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야말로 힘으로 압도한 승리.
칼라슈의 이어 발라스타라는 신성의 등장은 단번에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경계의 시선을 받으며 발리스타가 허허실실 대련장 밖으로 나와 이든 옆에 앉았다.
“어떤 것 같았소?”
눈이 보이지 않는 이에게 물어볼 만한 것은 아니지만, 대강 상황은 알 수 있었다.
이든이 산뜻하게 고갤 끄덕였다.
“훌륭했소.”
“허허! 역시 사람 볼 줄 아셔! 아니, 뭘 좀 아셔! 허허허!”
이든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하곤 황급히 말을 바꿨다.
‘이런 어리숙한 모습도 우호법과 참으로 닮았단 말이지….’
그리고 별 볼 일 없던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 이든의 순서가 왔다.
그의 등장에 칼라슈와는 다른 의미로 이목이 쏠렸다.
유일무이하게 눈이 보이지 않는 참가자.
이든을 향한 눈은 경계의 시선이라기보단 구경꾼들의 시선에 가까웠다.
모두가 그런 와중에 칼라슈와 발리스타의 시선만큼은 남달랐다.
그리고 그것은 이든의 상대인 마르코 역시 다른 의미로 마찬가지였다.
이든을 바라보는 마르코의 시선에 시퍼런 날이 서있다.
‘본선은커녕 다시는 검을 잡지 못하게 병신으로 만들어주마…!’
대놓고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살기.
이든이 이를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가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얜 또 뭐야? 왜 이렇게 이를 드러내지?’
그때, 감독관이 다가와 팽팽한 분위기가 흐르던 둘 사이에 다가와 섰다.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감독관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깃들었지만, 이내 싹 지우곤 본래의 냉엄한 얼굴로 돌아온다.
감독관 입을 열었다.
“두 참가자는 대련용 검을 받도록.”
이든과 마르코에게 대련용 검이 지급되었다.
씨익.
찰나 감독관으로부터 검을 받은 마르코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마지막 순서인 만큼, 규칙에 대한 설명은 따로 하지 않겠네. 모두 최선을 다해 주게.”
이든과 마르코는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시작!”
파앗!
감독관의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르코가 땅을 콱 박차곤 이든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곧이어 마르코의 검이 악에 박힌 듯이 매섭기 휘둘러졌다.
채앵!!
검과 검이 맞부딪힌 순간.
오오오오오!!!
이전까진 없던 환호성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든이 마르코의 검을 막아낸 모습에 지켜보던 이들이 하나같이 열광한 것이다.
정작 마르코의 검을 맞받아친 이든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무엇 때문인고 하니.
조금 전 상대인 마르코에게서 느껴졌던 노골적인 살기가 필시 자신의 목숨을 노리듯 검에 실려 쏘아졌기 때문이다.
‘뭐지? 조금 전부터 죽이겠단 식으로 덤벼드는데.’
이든의 예상대로 마르코의 매서운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반격을 걱정해 조심스러웠던 여타 참가자들과 달리, 마르코의 공격은 마치 앞만 보고 달리는 들소와 같았다.
채앵! 채앵! 챙!
필사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능수능란하게 막아내는 이든의 모습에 시선을 날리던 구경꾼들은 그야말로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스윽.
연신 마르코의 검을 받아내던 이든이 순간 검을 내렸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위험하기야 하겠지만, 확인할 방법이 이것뿐이니….’
줄곧 방어하던 이든이 검을 내리곤 늘어뜨리자 마르코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갤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도 잠시.
그의 눈에 재차 광기가 서렸다.
‘그래. 이참에 아예 죽여주마!!!’
휘익!
실력을 겨루는 대련이라기보단 상대를 죽이기 위한 모습 같았다.
줄곧 매서운 공격을 시도하던 마르코가 온 힘을 다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휘이이이익!
마르코의 검이 이든의 목을 노려 오는 그 순간.
이든이 곡예와 같은 몸놀림으로 마르코의 검을 아슬아슬 피한 그때….
사각.
빗겨 나간 마르코의 검이 이든의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가고, 그 자리에 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날려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쉽게 빗나간 공격에 마르코가 아쉬워하던 그때, 그의 귓가에 이든의 전음이 울렸다.
[너, 뭐 하는 새끼야.]
불현듯 귓가에 울리는 낯선 목소리에 당황한 얼굴을 하던 마르코의 눈이 곧바로 이든을 향했다.
[혹시나 했는데, 진검? 이거 웃기는 새끼네.]
입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든의 말이 마르코의 귓속에 똑똑히 박혀 들어왔다.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당황해하는 것도 잠시. 마르코의 얼굴에 다시 섬뜩한 미소가 피었다.
그의 검이 이든의 숨통을 노리며 재차 휘둘러졌다.
채앵!!!
서로의 검이 맞부딪치며 얼굴을 가깝게 마주하던 그 순간.
비로소 마르코가 그만 들리도록 입을 열었다.
“오늘만 기다리며 평생 수련해 온 동생을 한순간에 검도 못 잡는 병신으로 만들고, 네놈이 무사할 줄 알았어?”
“다짜고짜 무슨 개소리야.”
