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해당 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부르는 소리에 고갤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이든을 향했다.
“이곳에 다니는 제 친구를 만나고 싶은데…. 어디서 신청하면 될지 알 수 있을까요?”
“신청은 그냥 저쪽에서 하면 되는…. 아!”
설명하던 여학생이 비로소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굳게 닫힌 눈.
그제야 여학생은 이든의 눈이 보이질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저…. 혹시 따라오실 수 있겠어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이든이 환하게 웃었다.
닫힌 눈에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 평소엔 보지 못했던 다부진 몸에 훤칠한 키.
매끈하고 하얀 얼굴을 한 미청년의 미소에 여학생의 얼굴이 발그레 상기됐다.
“뭐… 뭘요. 어차피 저도 학교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따라오세요!”
걷는 내내 여학생의 눈이 이든을 향해 힐끔힐끔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만나러 온 친구가 누군지 궁금해진 그녀가 물었다.
“친구분이라 하면… 누굴 만나러 오신 거예요? 여기가 생각보다 바닥이 좁아서, 거의 다 아는 사람이거든요.”
“4학년 루디라고 합니다.”
“루디요!?”
“아십니까?”
“당연히 알죠! 우리 학교 루디 선배 모르는 사람 없을걸요?”
여학생이 힘주어 말하자, 의아한 듯 이든이 물었다.
“걔가…. 그렇게 유명합니까?”
“아카데미 수석인데 당연히 유명할 수밖에 없죠.”
“수석이요?”
뜻밖에 소식에 이든이 놀란 얼굴을 했다.
지금껏 루디에게 이에 관해선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 봐라. 수석인데 자랑 한 번 안 해?’
그간 살갑게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옆집에 사는 친한 친구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괘씸했다.
“앗! 그런데 루디 선배는 지금 황궁에 있을 텐데요?”
“황궁에 말입니까?”
“네. 아카데미에선 매년 상위 학생들을 추려 황궁에서 견습 시키거든요. 온다면 오늘 밤에야 올 거예요.”
“아…. 그렇습니까.”
그녀의 말에 의하면 헛걸음을 하게 된 것이지만 상관없었다. 친구가 좋은 성적을 거뒀다는 소식에 그는 진심으로 기뻤다.
뒤적뒤적.
그때, 이든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혹 루디가 오거든 저 대신 이것을 대신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든이 건넨 것은 숙소의 위치가 적힌 지도였다.
“아! 네. 꼭 전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이든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는 발길을 돌리는데, 그를 바라보는 여학생의 시선이 한동안 그의 뒷모습에 머물렀다.
“우리 학교엔 왜 저런 남자가 없나 몰라. 에휴…. 루디 선배 오면 이거나 전해 줘야지. 간만에 맘에 드는 남자 만나서 학교 구경시켜 주나 했더니만….”
학교 정문 앞으로 나선 이든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이대로 돌아가기 아쉬운데…. 그때, 파락호들 말에 의하면 오늘이 기사 아카데미 실기 시험이라 했지. 얼마나 성장했는지 구경이나 가볼까.’
멈춰 섰던 이든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수도에도 적응됐고, 위치도 표시해 뒀겠다.
기사 아카데미로 가는 이든의 움직임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도착한 이든은 뜻밖의 난관에 부딪혔다.
“해당 학생이 아니면 못 들어갑니다. 돌아가세요.”
“….”
문 앞의 경비가 이든을 막아선 것.
마법사 아카데미와 달리 이곳은 일반인들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여러 신분 출신이 모인 마법사 아카데미와 달리 기사 아카데미 학생들 대부분은 귀족이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이든이 발걸음을 돌려 되돌아가려다 멈춰 섰다.
‘내가 언제부터 눈치 같은 것을 봤다고.’
하긴…. 그러네?
한참을 고민하다가 생각을 정리한 이든의 신형이 사라지고, 어느새 그는 기사 아카데미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도중에 들키면 어쩔까 걱정했으나, 생각 외로 이든을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이든에게 풍기는 분위기가 이곳의 학생이라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실습장이 어디 있으려나….”
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지만, 그러다간 외부인으로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이든은 기감에 더욱 집중해 칼라슈와 발리스타의 기운을 느끼려 애썼다.
“저긴가. 미세하게 느껴지긴 하는데, 거리가 상당하군….”
이론 수업실, 대련장, 체력 단련실, 단체 훈련장, 식당, 기숙사까지 전부 수용하다 보니 아카데미 내부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매우 넓었다.
파팟!
다 둘러보려면 온종일이 걸릴 크기. 특정인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신법과 천리안과 다름없는 기감을 가진 이든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기감에 잡히는 기운과의 거리를 계속 좁혀나가던 이든의 신형이 다시금 우뚝 멈춰 섰다.
“여긴가….”
이든이 도착한 곳은 대련장이었다.
실기를 앞둔 학생들 탓인지 다른 곳에 비해 그 기세가 첨예하다.
대련장 근처를 살피며 서성이던 이든의 얼굴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여기 있군.”
