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작은 아드님 소식은 들었습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백작의 위로에도 남작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애초에 행실이 발랐으면 그런 일도 없었겠지요.”
“그래도 큰 아드님도 참가하셨으니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오지 않겠습니까. 듣기론 실력이 대단하다 들었습니다.”
“백작님의 아드님만 하겠습니까. 벌써 상당히 높은 경지에 올랐다 들었는데요.”
언뜻 덕담을 주고받는 듯했지만, 칼만 안 들었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기 싸움이 느껴졌다.
그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감독관 한 명이 귀빈들 자리에 들어와 백작 뒤에 섰다.
“백작님, 본선 진출자가 결정되었습니다.”
감독관이 건넨 명단엔 조별마다 본선 진출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명단의 이름을 살피던 백작이 남작에게 말을 건넸다.
“아드님께서도 본선에 진출하셨습니다.”
관심 없는 척하지만, 얘길 듣는 남작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리다가 한 이름을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의 눈이 ‘이든’이란 이름에 고정되어 있었다.
‘미련한 녀석, 그리 기회를 줬거늘 결국 처리하지 못해?’
드레이븐 남작이 속으로 화를 삼키는 사이, 레스타드 길드장 역시 명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레스타드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이든…?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인데.’
***
둥둥둥둥.
모든 관람객이 경기장에 들어서고, 본선 무대의 시작을 알리는 북이 울렸다.
잠시 후, 경기장 무대 가운데 감독관이 자리해 섰다.
“본선 진출자들은 입장하시오!”
우아아아아아아아!
열렬한 환호 속에서 본선 진출자들이 입장했다.
감독관이 말을 이었다.
“본선 경기도 예선과 똑같이 추첨으로 이루어집니다. 지금부터 모두 보는 앞에서 조 추첨을 시작하겠소!”
감독관의 호명 아래, 본선 진출자들이 차례로 나와 번호가 적인 표를 뽑았다.
발리스타와 칼라슈마저 추첨이 완료된 상황.
“드레이븐 마르코는 앞으로 나오시오!”
드레이븐 마르코가 지명되자 그가 앞으로 나와 번호를 뽑았다. 그의 손에 10번 번호표가 들려있었다.
“10번이오!”
본선 진출자들이 하나씩 호명되며 대진표를 마저 채울 무렵. 이든이 호명되었다.
“다음, 이든은 앞으로 나오시오!”
이든이 호명되어 앞으로 걸어 나오자, 사람들이 저마다 웅성거리며 입을 놀리기에 바빴다.
“장님…. 맞지?”
“그런 것 같은데.”
“아니 눈이 안 보이는데 어찌 본선까지 올라왔데?”
칼라슈 때도 이목이 쏠렸지만, 지금도 만만치 않았다.
웅성거림 속 유유히 걸어 나오는 이든을 향한 시선들 속에 브라운 역시 함께하고 있었다.
‘힘내라. 아들…!’
사람들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가 없다는 듯 무미건조한 표정을 일관하던 그의 손에 번호표가 들렸다.
이를 확인한 감독관이 모두가 들리도록 쩌렁쩌렁 외쳤다.
“9번이오!”
일순 마르코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번호를 들은 이든의 표정은 묘했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군. 본선에 진출하자마자 놈과 재대결이라….’
하지만 이든의 입가에도 금방 미소가 걸렸다.
마치 전생 천마의 시절을 보는 듯, 악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
어느덧 대진표 작성이 끝나고, 참가자들이 대기실로 향했다.
발리스타가 이든 옆으로 다가왔다.
“이든 형, 본선은 진짜 검을 쓰는 만큼 주의하는 것이 좋겠소. 마르코 저 새끼, 이든 형을 바라보는 표정이 진짜 미친놈 같소.”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뭐가 말이오?”
“본선에서 진검으로 대련 중에 죽는 일도 있소?”
“흠…. 간혹가다 그런 일이 한두 번씩은 생긴다고 하더이다. 혹 죽을까 겁이 난 것이오?”
발리스타의 말에 이든이 피식 웃었다.
“나보단 마르코 저 친구가 겁내야겠지.”
긴장감이 감도는 대기실에서 유독 광기 어린 분위기를 보이는 한 사람.
마르코의 눈에 서린 노골적인 살기는 내내 한곳만을 주시했다.
자신을 향한 서슬퍼런 시선이 발산되는 곳, 이든이 턱짓으로 그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발리스타가 고갤 저었다.
“에혀! 아무래도 오늘이 그 날인 듯하오.”
“무슨 날 말이오.”
“누구 하나 죽는 날 말이오.”
둥. 둥. 둥.
잠시 후, 다시 북이 울리고 감독관의 외침이 대기실 안까지 전해져 왔다.
