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로즈를 대신해 계획을 짜주는 톰슨의 얼굴에 요상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얼굴이 마치 호색한 같다. 톰슨의 말 같지도 않던 계획을 들어주던 로즈가 베개를 집어 톰슨의 얼굴에 휘둘렀다.
퍼억!
“악! 이 미친년이 기껏 조언해 줬더니만!”
“조언 같은 소리 하네! 네 말을 진지하게 들은 내가 바보지!”
다 늦은 밤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톰슨과 싸우던 로즈가 몸을 획 돌리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여전히 잠이 오질 않는지 몸을 몇 번 뒤척이던 그녀는 낮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쮸읍쮸읍.
왜일까.
허벅지에 입을 가져다 대던 이든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는 이유는 대체 왜일까.
로즈가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하다 문득 이든의 침낭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든…? 이 시간에 어딜 간 거지?”
자는 줄 알았던 이든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
가부좌를 틀고 천마심공을 운기 하던 이든의 눈살이 순간 찌푸려졌다.
“하아….”
그러고는 그답지 않게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살 만큼 산 노인네가 고작 입맞춤 한 번 했다고 잠을 못 자? 나도 한참 멀었군.’
이든이 가부좌를 풀고 일어났다.
어차피 심란해 잠도 안 오고 운기조차 제대로 되지 않으니. 일어나 몸이라도 풀 요량이었다.
채애애앵-
이든의 허리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하얀 검신이 달빛을 받아 더욱 밝게 빛나는 것이, 흑색의 검집과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치이잉.
휘이익!
잠시 뒤, 이든이 쥐었던 새하얀 검신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초식에 맞춰 보법을 밟고, 손끝에서 휘둘러지는 검은 마치 춤을 추듯 아름답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했다. 이 아름다운 검무에 천마심공의 마기가 더해지는 순간, 소름 끼치는 지옥이 펼쳐짐을 보는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보법을 밟던 이든의 발이 근처 호숫가로 향한다.
마계수라지옥검 초식의 위력은 비단 화려하고 세밀하게 짜인 검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전열을 부서뜨리기 위해 전진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첨벙.
계속 전진하던 이든의 발이 호숫가에 닿았다.
그리고 마땅히 가라앉아야 할 이든의 발이 물 위를 밟는다.
쉼 없이 휘두르는 검과 함께 땅을 밟던 나머지 한쪽 발도 물 위를 밟으며 계속 전진한다.
자연스레 보법에 깃든 수상비(水上飛). 가라앉지 않으며 검무는 땅과 물의 차이를 두지 않고 여전히 아름답게 펼쳐졌다.
잡념조차 사라질 만큼, 아니 잡념이 있어선 안 되는 마계수라지옥검 초식이 끝날 무렵.
어느새 이든은 호수 반대편까지 와 있었다.
일각이 넘는 시간 동안 무념의 초식을 끝낸 이든이 흑색의 검집에 검을 꽂아 넣었다.
탁.
“후우….”
전생에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쉼 없이 달리려 애썼다.
약관이 되기 전 전생의 경지에 오르기로 결심했고, 노력의 결실로 열일곱이 되는 해에 신검합일에 이르렀다.
오직 탈마에 이르러 등선이란 목표만 바라보고 달려온 이든에게 찾아온 위기(?).
‘몸이 너무 젊어.’
그것은….
정신에 비해 너무도 혈기왕성한 몸이었다.
속은 신선을 목표로 두던, 그리고 현재도 목표로 삼고 있는 백 살이 훌쩍 넘은 노인일지언정 환생으로 얻은 몸은 불과 열일곱에 불과했다.
몸 자체는 아직 한창이니, 사내로서의 본능이 쉽게 사라질 리 만무했다.
이든이 나름 심각한 고민으로 골머리를 썩이며 혈기를 달래는 사이, 밤은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
“워씨! 뭐야!?!? 물이었잖아!”
….
“아오! 신발 다 젖었네.”
…었다.
***
다음 날 아침, 지난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로즈와 이든은 호송 내내 서로 대화 없이 걷고만 있었다.
한참이나 지속된 어색한 침묵 속.
뭔가 떠오른 듯 로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든.”
“예?”
“화살 맞았던 곳은 괜찮아?”
“아, 다행히 손목에 찼던 보호구에 맞았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다행이다….”
그때, 저만치 앞서가던 케인이 반갑게 외쳤다.
“드디어 수도 입구가 보이는군요.”
케인의 말에 리갈과 세리의 얼굴 역시 환해진다.
위험천만한 몇몇 사건들이 있었고 희생자 역시 있었지만, 안전하게 모든 물품을 수도까지 가져왔기 때문이다.
앞서가던 케인과 대표들이 수도 성문 앞에서 보초들과 얘길 나누는 사이, 멀찍이 떨어져 있던 마지막 수레마저 성문 앞에 섰다.
“그럼, 검문이 있겠습니다.”
리갈과 세리가 고갤 끄덕이고 본격적인 검문이 시작됐다.
