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250)

30화.

이든이 자리에 앉자 안내했던 여자도 이든 옆에 같이 자리했다.

선택된 귀빈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였다.

카르엘을 두고 이든과 설전을 벌이던 사내, 옆에 있던 그가 말을 건넸다.

“아깐 대단했소.”

“과찬이십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어느 가문의 자제분이시오?”

뜨끔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질문은 아니었다.

“아직은 서로 통성명을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든이 거리를 두듯 자연스레 대답을 회피했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사내가 의심보단 이해한단 투로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난 국경수비대장 록이요. 들어본 적 있을 것으로 보오.”

끄덕.

이든이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훗. 그렇게 경계할 것 없소. 직함만 국경수비대장이지 이런 짓을 한 지 꽤 됐소. 내가 테이머 길드장의 뒤를 봐주고 있거든. 친해지고 싶어서 말 한번 걸어본 것이오.”

툭.

록이 이든의 어깨를 툭 쳤다.

그 나름 친근감을 표시한 것이다.

록이 고급진 연초를 하나 집어 이든에게 슬쩍 건넸다.

“바람도 쐴 겸 한 대 피우러 갈 생각인데, 생각 있소?”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이든이 쥐었던 연초를 되돌려주자 록이 ‘끙’ 소릴 내며 볼을 긁적였다.

‘친해지기 쉽지 않은 친구로군.’

록이 옆에 있던 여자를 끼고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록 대장님.”

“응?”

무슨 생각일까?

이든이 불쑥 그를 불러 세웠다.

“…제가 낮가림이 조금 심합니다. 저 역시 록 대장님과 친해지고 싶은데, 이따 자릴 마련할 터이니 오늘 시간 어떠십니까.”

이든의 제안에 록이 화색 했다.

이든이 마련한다는 자리.

아마도 고급술을 퍼마시며 경매에 낙찰된 여자들을 끼고 노는 것을 상상했을 것이다.

“훗. 좋소.”

“그럼 이따 함께 자리하시죠.”

“후후. 그럼 서로 통성명은 그때 가서 제대로 하십시다.”

록이 자릴 비운 사이, 옆에 있던 여자의 손이 이든의 허벅지를 훑었다.

“그러지 말고, 이제 저랑도 놀아줘요. 도련님~”

앙탈 부리는 여인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이든이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꺅!”

“…”

하지만 왜일까.

이든의 표정은 한없이 서늘하기만 하다.

그의 기감이 줄곧 록의 기척이 사라진 곳에서 떼어지질 못했다.

***

“아쉽게 됐습니다.”

연초를 태우던 록의 고개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테이머 길드장.”

“카르엘이란 그 계집년. 대장님께서 많이 탐내셨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훗. 뭐 이런 일도 있는 거지요. 그보다 그년을 사간 남자 말이오.”

“예.”

“자릴 마련할 테니 오늘 함께 하자는 군요. 내 생각엔 아마 길드장도 초대되지 않을까 싶소.”

“오오. 그렇습니까?”

길드장의 눈이 빛났다.

비록 불법적인 일이지만, 상도의 어긋난다고 하여, 상품에만큼은 절대 손을 대지 않고 부하들에게도 단단히 일러뒀던 그였다.

하지만 뜻밖에 찾아온 보상처럼 록의 말대로 혹여 카르엘을 사 갔던 사내가 자신도 초대할까 내심 기대가 밀려왔다.

이럴 게 아니었다. 귀빈이 여잘 제공해주겠다는데 자신 또한 가만히 있어선 안 됐다.

테이머가 말을 꺼냈다.

“그럼 술과 장소는 제가 제공해야겠군요.”

“호오. 혹시 그때 그 장소 말이오?”

“예. 어떤 일이 벌어져도 소리 한점 새어나가질 않을 그곳 말입니다. 흐흐….”

테이머의 말을 듣던 록의 아랫도리가 후끈 달아올랐다.

록의 얼굴에 이상야릇한 표정이 찰나 새겨지던 그때.

그가 궁금한 듯 입을 뗐다.

“그나저나 다음 상품들은 어떻소? 카르엘보다 괜찮은 상품이 남아 있소?”

록의 물음에 테이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요. 아주 깜짝 놀라실 겁니다. 후후후….”

***

로즈가 들쑤시던 지하 감옥에서 네 번째 상품이 들것에 실려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앞 전 여자들과 달리 취급이 특이하다.

보통 들 것 하나에 사내 둘이 붙어서 옮기던 것과 달리.

이번 것은 사내 넷이 신줏단지 모시는 애지중지 옮기는 것이 아닌가?

‘대체 누가 들어 있길래 저리 신경을….’