“1번과 2번 참가자 입장!!!!!”
대기하던 1번과 2번 참가자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경기장으로 향한다.
그 모습에 대기실에 있던 다른 참가들까지 덩달아 손에 땀을 쥐었다.
“후우…!”
발리스타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이든이 말을 건넸다.
“긴장되시오?”
“긴장은 무슨! 기대돼서 그렇소!”
“훗.”
이든이 웃었다. 긴장인지 기대인지 구분되지 않는 묘한 떨림.
젊은 시절 자신 또한, 저런 기분을 숱하게 느껴봤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에 이르러선 웬만큼 강자가 아니면 그 정도의 설렘을 느낄 수 없었지만.
‘하긴 저 아이에겐 이곳이 곧 무림인 셈이지.’
이든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후기지수를 바라보는 대선배의 마음이 드러난 것이었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
잠시 후 대기실 밖 경기장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발리스타가 중얼거렸다.
“승부가 난 듯하오.”
덜덜덜덜….
그때, 이든이 앉은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발리스타가 다릴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아, 아무래도 기, 긴장하는 게 맞는 것 같소. 방금 저 소리 듣고 깨달았소.”
“훗….”
발리스타의 얘길 듣던 이든이 실소했다. 그 모습에 발리스타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아니, 웃을 줄도 아시오?”
“간혹 어이없으면 웃긴 하오.”
“하긴 내 생각에도 어이없는 것 같소.”
둘이 담소를 나눈 사이 1번과 2번 참가자가 대기실로 돌아왔다.
둘 다 상당히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얼굴은 한껏 짐을 덜어낸 듯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고생했어.”
“어, 자네도.”
1번과 2번 참가자가 서로 악수하고, 참가자들이 고생했다 격려해 주었다.
단 한 사람, 마르코만 제외하고.
“3번과 4번 참가자는 입장하시오!!!”
잠시 후, 감독관의 외침과 함께 3번, 4번 참가자가 입장하기 시작한다.
우아아아아아아아!!!
또다시 들리는 함성.
본선에 진출한 실력자들인 만큼 엇비슷한 상대끼리 맞붙느라 경기는 눈 깜짝할 새 승부가 났다.
연달아 모든 경기가 짧은 시간에 승부를 냈고, 곧 발리스타의 차례가 왔다.
자신의 대검을 챙기며 움직이는 발리스타를 향해 이든이 무심히 말을 건넸다.
“잘 다녀오시오.”
무심히 던진 짤막한 한마디지만, 긴장이 역력했던 발리스타의 얼굴이 폈다.
“다녀오겠소.”
경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우아아아아아!
경기가 시작된 지 일각이 지나기도 전에 함성이 들려온 것을 보면 둘의 실력이 월등히 차이가 난다는 증거.
이를 증명하듯 발리스타는 땀 한 방울 흘린 기색 없이 대기실로 들어섰다.
발리스타와 대결했던 상대방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자네, 정말 괴물이더군. 많이 배웠네.”
“별말씀을. 나도 좋은 공부가 되었네.”
비록 싸웠던 상대이나, 경기장을 내려온 순간 상대를 인정하고 동료가 된다.
‘무도(武道)’가 갖는 참된 의미를 다들 깨닫는 것이다.
그때, 다음 차례인 칼라슈가 일어나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다음 7번, 8번 참가자는 입장!!!”
감독관의 외침과 함께 칼라슈와 그의 대련 상대가 걸음을 옮겼다.
“잘하고 와라.”
“흥. 이따 너나 잘하시지.”
무미건조하게 던지는 이든의 말에 칼라슈가 운치 없게 답하곤 걸음을 옮겼다.
경기가 시작된 지 얼마나 됐을까. 발리스타 때도 참 빨리 끝났지만, 칼라슈는 경기 시작과 동시에 승부가 났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너무 허무하게 끝난 탓일까. 칼라슈의 상대가 상당히 기죽은 얼굴로 대기실로 들어오자 뒤따라오던 칼라슈가 그의 등을 토닥였다.
“자넨 잘 싸웠다. 단지 내가 나이와 경험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지. 절대 자네의 실력이 뒤떨어져서가 아니야.”
칼라슈의 격려에 그의 상대가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대화를 엿듣던 이든이 칼라슈의 또 다른 이면의 감탄했다.
‘강자로 머무는 것만이 아니라. 상대를 이끄는 재주까지. 지도자의 자질도 갖췄군. 백작이 자식 복은 좋군.’
시간은 흘러 이든의 차례가 왔다. 호명을 기다리던 그때, 옆에 서 있던 마르코가 그에게만 들리도록 말을 건넸다.
“어때. 죽기 전 마지막 휴식은 잘 보냈나?”
