 수행기사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
‘꽤 오래전 칼라슈 도련님이 누군가에 져서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그게 맹인이었을 줄이야…’
그때, 제인이 재차 입을 뗐다.
“오빠도 이제 아카데미에 입학하겠다. 왠지 네 생각도 나서 이렇게 찾아와 봤던 거야.”
“그래? 근데 너희 오빠 입학이 좀 늦은 것 아냐?”
“응. 원래 예정대로라면 진즉에 입학해야 했는데, 오빠가 부모님을 극구 말렸거든.”
“말려?”
“아직 배움이 부족하다고 계속해서 입학을 미뤘었거든. 근데 이젠 완성됐다나 어쨌다나. 아무튼 우리 오빠도 이번에 입학하기로 했어.”
“그렇단 말이지.”
이든은 고갤 끄덕였다.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확실히 칼라슈란 아이는 당시 보기 힘든 재능이 출중한 후기지수 중 하나였다.
그랬던 아이가 스스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이다. 이든의 입장에선 그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시험해 보고 싶은 욕구가 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너희도 대 귀족이지?”
대뜸 묻는 이든의 말에 제인이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뭐 그렇지? 근데 왜?”
“그럼 칼라슈는 무도 대회에 참가하지 않겠군.”
“그치?”
“아쉽게 되었군.”
“응? 뭐가?”
“아니다. 어쨌든 고맙다.”
이든이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든을 제인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정말 많이 컸구나….”
“응?”
“우리 오빠도 키 진짜 크거든. 근데 너도 오빠만큼 커 보여.”
“그래?”
눈이 보이질 않으니 그간 본인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모르고 지냈다. 문득 자신의 모습이 궁금해진 이든이 제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 혹시 내 머리 색은 어떻지? 외모는?”
대뜸 그 모습에 제인이 얼굴을 잔뜩 얼굴을 붉히며 이든의 얼굴을 훑었다.
“머, 머리 색은 흔치 않은 색이야. 완전한 검은색은 아니고…. 거,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이라고 해야 하나. 얼굴은 하얗고, 쌍꺼풀은 ….”
“그리고?”
이든의 외모를 하나하나 뜯어보던 제인의 얼굴이 말도 못 하게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다가 무엇이 문제였는지 이든을 갑자기 확 미는 것이 아닌가.
“뭐야. 갑자기 왜 사람을 밀어?”
“내, 내가 왜 네 외모를 하나하나 뜯어봐야 하는데! 우, 웃겨. 정말!”
라고 말하고는 휙 하니 돌아가 버린다.
“아, 아가씨!?”
그녀의 수행기사 당황했는지 황급히 제인을 뒤따라갔다.
그런 제인을 향해 이든이 혀를 찼다.
“참나. 아무튼 저 집구석은 자식 교육을 어찌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쯔쯧!”
멀어져 가던 제인을 향해 혀를 차던 이든이 내심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무튼 정리하면 키 크고 잘생겼다 그 말이지? 이게 웬 떡이야?’
제인이 떠난 직후, 곧 있을 무도 대회 때문일까.
솟구치는 의욕을 참지 못한 이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아무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휘릭.
초식을 펼치는 선은 아름답다 못해 화려했다.
손을 휘두를 때마다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춤을 추는 듯한 착각마저 주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 품고 있는 힘은 필시 ‘살초’였다.
아름다운 춤처럼 보이는 이 살초에 천마심공의 마기가 더해지는 순간, 수라의 살육검이 된다.
‘역시 몸에 완전히 익으려면 실전 감각이 더없이 필요하단 말이지.’
더없이 완벽해 보이는 초식이었건만, 이든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듯한 얼굴이었다.
‘무도대회라. 그곳이라면…. 미흡한 지금을 보완할 기회의 장이 되겠군.’
무도대회를 떠올린 이든이 작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조금전 휘둘렀던 초식을 반복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든의 수련은 밤이 깊도록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파팟! 파아아아앗!
길드에서 배정된 물건을 배송하는 이든의 움직임이 여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그것은 경쾌하다기보다 쏜살같았다.
“다녀왔습니다. 정산해 주십시오.”
“…예?”
사무관이 지금 뭘 들은 것이냐는 얼굴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든은 품에서 서류를 꺼내 사무관에게 전달했다.
“서명 확인 부탁드립니다.”
“아, 아아… 예!”
해가 중천이었다. 점심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은 시각에 와서는 모든 배송을 끝냈다고 말하니, 어리둥절한 사무관의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사무관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검토한 서류를 다시 이든에게 건넸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서류를 건네받기 무섭게 곧바로 비서실로 향한 이든이 덜컥 멈춰섰다.
