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변태. 무슨 생각하는 거야?”
“그 대단했다고….”
물론 이든은 실제로 대단했다.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로즈가 말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밤 중에 고래고래 노랠 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숙소에서 자던 사람들이 어찌나 욕을 해대던지…!”
“제, 제가 그랬습니까?”
“응. 그리고 다짜고짜 내 방에 들어와선 침대에 드러누웠지.”
‘이런…. 멍청한 놈.’
이든이 추태를 부린 과거의 자신을 나무랐다.
“그리고 뭔가 말도 했는데….”
“말이요?”
“응. 근데 난생처음 들어본 말이었어.”
아마 중원의 말이었을 것이다.
술에 떡이 되어 기억 대부분이 날아간 가운데, 그 와중에도 버젓이 남은 하나의 기억.
‘보고 싶다. 친구야.’
지금 생에서도 그렇고,
전생에서도 이따금 그 친구를 그리워했다.
이든이 서둘러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밤새 죄송했습니다. 저 때문에 잠도 설치셨겠군요.”
“아니. 옆에서 완전 잘 잤는데?”
“옆에서요?”
“그럼. 땅바닥에서 자?”
“아….”
철면스럽게 말하는 로즈의 말도 틀린 것이 없다. 애초에 로즈의 방이었고, 자신이 무작정 들어와 누운 것이었다.
“자.”
그때, 로즈가 이든의 얼굴에 차가운 뭔가를 가져다 댔다.
“이건….”
“어제 내가 마셨던 꿀 탄 물. 주인아저씨한테 부탁해뒀지.”
“아 감사합니다.”
“뭘. 아! 그나저나 이제 수도에서 마지막 날인데, 뭐 할 셈이야?”
“글쎄요. 달리 생각해본 것이 없어서….”
“그럼 혹시 나랑….”
똑똑.
그때, 누군가 로즈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날세.”
목소리는 다름 아닌 케인이었다.
유니콘 길드 본사에서 숙식을 하며 남은 업무를 마치고 지금 막 돌아온 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케인이 이든과 로즈를 번갈아 바라보다 머릴 긁적였다.
“이런…. 내가 중요한 시간을 방해했나?”
“그런 거 아니에요!”
로즈가 냉큼 답했다.
“아무튼 사적인 얘기는 따로 묻지 않도록 하지. 그보다 본사에서 명령이 떨어졌어. 극비 임무일세.”
“극비 임무요?”
예정에 없던 일에 이든과 로즈가 놀란 얼굴을 했다.
***
잠시 후. 휴가를 즐기던 모든 길드원이 한곳에 모였다.
“대장. 극비 임무라니 무슨 일입니까?”
삼 일 내내 먹고 자기만 하던 톰슨이 제일 먼저 케인에게 물었다.
“일단 한가지 알려둘 것이 있네. 얼마 전 수도에 같이 왔던 여인들을 기억하나. 이든이 산채에서 구한 여인들 말일세.”
길드원들이 저마다 고갤 끄덕였다.
“그때 여인 중 카르엘이라고 있었지.”
“아! 이든이랑 같이 불침번 서고 분위기 묘하게 만들었던 그때 그 여자…. 악!”
깨방정 떠는 톰슨의 발을 로즈가 콱 밟는다.
톰슨이 뭐라 하려던 그때.
로즈의 서슬퍼런 시선이 자신에게 박히자 그가 슬며시 눈을 피했다.
“아무튼. 카르엘이 이번에 우리 팀에 합류하게 되었네.”
“엑! 정말요?”
이번엔 로즈가 소릴 질렀다.
단지 예상외 소식에 불가했으나, 로즈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그래. 근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야. 여인들을 고향에 바래다줄 겸. 호송 임무에 여인들 몇을 끼어서 같이 보냈는데…. 그만 습격을 당했다는군.”
“습격을 당했다고요?”
“그래. 그리고 호송에 합류했던 모든 여자들은 다시 행방불명. 국경 수비대에선 누구 짓인지 물증을 찾지 못했다는군. 하지만….”
“누군지 예상이 가는 곳이 있는 거군요.”
이번엔 가만히 듣던 이든이 말을 꺼냈다.
