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훗. 그리 말할 줄 알았어.”
볼일이 끝난 레스타드 길드장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다른 영지에서 열리는 남은 무도 대회를 순회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무도 대회에서 충분히 입증했지만 그래도 세상 밖은 위험 요소들로 천지지. 내가 오늘 자네에게 제안한 일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한편으론 굉장히 위험한 업무가 될 거야. 그러니 그때까지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훗…. 무도 대회 때도 그랬지만 대답도 시원시원하니 좋군.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게럴드 지부장도 수고하시게.”
“예, 길드장님!”
게럴드의 경례를 받으며, 레스타드 길드장은 곧바로 짐을 꾸려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옆엔 길드장을 호위하는 그의 경호원들이 즐비해 있었다.
“이럇!”
레스타드 길드장이 마차에 타기 무섭게 말들이 무리 지어 발을 옮기기 시작한다.
‘표국 업무라…. 훗. 이거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벌써부터 온몸이 근질근질한 듯 이든의 표정은 상당히 들떠 있었다.
***
이든은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집 앞 공터로 향했다.
공터에 도착한 뒤 줄곧 가부좌 자세를 유지하며 천마심공을 운공하던 이든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응?”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든?”
부르는 소리를 듣던 이든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루디?”
“왠지 이곳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영락없이 너일 것 같았어.”
“오랜만이구나. 학교 수업은 잘 끝내고 온 거야?”
“그냥 그럭저럭…! 힘들어 죽겠다고…!!”
“흠.”
루디는 열네 살이었던 작년부터 수도에 있는 마법 학교에 입학했다. 학기 중엔 학교 기숙사에서 줄곧 지내다가 방학을 하면 다시 고향에 종종 내려오곤 했다.
“시간 참 빠르군. 벌써 겨울 방학이라니.”
“그러게…. 맞다! 그나저나 이든 너, 이번 무도 대회에 참가했었다면서?”
“소문이 그새 수도에까지 난 건가?”
“하핫! 그럴 리가.”
“크흠.”
딱 잘라서 말하는 루디의 모습에 무안해진 이든이 끙 소릴 냈다.
“하지만 이곳 영지엔 소문이 쫙 퍼졌는걸. 심안의 무사 이든이라고!”
‘심안의 무사라….’
전생의 무진 시절, 그의 별호는 ‘패왕’이었다.
그 시절 이후, 자신을 세상에 알리고 처음 갖게 된 별호가 썩 마음에 드는지 이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미소짓던 이든이 문득 입을 뗐다.
“이번 방학도 한 달이지?”
이든이 화제를 돌렸다. 그의 말을 듣던 루디가 한숨을 푹 내쉰다.
“응….”
“고생한 것치곤 방학이 너무 짧은 것 아냐?”
“배워야 할 게 산더미처럼 많거든. 내년에 3학년이 되면 고향에 못 올 수도 있어. 그때부턴 마법 실습 과정이라 책 더미가 산처럼 쌓일 예정이거든.”
“실습?”
“응.”
“해봐.”
“뭐?”
“마법인가 뭔가 해보라고. 임마.”
“어, 어…!?”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에 루디가 우물쭈물한다.
이든이 답답한 듯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아 거참. 빨리!”
“알았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건만, 닦달하는 이든의 모습에 루디가 마지못해 이든 앞에 섰다.
손바닥이 보이도록 쫙 핀 루디가 주문을 걸었다.
“플레임.”
후욱.
그러자 루디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잠시 일렁이다 훅 사라진다.
이든이 찰나 놀란 얼굴을 했다.
“이거…?”
마법은 곧 원천인 마나를 매개로 움직인다.
그것은 비단 진기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일순 느낀 그 변화.
이든이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삼매진화로군.’
진기의 최초 가시화는 삼매진화에서 비롯된다.
루디가 보인 것 역시 그 또한 다르지 않다. 다만.
운용방식이 달랐다.
루디에게서 느껴졌던 기운은 단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다른 곳.
‘심장인가?’
마법과 무공.
같은 듯 다른 그 발화에 이든이 속으로 감탄할 무렵, 불현듯 루디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다시 들려왔다.
“별 것 없지? 아직….”
풀이 죽은 루디의 등을 이든이 툭 쳤다.
“응. 별거 아니네.”
“뭐어?”
“농담이야. 농담. 그보다 공부도 공부지만 틈날 때마다 운동해라. 내 살다 보니, 결국 체력 강한 놈이 공부도 진득하니 오래 하더라.”
애늙은이 같은 말에 루디가 비웃었다.
“무슨! 나보다 6개월이나 늦게 태어났으면서 누가 누굴 타이르는 거야?”
