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예는 무슨 예야! 빠져가지고. 비록 길드에선 망신당하긴 했지만 난 엄연히 네 선배다. 알았나!”
“알고 있습니다.”
“알았으면 한 잔 받아!”
톰슨이 걸쳤던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곤 이든에게 건넸다.
걸어온 싸움과 건네는 술은 거절하지 않는다.
과연 그답게 술이 가득 찬 잔을 받아든 이든이 단숨에 벌컥 들이키자 사람들이 저마다 탄성이 질렀다.
“오오오오오!”
“크!”
“크으 잘마시네!”
참 별 것 아닌데.
전생의 무림이나, 이곳이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 법인지 반응이 좋다.
짝짝짝짝!
가득 찼던 술을 단번에 들이켠 이든을 향해 사람들이 환호했다.
상단의 무사들과 길드원 모두 조금씩 취기가 올라왔는지, 벌써 꽤 친해져 있었다.
“그럼 다시 자리로 복귀하겠습니다.”
그때, 술 한잔 걸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는 이든을 톰슨이 붙잡았다.
“어허! 이렇게 바로 들어가면 섭섭하지. 노래 한 곡 불러 봐!”
“...예?”
“아까부터 이 시키가 예는 무슨 예야. 노래 말이야 노래!”
“노, 노래 말입니까?”
“그래. 너, 신고식도 안 치렀잖아. 이참에 신고식 치르자고!”
“오, 좋다. 좋아! 노래해! 노래!”
주변에서 입을 모아 한마음 한뜻으로 웅성거리자 이든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당연하지….
지금껏 남이 부르는 노랠 듣기만 했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노랠 불러 보라 시켰던 사람이 없었는데.
“그게… 제가 남 앞에서 노랠 불러본 적이 없어서….”
“에헤이! 이 사람 이거! 싸울 때는 사내답더니. 노래 앞에서 주눅 든 거 보게!”
“하하하하하!”
‘뭐라?’
톰슨이 비아냥거리자 이든의 눈썹이 꿈틀했다.
당황했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는 굳은 결의가 느껴지는 얼굴.
이든이 사람들 앞에 다시 섰다.
“…까짓것 불러 보겠습니다.”
“오오오오오!”
기대에 찬 사람들의 눈빛 속.
이든이 기억을 더듬었다.
이윽고 그의 머릿속에 자주 듣던 노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크흠…! 그, 그럼 불러 보겠습니다.”
“얼른얼른!”
‘후우…. 내가 어쩌다가….’
잠시 망설이던 이든이 조용히 입술을 뗐다.
- 어찌 세상에 태어나 정해진 길만 갈 수 있겠는가.
내 신념이 향하는 곳이 곧 나의 길이지.
이 한 몸, 강호라는 풍파에 내던져본다.
내 피로 적신 대지를 발판 삼아, 내 이름 저 태양에 한 번 새겨 보고 떠나련다.
아주 오래전 젊은 무진이었던 시절 그가 즐겨 듣던 노래.
그리고 일인자가 되었을 땐 이따금씩 찾던 노래.
노래처럼 살았고, 그렇게 살았기에 패왕이 되었다.
이곳의 언어로 바꾸어 노랠 부르는데, 듣는 사람들의 표정이 묘했다.
특히 무인들의 표정에선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고 있었다.
“다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한동안 정적이 이어지다가 갈채가 쏟아졌다.
…짝짝…짝짝짝짝!
무인들의 마음을 울린 이든의 신념이 담겼던 노래.
옆에서 가만히 노랠 듣던 톰슨이 눈물을 흘리며 이든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흑…! 자네 노랜 지금껏 들었던 노래 중 최고였어. 내 인생 노래라고!!! 흑…!!!”
“아, 예…. 고맙습니다.”
이토록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다. 갈채 속에 자리로 돌아온 이든이 다시 로즈 옆에 앉았다.
로즈가 물었다.
“신입.”
“예?”
“옛날 길드원 중에도 음유시인이 있어 노랠 자주 들었는데 이건 처음 듣는 노래야. 직접 작사한 거야?”