“아무도 없나…?”
이든이 볼을 긁적였다.
배송을 너무 빨리 끝내고 온 걸까.
비서실엔 아무도 없었다.
벌컥.
그때, 유니콘 길드의 지부장실이 열리고 게럴드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든? 이 시간엔 무슨 일인가.”
이든이 들고 있는 서류는 전혀 보지 못한 채, 이곳에 왜 있는지부터 묻는 것을 보면 그가 정말로 배송을 빨리 끝마치기는 한 모양이었다.
“미쳤구먼, 자네.”
서명이 적힌 서류에 최종 결재를 받으러 왔다는 이든의 말에 게럴드가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저, 지부장님. 급한 일이 있어서 빨리 검토 좀 부탁드립니다.”
“뭐, 자네가 맡은 일이니 어련히 잘했겠지.”
게럴드는 별다른 확인도 없이 서류에 인장을 찍었다. 웬만큼 신뢰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간에 오늘도 정말 고생 많았네. 어서 들어가서 쉬게.”
“예,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퇴근해 보겠습니다.”
“아, 맞다!”
그때, 게럴드가 발을 옮기려는 이든을 불러 세웠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그, 이리아 말일세.”
“비서장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리아랑 잘 좀 해보라고.”
“예?”
“비서장 말이야. 요즘 보기 드문 아가씨라고, 이제 열아홉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이곳의 비서장을 맡는다는 건 보통 똘똘해서 되는 일이 아니거든. 게다가 얼굴 예뻐, 몸매도 훌륭…. 흠흠! 아무튼, 내 보기에 이리아가 자네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일세.”
“그랬습니까…?”
이든의 대답에 게럴드가 답답하단 얼굴을 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자네가 이런 쪽으로 어디 보통 눈치가 없어야 말이지. 아니, 어떻게 이리아가 대놓고 신호를 주는데도 그걸 몰라?”
“아아, 예….”
아….
그래서 이리아 씨가 평소에 그렇게 잘해줬던 건가.
이든은 그간 이리아의 행동을 이해하면서 한편으로 그런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무뎌질 때로 나이든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온 동네 남정네들이 이리아를 꼬시지 못해 안달인데, 자네는 이리아가 그리 눈치를 주는데도 어찌 그리 목석같이구나. 내 보다보다 답답해서 한마디 하는 걸세!”
“아, 예….”
“그러니까 잘 좀 해보라고, 응?”
“예. 새겨듣겠습니다.”
“그래. 이제 어서 들어가 봐.”
그렇게 한 소릴 듣던 이든이 지부장실을 나와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마침 식사를 마치고 온 이리아가 지부장실 앞에 서 있었으니까.
“이리아 씨?”
“이, 이든 씨. 벌써 일을 끝내고 오시는 건가요?”
“예. 오늘은 급한 볼일이 있어서요.”
“그랬군요….”
이리아의 얼굴은 굉장히 상기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밖에서 우연히 지부장과 이든의 대화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고, 고생하셨습니다!”
이리아가 고갤 푹 숙이고 인사하며 급하게 자릴 옮기려던 그때였다.
“이리아 씨.”
“예!?”
“항상 고맙습니다. 제가 대접할 테니 언제 식사 한번 같이하시죠.”
“…정말…요?”
“예.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이리아의 얼굴은 상기되다 못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이든은 바삐 걸음을 옮겼다.
“아, 안녕히 가세요.”
들릴 듯 말 듯 한 그녀의 목소리. 그러나 이든은 어느새 저만치 날아간 뒤였다.
그 이리아를 뒤로하고 이든이 바삐 움직이는 곳.
다름 아닌 그곳은 현재 무도 대회에 신청을 받고 있는 칼스테인 가문의 성이었다.
***
칼스테인 성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줄지어 참가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성에 도착한 이든 또한 예상보다 많은 인기척에 놀란 얼굴을 했다.
‘역시 시장 바닥에서 느끼던 기척들과는 다르군. 애들이라지만 역시 무인은 무인인가.’
애들이라도 부족함 없이 갈고 닦아온 아이들의 기도는 확실히 무인의 그것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수많은 기척이 줄지어 선 끝에 이든 역시 줄을 섰다.
오후 시간이 되어갈수록 줄을 서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속도로 늘어나서, 자칫 늦게 왔다 간 줄만 서다 신청서 작성도 못 하고 돌아갈 판이었다.