“식당에서 내 동생 팔 그 꼴로 만든 거. 너지, 이 장님 새끼야.”
“응?”
일전 식당에서 있던 소동.
듣던 이든이 아는 척을 했다.
“아, 그 새끼가 네 동생이었어?”
그때, 마르코를 마주한 이든의 입꼬리 한쪽이 위로 걸렸다.
“형제라서 그런가 하는 짓이 닮았네.”
“뭐?”
검을 쥔 이든의 손등에 힘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마주하던 마르코의 검을 그대로 밀어 쳐냈다.
채앵! 주륵….
가볍게 쳐낸 것 같은데, 마르코의 몸이 뒤로 한참이나 밀려났다.
경악한 얼굴, 검을 쥔 마르코의 손이 덜덜 떨려 왔다.
‘뭐야. 이 무식한 힘은…!’
그때, 다시금 마르코의 귓가에 이든의 전음이 들려와 박혔다.
[내기 하나 하자.]
“뭐?”
[지금부터 제한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난 너의 공격을 막기만 하지.]
“무슨 개소리….”
[단 지금 날 죽이지 못하면, 본선 때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하게 해주지. 반격 따윈 안 할 테니 죽을 힘을 다해 공격하도록.]
“이, 이 개새끼가 날 뭘로 보고!!!!”
전음을 듣던 마르코의 이마에 핏대가 적나라하게 섰다.
그가 핏발 선 눈을 하며 땅을 박차고 이든을 향해 달려들었다.
휘익! 휘이익! 휘익!
이성의 끈을 놓은 채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검술이라기보다 난도질에 가까웠다.
채앵챙채앵!
그야말로 뒤가 없는, 무지막지한 그 모습에 환호하던 관람객들의 얼굴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 뭐야. 이 대련. 아니, 애초에 이걸 대련이라 할 수 있는 거야?”
발리스타도, 그리고 내내 말없이 지켜보던 칼라슈도 상당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더욱이 어처구니가 없던 것은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상황에서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는 감독관이었다.
칼라슈의 눈이 이든과 마르코의 대련에서 감독관으로 옮겨졌다.
‘아까부터 이상하단 말이지….’
칼라슈가 불신 어린 눈으로 감독관을 노려보던 그때.
채애애애앵!
커다란 굉음이 광장을 가득 메우자, 칼라슈의 시선이 다시 대련장을 향했다.
푹!
줄곧 휘두르기 바쁘던 마르코의 검신이 두 동강 난 채 대련장 밖으로 날아가 땅에 박혔다.
얼마나 사정없이 휘둘러댔으면 검신이 박살이 났을까.
참가자들과 멀지 않은 곳이라 하마터면 큰 사고가 날 뻔했다.
일순 피어난 정적.
구경하던 이들이 저마다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대련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이 믿지 못할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마르코가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칼라슈가 일어나 땅에 박힌 검신을 주우려던 그때, 감독관이 급히 다가와 제지했다.
“도, 도련님! 만지지 마십시오.”
“감독관께선 대련을 지켜봐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치워도 상관없습니다.”
“아, 아닙니다. 이런 것도 감독관이 할 일 중 하나입니다.”
칼라슈를 급히 말리러 달려오던 감독관은 가죽 장갑을 착용하고는 바닥에 깊이 박힌 부러진 검신을 뽑아냈다.
‘이상하단 말이야. 애초에 날이 없는 대련용 검을 굳이 장갑을 껴가면서까지….’
칼라슈가 의문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감독관을 바라보던 그때, 검을 치우고 온 감독관이 급히 상황을 정리했다.
“제, 제한 시간이 끝났다. 어차피 검이 부러졌으므로 더는 진행이 불가한 바. 무승부로 둘 모두 다음 경기에 진출한다.”
예측불허였던 마지막 대련이 끝나고, 여전히 가쁜 숨을 내쉬던 마르코를 향해 이든이 다시 전음을 날렸다.
[본선까지 절대 떨어지지 마라. 애송이.]
“이익…!”
마르코가 핏발이 선 눈으로 노려보지만, 어느새 이든은 사람들 틈으로 파고들어 멀찍이 떨어진 후였다.
‘죽여주마…! 기필코 죽여주마. 이든!!!!!’
마르코의 서슬 퍼런 살기를 뒤로하고, 이든이 발리스타 옆으로 와 앉았다.
그 과정에 사람들의 이목은 덤이었고.
“와씨… 봤냐?”
“어… 눈 안 보이는 거 맞아…?”
“와 난 살다 살다 이렇게 살 떨리는 대련은 처음이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지나쳐 옆에 앉은 이든을 향해 발리스타가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괘, 괜찮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치열한 현장에 있던 장본인이 맞긴 한 건지, 걱정이 한가득한 발리스타와 달리 이든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얼굴로 답했다.
“괜찮소.”
“저, 정말…?”
발리스타가 이든을 이리저리 들추며 확인하자 이든이 기겁한다.
“뭐 하는 거요?”
“진짜 다친 곳 없는지 확인하는 거요.”
“보면 모르오? 거, 눈도 멀쩡히 보이는 사람이 크흠….”