이든이 고갤 저었다.
“아닙니다. 오래전 우연히 들었던 노래입니다. 그 이후로…. 잊지 못하는 노래입니다.”
“으음. 그렇구만….”
말끝을 흐리는 로즈의 표정이 묘했다.
자의는 타의든.
검을 잡는 이라면 이 노래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생의 무진도 그랬고,
이들 또한 그랬다.
깊은 밤. 이든이 불렀던 노래는 모두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호송이 다시 시작됐다.
새벽같이 출발해서였을까. 어째 다들 술이 덜 깬 얼굴이었다.
“으으으…….”
톰슨이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자, 그 모습에 케인이 혀를 찼다.
“쯔쯧. 첫날부터 그렇게 술을 퍼마시나.”
“으으… 머리 울려요… 잔소리 좀 그만해요.”
“어휴.”
케인이 한숨을 내쉬곤 옆에 있던 대표들을 향해 고갤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놈이 좀…. 모자란 녀석이라. 남은 길드원들이 두 명 몫을 할 테니 너무 염려 마시길.”
케인의 말에 리갈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뭐. 그럴 수도 있지요. 대장께선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세리 페리온도 동조했다.
“맞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녔기에 호송 문화가 어떤지 잘 알고 있습니다.”
각 길드 대표에게 양해를 구한 케인은 그나마 상태가 멀쩡한 남은 길드원들에게 호송에 좀 더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로즈 역시 숙취가 있는 모습이었지만 톰슨만큼은 아니었다.
그때, 로즈의 시선이 이든을 향했다.
“이든.”
“네?”
“어찌 그렇게 멀쩡한 거야? 남들 다 죽어가는데 너는 숙취가 전혀 없는 기색이잖아?”
어젯밤.
술자리가 무르익을 때쯤 분위기에 휩쓸려 이든 역시 톰슨만큼이나 마셔댔었다. 그런데 다 죽어가는 꼴에 톰슨과는 달리, 이든은 너무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아… 그게 제가 술이 아주 세거든요.”
“그래?”
하지만 이든도 사람인데 어찌 취하지 않고, 숙취가 없겠는가.
다만 어젯밤 건하게 취하고 잠들기 전, 삼매진화로 체 내에 취기를 모두 태워냈으니 숙취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술이 쎈 건 사실이긴 하지….
달그닥, 달그닥.
하루가 지나니 국경 밖에 이르렀다.
수도의 국경까지 도착하기 전까진 사실상 무법 지대나 다름없는 길을 계속 걸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영지 국경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지금부터는 사실상 몬스터들과 산적들의 표적이 된 것과 다름없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케인의 말에 대표들은 고갤 끄덕였다.
숙취에 힘들어하던 상단의 무사들과 길드원도 국경의 밖을 나선 순간 표정이 달라졌다.
“이든, 지금부터는 어느 영지에도 속하지 않는 무법지대야. 급습에 비명횡사하기 싫으면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긴장 속에서 국경 밖을 나서고 한참 뒤. 불현듯 이든의 눈썹이 꿈틀했다.
먼발치 어디선가 느껴지는 살기와 기척. 사람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의 시선이 천리안이라 만부당한 그의 기감에 포착된 것.
‘아까부터 계속 따라붙고 있다. 국경을 나서자마자 줄곧 노리고 있던건가?’
그의 생각대로 먼발치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계속 상단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든이 눈살이 찌푸렸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때, 이든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야영 준비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어느새 숙취가 해소되어 거의 기력을 회복한 톰슨이 케인에게 보고했다.
“모두 야영 준비를 마쳤습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현 시간부로 불침번을 서도록. 이 사실을 길드원과 상단 무사들에게 알리고 순번을 정하도록 해.”
“예.”
모닥불이 피워지고 저녁이 준비되는 사이, 길드원의 통제하에 불침 순번이 정해졌다.
모든 불침 순번은 짐꾼들을 제외한 무인들이 돌아가면서 맡도록 정해졌다.
