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지치지도 않는지 론이 재차 달려들었다.
휙!
역시 어렵지 않게 피한 첫 번째 발차기,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대체 궤도가 어디로 휘어 들어오는지 알 수가 없다.
퍽!
론의 몸이 주륵 밀려, 다시 네빌 옆에 고꾸라졌다.
“억!”
“로, 론!”
네빌은 진즉에 정신을 차렸건만, 섣불리 이든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때, 이든의 고개가 네빌을 향했다.
“넌 안 해?”
“그, 그게….”
“근성 없는 새끼. 친구를 보고 좀 배워라. 임마.”
이든이 턱으로 론이 쓰러진 곳을 가리켰다.
론이 피떡이 된 얼굴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다시 해.”
아무리 쓰러져도 악착같이 일어나 덤벼들 기세에 이든은 진심으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놈 봐라. 단순히 양아치 새낀 줄 알았더니만, 근성 있잖아?’
제아무리 파락호라도 근성이 된 놈이라면 일단 달리 보이는 법.
이쯤 되니 이든도 단순히 ‘참교육’이 아닌 ‘참’된 교육을 하고 싶어졌다.
“괜찮겠냐. 한 번 더 맞으면 시험도 못 보고 완전 골로 갈 것 같은데?”
“허억…. 허억! 시꺼. 내가 너 반드시 죽여버린다. 다시 해 봐.”
론이 비틀거리며 다시 이든에게 다가갔다.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와중에도 이든의 첫수는 기가 막히게 잘 피한다.
그리고 문제의 두 번째 발차기.
내내 제대로 대응 한번 못 하고 얻어터지기 바쁘던 론이 이번엔 어느 한 곳을 미리 두 팔로 선점하여 가로막는다.
휘익. 퍽!
“어, 어째서…. 남은 곳은 여기밖에 없었는데…!”
이든의 다리가 후미에서 날아올 것으로 생각했던 론의 ‘선점’ 방어는 그렇게 어이없게 실패로 끝났다. 이젠 한계에 달한 것인지 론도 더는 일어나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를 바라보던 이든이 경악한 얼굴로 헛바람을 삼켰다.
“허참!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지금껏 단순히 얻어터졌던 게 아니라 내내 경로를 확인했던 거였어? 몸으로 때워가면서?”
이쯤 되면 이든도 녀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아. 내가 바보도 아니고 때렸던 곳만 때리겠냐.”
“으으…….”
론이 중얼거리는 것 같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얼굴에서 제대로 된 발음이 들릴 리가 만무하다.
“유연하게 생각해야지. 유연하게.”
흡사 제자를 타박하는 스승의 모습 같다.
“어제 하던 꼬라지를 생각하면 더 패도 시원치 않은데, 네놈이 마음에 들었다. 과거에도 잠재력만 믿고 깝죽거리는 것보다 너같이 우직한 녀석을 선호했지. 론이라 했나? 듣자니 귀족이라던데 성이 무어냐.”
“으으…. 개새끼….”
만신창인가 되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와중에도 투기는 여전하다.
이든이 혀를 찼다.
“쩝…. 그래. 넌 이제부터 개새끼 론이라 기억하마.”
“시이이 바아아….”
풀썩.
어렵게 의식을 붙잡던 론이 기어코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휙.
그때, 이든의 고개가 다시 옆에 있던 네빌을 향했다.
여전히 착 감긴 눈에서 마치 안광이 쏟아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네빌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너.”
“…예!?”
“얘 의무실로 데려가라. 금방 깨어날 거니 시험 보는 데 지장은 없을 거다.”
“네, 네!!”
이든이 자릴 털고 일어나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론을 옮기던 네빌에게 한마디 더 거든다.
“그리고 네놈은 웬만하면 저 녀석 옆에 꼭 붙어 다니거라. 그럼 한자리는 어렵지 않게 차지할 수 있을 거다.”
“아…. 예…!”
“그리고 여자들한테 집적거리는 짓도 그만하고. 그러다 나한테 또 걸리면 그땐…. 알지?”
“아, 알겠습니다.”
파밧!
신법을 쓴 이든의 신형이 귀신같이 사라지고, 네빌이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동시에 부축하던 론도 다시 땅에 처박혔다.
“으으으….”
“아아…. 맞다. 론 조금만 참아.”
