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든의 나이가 열일곱이 되고, 오늘은 그의 마지막 배송 날이었다.
“오늘 들어온 배송을 모두 자네에게 위임해 달라고?”
“예. 마지막 인사도 드릴 겸 일단 가벼운 것부터 빠르게 돌리고 오겠습니다.”
“아니, 자네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역사상 지금껏 이런 경우가 없었는데….”
게럴드의 시선이 이리아를 향했다.
“그, 그럼 우선 중복되는 장소의 물품은 다른 배송원들에게 위임하고, 이든 씨가 각각 배송 지역을 맡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정말 괜찮겠나, 이든.”
“문제없습니다. 해가 지기도 전에 모든 업무를 마치고 오겠습니다.”
“그게 진짜 가능하다고?”
게럴드가 벙 쪘다.
잠시 후, 사무관들이 이든에게 배송할 물건을 건넸다. 부피가 크진 않았지만, 양이 상당한 만큼 그 무게가 상당했다.
“이것 말고도 앞으로 몇 번은 더 다녀오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사무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이든이 웃으며 답했다.
“가뿐합니다. 마지막 업무인데, 기록 한 번 세우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모두 헛웃음만 내뱉었다.
“그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으, 응…. 그, 그래.”
벙쪄있던 길드원을 뒤로하고.
파앗!!!
밖으로 나선 이든이 곧바로 신법을 밟았다.
그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윌턴의 대장간이었다.
이든이 들어서기 무섭게 윌턴이 마중 나와 그를 반갑게 맞아줬다.
“이든!”
“안녕하셨습니까.”
이든이 건넨 배송품은 안중에도 없는지 윌턴이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뗐다.
“그래. 오랜만인데 아쉽게 됐군. 지부장에게 들었네. 오늘이 마지막이라지?”
“예. 내일부턴 다른 업무를 하게 됩니다.”
“그렇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윌턴의 시선이 이든의 허리춤에 찬 검으로 향했다.
“잠깐 검 좀 볼 수 있을까.”
“예.”
이든이 윌턴에게 검을 건넸다.
“음…! 사용한 흔적이 있지만 역시 잘 관리했군.”
“그렇습니까?”
“그래. 검을 관리한다는 게 사실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지 않은가. 별것 아닌 듯하지만, 조금이라도 게을러지면 검은 금세 생기를 잃게 되지. 그래서 검은 주인을 닮는다고 하네. 이 검을 보니까 그 말에 더욱 확신이 드는군.”
비록 무공 한 줌 없는 이지만, 장인은 장인이었다.
무인을 알아보는 눈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자넨 앞으로 먼 길을 떠날 테지. 보잘것없지만, 지금처럼 이 검을 아껴주게.”
윌턴이 건네는 검을 다시 받으며 이든이 웃었다.
“물론입니다.”
“내가 너무 시간을 뺏었군. 자네 뒤에 짐을 보니 아무래도 이곳 전부를 다 돌 작정인가 보구먼?”
“예. 마지막으로 인사도 드릴 겸 그러고 있습니다.”
“그래. 새로운 환경에서도 자넨 잘 해낼 걸세. 건투를 비네.”
“그간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무슨, 오히려 내가 더 고마웠지.”
검을 다시 허리에 찬 이든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래도 종종 이곳에 들러주라고.”
“알겠습니다.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이든은 그렇게 말하곤 다시 빠르게 발을 옮겼다. 멀어져가는 이든을 바라보며 윌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심안의 무사라. 썩 잘 어울리는 별명이야.”
***
이든이 그날 배당된 모든 배송을 끝낼 즈음.
하늘도 어느새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그가 길드에 돌아왔을 땐, 사무관은 이미 퇴근한 뒤였고, 이리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이든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아무리 그의 경지가 드높다 한들 그 역시 사람인지라 운공 한번 없이 쉬지 않고 신법을 사용해댔으니 지칠 만했다.
“고생 많았어요. 많이 힘들었죠?”
“그래도 많은 분에게 인사드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괜히 저 때문에 이리아 씨의 퇴근만 늦어졌군요.”
“아니에요. 저도 마침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거든요. 그럼 내일부터는….”
“내일부턴 케인 대장님을 도와 남은 증설 작업에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그러게요.”
이든의 고개가 문득 아쉬워하는 이리아를 향했다.
“본격적으로 호송 일을 시작하면 이전만큼 자주 보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이리아 씨.”
“네…!”
헤어짐이 아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그의 말.