그의 기감에 잡힌 익숙한 기운.
발리스타와 칼라슈였다.
무도 대회 때도 워낙 선전했던 친구들이라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나저나 전국에서 모인 인재들이라서 그런가. 하나같이 다들 대단한데….”
발리스타와 칼라슈 말고도 모인 대다수 학생의 기세는 이미 같은 나이대 또래들을 훨씬 앞질러 있었다.
“오. 저 양반도 대단한데.”
청력에 기운을 집중시켜 수업 내용을 몰래 듣던 이든이 절로 감탄했다.
교수로 추정되는 이의 갈무리된 기운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자, 설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고, 휴식 시간을 갖고 잠시 뒤에 시험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이상.”
교수가 자릴 비우자, 학생들이 저마다 친한 이들과 모여 떠들기 시작했다.
교수가 자릴 비운 틈을 타 이든이 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거의 2년 만인가. 안 본 사이 많이도 성장했군.’
이든이 천천히 학생들 무리를 헤치고 칼라슈와 발리스타가 있는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어울려 노는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혼자 고독하니 있던 칼라슈가 제일 먼저 이든을 발견했다.
“이든…?”
커진 동공이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보여주었다.
이든이란 말에 근처에 친구들과 얘기 중이던 발리스타마저 고갤 돌렸다.
“이든 형이라니 그 무슨… 아니, 진짜 이든 형이잖아?”
칼라슈가 벌떡 일어나 이든에게 다가갔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아니, 그보다 어떻게 들어온 거야?”
“어떻게 들어오긴, 몰래 들어왔지.”
“미쳤군.”
“거, 간만에 만난 친구에게 미쳤다니 말이 심한 거 아닌가?”
“치, 친구는 무슨…!”
칼라슈가 퍽 당황한 얼굴을 하는 사이, 발리스타가 달려오다시피 가까이 다가왔다.
“이든 형!”
“오랜만이오.”
“아니 여기까진 어쩐 일이오. 혹시 몰래 들어왔소?”
“간만에 얼굴 좀 볼까 해서 들어왔소.”
“간도 크오. 어찌 이곳에 몰래 들어올 생각을 하시오.”
“뭐, 어차피 잡히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오?”
“역시 내가 아는 이 중에 가장 사내답소.”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칼라슈가 물었다.
“그간 어떻게 지냈지? 여전히 유니콘 길드에서 일하는 중인가?”
“그렇긴 한데, 업무가 바뀌었어. 배송에서 호송으로.”
“호송? 그렇군. 수도 본부에서만 하던 사업을 아버지 영지에까지 확장한 것이로군.”
“그런 셈이지.”
학생이 아닌 이의 등장과 더불어, 현 학년 최고라 할 수 있는 칼라슈와 발리스타가 한데 모여 얘길 나누니 이목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들 말고도 학생 중 이든을 알아본 이가 있었다.
“론. 저 새끼, 그때 그 장님 새끼 아니야?”
“응?”
옆에 있던 동료의 말에 론의 시선이 그가 가리킨 곳으로 향한다.
칼라슈와 발리스타 사이에서 여전히 눈을 감고 얘기를 나누는 사내.
론의 시선에 언뜻 살기가 비쳤다.
“진짜 그 새끼잖아. 용병 새끼가 겁도 없이 여길 쳐 들어와?”
“뭘 믿고 설쳐대나 했더니 저 새끼들이랑 친구였군.”
그 사이, 이든이 돌아가려는 듯 발길을 돌렸다.
“수도에 언제까지 있을 예정이지?”
“모레 떠날 것 같군.”
대화를 듣던 발리스타는 미련이 남아 보였다.
“모레? 아…. 이거 아쉽게 됐소. 그때까지라면 우리도 시험 기간이라 한잔하기 벅찰 것 같소.”
“됐소. 어차피 나도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으니까. 업무가 업무인 이상 앞으로 종종 수도에 들릴 테니. 다음에 한잔하지요.”
“알겠소. 수도에 다시 들르거든 꼭 찾아와주시오.”
이든을 고갤 끄덕이곤 돌아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때, 론이 옆에 있던 동료를 흔들어댔다.
“네빌, 따라와.”
“어디 가게? 곧 교수님 오시는데.”
“어차피 시험 시작하려면 시간 좀 남았어. 우리가 그사이에 저 새끼 하나 못 조지겠냐?”
론의 말을 듣던 네빌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의미심장했다.
“아아…. 좋은 생각인데?”
“그래. 어차피 학교에 몰래 들어온 새낀데 반쯤 죽여 놔도 학교에서 별말 안 할 거라고.”
“좋아. 흐흐흐.”
이든이 사라진 방향으로 론과 네빌이 따라 움직였다.
모퉁이를 지나, 바삐 옮기던 그들의 걸음이 멈추었다.
“아, 씨발! 이 새끼 그새 내뺐잖아.”
“장님이라서 느린 줄 알았더니만!”
금방 따라잡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든이 보이질 않자 론과 네빌이 욕을 내뱉었다.