그때, 들것에 실려있던 것을 확인한 로즈의 눈이 부릅 뜨였다.

‘저, 저건…!’

넋을 놓은 채 들것에 실려 나가는 것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로즈가 이내 고갤 휘휘 저었다.

이미 경매 상품으로 나간 것까지 로즈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저곳에 일은 전적으로 이든이 처리할 일이었다.

로즈의 시선이 다시 감옥 쪽으로 향했다.

‘됐어. 이 정도 숫자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겠어.’

감옥을 지키던 사람의 수가 처음과 비교해 급격히 줄었다.

슬슬 움직일 요량인 듯 로즈의 손이 드레스 속에 가려진 허벅지로 향했다.

그녀의 손에 단검이 쥐어졌다.

***

네 번째 상품이 무대 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기존의 붉은 천이 아닌 검은 천으로 뒤집어씌운 상품.

조금 다른 취급에 이목이 금방 쏠렸다.

“자. 이번에 소개해드릴 상품은, 저도 보고 깜짝 놀란 것입니다. 지금까지 귀분들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켜드릴 상품들이 각각 공개됐다면 이번 것은…. 후후. 무어라 말하기 힘들군요. 왜냐! 사람이 아니거든요.”

길드장의 알 수 없는 말에 사람들이 저마다 웅성거렸다.

내내 무미건조한 얼굴로 관망하던 이든도 저게 뭔 말인가 싶었다.

그때, 이든의 옆에 있던 여자가 뭔가 아는 듯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기대해도 좋아요.”

‘대체 뭐길래….’

잠시 뒤, 테이머 손끝에 검은 천이 잡혔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오래전 자취를 감추었다고 알려진 신비의 종족. 오늘 경매의 하이라이트! 엘프입니다!!!!!!!!!!”

휙.

걷힌 천에서 드러나는 엘프의 모습.

“헉!”

“세상에 엘프라니…!”

“오오오…!”

상품이 공개되기 무섭게 사람들이 저마다 탄성을 내지른다.

하얀 피부는 진주와 같았고, 은색의 머리카락은 별을 따다 수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기다란 귀는 무릇 신비함을 자아냈다.

엘프의 늘씬하게 쭉 뻗은 팔과 다리가 바르르 떨려왔다.

길드장의 말대로 정말 살아있는 엘프인 것이다.

“엘프? 엘프가 뭐지.”

반면 이든은 엘프가 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던 여자가 꺄르르 웃으며 그의 가슴을 토닥였다.

“어머! 도련님. 설마 엘프에 대해서 전혀 들어본 적이 없으신 거예요?”

“흠. 엘프란 게 뭔지 내게 말해 주겠나.”

이든이 옆에 여자를 확 끌어안았다.

줄곧 아저씨들의 손길만 받다가, 젊은 사내의 손길이 나쁘진 않은 얼굴이었다.

“엘프는 숲에 사는 종족이에요. 겉모습은 인간과 거의 흡사하지만, 오래전부터 자취를 감추고 이젠 보기 드문 종족이 됐죠. 오랜 옛날에는 인간과 엘프 간에 왕래가 깊어 사람만큼 자주 보였다는데, 어느 순간부터 숲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는 더 이상에 왕래도 없게 되었죠. 도련님이 저 엘프를 눈으로 봤다면 정말 너무 예뻐서 깜짝 놀랐을걸요?”

“그래? 꾀꼬리 같은 자네 목소리만큼이나 이쁜가?”

“어머! 호호호! 도련님은 말도 참 재밌게 하셔!”

잘만하면 옆에 여자를 통해 쓸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 싶었다.

이든이 친한 척을 하며 물었다.

“깜빡하고 네 이름을 묻지 않았구나. 이름이 뭐지.”

이든의 물음에 여자가 이든의 품에 달라붙어 소릴 냈다.

“릴리라고 해요.”

그 사이. 상품에 넋이 나간 귀빈들의 표정을 확인하던 길드장이 예상했던 반응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자. 쉽게 보기 힘든 최상품인 만큼 시작가는…. 이천 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길드장의 말에 몇몇 이들이 저마다 식겁했다.

이천 금.

졸부들은 애초에 쳐다도 못 볼 금액. 오롯이 중앙에 있는 진짜 귀빈들에게 판매할 요량인 것이다.

“어떤가. 자네도 욕심이 생기나? 흐흐흐.”

보자마자 첫눈에 마음에 쏙 들었던 록이 옆에 있던 이든에게 물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이든의 반응은 영 시큰둥하기만 했다.

“글쎄요. 사람이 아니라니 잘 모르겠군요.”

“훗. 그럼 이번엔 내가 욕심 좀 내보겠네.”