‘일찌감치 오길 잘했군. 신청자가 이렇게 많을 줄은 미처 예상 못 했는걸.’
오랜 기다림 끝에 이든이 작성할 차례가 될 무렵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나이는 열넷 이상이시죠?”
“예.”
“그럼 주의사항 읽어주시고 이곳에 서명을… 응?”
신청서 서명을 받던 사무관이 이든의 얼굴을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 다름 아닌 그의 눈 때문이었다.
“저기, 실례지만 이곳은 무도 대회 신청을 받는 곳입니다. 알고 오신 것 맞죠…?”
“예. 맞습니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다. 이든이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서명은 어디에 하면 되겠습니까.”
“아… 여, 여기입니다.”
사무관이 허둥지둥 이든이 쥔 펜을 잡고 서명 위치를 알려주던 그때였다.
“뭐야. 진짜 장님이잖아?”
“내 말이 맞지? 내내 눈 감고 있는 게 이상하다 했잖아.”
이든이 쥔 펜이 멈칫하다가 이내 다시 이름을 써 내려 나간다. 이런 반응 또한 예상했던 것 아닌가?
“아카데미도 수준 많이 떨어졌네. 저런 장애인도 신청하러 올 정도면.”
“그래도 일찌감치 와서 줄 서 있던 건 꽤 기특하지 않아?”
“크크! 이 새끼, 말 존나 골때리게 하네!”
옆에 있던 사무관마저 듣기 민망할 정도의 험담이었다.
보다 못한 사무관이 이내 무리들을 향해 버럭 화를 냈다.
“거참, 정숙하시오!”
“크하하! 아,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야야! 조용히 하자. 저 사람한테까지 잘 들리겠다.”
사무관이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다 들리도록 얘기해 놓곤,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전 상관없습니다.”
그때, 뒤에 한 남성이 모두에게 다 들리도록 입을 열었다.
“남의 흉이나 보고, 정말 천박하기 짝이 없군.”
흉을 보던 사내들이 흉흉한 눈빛을 하며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홱 고갤 돌렸다.
“뭐야. 지금 우리보고 한 소리냐?”
사내들의 서슬 퍼런 시선이 향한 곳.
그곳엔 키가 큰 금발의 사내가 서 있었다.
“진정 무인이라면 알량한 혀 따위 놀리지 말고, 검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법. 너희들이 그러고도 무인의 길을 걷는 기사라 할 수 있나.”
“하…! 네놈이야말로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혀를 놀리세요. 쓰발럼아!”
거친 욕설에 금발 사내의 눈살이 한껏 찌푸려졌다.
“입에 걸레를 물었나. 정말 천박하군.”
“뭣이! 이 새끼가 죽고 싶어 환장했나!”
그때, 소란스러운 현장에 눈이 가던 사무관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고갤 숙였다.
“도련님, 이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도련님…?”
칼스테인 백작가의 사무관이 도련님이라 부를 사람이 한 사람 말고 더 있을까.
바로 백작가의 장남 칼라슈 칼스테인이었다.
“저 사람이 그 천재 칼라슈 칼스테인…?”
“아카데미에서 제발 빨리 좀 입학해 달라고 애걸복걸했다며, 황궁에서도 하루빨리 보고 싶어 한다던 것 같은데.”
예상치 못한 칼라슈의 등장에 문전성시를 이루던 성 앞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이는 단지 그의 천재적인 검술 실력뿐만은 아니었다. 이미 사교계에서도 영향력을 넓힌 칼라슈는 무인의 길을 걷는 또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든의 흉보던 사내가 급히 고갤 조아렸다.
“카, 칼라슈 도련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드레이븐 가문에….”
“피차 자기소개는 됐고. 신청서 작성 끝났으면 그만 가줬으면 좋겠는데.”
사내 역시 가문의 명성으로 따지면 부족한 곳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저리 내리 깔보는 듯한 칼라슈에 행동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나는 듯했지만, 어쩌겠는가. 사내가 속으로 화를 삼키곤 웃으며 입을 뗐다.
“아하하! 그, 그럼요. 바쁘실 텐데 제가 괜한 소릴 했군요. 그럼 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웃는 낯으로 급히 자릴 피한 그들이 저만큼 멀어졌을 때, 그들을 마땅치 않은 눈으로 흘기던 칼라슈의 시선이 이든 쪽으로 옮겨졌다.
‘역시….’
이든을 바라보는 칼라슈의 눈빛에 이채가 서린다.
칼라슈가 천천히 다시 입을 뗐다.
“오랜만이군. 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