이리아는 눈물 대신 마주 웃어 보였다.
***
이든은 다음 날부터 막바지인 증설 작업 현장 일을 도왔다.
작업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엔 수도에서 온 사무관들과 현장에서 일할 남은 길드원이 합류했다.
비로소 유니콘 길드의 호송 부서가 신설된 것이다.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다.
호송팀 신설 직후, 두 상단에 의뢰를 동시 진행하기로 했으니, 산뜻한 출발인 셈이었다.
“어차피 수도까지 가는 목적지도 같겠다. 두 상단 모두 급하다니 한꺼번에 호송을 진행할 생각이네.”
남은 길드원들이 가만히 듣고 있을 무렵, 이든이 입을 열었다.
“호송 물품이면 그 양이 상당할 텐데, 저희 인원은 고작 스무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그건 걱정 안 해도 되네. 어차피 호송이라는 게 온전히 용병들에게만 맡기는 것이 아니거든. 상단 자체 내에도 그곳을 지키는 무사들이 있지. 우리까지 합세하면 결코 적은 인원수는 아닐세.”
“그렇군요.”
“이틀 뒤 날이 밝는 대로 길드 앞에 수레들이 대기할 걸세. 바빠질 예정이니 내일은 다들 푹 쉬도록. 그럼 회의를 마치도록 하지.”
케인이 일어나자 남은 길드원들도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이든 역시 곧장 집으로 돌아가 남은 시간을 그의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그리고….
그의 새 업무가 시작되는 아침이 밝았다.
“항상 몸조심해야 하는 것, 잊지 말거라.”
메리는 여전히 걱정되는지 이든의 손을 놓지 못했다.
“걱정 마세요. 조심히 잘 다녀오겠습니다.”
매일 새벽같이 출근하던 브라운도 그날만큼은 이든을 배웅하러 나섰다.
“수도까지 간다면 다시 돌아오는데 2주 정도 걸리겠구나.”
“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나도 젊은 시절엔 군인이었단다. 때문에 영지 밖에 자주 나갔었지. 항상 조심하렴. 영지 밖엔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것들 천지니 말이다. 물론 지금의 너라면 어떠한 위험도 잘 헤쳐 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연신 손을 놓지 못하던 메리와 다르게 우물쭈물하던 브라운이 이든에게 가까이 다가가 와락 안았다.
“몸 건강히 돌아오거라. 아들.”
“예. 아버지.”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무거운 걸음을 떼려던 이든이 불현듯 멈춰섰다.
원하던 일이었으나, 차마 가족들을 오래도록 두고 떠나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왠지 눈물도….
찔끔 나오는 것 같고…?
그래도….
‘…가야겠지.’
무복 차림으로 허리에 검을 차고 나서는 아들의 뒷모습이 그토록 의젓해 보일 수 없다.
브라운과 메리가 저만치 멀어지는 이든의 등 뒤에서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이든, 왔는가!”
게럴드 지부장이 아침 일찍부터 나와 이든을 반갑게 맞아줬다.
“일찍 나와 계셨군요.”
“첫 호송인데 지부장이란 사람이 이럴 때 안 나오면 또 언제 나오겠는가. 마침 지금 막 준비가 끝난 참이네.”
게럴드의 말대로 길드 앞은 수십 대의 수레와 호송에 나설 길드원들, 상단의 사람들까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때, 육중한 몸집의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지부장님께서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시군요.”
한 상단의 길드장, 리갈이 지부장과 인사를 나누다가 이든과 마주쳤다.
“심안의 무사가 이분이군요.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더욱 영광입니다. 저는 리갈 상단의 리갈 베리굿 길드장입니다.”
“처음 뵙습니다. 이번에 호송을 맡은 이든 길드원입니다.”
“이든 님께서 호송에 나서신다는 걸 저도 오늘 막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심이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때, 한쪽에서 페리온 상단의 사람이 다가와 그들 사이에 꼈다.
“다들 여기 모여 계셨군요.”
앳된 여인의 목소리. 이제 스물이나 됐을까.
푸른 옷에 상단의 문양이 새겨진 경갑을 입은 금발의 여인이었다. 아는 사람이었는지 게럴드 지부장이 그녀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세리 페리온 아가씨 아닙니까.”
세리 또한 가볍게 고갤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했다.
“이번 운송은 길드장이신 저희 아버님 대신 제가 나서게 되었습니다.”