“끙….”
“그나저나 이번 방학 끝나면 이든 너랑은 정말 한참 동안 못 보겠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내가 수도로 놀러 갈 테니.”
“무슨 말이야. 수도로 놀러 온다니?”
“내후년부터 유니콘 길드에서 맡은 업무가 바뀔 거야. 상단을 호송하는 거라. 분명 수도에 갈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군.”
“헤에…. 호송이라. 하긴 너도 언제까지 이곳에만 있을 순 없으니까.”
“응.”
이든의 얼굴에 좀처럼 보기 힘든 웃음꽃이 활짝 폈다.
호송 업무를 제안받은 뒤로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건만 무인의 가슴에 지펴진 불꽃은 좀처럼 사그라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참 신법을 밟던 이든의 신형이 갑자기 뚝 하고 멈췄다.
평소 상인들의 목소리로 번잡스러워야 할 곳이 고성으로 가득하다.
“뭐지? 생각보다 소란스러운걸.”
이든이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곳으로 발을 옮겼다.
“저 나쁜 놈의 새끼들!”
“그러게 조용히 살 것이지 별 볼 일 없는 가문이 왜 그리 나서냐고. 쯔쯧! 분수도 모르고 괜히 욕심을 부려서 천벌 받은 거야!”
수많은 목소리가 뒤엉켜 고성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자세히 들으면 하는 얘기는 하나같이 다 똑같았다. 이든이 옆에 있던 사람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들 모여계신 겁니까?”
“아니 무슨 일이긴! 드레이븐 가문인지 뭔지, 그놈들이 변방으로 끌려가는 거 아녀…. 응? 뭐야. 심안의 무사 이든 아냐!?”
“이든?”
“그 이든이라고? 드레이븐 남작을 박살 낸!?”
순식간에 주변 이목이 모두 이든에게 집중됐다.
확실히 무도 대회 이후, 영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인사가 된 그였다.
“지금 드레이븐 가문의 죄인들을 변방으로 이송하는 중이네.”
“그렇습니까?”
일전 무도 대회에서 풍비박살을 냈던 드레이븐 가문의 사람들이 팔다리가 포박된 채 끌려가고 있었다. 폐인이 된 남작은 수레 감옥에 갇혀 이송 중이었고, 마르코와 드라이는 넝마와 다름없는 죄수복을 입고 사람들의 질타 속에서 휘청휘청 걷고 있었다.
쇠퇴했다곤 하나, 명색이 귀족이었던 이전과는 너무도 다른 처지였다.
그때, 앞서가던 마르코의 눈이 한쪽에 서 있던 이든을 향했다.
그가 걷던 것을 멈추고,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든… 반드시 복수해 주마…. 난… 난 절대 여기서 주저앉지 않는다. 반드시 네놈의 사지를 찢어 발겨주마.”
맥이 빠진 목소리였으나, 내용엔 바짝 날이 서 있다.
“이놈의 자식이, 아직 정신 못 차렸구먼.”
“복수는 얼어 죽을! 가서 뒤져, 이눔 시키야!”
이든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 주변 사람들이 마르코를 향해 돌을 던지며 저마다 욕을 해댔다.
“죄인은 어서 걷도록!”
죄인을 이송하는 칼스테인 백작의 병사들이 마르코를 타박하자 멈췄던 그의 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가 점점 멀어져 가던 그때, 마르코의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냐, 환영이다. 내 얼마든지 자네의 복수를 기쁘게 맞아주도록 하지.]
“크윽…!”
이든의 전음을 듣던 마르코가 이를 바득 갈았다.
[포기하지 마라. 쓰러질 것 같거든 나를 떠올려라. 그리고 강해져서 다시 도전하도록.]
‘오냐… 반드시, 반드시 죽여주마. 이든!’
휘청휘청 걸으며 멀어져가던 마르코에게서 쉬이 사그라지지 않을 전의가 느껴졌다.
***
겨울의 막바지, 얼어붙을 것 같던 차가운 공기는 떠나고, 봄이 왔다. 그리고 곧 여름이 오고, 가을을 지나 다시 겨울에 들어선 계절의 선순환.
쏜살같이 흘러간 시간들.
이든이 옷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길드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 이든 씨… 벌써 배송을 끝마치신 거예요?”
“이리아 씨, 벌써 겨울이네요.”
“그러니까요. 시간이 왜 이리 빠른지 모르겠어요.”
스무 살이 된 이리아의 미모는 그야말로 만개한 꽃 같았다.