“그래. 국경 수비대가 정말 물증을 찾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알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우리로선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길드장님이 예상할 정도면 국경 수비대도 모르진 않을 거야.”
“누굽니까. 그들이.”
“폰 하름 테이머 길드. 상단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상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지. 그곳은 일반적인 물건 사고파는 상단이 아닐세. 그들이 파는 것은 사람. 특히 여자들을 선호하지.”
“노예 상인이군요.”
“그래. 근데 문제는 거기에 우리 길드원이 되기로 했던 카르엘도 포함되어 있네.”
운명 한번 기구하다.
산적 소굴에서 벗어나 다시금 사람답게 살아보려 했더니만, 이번엔 노예 상인에게 붙잡힌 것이다. 상처에 상처를 더한 격이다.
꽈악.
언뜻 내내 무미건조한 반응을 보이던 이든의 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볼 것 있습니까. 바로 가시죠.”
이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데 케인이 고갤 저었다.
“모두 갈 수는 없네.”
“어째서입니까.”
“우리 팀이 전부 가게 된다면 상대에게 우리가 누군지 들키고 말아. 그렇게 되면 구출 작전이 아니라 전쟁이 되는 거지.”
케인의 말이 옳았다.
길드원이 납치된 일이기도 했지만, 길드 간에 전쟁으로 가게 된다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해서 우리 팀 중 일부를 그곳에 위장 투입할 생각이네. 지원할 사람….”
“제가 가겠습니다.”
이든이 또 먼저 말을 꺼냈다.
“저 또한 이 팀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놈들로선 제가 누군지 모를 겁니다.”
“음. 일리 있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제가 할게요!”
이번엔 로즈가 재빨리 거들었다.
“로즈 자네가?”
“잊었어요? 저 잠입이 특기인 거.”
과거 청부업 시절의 로즈를 케인이 모를 리 없다.
케인의 시선이 이든과 로즈를 훑는다.
뭔가 어울리면서도 불안한 조합이었다.
“확실히 해둘 것은 구출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점일세.”
케인의 시선이 불현듯 이든을 향했다.
“파괴 같은 것이 아니라. 구출 말일세. 구출.”
“설마 사고라도 치고 올까 봐 그러십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끄응….”
이든이 그간 보여준 행적으로 보건대, 그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불안했다.
침투할 팀원이 정해지고, 본격적인 작전 회의가 시작됐다.
“오늘 자정. 테이머 길드에서 경매가 있을 예정이네.”
“자정의 경매라. 누가 봐도 수상하군요.”
“그래. 길드장님도 그 부분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신 거지. 누가 봐도 정상적인 거래 현장이 아닐 텐데, 경비대가 바보도 아니고 가만히 있다는 것은 이 부분에 대해 묵과하고 있다는 거겠지. 이든 자네가 할 일은 그 경매에 참가자로 들어가는 것일세.”
“참가자 말입니까.”
“그래. 그런 노예 경매 같은 경우엔 일반 경매와 달리 일이 신속하게 진행되지. 자네는 그 경매의 진행을 최대한 늦춰주는 작업을 하는 것일세.”
“꼬장말이군요.”
“그, 그렇지.”
표정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것 같지만, 한마디마다 단도직입적인 것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 같다.
이번엔 케인의 시선이 로즈를 향했다.
“그 사이 로즈는 잠입해서 카르엘과 나머지 여자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 구출하는 것일세. 혹 구출 전에 여자들이 경매장으로 나오는 경우엔….”
“그땐 일단 값을 크게 불러. 저와 거래가 성사되도록 만들겠습니다.”
“흠. 그러도록.”
그 후엔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이든의 말 외에 마땅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머지 인원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주변에서 대기하도록.”
“예.”
길드원들이 저마다 고갤 끄덕였다.
“모두에게 다시 말하지. 이번 일은 구출을 위한 극비 작전일세. 절대 길드 간 전쟁으로 확대돼서는 안 되네.”
그의 염려를 알기에 다들 알아듣는 와중에, 케인의 시선이 다시금 힐끗 이든을 향한다.
‘하아…. 역시 불안하단 말이야.’
이든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의심이 사실이 될까 너무도 염려스러운 그였다.
