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형씨도 여기에 참가하는 거요?”
“예. 보다시피.”
이든은 말하며 자신의 검을 가리켰다. 그의 검을 보던 발리스타가 흥미롭다는 투로 물었다.
“검이 참 신기하게 생겼소. 그렇게 얇은 검으로 대회 내내 쓸 수 있겠소?”
“쓰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호오 이 형씨, 꽤 자신 있나 보오?”
자신만 있을까.
마음 같아선 기사 지망생이 아니라, 기사들과 한바탕 겨뤄보고 싶었다.
“그다지 떨리진 않군요. 그쪽은 어떻소?”
발리스타가 턱을 매만지면 주변을 훑었다.
“흠. 몇몇 성가신 이들이 보이긴 하지만 내가 질 것 같지는 않소. 뭐 그래도 그중에 제일을 꼽자면 역시 칼스테인 가문의 칼라슈가 제일 성가시지 않을까 싶긴 한데….”
발리스타의 말에 이든은 새삼 칼라슈의 유명세를 느낄 수 있었다.
‘보지 못한 사이에 정말 많이 성장했나 보군.’
유명세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검으로 자신을 증명하여 유명세를 얻었다는 것은 그 실력이 일취월장하였단 것일 터.
감개무량한 얼굴로 옛일을 떠올리던 그때,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여 있는 광장 한가운데에 누군가 소리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주목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대진표 추첨이 시작됩니다. 모두 각자 원하는 곳에 줄을 서서 대기하여 주십시오!”
광장에 대기하던 사무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사람들을 한곳에 모으곤, 미리 마련된 자리에 착석했다.
참가자들은 각자 원하는 사무관 앞에 제각기 줄을 서기 시작했다.
“야야, 저기 봐. 저기! 칼스테인 칼라슈야.”
“대회에 참가한다더니 진짜였잖아. 아니, 어차피 대회 없이도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는 놈이 대체 여긴 왜 참석한 거래.”
“꺄! 저분이 칼라슈 도련님?! 저분과 아카데미를 같이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무슨, 아직 대회 시작도 안 했는데 설레발은….”
동경과 경계가 한데 뒤엉킨 시선이 칼라슈를 향한다.
이든 옆의 발리스타도 꽤 감탄한 얼굴이다.
“휘유! 저 사람이 칼라슈 칼스테인이라니. 실제로 보니까 정말 어마무시하구먼. 성가실 것 같다는 말 취소. 지금의 나는 상대도 안 되겠구먼.”
‘이놈 봐라. 칼라슈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꿰뚫어 봤다고?’
모두가 단지 유명세로 칼라슈를 경계할 때, 그는 자신과의 실력 차를 판단한다.
본질을 파악한 듯한 발리스타의 말에 이든은 내심 그의 실력도 궁금해졌다.
“이든 형씨는 어떻소.”
내내 치근덕거리는 것에 귀찮을 법도 하건만 이든은 그의 붙임성 있는 성격이 썩 마음에 들었다.
“뭐. 제법인 것 같소.”
“크크! 이든 형씨는 겉보기보다 사내다운 구석이 있구려.”
이목이 쏠리던 칼라슈가 제일 먼저 한 사무관 앞에 섰다. 그러자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칼라슈를 피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자칫 예선에서 칼라슈와 만나 본선에 가기도 전에 떨어지는 것을 염려한 반응이었다.
그때, 상황 지켜보던 발리스타가 넌지시 물었다.
“난 칼라슈 저 친구 서 있는 쪽으로 줄을 설까 생각 중인데. 이든 형씨는?”
“이하 동문이오.”
“응? 무슨 말이오?”
“같이 가자는 거요.”
“크! 역시 사내다우셔.”
이든과 발리스타가 유달리 텅텅 빈, 칼라슈가 서 있던 사무관 앞에 섰다.
자신 뒤에 선 이든을 보고는 칼라슈가 입을 열었다.
“너와는 본선 때 겨루고 싶었는데.”
“내가 성격이 조금 급해서 말이야.”
“훗.”
그때,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발리스타가 의아한 얼굴을 한다.
“둘이 서로 아는 사이?”
“뭐. 어렸을 적 알고 지내던 사이랄까.”
이든의 말을 듣던 발리스타가 난감한 얼굴을 한다.
“아, 이번엔 꼭 합격해야 하는데, 여기 괜히 선 거 아니야?”
말은 이리해도 칼라슈와 이든을 바라보는 발리스타의 눈빛은 흡사 강자와 대결을 앞두고 기대하는 무인의 그것과 흡사했다.
“야! 다른 줄 끝에 선 참가자들 여기 빈 곳으로 이동시켜!”
번잡한 다른 줄과 달리 유독 그들이 선 곳만 한가하던 그때, 보다 못한 감독관이 다른 줄 끝에 서 있던 참가자들을 강제로 떼어내 칼라슈가 선 줄로 이동시켰다.