잠시 후, 음식이 나누어지고, 빠르게 식사를 끝낸 이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릴 비우는 이든의 모습에 로즈가 물었다.
“어디 가?”
“잠시 볼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똥?”
“…아닌데요.”
“크큭. 다녀와~.”
내내 로즈의 장난에 시달렸던 이든의 얼굴이 핼쑥했다.
전생에 전쟁터를 누비며 종일 전투를 벌였을 때도 이만큼 지치진 않았을 것이다.
로즈의 장난을 받고 풀숲으로 들어간 이든의 얼굴이 순간 사늘하게 변했다.
“사냥감으로 전락하는 건 내 취미가 아니어서 말이지…. 자, 그럼… 어떤 놈들인지 확인해 볼까.”
살기가 뒤섞인 기척이 느껴지는 곳. 일순 이든의 신형이 그곳으로 바람과 같이 훅 사라졌다.
***
아스란 대륙에서 칼스테인 영지는 동부 쪽에 있다.
칼스테인 영지에선 꾸준히 토벌을 진행하고 있어, 수도로 가는 길목엔 서식하는 몬스터 수가 현저히 적은 편에 속했다.
몬스터 개체 수가 적다 보니 아무래도 이를 노려 활동하는 산적들이 더 많기도 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숲이 정적에 휩싸일 무렵.
의문의 시선들이 야영 중인 상단을 살피는데, 그 눈빛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았다.
“수레가 스무 대라. 꽤 큰 상단의 행렬인가 보군.”
“팔면 꽤 돈이 되겠어.”
“어서 두목에게 알리러 가자고, 팔 물건들이 많다고 말이야.”
상단을 살피던 산적들이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향한다.
바스락, 바스락.
“응?”
근거지로 걸음을 옮기던 중, 한 산적의 눈이 연신 주변을 살폈다.
“왜 그래?”
“아, 아냐.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서….”
“이 사람이 오늘 뭘 잘못 먹었나. 아무것도 없는데 오싹하긴 뭐가 오싹하다는 거야.”
“그런가.”
“자자, 어서 가자고. 늦으면 두목한테 두들겨 맞기밖에 더해?”
“으, 응… 그러자고.”
동료의 타박에 시선을 거두곤 다시 근거지로 향하는 산적들.
그때, 그들이 떠났던 자리에 한 신형이 나타났다.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으며 발을 옮기는 산적의 뒤를 쫓는 그 모습은 흡사 마귀와 같았다.
정찰을 마치고 온 산적들이 도착한 근거지엔 수십에 달하는 험상궂은 사내들로 가득했다.
“두목! 정찰을 마치고 왔습니다!”
중앙이 호피로 장식된 의자에 앉은 사내가, 정찰을 마치고 온 수하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끄윽! 그래. 물건들은 꽤 있더냐.”
얼마나 마신 것인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읍하고 있던 수하는 두목이라 불린 사내가 한껏 트림을 한 후에 남긴 악취를 참으며, 보고 온 것을 읊었다.
“수레가 총 스무 대 정도 됩니다. 한참을 살펴본 결과 음식과 병장기들이 가득합니다.”
“그래? 꽤 큰 상단이 움직였나 보구나. 근데… 거기에 여자들은 있더냐.”
“물론입니다! 예쁘장한 것들이 몇 있었습니다!”
“그래?”
부하들의 보고를 듣던 두목이 입맛을 다셨다.
상단의 물품도 물품이지만, 무엇보다 아리따운 여자를 품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던 상태였다.
“흐흐흐…. 잘 됐구나. 마침 잡아둔 년들이 질리던 참이었는데, 오늘 밤은 새로 올 년들을 데리고 놀아야겠구나.”
두목의 말을 듣던 부하들의 시선에 묘한 기대감이 비쳤다.
“두, 두목… 그럼!”
“훗, 좋아. 감옥에 있는 년들은 네놈들 마음대로 해도 좋다.”
두목의 허락이 떨어지자 산적들의 아랫도리가 불끈 달아올랐다.