***
그날 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번잡했던 수도에 거리마저도 침묵할 때, 수상한 이들이 한두 명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저마다 걷는 방향은 달랐지만,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였다.
도무지 길드가 있을 만한 위치라곤 보기 힘든 어두운 골목에 자리한 테이머 길드.
길드의 외견은 형편없었지만, 속속들이 모여드는 사람들의 행색은 틀림없이 범부는 아니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과 휘황찬란한 장신구들.
저마다 모습은 달랐지만 느낌은 비슷했다.
길드 문 앞엔 수문장으로 보이는 경비원이 서 있었다.
커다란 덩치에 사나운 인상과 달리 초대된 손님이라면 깍듯하게 대했다.
“확인됐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속속들이 모이는 사람들 사이에 유독 튀어 보이는 한 사람.
착 감긴 눈. 검은 옷에 겉에는 하얀 털로 된 고급진 외투를 걸치고 옆엔 비서로 보이는 노출 심한 드레스를 입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성이 보좌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 허리춤엔 검은색 검을 차고 있다. 수문장이 입구를 가로막았다.
“어서 오십시오. 초대장은 가져오셨습니까?”
“예. 여깄습니다.”
사내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낸다.
초대장을 확인하던 수문장이 고갤 끄덕였다.
“저희 초대장이 맞군요.”
“그럼.”
사내가 입구로 들어가려던 그때. 수문장이 다시금 그를 가로막았다.
“죄송하지만 무기는 반납하시고 입장하셔야 합니다. 모든 경매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사내는 아쉬워하며 허리춤에 있던 흑색 검을 수문장에게 건넸다.
검을 받은 수문장이 보관함에 따로 챙기고는 사내 옆에 있던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옆에 같이 오신 분은….”
“제 비서입니다.”
“그렇군요. 어서 오십시오. 테이머 길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모든 확인 절차가 끝난 후, 수문장의 안내에 사내와 여인이 길드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초라했던 외부와 다르게 내부는 화려함 그 자체였다.
황궁에서나 볼법한 장식,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군데군데 아름다운 마법 조명들은 필시 예사의 장식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손님맞이용 탁자에 놓인 술잔 역시, 화려한 무늬가 세공된 것이 필시 값비싼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내 옆에 비서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와 정말 대단하게도 꾸며 놓으셨네.”
“그 정도입니까?”
“어. 게다가….”
주인과 비서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대화.
비서의 시선이 손님들 잔에 술을 채우고 있는 여자들을 향한다.
비서의 드레스도 상당한 노출이었지만, 이곳에 여자들은 거진 속옷이나 다름없는 차림새였다.
약관이나 됐을까. 얼굴도 상당히 앳돼 보였다.
사내 옆에 비서로 위장한 로즈가 재차 입을 뗐다.
“애들을 엄청 야하게도 입혀놨네.”
“그래요?”
“왜.”
로즈의 눈이 가느다랗게 뜨였다.
“뭐가요?”
“크흠.”
그때, 주변을 살피던 로즈가 누군가를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경비대장 록도 있잖아?”
“케인 대장 말이 옳았군요. 어디까지 연관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히 그간 묵과하고 있던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때, 멀뚱히 서 있던 그들에게 잔을 채우던 여자 중 한 명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곧 경매가 시작됩니다. 자리로 안내해 드릴까요?”
소녀의 입에서 나온 간드러지는 목소리는 흐르다 못해 넘치는 색기를 품고 있었다.
여자의 물음에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그러지.”
“예. 그럼 이쪽으로.”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중. 앞서가던 여자의 걸음이 어느 한 탁자에 멈췄다.
“이곳에 앉으시면 됩니다. 술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이든이 말없이 고갤 끄덕였고, 그의 잔에 술을 채우던 여자의 시선이 옆에 로즈를 향한다.
로즈가 고갤 저었다.
명목상은 비서로서 들어온 거지만, 그녀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여자 또한 아무런 의심 없이 고갤 끄덕였다.
이든의 잔에 술을 채우던 여자가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다음 오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여자가 볼일을 보기 위해 자릴 비운 후, 로즈가 옆에서 가만히 술을 마시던 이든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우릴 완전히 개무시하는군.”
“뭐가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