수레의 천막을 걷고, 둘러보며 검문을 하던 보초병이 흠칫 놀랬다.
“이, 이 사람은 뭡니까?”
보초가 보고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몬스터들을 유인하기 위해 먹이로 던져 주고 남은 산적 중 일부였다. 보초의 물음에 케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그것이… 오는 길에 조우한 산적들입니다. 이놈 말고도 뒤에 있는 수레에 세 놈이 더 있습니다.”
“그렇군요. 잡아 온 것들은 이들이 다입니까?”
“그게….”
케인이 어물거리며 쉽게 답하지 못하는 사이, 옆에 있던 세리 페리온이 대신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몬스터들 먹이로 던져줬습니다.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올 수 있었죠.”
“아 그렇군…. 네? 먹, 먹이로…. 말입니까?”
별생각 없이 듣던 보초가 벙찐 얼굴을 했다.
옆에 있던 다른 보초들 역시 식겁한 표정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려 보이는 얼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잔인한 말을 내뱉는 것이 오히려 웬만한 장부보다 살벌했다.
보초의 시선이 수레에서 끌려 나오는 산적들을 향하는데, 그들 모두 하나같이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그, 그러셨군요. 응당 나쁜 놈들은 죗값을 치러야 하는 법이죠. 하하…. 자, 잘하셨습니다. 이봐, 뭐 더 검문할 필요 있겠어? 그냥 얼른 보내드리자고.”
“그, 그러자고. 하하하…!”
“저기요?”
보초들이 서둘러 발길을 돌리려는데 세리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예?”
“이것들, 데려가야 하지 않나요?”
세리의 손이 산적들을 가리켰다.
“아! 아아! 예, 예! 그럼요. 데리고 가야 하고말고요. 저희가 아주 엄벌에 처할 수 있도록 보고 올려놓겠습니다!”
서둘러 산적들을 질질 끌고 도망치다시피 사라지는 보초들을 바라보며 케인이 웃어넘겼다.
“대표님 덕분에 검문이 보다 쉽게 끝나는군요. 잘하셨습니다.”
“뭘요. 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만 말했을 뿐인걸요.”
“하, 하하하….”
케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호송 과정에 큰 감명을 받은 것일까. 어째 점점 ‘이든화’ 되어 가는 세리 대표였다.
“자, 다들 이동!!!”
검문이 간단하게 끝나자 케인이 서둘러 수레를 성 안으로 인도했다.
수도에 들어서니 칼스테인 영지와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인파가 수도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 지나쳐 어느덧 다달은 목표지점.
케인이 말을 멈추자, 리갈 대표와 세리 대표가 멈춰 마주 섰다.
“두 대표님,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케인 대장도 수고 많았소. 덕분에 피해를 거의 입지 않고 수도에 올 수 있었소.”
호송을 무사히 끝내고 서류에 대표들이 서명하는 사이, 세리가 물었다.
“물건을 모두 납품하고 정산까지 마치는데 사흘 정도 걸릴 겁니다. 유니콘 길드원분들께선 그동안 어찌 지내실 생각이신지요?”
“흠. 우선 중간에 합류했던 여인들의 거처에 대해서 길드장님께 보고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고생한 길드원들에게 휴가를 줄 생각입니다. 수도에서 각자 알아서들 잘 놀겠지요.”
“그렇군요. 그럼 다시 칼스테인 영지로 돌아가는 날에 뵈면 되는 거지요?”
“예.”
세리 페리온이 서명을 마치고 케인에게 건넸다.
앞으로 사흘 뒤 칼스테인 영지로 돌아가는 날, 그들을 무사히 고향으로 복귀시켜주면 유니콘 길드의 모든 업무가 끝나는 것이다.
“그럼 대표님들 돌아가는 날 뵙겠습니다. 저희 길드원은 근처 숙소에서 묵을 예정이니, 혹 별다른 문제가 생긴다면 찾아주십시오.”
“알았소.”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일렬로 대기 중이던 스무 대의 수레가 각 상단의 대표를 따라 흩어졌다.
그 사이 케인이 그간 수고해 준 길드원들을 한데 불러 모았다.
“다들 고생 많았네. 두 대표가 모든 거래가 끝내는 데 사흘 정도가 소요될 예정이네. 그때까지 자네들 마음대로 휴식 시간을 갖도록. 단, 밤에는 무조건 숙소에 복귀할 것. 알았지?”
“저흰 그럼 늘 놀던 곳으로 가겠습니다~.”
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송 첫날에 합류했던 길드원 몇이 자릴 비웠다. 그들을 보며 앙휄이 혀를 찼다.
“저것들 또 도박하러 가는 것 봐. 저러니 여태까지 돈을 못 모으고 있지.”
“자자. 각자 사생활에는 신경 끄고, 다들 다리 쭉 뻗고 즐거운 시간들 보내라고.”
그때, 케인의 시선이 이든에게 향했다.