강제로 이동 중인 참가자들이 울상을 지을 때, 한 남자가 시퍼렇게 날이 선 눈으로 이든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드레이븐 가문의 마르코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조별로 추첨이 시작될 무렵.
총 감독관이 사무관에게 다가왔다.
“이보게, 영주님께서 급히 찾으시네. 추첨은 내가 진행할 테니 자네는 어서 가보시게.”
“영주님께서요…!? 알겠습니다.”
영주가 호출했다는 말에 사무관은 급히 자릴 비웠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감독관이 섰다. 그 모습에 칼라슈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대회 직전에 아버지가 호출을? 지금껏 그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는데.’
매년 진행되는 무도 대회를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버지였다.
그런데 대회를 진행 중인 사무관을 중도에 불렀다.
뭔가 이상했다.
그사이, 총감독관이 입을 뗐다.
“자, 그럼 지금부터 대진표 추첨을 시작하겠습니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자는 앞으로 나와 번호표를 뽑아주십시오. 우선 칼라슈 칼스테인!”
칼라슈의 이름이 호명되자 광장에 이목이 단박에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런 광경이 익숙한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통 안에 있는 번호표를 무작위로 뽑았다.
“15번이군.”
“대진표 15에 칼스테인 칼라슈.”
그의 이름이 대진표에 적히자 같은 조였던 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15번이면 16번만 아니면 되는 거군.”
“제발 16번 피해 가라. 피해 가라….”
참가자들이 저마다 칼라슈를 피해가기를 바라는 사이, 감독관이 다음 참가자를 호명했다.
“발리스타!”
발리스타가 호명되고, 그가 앞으로 다가가 역시 번호표를 뽑았다.
“18번입니다!”
“발리스타 대진표 18! 다음은 드레이븐 마르코!”
칼라슈만큼은 아니더라도 참가한 다른 귀족들 또한 충분히 관심의 대상이다.
무도 대회에 참가하는 귀족들이 대체적으로 다른 참가자에 비해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뽑아주시게.”
순간, 감독관과 마르코의 눈빛이 묘하게 마주쳤다. 통 안에 손을 넣었던 마르코가 번호표를 뽑더니 입을 열었다.
“29번이오.”
“드레이븐 마르코 대진표 29!”
수많은 참가자들이 저마다 호명되며 대진표에 이름이 작성되는 사이, 어디선가 절규가 들려왔다.
“아!!!!!!! 16번이라니!”
“야, 야! 쟤 16번이다. 쟨 이번에도 합격은 글렀네. 크크…!”
곧이어 칼라슈의 대진 상대도 확정되었으나, 이상하게도 내내 이든의 이름만큼은 호명되지 않았다.
‘흠. 호명이 늦는군.’
시간은 흘러 이든을 포함한 단 두 명만이 추첨을 앞둔 상황.
감독관은 그 중 한 명을 호명했다.
“다음, 세바스찬은 앞으로 나와서 번호표를 뽑으시오.”
“네!”
마지막으로 호명된 사내가 앞으로 나가 남은 번호표를 꺼냈다.
시간은 흘러 이든을 포함한 단 두 명만이 추첨을 앞둔 상황.
감독관은 그 중 한 명을 호명했다.
“다음, 세바스찬은 앞으로 나와서 번호표를 뽑으시오.”
“네!”
마지막으로 호명된 사내가 앞으로 나가 남은 번호표를 꺼냈다.
“17번입니다.”
“세바스찬, 대진표 17번! 그럼 남은 참가자 이든은 자동으로 대진표 30번으로 참가한다.”
“자, 그럼 남은 조에서 대진표 작성이 끝나는 대로 예선전을 시작하겠습니다. 그전까지 다들 자리에 그대로 앉아 계십시오.”
대진표 작성이 끝나고 감독관이 자릴 비우려던 그때, 칼라슈가 그를 불러 세웠다.
“감독관.”
“예, 도련님.”
“통 안에 번호표 30번이 남아 있나?”
칼라슈의 물음에 감독관은 순간 당황했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황급히 표정을 지운 감독관이 능청스럽게 통안을 뒤적거리다 의아한 얼굴을 한다.
“이상하군요. 번호표가 없습니다.”
“남은 번호표가 없다?”
“예, 아무래도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알았네.”
“예. 그럼 전 감독관 업무를 진행하러 이만….”
감독관이 멀어지는 사이, 칼라슈는 여전히 미덥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꺼림칙한데.’
잠시 후.
모든 조의 대진표 작성이 끝나고, 감독관의 통제하에 참가자들이 광장 모서리 쪽으로 이동하니, 인파에 가려졌던 연무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대기하던 사무관들이 각각의 연무장에 한 명씩 배정되었다.
이든이 속한 조에는 대진표 작성을 진행했던 감독관이 배정됐다.
이든이 속한 연무장에 선 감독관이 입을 열었다.
“그럼 본선 진출자를 가리기 위한 예선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예선전에서 최종적으로 남는 4명의 참가자가 본선에 진출할 수 있게 됩니다. 자, 그럼 1번과 2번 참가자는 앞으로 나와 대련용 검을 받으시오.”