론의 앓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네빌이 그를 둘러업다시피 의무실로 데려갔다.
의무실에 실려 간 론의 소식은 결국 담당 교수의 귀까지 들어갔다.
네빌은 유급을 피하고자 학교에 외부인이 몰래 들어왔고, 그 외부인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결국 당하고 말았다는 식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명했다.
교수는 처음에 믿지 않았다.
워낙 행실이 좋지 않았던 학생들이라, 당시 수업을 같이 듣던 학생들에게 물었고, 이든을 목격한 이들이 상당수 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결국, 시험의 공평성을 위해 실기시험은 며칠 뒤로 연기되었다고 한다.
***
몸을 풀고 온 이든이 여관에 도착했을 땐, 로즈는 이미 자신의 방으로 옮겨 숙취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대낮부터 한바탕하고 온 이든도 조금 피곤한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아이고…. 삭신이야.”
아직 쨍쨍한 몸이건만,
전생 시절부터 입에 붙은 말이라 가끔 고단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내뱉곤 한다.
침대에 눕고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든이 잠에서 깼다.
“후우. 오래도 잤군.”
끼익.
문이 열리고, 거기엔 숙소의 관리인이 서 있었다.
“이든 님을 찾는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요?”
이든을 찾아올 사람이라면 수도에 한 사람밖에 없지.
바로 루디였다.
로비로 내려가자 그의 예상대로 루디가 그를 보곤 반갑게 맞았다.
“잘 지냈어? 이든.”
“이게 누구야. 마법 학교 수석 아니야?”
자신에게 말해 주지 않은 것을 장난 섞어 비꼬듯 얘기했지만, 듣는 루디도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하하…. 설마 수석이었다는 거 말 안 해줘서 삐진 거야?”
“삐지긴 무슨. 내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그래. 황실에서 일을 잘 끝냈고?”
“에휴. 뭐 그런 셈이지.”
“훗. 한숨을 내쉬는 모양새가 일이 꽤 힘든 모양이군. 한잔할래?”
전생에도 관직 생활을 하던 친구가 있었다.
아직 견습이더라도 지금 루디가 하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럴까.”
평소 시달리는 학업과 업무 탓에 술을 멀리하던 루디도 오늘만큼은 한잔하고 싶었는지 바 앞에 앉는다.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별일이군. 술은 죄악이라며 멀리하던 친구가.”
탁.
숙소 한켠에 마련된 주점에서 일하던 주인이 이든과 루디 앞에 가득 따른 술을 놓았다.
“이보게 젊은이 그거 아나? 몸의 상처는 약으로, 정신의 상처는 술로 치유하라는 말도 있지.”
“하하. 감사합니다.”
루디가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크하. 이거 정말 쎄군.”
“어디 한번 얘기해 보게.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황실 일은 어떤지.
고작 한 모금 마셨는데, 그새 얼굴이 상기된 루디가 얘길 풀기 시작했다.
“황실 일이라…. 정말 최악이야. 업무 강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제일 힘든 건 정치질이야.”
“정치질?”
“이든 난 말이야. 훌륭한 마법사가 되는 방법은, 주어진 학업을 열심히 하면 그뿐인 줄 알았어. 열심히 배워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그것이 마법사 본연의 일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 누구에게 잘 보일 것인지 정해야 하고 아부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하지. 심지어 친구조차 원하는 대로 사귀지 못해. 인맥을 쌓는데 신중을 기해야 하고, 제아무리 맘에 드는 이라도 그가 나와 같은 사상인지를 따져야 해.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내가 하려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런 게 어때서?”
“응?”
가만히 루디의 얘길 듣던 이든이 한마디 꺼내는데, 잔을 들던 루디의 손이 멈칫한다.
“아부 좀 하면 어떤가.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하겠다는 그 뜻이 아부보다 못 한 일인가?”
“…!”
루디의 눈이 커다랗게 떠진다.
“정치가 힘들면 졸업하고 속세에서 나와 소소하게 사람 도우면서 살면 될 일 아닌가. 그런데 자네 뜻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자네의 그 지식으로 보다 널리 세상을 편하게 만드는 것 아니었나? 정치질이 힘들다는 것은 단지 자네가 나약하기 때문이야. 세상 모든 정치인들이 때론 자신의 이권을 위해 입에 발린 말을 할지언정 그들 또한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야. 자신의 이권을 챙기되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뜻은 똑같을 수도 있다는 말이세. 정치판 역시 사상을 들고 싸우는 전쟁터야. 자네가 그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건 아닌가?”