이든의 말을 듣던 발리스타가 경외에 찬 눈으로 헛바람을 삼켰다.
“허! 이든 형은 보기보다 상당히 사내다운 구석이 있소.”
“그리 봐주니 고맙소.”
발리스타와 이든이 시답지 않은 농을 주고받던 중, 칼라슈가 그들 앞으로 다가와 섰다.
“이든.”
“응?”
“조심하는 게 좋겠다. 아직 파악 중이지만, 아무래도 배후에서 누군가 의도적으로 너를 노리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의 영지에서 개최하는 대회란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알려준다.
이는 칼라슈의 신념이 그만큼 곧다는 방증이었다.
그런 칼라슈의 행동이 기특했는지 이든이 웃어 보였다.
“훗, 걱정하지 마라. 너와 본선에서 맞붙을 때까지 떨어질 생각 없으니.”
이든의 말에 칼라슈가 당황해하더니 얼굴을 획 돌렸다.
“누, 누가 널 걱정한단 말이냐. 헛소리 말고 본선까지 반드시 올라와라.”
‘제 동생하고 하는 짓이 똑같군. 귀엽기는….’
이든과 칼라슈의 대화 사이로 발리스타가 울상을 했다.
“왜 나한테는 본선에서 만나자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 거요…?”
***
광장에서 젊은이들이 꿈을 향해 그간의 노력을 불태우고 있을 무렵.
칼스테인 성내 한곳에 있는 원형 경기장에선 곧 개최할 본선 준비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백작님, 초대한 손님들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모시게.”
본선 무대 준비를 진두지휘하던 칼스테인 백작이 관람객을 들이기 전, 초대한 귀빈들부터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리처드 레스타드 경. 작년 수도에서의 연회 이후로 오랜만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초대만 해주셔도 영광인데, 이리 귀빈석으로 모셔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바쁘신 와중에 와주신 유니콘 길드의 길드장님을 소홀히 대할 순 없지요.”
“영주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 주신 까닭에, 제가 이곳에서 아주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유니콘 길드의 길드장, 리처드 레스타드는 워낙 바쁜 업무 탓에, 수도 밖으로 나올 일이 거의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각 영지에서 개최하는 무도 대회 일정에 맞춰 전국을 순방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지고, 영주들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도 대회 당일 그를 귀빈석으로 초대했다.
레스타드와 칼스테인 백작이 담소를 나누고 있을 무렵.
초대된 몇몇 귀빈들이 연달아 들어왔고 칼스테인 백작은 그들 역시 반갑게 맞아주었다.
시간은 흘러 관람객들이 경기장으로 입장하고 대부분의 귀빈석이 채워질 무렵.
빈자리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저 자리는 누구 자리입니까?”
평소 궁금한 것이란 못 넘기는 레스타드 길드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드레이븐 드레이크 남작님의 자리입니다. 혹시나 해서 매년 무도 대회가 열릴 때마다 비워두고 있기는 한데, 단 한 번도 오지 않으셨죠.”
“아….”
듣던 레스타드 길드장이 비로소 이해된다는 얼굴을 했다.
드레이븐 드레이크 남작은 과거 이곳의 영주였다.
하지만 칼스테인 백작이 전쟁에서 큰 공적을 쌓은 탓에 영주의 자리에서 밀려났고, 현재는 남작이란 작위로 강등되었다.
사실상 말만 남작이지, 황궁에서 마지못해 먹고 떨어지라 내린 명예 작위나 마찬가지였다.
이렇다보니 칼스테인 가문과 드레이븐 가문은 서로 보기 껄끄러운 사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참석하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듣기론 이번에 드레이븐 남작님의 자제분도 올해 무도 대회에 참가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긴 한데,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현재 참가 중인 드레이븐 마르코 말고도 차남이 참가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경기 전 한 식당에서 싸움에 휘말려, 그만 영영 검을 못 쓰게 되었다는군요.”
“이런…. 그래도 큰아들이 참가했으니 오시지 않겠습니까.”
“흠….”
그때였다. 한창 드레이븐 남작의 참석 여부로 얘기를 하고 있을 때, 한쪽에서 경기장 운영을 맡고 있던 델몬트 집사가 급히 달려왔다.
그가 가쁜 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백작님, 드레이븐 남작께서 오셨습니다.”
“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딱 그 모양이었다.
줄곧 초대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않았던 남작의 등장에 칼스테인 백작이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귀빈석에 들어선 드레이븐 남작 역시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살짝 고갤 숙였다.
“남작님, 어서 오십시오.”
“염치 불고하고 초대에 응했습니다.”
보통 백작과 남작이라면 군신의 관계지만, 이들은 문제는 정치적인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그러지 않았다.
“아닙니다. 와주셔서 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서 앉으시지요.”
“고맙습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서로 보기 껄끄러운 사이임에도 칼스테인 백작은 드레이븐 남작을 부족함 없이 환대했다.
잠시 후, 남은 귀빈석이 백작 옆에 마련되고 드레이븐 남작이 앉았다.
칼스테인 백작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유니콘 길드장이, 다른 한쪽에는 드레이븐 남작이 자리한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