각 조에 호명된 참가자들이 나오고, 본격적으로 예선전이 시작됐다.
대회 예선은 주최 측에서 준비한 날이 없는 대련용 검으로 승부를 냈다.
본선 전에 부상을 당하면 안 되었기에 주최 측에서 미리 신경을 쓴 것이다.
‘이 세상에도 제법 출중한 인물들이 많군.’
이든은 내심 아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기도에 감탄 중이었다.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 대련장에서 느껴지는 아이들의 투기는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었다.
“15번 참가자 입장!”
칼라슈의 번호가 호명되자 광장 에 있던 모든 이목이 그를 향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16번 참가자.
훙훙훙!
칼라슈가 대련에 앞서 몸을 푸는 사이, 어째선지 상대는 잔뜩 기가 죽어 몸도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있다.
“다들 준비됐나.”
감독관에 물음에 칼라슈가 대답하며 검을 치켜세웠다.
“네, 됐습니다.”
칼라슈에게 느껴지는 첨예한 기도에 앞에 선 상대가 절로 마른침을 삼켰다.
“네, 네! 돼, 됐습니다.”
“그럼 시작!”
파앗.
눈 깜짝할 새였다.
감독관의 외침과 동시에 땅을 박찼던 칼라슈가 어느새 상대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던 것.
“흐힉!”
이에 상대가 까무러치게 놀라며 검을 휘둘렀다.
챙!
대련용 검이 맞부딪쳤다. 칼라슈의 검을 막던 상대의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사이, 칼라슈의 검은 기울어진 승기를 놓치지 않고 그의 목을 정확히 겨누었다.
“와…. 봤어? 이합도 못 버티고 져버렸어.”
‘오호…이합?’
이든 역시 칼라슈의 성장에 꽤 감탄한 얼굴이었다.
“15번 참가자 승! 자 다음, 17번과 18번 앞으로!”
난 놈은 난 놈이라는 시선을 한데 받으며 칼라슈가 대련장 밖으로 나가는 사이, 발리스타의 차례가 왔다.
이든 외엔 내내 관심을 보이지 않던 칼라슈의 시선이 처음으로 대련장으로 향했다.
대련용 검을 받아 든 발리스타와 상대가 몸을 풀기 시작한다.
후우웅! 후우웅!
발리스타가 몸을 푸는데, 검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가 남달랐다.
검에서 이는 풍압은 오롯이 단련된 체격에서 나오는 법.
이든이 또 다시 감탄했다.
‘허! 입만 산 놈인 줄 알았더니. 힘도 제법일세?’
잠시 후, 각자 몸을 다 풀었는지 대련용 검을 세웠다.
“시작!”
앞서 칼라슈를 보고 영향을 받았던 걸까.
파앗!!!
감독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17번 참가자가 칼라슈가 그랬던 것처럼, 발리스타 코앞까지 재빠르게 달려들었다.
휘익!
칼라슈와 마찬가지로 틈을 주지 않겠다는 것.
이를 보는 발리스타의 눈빛에 광채가 서렸다.
“얕보였나 보군. 내가 똑같은 수에 당할 것 같아?”
찰나의 순간, 발리스타와 눈이 마주친 그의 등줄기에 섬뜩한 기운이 훑고 지나간다.
채애앵!
17번이 가한 회심의 선제공격은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발리스타의 빠른 대처로 손쉽게 막혀버렸다.
부르르.
있는 힘껏 내지른 검이 압도적인 힘 차이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못 한다. 그때, 검을 마주한 발리스타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말이야. 나와 가까이 붙은 것 자체가 자네의 최대 실수라고.”
“그 무슨…!”
검을 잡은 발리스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파앙!
온 힘이 다한 발리스타 검이 이내 힘을 겨루던 상대의 검을 밀어 쳐내는데,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17번의 몸이 날아가 공중에 붕 떴다.
쿵!
“크윽!”
“와, 미친! 지금 힘으로 날려버린 거야?”
발리스타의 괴력에 칼라슈가 상당히 놀란 얼굴을 했다. 그건 이든도 마찬가지였다.
‘허…. 애들 싸움 맞아? 순수한 완력으로 상대를 날렸다고? 저거 정말 우리 우호법 생각나게 하네.’
전생 무진이었던 시절.
그의 오른팔이었던 우호법 장룡도 그랬다.
커다란 태도를 휘두르며 무지막지한 힘으로 무림을 휩쓸던 장룡의 모습은 흡사 인중 여포를 떠오르게 했다.
발리스타 또한 그랬다. 천마 시절 무진과 더불어 무림을 종횡하던 우호법 장룡과 그 실력이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순수한 완력만큼은 젊은 시절 장룡을 떠오르게 했다.
“이럴 수가….”
바닥을 나뒹굴었던 17번 참가자가 망연자실한 얼굴을 한 사이, 감독관이 결과를 외친다.
“17번 실격. 18번 발리스타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