“충고하나 해줄까?”
이든의 알 수 없는 말에, 광기로 휩싸인 마르코의 눈이 이든에게서 떠날 생각을 않았다.
“오늘이 자네 가문의 마지막이 될 것이야. 기대해도 좋아.”
“미친놈.”
“9번과 10번 참가자는 입장하시오!!!!”
이든과 마르코가 대회 경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는 둘 사이의 분위기는 무겁다 못해 살벌했다.
우오오오!
경기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참가들의 입장에 관람객들이 환호했다.
그 와중에 이든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줄곧 숨어 지내던 잠룡이 세상에 드러낼 순간이 당도한 것이다.
“쟤는…?”
경기장 중앙으로 들어서는 이든의 모습에 뒤늦게 귀빈석에 참가한 제인이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본선에 올라왔구나.’
제인이 아무도 모르게 미소짓던 그때. 옆에 자리한 그녀의 어미인 리안나가 이든을 보자마자 중얼거렸다.
“이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옆에서 이를 듣던 제인이 퍽 놀란 얼굴을 하다 황급히 입을 열었다.
“듣, 듣긴 뭘 들어요. 그냥 흔하디 흔한 평민 이름이구만!”
“흠?”
딸의 반응이 조금 이상한데?
리안나가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칼스테인 백작이 드레이븐 남작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큰 아드님의 차례이군요.”
“예, 그렇군요.”
무미건조하게 답하지만 드레이븐 남작은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비록 작은아들은 그 모양이 됐지만, 마르코만큼은 인정받고 쇠퇴한 가문을 일으킬 기회를 잡기 바랐다. 그런 의미에서 무도 대회는 드레이븐 가문에 있어서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든. 이든이라….”
유니콘 길드장의 시선이 내내 입장하는 참가자 중 한 사람을 향하며 그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드레이븐 남작의 표정을 살피던 칼스테인 백작이 레스타드에게 시선을 옮겨 물었다.
“레스타드 경, 무슨 일이십니까?”
“아닙니다. 그냥 저기 저 친구한테 관심이 가서요.”
“저기, 이든이라는 저 친구 말입니까?”
“예.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제가 들은 사람과 너무 닮았군요.”
명단의 이름만 봤을 땐 긴가민가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고 나니 확신했다. 이든이란 이름, 줄곧 감고 있는 눈.
동명이인은 있을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눈마저 같을 수는 없었다.
레스타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 친구 보게…. 모든 지부 통틀어 배송 업무 최고 기록을 세우더니, 이젠 무도 대회 참가까지…. 저 친구, 완전 물건이었잖아?’
레스타드의 감탄 어린 시선이 이든을 줄곧 향하던 그때, 그를 눈여겨 보는 것은 비단 레스타드 뿐만이 아니었다.
칼스테인 백작 역시. 맹인임에도 본선까지 진출한 이든에게 관심이 가던 차였다.
오죽하면 자신의 아들의 경기보다 더욱 집중하고 있겠는가.
칼스테인 백작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이든…. 분명 아들과 어렸을 때 얽혔던 그 꼬마겠지….’
***
우득! 우드득!
경기에 앞서 이든이 본격적으로 몸을 풀었다.
그에 반해 마르코는 그저 죽일 듯, 이든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 사이, 감독관이 둘 사이 중앙에 섰다.
“예선과 달리 본선에선 진짜 검을 사용한다. 자칫 실수하다간 상대 선수가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대련에 신중을 기하도록. 알겠나!”
감독관이 주의를 주자 이든과 마르코가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그럼 대련 시작!”
둥둥둥둥둥…!
경기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고, 감독관은 멀찍이 떨어진 가운데, 이든과 마르코가 비로소 이 무대에 마주했다.
스릉.
마르코가 드레이븐 가문을 상징하는, 용 문양이 새겨진 검집에서 자신의 롱 소드를 뽑았다.
“어서 검 뽑아. 널 죽이더라도 가문에 먹칠해서는 안 되지 않겠어?”
“풉.”
“이, 이 새끼가…. 웃어?”
이든의 조소에 일순 마르코의 눈에 핏발이 섰다.
실없이 웃던 이든의 웃음이 뚝 멈춘다.
“너 같은 애송이를 상대로 검을 뽑아? 시건방진 소리 하지 마라.”
북풍(北風)의 한설(寒雪)이 이든의 표정에 드러나며 살벌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든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검집째 뽑았다.
“이 무슨…!”
검을 뽑긴 얼어 죽을.
본좌를 뭘로 보고.
우드득.
집중 된 이목과 함께 찾아온 정적 속에 이든의 손에 살벌한 뼛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린다.
“뚜들겨 맞을 준비하도록. 마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