두목이 가지고 놀다 질린 노예는 온전히 부하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쿵.
그때, 산적 두목의 육중한 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육중한 몸처럼 옆에 든 무기 또한 무식하리만치 큰 철퇴였다.
크기와 무게가 어찌나 대단한지, 웬만한 방패도 그의 철퇴 앞에선 맥을 못 추릴 것 같았다.
“자, 얘들아!!!!!!!”
“예! 두목님!”
“사냥 시작이다!!!!!!!! 그라라라라라!”
육중한 몸에서 나오는 기이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던 그때, 두목의 웃음이 뚝. 멈추더니 이내 그의 시선이 뒤쪽에 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뭐야…. 저 새끼는?”
“……?”
두목의 시선이 멈춘 곳에, 수하들의 눈도 그곳을 따라 향한다.
산적들의 시선이 멈춘 곳, 거기엔 낮선 사내 하나가 어슬렁거리며 감옥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멀뚱히 바라보던 두목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
옆에 수하가 고갤 저었다.
“저런 놈은 없었는데요….”
당연했다. 행색부터가 산적들인 자신들과 너무도 달랐으니까.
그때, 그 낮선 사내가 고갤 돌려 이목을 마주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뒤편의 감옥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누가 살려달라는데?”
“이, 이이….”
“좀 꺼내줄 사람. 거수.”
이걸 당돌하다 해야 하나, 미쳤다고 해야 하나.
미쳤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그 모습에 산적들이 벙쪄 있던 그때, 그들의 두목이 맹수와 같이 으르렁거린다.
“저 새끼 잡아!”
두목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산적이 사내를 향해 어슬렁 걸어갔다.
“네놈이 진정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이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두목 옆에 있던 산적 한 놈이 칼을 빼 들고 달려들던 순간, 이내 멈칫했다.
사내의 얼굴을 육안으로 확인한 산적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장님…?”
“장님이라고?”
“응…? 끌끌… 끌끌끌……. 그라라라라라라!”
침입한 사내가 장님이란 사실에 산적 두목이 다시 기이한 웃음소릴 냈다.
“어떤 겁대가리 없는 놈이 이곳에 왔나 했더니만, 장님이었구만. 그라라라라라!”
“크하하하하하!”
두목의 웃음 선창에 남은 산적들이 따라 웃는다.
“귀는 잘 들린다. 시끄러우니 닥치도록. 특히 너.”
사내의 손가락이 정확히 두목을 가리켰다.
“네놈의 그 웃음소리는 소름 끼쳐서 듣기가 거북할 정도다. 게다가 그 입 냄새. 어찌나 지독한지 네놈이 어딨는지 훤히 알 정도다. 그러니 필히 닥치도록.”
“뭐?”
사내의 말에 산적 두목의 얼굴이 다시 사늘하게 변했다.
“얘들아, 아무래도 저놈이 자기 무덤으로 이곳을 고른 듯하구나. 내 친히 이 철퇴로 저놈의 머리통을 으깰 생각이니 숨만 붙여서 데리고 오도록.”
“예!”
두목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산적들이 이든을 둘러싸는데, 그 수가 거의 오십에 달했다.
희번득.
그들 손에 죽어간 사람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산적들이 쥔 칼이 번쩍이며 진한 피비린내를 풍긴다.
“쳐랏!”
상대가 장님이라는 것을 안 순간, 먹잇감을 노리는 산적들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둘러싸기 무섭게 달려드는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어째선지 사내의 표정엔 여유가 가득하다.
휘이이이익!
두목에게 점수를 따려고 혈안이 된 산적들 댓 명이 일제히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다.
파밧.
그때, 산적들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이 휘둘러진 자리에 사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헉!”
“어디 갔어. 이 새끼!”
“뒤!!! 뒤다! 멍청한 것들!”
동료의 목소리에 달려들던 산적들이 황급히 고갤 돌렸다.
사내는 어느새 칼을 휘두른 산적들 뒤를 점하며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