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50)

21화.

언제 빼 든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철컥.

사내가 쥔 검을 다시 흑색의 검집에 집어넣는다.

그 순간.

푸슈웃!!!!!!!!!!!!!!!!!

찰나의 순간 몇 번을 휘둘렀는지.

검을 휘두른 산적 다섯 명의 목이 떨어져 나가고, 반듯하게 잘려진 팔, 다리가 떨어지며 분수 같은 피를 내뿜는다.

눈 깜빡할 새 다섯이 비명횡사했다.

“흐이이익!”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

비명도 못 지르고 주검으로 변한 동료들의 모습에 산적들이 지레 겁을 먹고는 일제히 뒤로 물러서던 순간.

뒤에서 지켜보던 그들의 두목이 우레와 같은 소리로 포효했다.

“이놈들!!!!! 내 철퇴에 죽고 싶은 것이냐!!! 도망치는 놈은 내 철퇴로 으깨주마!!!”

앞에는 마귀, 뒤로는 호랑이와 같은 두목의 포효에 산적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 그래 봤자 장님이야! 일제히 달려들면 아무것도 못 할 거야!!!!”

“이야아아아아아아!”

주춤하던 산적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조금 전엔 다섯이 달려들었다면 이번엔 남은 전부가 달려들었다.

일 대 수십의 상황, 사내가 다시 흑색의 검집에서 검을 뽑았을 땐, 새하얀 검신은 이미 까만 안개로 뒤덮인 후였다.

휘이이이이이익!

사내가 검게 물든 검을 휘둘렀다.

일순 휘두른 방향으로 검은 반월에 검기가 달려들던 산적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어?”

“무, 무슨…?”

무언가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간 느낌에 산적들이 멈춰선 채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철컥.

사내가 흑색 검집에 착검하기 무섭게, 검은 반월이 훑고간 산적들의 몸이 횡으로 반듯하게 갈렸다.

푸슈우우우우우웃!

그리고 사방에서 일제히 피분수가 솟구쳤다.

수십에 피가 흩뿌려지자 금세 땅이 축축히 젖어 들었다.

“으히이이익!”

칼질 한 번에 비명횡사한 동료들의 모습들. 이쯤 되니 뒤에 있던 두목의 호통은 가볍게 잊혔다.

동료 수십을 너무도 간단히 죽인 마귀를 뒤로하고, 모두가 꽁지 빠지게 도망치던 순간.

“이, 이놈들! 돌아오지 못할까!!!!!!!!!!”

후우우우웅!

그들의 두목이 도망치는 수하들을 향해 커다란 철퇴를 휘둘렀다.

그중 운이 없던 수하들 몇의 대가리가 그대로 짓뭉개졌다.

“다시 말 안 한다. 도망치는 순간, 내 철퇴에 대가리가 터져나갈 것이야!!!”

잔뜩 겁먹은 산적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그들 사이를 비집고 두목이 사내 앞에 섰다.

“네놈, 장님 주제에 제법 괜찮은 실력을 갖고 있구나. 나는 이곳을 다스리는 빅산도르다. 네놈의 이름은 뭐지.”

“이든.”

두목의 눈에 일순 이채가 서렸다.

“이든…? 들어본 적이 있지. 무도 대회에서 심안의 무사라 불린 그 애송이가 너였군. 어떤가, 이든. 이몸께서 네 녀석이 저지른 건방졌던 언사는 없었던 것으로 쳐주지. 내 밑으로 들어와라.”

“당신 밑으로?”

“그래. 너의 실력과 나의 지도자로서 능력이라면 이 숲을 넘어 다른 국경의 숲을 다스리는 것도 가능할 터. 어떤가? 나를 따르겠다면 내 너에게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지. 바로 나 산왕 빅산도르와 함께 말이다. 그라라라라라라!!!!”

그때, 이든이 자신의 코를 막았다.

“산왕?”

“그래!”

“뒷동산 산적도 산왕이라 하나?”

“…뭣이!?”

“그리고 난 너처럼 입에서 냄새나는 놈 밑에 들어가기 싫다.”

뼈를 때리는 것도 모자라 망신까지 주는 이든의 말에 빅산도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한다.

“네놈…!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나를 놀리려 들어. 네가 진정 죽고 싶은 게로구나!!”

잔뜩 열이 받은 빅산도르가 그새를 못 참고 철퇴를 휘둘렀다.

쾅!!!!!!!!

마치 지진이 나는 듯했다.

이든의 신형이 사라진 곳에 빅산도르의 철퇴가, 지면 깊숙이 박히며 울려 왔다.

“큭!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쥐새끼?”

그때, 다시 나타난 이든의 신형이 빅산도르의 빗나간 철퇴를 한쪽 발로 가볍게 밟고 올라섰다.

꾸욱.

“한번 쥐새끼한테 네 무기 뺏어보련?”

“오냐. 그리 원한다면 내 잘근잘근 짓이겨 주마!”

턱.

“으, 응?”

빅산도르가 철퇴를 빼내려는 순간, 땅에 박힌 철퇴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 너무 깊게 박혔나?”