“아. 이든 자네는 수도에 온 게 처음이지?”
케인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던 로즈의 눈알도 이든을 향해 굴렀다.
“예.”
“앞으로 시간이 꽤 넉넉한데 어쩔 생각인가?”
“지내는 동안 수도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 볼 생각입니다.”
“수도에 친구들이 있었나?”
“예. 있긴 한데… 이것 참. 수도는 처음이라 방향 감각이 없어지는군요.”
“흠.”
케인 역시 꽤 난감한 얼굴을 했다.
호송 내내 이든이 신기의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다지만, 그 역시 일단 맹인이었다.
두 눈 뜨고 돌아다녀도 길을 잃는 곳이 수도인데, 이든의 입장에선 꽤 곤혹스러울 상황일 만 했다.
툭툭.
그때, 가만히 얘길 듣던 톰슨이 로즈의 옆을 쳐댔다.
‘아, 왜!’
‘지금이야!’
고요 속에 고성이 오갔다.
‘뭐가!’
‘어휴! 이 답답한!’
그때, 톰슨이 다짜고짜 로즈의 팔을 잡고 위로 올렸다.
“대장!!!!”
케인의 시선이 톰슨과 로즈를 향했다.
“로즈가 이든한테 수도 안내해 준다네요!?”
“내, 내가 언제…!”
로즈가 뭐라 쏘아붙였지만, 톰슨이 씩 웃는다. 케인도 낌새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편이 좋겠군. 그럼 오늘은 로즈가 이든에게 수도를 안내해 주도록.”
“예?!”
케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즈의 시선이 이든에게 향했는데, 까맣게 탄 로즈의 피부가 확연히 보일 만큼 붉게 물들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앙휄과 리아의 입가에도 묘한 미소가 걸렸다.
“후후후…. 오늘이 그날인가?”
“무, 무슨 날이요?”
“로즈의 거사가 치러지는 날…?”
“저, 정말요!? 근데 그 거사란 게 정확히 뭐예요?”
“크면 자연스럽게 알게 돼. 후후후….”
익살스런 농담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케인이 마저 말을 이었다.
“자. 그럼 다들 푹 쉬도록. 난 잠시 본부에 다녀오도록 하지. 해산!”
케인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길드원들이 제각기 흩어졌다.
그 와중에도 로즈와 이든을 번갈아 바라보는 길드원들의 시선은 얄궂기만 하다.
로즈가 휙 째려보며 그들을 내쫓는 사이, 이든이 그녀 옆에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로즈 씨 휴식에 방해를 끼치게 됐습니다.”
“아니야!!”
“예?”
너무 빨리 말한 것은 아닌지 로즈가 아차 싶어 덧붙였다.
“아, 아니! 나도 간만에 수도 구경 좀 해보고 싶었거든! 하하… 이참에 이든도 안내해 주고, 일거양득이지! 아, 안 그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럼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로즈 씨.”
“으, 응! 나만 믿고 따라와!”
로즈가 안내해 준단 말에 이든은 한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수도에서 느껴지는 기척의 수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칼스테인 영지도 상당히 넓은 곳이라 들었는데. 수도에 비하면 정말 새 발의 피였군.’
수도는 칼스테인 영지에 비해 그 면적이 다섯 배에 달했다.
황궁 못지않은 규모를 자랑하는 수습 기사들의 아카데미와 마법사 아카데미까지 동시에 수용하다 보니 자연스레 영지의 면적이 넓어진 것이다.
게다가 수많은 상단과 길드 역시 즐비한 탓에 대륙의 전체 인구 중 절반에 가까운 수가 이곳에 모여있었다.
더군다나 처음 온 곳인 만큼 방향과 위치를 전혀 모르니. 움직임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
평소와 다르게 움직임이 굼뜬 이든의 모습을, 로즈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스윽.
로즈가 이든의 손을 꼭 잡았다.
“걱정하지 마. 이곳에선 날 의지하라고.”
“고맙습니다. 그럼 이곳에선 잠시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으, 응!”
긴장한 탓일까. 맞잡은 로즈의 손에 금방 땀이 찼다.
‘진정하자. 진정해…!’
마음속으로 주문을 달달 외우지만, 어찌 사랑에 빠진 여인의 마음이 고작 주문으로 달래지겠는가.
그때, 이든이 먼저 입을 뗐다.
“제일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그, 그럼! 어디로 가고 싶은데?”
“마법사 아카데미입니다.”
“마법사 아카데미? 아까 말한 수도에 있는 친구가 마법사를 준비 중인가 보구나?”
“예. 올해면 아마 졸업반일 겁니다. 졸업하기 전에 수도에 가게 되면 놀러 간다 했으니, 이번에 만나 보려 합니다.”
이든의 말을 듣던 로즈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물었다.
“혹시… 여자?”
“아뇨. 남자입니다.”
“그래?!”
“예. 근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
“아, 아냐! 하하하하하! 어서 가자고!”
뭐가 그리 신난 것인지 이든을 안내하는 로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