그리고 그 앞의 이든 역시, 열일곱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키도 더 크고, 몸도 훨씬 다부진 것이 사내의 모습을 뚜렷이 보이고 있었다.
“아, 맞다. 이번 달 말에 수도에서 사람이 온댔어요.”
“수도에서요?”
“아무래도 일전 길드장님께서 말씀하셨던 호송팀이 파견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벌써 그렇게 됐군요.”
대답하는 이든의 얼굴이 잔뜩 기대에 차 있다. 그 모습에 이리아가 웃었다.
“엄청 기대되나 봐요?”
“예. 세상 밖을 구경해 보고 싶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호송팀이 오는 거라면… 이든 씨가 이곳에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네요….”
그가 떠날 생각에, 이든을 바라보는 이리아의 얼굴에 아쉬움이 한가득했다.
“아쉽습니까?”
장난스럽게 묻는 이든의 질문에 이리아는 부끄러운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아쉽긴요. 그, 그냥 시원섭섭하다 그런 말이죠. 뭐…!”
대충 얼버무리지만, 그 순간에도 이리아의 얼굴엔 여전히 아쉬움이 남아 있다.
무미건조한 이든의 얼굴에 에도 미미한 변화가 일었다.
그답지 않은 작은 미소였다.
“어차피 호송이 끝나면 다시 이곳으로 올 텐데요.”
“그렇긴 한데, 호송 업무는 꽤 오랫동안 진행되잖아요. 갔다가 다시 돌아오려면 한참 걸릴 텐데….”
“아. 매일같이 저를 보다가 자주 못 볼 거라는 생각에 아쉬웠던 거군요.”
새로운 사업 관련해 줄곧 게럴드 지부장과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이든의 성격도 이전보다 꽤 능청스러워졌다.
“가, 갑자기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요…!!!”
그의 능청스러운 말에 이리아가 당황해했다.
이미 막을 내린 관계지만,
이든을 향한 이리아의 마음은 여전히 묘했다.
“흠흠…!”
그때, 게럴드 지부장이 헛기침하더니 지부상실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다.
“이든, 이 분위기에 갑자기 껴서 미안하네만 잠깐 얘기 좀 하지.”
“…?”
지부장실 안에 들어선 이든이 사무용 책상을 사이에 두고 게럴드 앞에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수도에서 사람이 온다는군.”
“예. 이리아 씨에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게럴드가 씩 웃었다.
“길드장님의 서신에 의하면 호송팀이 맞다는군.”
호송 팀이 온다는 것이 확실시되자 이든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레스타드 길드장이 다녀간 후로 상당 시간을 수련에 매진했던 그였다.
아직 전생의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신검합일(神劍合一)에는 진즉에 오른 상태였다.
“본부에선 재작년부터 벌이던 사업이었지만, 수도 외 영지에서 시행되는 것은 우리가 처음이야. 처음인 만큼 난관도 있겠지만 자네라면 잘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
신뢰를 넘어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믿음. 이것은 그간 이든이 보여준 일 처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그나저나 이곳 사람들이 아쉽게 됐군. 자네가 호송으로 빠지게 되면, 그간 자네의 배송을 받던 사람들이 많이도 답답해할 거야.”
“그렇지 않아도 그게 걱정됐습니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게럴드는 걱정했던 것치곤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사람을 더 써야겠지. 인건비가 늘어나긴 하겠지만, 호송 쪽에서 충당하고도 남을 거야. 일반 배송과 달리 그쪽은 상단 길드와 거래하는 거니까.”
“그렇군요.”
“그만큼 위험 부담도 크겠지. 일반적으로 상단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고가인 경우가 많고, 그 양도 상당하니까. 임무에 실패하면 고스란히 우리 책임이 되겠지. 그 때문에 수도에서도 우리 지부에 고급 인력을 배치할 거라 하더군.”
“고급 인력이요?”
“그래. 이쪽 방면으론 꽤 유명한 사람들이야. 유니콘 길드에 흡수되기 전에는 푸른 방패라는 용병단으로 명성이 꽤 자자했지. 이번에 본부에서 파견되는 친구들도 그 친구들이고, 길드장님이 꽤 신경 쓰신 모양이야.”
“그렇군요.”
“이 분야의 전문가인 만큼 자부심도 강할 거야. 괜히 자네에게 텃세 부리지나 않을까 걱정되는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음?”
이든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제가 또 워낙 교우 관계가 좋아서요. 그런 친구들과 친해지는 법을 제가 또 잘 알고 있죠.”
“그, 그런가…?”
평소 이든의 말이라면 무한히 신뢰하던 게럴드였지만, 어쩐지 이든의 알 수 없는 표정에 살짝 불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