턱턱.

평소엔 잘만 들리던 철퇴가 이상하게 빠질 생각을 안 했다.

그 모습에 이든이 혀를 찼다.

“쯔쯧. 얼마나 술에 절어 살았으면 이거 하나 못 빼?”

“이이잇! 내 철퇴가 있든 없든 네놈이 죽는 것은 똑같다!!!!!!!!!”

분에 못 이긴 빅산도르의 우악스러운 주먹이 이든을 향해 날아오던 그때. 이든의 손끝이 검은 섬광이 번쩍였다.

‘응…?’

파아아앗!

푸쉬이이이이이이이!

“으아아아아아아아악!”

휘둘렀던 빅산도르의 팔은 완전히 뜯긴 채 어느새 이든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가 산이 떠나갈 듯 괴성을 질렀다.

“내, 내 팔이, 내 팔!!!!!!!!!!!!”

빅산도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든이 들고 있는 자신의 팔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상처를 감싼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툭.

이든이 들고 있던 빅산도르의 팔을 한쪽에 던졌다.

“팔 두 개였을 때도 철퇴 하나 못 들던데, 한 짝만 가지고 들 수 있겠어?”

“죽여주마…. 넌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기필코 죽여주마!!!!!!!!”

빅산도르는 죽은 부하가 떨어뜨린 검을 주워 들고는 죽기 살기로 이든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바밧!

육중한 몸과 달리 달려오는 속도는 제법 빨랐다.

어느새 이든의 코앞까지 다가온 빅산도르가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그 순간이었다.

촤아아아악!

뚝.

뚝….

피로 점철된 이든의 손가락 끝에서 빅산도르의 붉은 피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칼을 휘두르려던 빅산도르의 팔이 이번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가리 찢겨나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라마참조아격.(修羅魔斬爪牙格).

무기가 없어도 맹수와 같이 맨손으로 상대를 갈가리 찢을 수 있는 잔혹한 기술 중 하나였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재차 이어진 괴성.

아무 것도 못한 채 두 팔을 잃은 빅산도르가 무릎을 꿇었다.

쿵.

주변에서 숨죽이고 있던 산적들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껏 괴물이라 생각했던 두목이, 꼼짝도 못 할 상황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피로 점철된 손을 털던 이든이 남은 산적들을 향해 고갤 돌렸다.

“뭣들 하냐?”

“…예?”

“감옥에 있는 여자들 꺼내.”

“예, 예!!!”

남은 열댓의 산적들이 서로 감옥으로 달려가 갇혀 있던 여자들을 꺼냈다.

그간 얼마나 납치하고 유린했던 것인지, 거의 열 명에 달하는 여자들이 갇혀 있었다.

덜덜덜…….

영문도 모른 채 밖으로 나온 여인들이 사시나무 떨듯 바르르 떨었다.

잔뜩 겁에 질린 듯한 여인들의 숨소리.

이든이 입을 뗐다.

“곧 이곳에서 구출해드리겠습니다.”

이든의 말을 듣던 여인들의 눈에 비로소 뒤에 있던 빅산도르의 모습이 보였다.

양팔이 잘린 채 가쁜 숨을 내쉬며 꺼져가는 생명을 붙잡고 있는 빅산도르의 모습에 비로소 그녀들은 안심하며 눈물을 흘렸다.

살았다는 안도의 눈물이기보단, 거친 숨에서 알 수 있듯 끝없는 분노에서 나오는 눈물이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매일 밤 빅산도르의 시중을 들고, 강제로 잠자리를 해야만 했다.

개중엔 아직 너무나도 어린 소녀도 있었고, 남편과 자식이 있던 여자도 있었다.

한 여인의 인생과 가정을 파탄 낸 빅산도르를 향한 그녀들의 분노가 다시 지펴지며 절정을 이루던 그 순간.

터벅. 터벅…….

여인 중 한 명이 땅에 떨어져 있던 칼을 들고 빅산도르에게 다가갔다.

간신히 명줄을 잡고 있던 빅산도르의 흐릿한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죽어가는 거구의 색마를 노려보는 여인의 서슬 퍼런 눈에 핏발이 가득 선 것이 꼭 피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푸욱!

“끄, 끄허어어어… 억!”

이윽고 여인이 빅산도르의 가슴에 쥐고 있던 검을 깊게 쑤셔 넣었다.

“….”

아무말 없이 간신히 붙잡고 있던 빅산도르의 마지막 명줄을 끊은 여인. 이미 진즉에 숨은 끊어졌지만 쑤셔넣었던 검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푸욱. 푸욱. 푸욱.

칼을 뽑았다 넣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이미 죽었음에도 그녀의 울분은 가실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턱.

그때, 이든의 기다랗고 따듯한 손이 칼을 쥔 그녀의 손을 감쌌다.

“됐습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흑… 흐으윽…!”

어찌 그의 죽음만으로 그녀들의 분노가 풀리겠는가. 연신 칼을 찔러 넣던 그녀는 결국 다리가 풀리며 오열했다.

“…….”