“오! 그 말인즉 세리 양께서 가문의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스무 살이 되면 본격적으로 상단의 일을 가르쳐준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제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아버님께 보여드리는 첫 관문인 셈이에요.”
말하는 도중 세리의 시선이 이든을 향했다.
게럴드가 웃으며 이든을 소개했다.
“아 참, 여기 이 친구는 이번 호송에 함께할 길드원 이든입니다.”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군요. 심안의 무사 이든 님 맞으시죠?”
이든의 멋쩍은 얼굴을 했다.
처음 들었을 땐 마음에 쏙 들었지만, 자꾸 듣다 보니 지금의 별호가 쑥스러운 그였다.
“예. 제가 그 이든 맞습니다.”
“무도 대회에 참가하셨을 때 아주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좋게 봐주셨다니 영광입니다.”
그때, 모든 점검을 마친 케인 대장이 다가와 상황을 보고했다.
“지부장님, 모든 점검이 끝났습니다. 이제 바로 출발하면 되겠습니다.”
“음!”
순간, 게럴드의 눈에 이채가 띠는 것이 첫 출항을 앞둔 선장의 포부 같았다.
“그럼 이만 출발하지.”
“예.”
고개를 끄덕이는 케인.
“준비하시오!!!”
게럴드의 명이 떨어지고, 케인의 목소리가 사방에 쩌렁쩌렁 울린다.
곧 대기하던 일꾼들과 상단의 무사들, 그리고 길드원들이 수레 옆에 섰다.
“출발!!!!!”
말을 타고 선두에 선 케인과 함께 두 상단의 대표들이 앞장서 출발하고, 뒤이어 수레와 상단 무사들, 길드원들이 양쪽에서 호송했다.
수도로 향하는 두 상단과 길드의 대열은 그토록 장관이었다.
“이든 씨!”
호송 중이던 이든이 수레 옆에서 천천히 걷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리아 씨?”
“이거 받아요.”
“응?”
이리아가 건넨 것은 간소하게 차린 도시락이었다.
“잘 챙겨 먹고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녀를 안심시키듯 이든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
덜그덕, 덜그덕.
하나둘씩 영지 밖으로 나오고 있는 수레들.
수레 간 간격 때문에 모두 빠져나오기까진 시간이 꽤 걸렸다.
쉬- 쉬-
호송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반대편에 있던 로즈가 바람 소릴 내며 이든을 불렀다.
“이든!”
“네.”
“어때. 오늘 처음 호송을 하는 소감이?”
“아직 뭐 별 감흥은 없습니다.”
“나 참. 신입이 기합이 빠져서 말이야. 흥분돼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말이야.”
“그랬습니까.”
“긴 시간을 하염없이 걷다 보면 얼마나 무료한지 알아? 근데 이렇게 재미없는 친구가 옆에 붙어서야. 쯧!”
“흠.”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었다. 업무라 해봤자 호송이 전부일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선배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입도 놀려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목석같은 그도, 조직 내 분위기를 흐릴 만큼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표사들이 하는 일이라면 호송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어딜 가나 사람이 있는 곳엔 사회생활이 뒤따르는 법이군.’
중간중간 이리아가 싸 준 도시락을 먹으며 허기를 채우고 걷기를 반복.
해가 지고 막 어둑해질 무렵 앞서가던 케인이 외쳤다.
“정지!!!!”
“정지!!!”
케인의 선창과 함께 남은 사람들이 복창하며 현 상황을 알린다.
케인이 말을 돌려 두 상단 대표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해가 지고 있어서 야영을 하고 내일 다시 이동해야겠습니다. 아직 위험 구역은 아니긴 하지만 미리 불을 피워 놓아야 사전에 위험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케인의 말에 대표들은 수긍했다. 빠른 운송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한 것은 무엇보다 사람들의 안전이었다.
“야영을 준비한다!!”
“야영 준비!!!”
사람들이 저마다 짝을 이뤄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천막들 사이사이에는 모닥불이 지펴지는데, 불을 지피는 일은 길드원 중 마법사인 리아가 담당했다. 사람들이 미리 모아둔 나무에 불의 원소 마법 주문을 외우니 쉽게 불이 붙었다.
야영 준비가 끝나고 일꾼 중 수레를 몰던 이들이 끼니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끼니는 간단히 준비된 만큼 고기 수프와 마른 빵이었다.
그때, 호송 첫날부터 술에 얼큰하게 취한 톰슨이 고래고래 노랠 부르다가 손가락으로 이든을 지목했다.
“어이! 신입!!!”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