“…”
루디가 마치 벙어리가 된 듯 말이 없어졌다.
“검 대신 펜을 들고 싸우는 그곳에선 아부와 아첨은 계략이고 수단일 수도 있지. 만약 자네가 이대로 주저앉는다면 전쟁터에서 진 장수나 다름없는 것이야.”
뼈를 후비는 촌철살인 같은 말. 침묵하던 루디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푸하…! 자네 말이 맞아. 근데 그거 아나?”
루디가 그랬던 것처럼 이든도 말없이 듣기만 했다.
“…”
“힘들어 주저할지언정. 난 절대 포기하지 않아. 내 뜻을 기필코 세상에 이루고 말겠어. 절대로 전쟁터에서 패배하는 장수가 되지 않겠다고!”
탁.
쾅!
연설을 끝낸 루디가 거칠게 술잔을 놓곤 그대로 주점 문을 열고 휙 나가버렸다.
말없이 둘의 대화를 듣던 주인이 한마디 꺼냈다.
“이대로 보내도 괜찮겠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아 보였는데 말이야.”
“괜찮습니다. 오늘은 왠지…. 이대로 헤어지는 것이 저 친구한테 이로울 것 같습니다.”
이든의 말을 십분 이해한듯, 주인이 고갤 끄덕이다 궁금한 듯 묻는다.
“근데 아까 자네가 했던 말 있지 않은가. 그 말 어디서 들은 건가. 평소 자네 생각인가?”
주인의 물음에 이든이 웃었다.
“아닙니다. 그냥 아주 오래전…. 소중했던 친구가 한심한 이에게 해주었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먼 과거의 이야기.
이든이 무진이었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힘을 숭배하는 신교라고 정치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서도 이해관계가 있었고, 검 없이, 고요하지만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계략이 난무했다.
무진이 마인에서 소교주 후보로 부상하고, 장로들과 교주 사이에 이해관계에 질려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을 때, 황실 관료로 있던 친구가 그에게 해주었던 이야기.
‘너는 또 다른 전쟁에서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오직 치고받고, 피 흘리는 것만이 싸움의 전부라 생각했던 그에게 친구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피 흘리는 것만이 전쟁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보이지 않는 전쟁이 난무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이에게 얻은 깨달음에 실마리.
삶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한바탕 전쟁이요. 지나가는 바람과 같다.
그 바람에 버티고 우뚝 서느냐, 그대로 휩쓸리느냐.
모든 것이 다 본인 의지에 달렸다는 것.
철없던 무진은 이후로, 싸움터와 정치판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왔다. 그렇게 걸어온 그 길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것이다.
탁.
이든이 비운 술잔을 놓았다.
주인이 다가와 술잔을 치우곤 한잔 더 권한다.
“어떤가. 괜찮은 술이 있는데 한잔 더 하겠나.”
“예. 좋지요. 오늘은 왠지 옛 친구 생각에 한 잔 더 하고 싶습니다….”
밤이 깊어가고,
오래전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는 이든의 적적함도 깊어만 갔다.
***
다음 날.
이든은 충분히 취기를 빼낼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것도 잊을 만큼 코가 삐뚤어지도록 밤새도록 마셨던 것이다.
“후우…. 정신 나갔군. 기억이 끊길 정도로 마시다니.”
눈을 뜬 이든이 숨을 깊게 들이 내쉬었다.
밑에 주점에서 마신 이후로 방에 어떻게 들어왔는지조차 기억나질 않았다.
울렁거리는 속을 참으며 이든이 취기를 뱉어내려던 그때였다.
“일어났어?”
“응?”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
“로즈씨? 여긴 어쩐 일로….”
다름 아닌 로즈였다.
“여긴 내 방인데?”
“예?”
로즈의 말을 듣던 이든이 이마를 짚었다.
‘이런. 내가 추태를 부렸구나….’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이든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사실 너무 취해 기억이 안 납니다. 혹시 제가 어제 실수를…?”
“흠. 아주…. 대단했달까.”
“예…?”
지금껏 아무리 취했어도 그런 실수를 한 적은 결단코 없었다.
이든의 얼굴이 기겁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