무슨 말로 그녀를, 그녀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가만히 있던 이든이 고갤 돌려 산적들을 향했다.

“외투 벗어.”

“예…?”

“안 들리나? 벗으라고.”

“예…!”

산적들이 입고 있던 두툼한 외투를 벗는다.

이든은 산적들의 외투를 받아 그녀들에게 하나하나 입혔다.

매서운 추위에 거의 나체나 다름없던 그녀들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근처의 저희 상단이 있습니다. 일단 그곳으로 가서 도움을 청해 보시지요.”

이든의 말에 그녀들이 고갤 끄덕였다.

무슨 근거로 그를 따르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더는 떨어질 나락이 없다 느꼈을 수도 있다.

이든의 얼굴이 다시 산적들을 향했다.

“너희 열다섯 명, 잔말 말고 따라오도록. 혹여 도망칠 생각이라면 너희들 두목 꼬락서니를 다시금 새겨 넣어라. 도망치는 순간, 팔다리를 전부 뽑아주마.”

이미 자신들의 두목이 어찌 죽어갔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이든이 여인들과 산적들을 데리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며 앞장섰다.

“흠.”

걷던 이든의 걸음이 멈칫했다

산적소굴에서 상단이 야영을 친 곳까지 가려면 울창한 숲을 꽤 지나야만 했다. 게다가 밤도 깊었기에 야생 몬스터들의 습격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든의 손에 다시 검은 마기가 피어올랐다.

휙!

한번.

단 한 번 팔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콰과과과광!

수라마참조아격이 다시 한번 휘둘러지자, 팔을 휘둘렀던 방향으로 울창했던 숲 한가운데가 뻥 뚫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숲 일부를 보니, 산적들이 저마다 마른침을 삼켰다. 두목이 왜 그리 허무하게 당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

콰과과과광!!!

“무슨 소리지?”

야영장에서 한숨 돌리던 케인과 무사들이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았다.

근처 숲에서 들린 굉음 때문이었다.

소리만 들으면 들짐승 무리의 이동 소리 혹은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대형급 몬스터의 이동 소리 같았다.

하지만….

칼스테인 영지엔 대형급 몬스터가 나타났단 보고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체 뭐지…?’

케인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 경계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그때.

“대장님!”

“응?”

“저, 저쪽 좀 보십시오!!!”

길드원이 가리킨 곳.

거기엔 울창했던 숲 한쪽이 쑥대밭이 된 채 먼지를 피우고 있었다.

“뭐, 뭐지? 폭발이라도 난 건가?”

케인이 의아한 눈으로 그곳을 연신 살피던 그때.

바스락.

폭발이 일어난 숲속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제법 적지 않은 기척 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이며 그곳을 바라보던 그때. 그곳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자 전투 준비를 마치던 무사들의 얼굴이 얼빠진 표정으로 변했다.

“이든?”

제일 먼저 그를 알아본 로즈가 입을 열었다.

“이든이라고?”

“아니. 그보다 저 친구는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

로즈가 단도를 검집에 집어넣고는 이든에게 다가갔다.

“이든, 걱정했잖아. 어디 있다가 이제야….”

그를 살피던 로즈가 이든의 옷에 튄 피를 보고 기겁했다.

“이 피는….”

“로즈 씨, 그보다 우선 이 여인들을….”

“응?”

이든이 가리킨 뒤편엔 털로 된 외투를 걸친 채 떨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열 명에 달하는 여인들이 차례차례 걸어 나오고 잠시 후, 잔뜩 겁에 질린 사내들 또한 줄줄이 기어 나왔다.

“이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설명하자면 조금 깁니다. 이따 설명해 드릴 테니 우선 이 여자분들이 입을 옷 좀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케인과 두 상단의 대표들이 이든에게 다가왔다.

“이든,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호송을 맡던 길드원 몇몇이 데려온 여인들을 챙기러 간 사이, 이든이 뒤에 있던 산적들을 가리켰다.

“근처에서 볼일을 보던 중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 따라가 봤는데, 산적 소굴이 있더군요. 가만히 대화를 엿듣다 보니 저희 상단을 노리는 것 같아 먼저 선수를 쳤습니다. 두목은 죽었고, 여기 뒤에 있는 것들은 그 잔당입니다.”

“그럼 여자들은….”

“놈들이 노리개로 잡아두던 불쌍한 여인들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어 모두 데리고 왔습니다.”

이든의 얘길 듣던 세리 페리온 대표가 불같은 눈을 하다가 케인과 리갈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도 따라가 여인들이 입을 옷을 챙겨주고 오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케인이 고갤 끄덕이고, 그녀가 여인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이, 리갈이 케인에게 물었다.

“여인들이야 각자 고향에 바래다주면 되지만…. 이놈들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케인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갤 저었다.

“괜히 데려가 봤자, 짐만 될 겁니다. 여기서 처리하시죠.”

스릉.

문답무용.

케인의 검이 검집에서 기이한 쇳소리를 내며 뽑혔다.

산적들이 저마다 식겁한 얼굴을 하며 바르르 떨던 그때, 이든이 가로막았다.

“아닙니다. 제게 더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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