아쉬워하며 그들이 되돌아가려는 찰나였다.
“날 찾나?”
근처 정원, 나무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론과 네빌의 걸음이 턱하니 멈춰 섰다.
나무 뒤 그늘진 곳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얼굴.
이든이었다.
“눈도 안 보이는 새끼가 눈치 한번 빠르네. 도망간 줄 알고 걱정했잖아. 이 십새야.”
영락없는 파락호였지만, 행동거지는 이든 역시 그 둘 못지않았다.
우득. 우드득.
그가 살벌한 소리를 내며 마주 걸어왔다.
“대놓고 살기를 쏘아대는데 내 어찌 그냥 가겠나.”
생각보다 강하게 나오는 이든의 모습에 론과 네빌이 헛웃음을 쳤다.
“하! 이야… 이 장님 새끼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우리, 너 반쯤 죽여 놓으려고 여기 온 거야.”
그들의 말에 이든이 화색을 띠었다.
“잘됐네. 나도 그럴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거든.”
“푸훕!”
“끄하하! 이 병신, 말 꼬라지 존나 웃기게 하네. 어이 병신. 진짜 죽고 싶어?”
론과 네빌의 눈에 핏발이 섰다.
서슬 퍼런 눈에서 풍기는 흉흉한 살기는 마치 견습 기사보단 범법자의 눈과 닮아 있었다.
이든이 혀를 찼다.
“애새끼들이 벌써부터 살기는…. 조용한 데로 가지. 방해받기 싫으니까.”
이든이 턱짓으로 정원 쪽을 가리키고는 발을 옮겼다. 론과 네빌도 따라나섰다.
인적이 없는 곳으로 자리 잡은 이든이 멈추어 서는데, 따라 들어오던 론이 비아냥댄다.
“장소 잘 골랐네.”
네빌이 옆에서 거들었다.
“네 무덤. 크크!”
이든이 허리춤에 있던 검을 검집채 땅바닥에 툭 던졌다.
“애들 상대로 검을 쓰기엔 내가 쪽팔리고, 맨손으로 손봐주지.”
“하….”
“저 새끼… 완전히 미쳤네. 어이! 너 그 검 안 들면 후회할 텐데. 진짜 괜찮겠냐?”
그런데 그 뒤에 오는 이든의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사내새끼들이 조잘조잘 말이 많네. 이제 대답하기조차 귀찮다.”
“뭐, 뭐어? 이 새끼가!”
네빌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잔뜩 구겨진 얼굴로 이든에게 달려들었다.
파앗.
본색은 파락호일지언정, 무도 대회 본선까지 올라갔던 실력자답게 움직임이 남달랐다.
이든의 코앞까지 다가간 네빌이 주먹을 냅다 휘둘렀다.
후욱.
이든이 살짝 발을 틀었다.
일순 커지는 네빌의 눈.
정처 없이 허공을 가로지른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어느덧 이든의 얼굴을 향했다.
‘자, 장님 맞아…?’
그때, 살짝 발만 틀어 가볍게 피했던 이든의 발이, 네빌이 미처 뭘 해보기도 전, 턱주가리에 날아가 꽂혔다.
“커헉…!”
“네빌! 이 장님 새끼가…!!!”
네빌이 쪽도 못 쓰고 바닥을 구르자, 곧바로 론이 달려들었다.
론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아무것도 못 하고 나자빠진 네빌과 다르게 이든이 휘두른 발을 정확히 보고 피했다.
“호오…. 넌 좀 쓸 만하구나.”
“닥쳐!”
휘익!
퍽.
“끄헉!”
그때, 어디선가 다시 날아온 이든의 발차기에 론이 얼굴을 맞고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분명 첫 번째 발차기는 눈으로 정확히 보고 피했는데, 재차 날아든 발차기는 시야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막을 새도 없었던 것.
론이 이를 악물었다.
“이런 씨발, 어디서 날아온 거야?”
“곧 실기 시험이라 했지. 지금부터 남은 시간 동안 두 번째 발차기를 막거나 피하면, 보나 마나 만점이다. 어때…. 시험해 보겠느냐?”
“이잇…! 개소리 작작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네빌과 달리, 잔뜩 열 받은 론이 재차 달려들었다.
휙.
다시금 날아오는 이든의 발차기. 역시나 첫 번째 발차기는 어렵지 않게 피한다.
그러나….
휘익!
퍽!
역시 다시금 날아온 두 번째 발차기를 피하지 못하고 론이 굴렀던 자리로 날아갔다.
“컥…! 허억… 허억!”
“쩝. 간만에 몸 좀 풀 수 있나 했더니 영 시원치들 않구먼. 왜 이리 비실비실해? 마법사 아카데미로 가야 할 놈들이 여기로 잘못 온 거 아니야? ”
“크읍! 야. 다시 덤벼.”
론이 휘청거리며 어렵사리 일어났다.
“아서라. 너 그러다가 시험도 보기 전에 몸살 난다.”
“닥쳐!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