이든이 별 욕심 보이질 않자 록이 입맛을 다셨다.

“자. 그럼 이천 금부터 시작합니다.”

시작하기 무섭게 중앙에 자리한 이들이 손을 들기 시작했다.

“이천 백.”

“이천 백금 나왔습니다.”

“이천 이백.”

“이천 오백!”

“바로 이천 오백을 부르시는 분이 계시군요.”

서로 욕심을 내는 상품답게 경매가가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한다.

“삼천.”

내내 상황을 지켜보던 록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듯. 그보다 더 부른 삼천 금을 꺼냈다.

이렇게 되면 양상이 되는 것이다.

이목이 각각 이천오백과 삼천을 부른 이들에게 집중됐다.

“삼천 오백.”

“사천.”

“자자 사천까지 나왔습니다!”

따로 진행자가 제시한 것도 아닌데, 양상이 되니 자연스레 오백 금씩 올라간다.

모두가 흥미를 보일 때 내내 무미건조한 얼굴로 관망하던 이든의 귓가에 낯선 여자의 음성이 들어와 꽂혔다.

[도, 도와주세요.]

움찔.

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음?’

자신에게 콕 집어 보낸 전음에 이든이 기감으로 주위를 살폈지만, 딱히 전음을 보낼만한 사람이 느껴지진 않았다.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마치 자신을 제발 찾아달라는 양 재차 울리는 전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이든의 얼굴이 단 쪽에 멈췄다.

‘설마. 저 여자가…?’

무미건조한 얼굴로 관망하던 이든의 관심이 비로소 엘프에게 향했다.

“도련님?”

시중을 들던 릴리가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이든의 모습에 걱정되는 듯 가까이 다가와 불렀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든이 서둘러 표정으로 고치고는 단 위에 엘프의 기척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네가 부른 것이냐.]

[네…. 도, 도와주세요….]

[전음을 어찌 알고?]

[전음이 뭐죠…?]

전음을 모르는데 전음을 보낸다.

대답 한번 황당무계하다.

게다가 전음을 보낼만한 수준이면 애초에 노예로 잡히지도 않았을 텐데….

이든이 재차 그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건 그렇고. 도와달라니 무슨 말이지?]

일전 오크를 만난 뒤로 생긴 선입견 탓일까.

만약 전음을 보낸 이가 사람이었다면, 이든도 이리 쌀쌀맞게 굴지 않았을 것이다.

[절 구해주실 분이…. 당신밖에 계시질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지?]

[당신은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니까요.]

‘뭐야…. 이 녀석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자칫 작전이 실패할까, 자신의 목적을 꿰뚫는 목소리에 당황한 것도 잠시.

[너. 대체 뭐야. 어떻게 내 생각을 읽었지?]

혹여 제 엘프란 계집이 입을 잘못 놀린다면 계획이 수포가 되고, 여자들을 구하러 간 로즈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든이 심기 불편한 전음을 보내던 그때.

뜻밖에 대답이 들려왔다.

[도, 도와주세요…. 너무… 너무 무서워요…. 흑흑….]

뚝,

투둑.

상품으로 끌려 나온 내내 얼음장같이 차갑던 엘프의 얼굴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 사이.

테이머 길드장은 연신 싱글벙글하며 입찰가를 외쳤다.

“사천오백 금!”

여유자금이 있다곤 하나, 제아무리 록이라도 사천 오백 금은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눈앞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엘프를 밤새 유린하고 싶다는 욕망에 무리를 쓴다.

“오천.”

록이 사천오백 금을 부르기 무섭게 재차 오천을 부르는 의문의 사내.

경매 내내 입찰 한번 없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던 이가 록과 양상으로 가면서

이목을 집중시키더니 승부를 보려는 듯 아예 찍어누른다.

“젠장!”

록이 잔에 있던 술을 벌컥 들이켰다.

아무리 욕심이 나더라도 이 이상 입찰하기엔 부담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때, 이든의 얼굴이 록을 향했다.

“제가 도와드리지요.”

“응? 그게 무슨…?”

관심 없다던 이든이 손을 들었다.

“육천.”

오천에서 바로 천금이 올라간다.

내내 구경하던 이들도, 진행자의 얼굴도, 그리고 오천을 부르던 입찰자마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곧 테이머가 호들갑을 떨어대며 외쳐댔다.

“유, 육천!!!! 육천이 나왔습니다!!!”

길드장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고래고래 외쳤다.

이든의 옆에 있던 록이 어처구니 없단 얼굴을 했다.

“자네 관심 없다 하지 않았나…?”

“오늘은 제가 모시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저것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시니 제가 사도록 하죠.”

록의 얼굴에 지금껏 볼 수 없던 화색이 만개한다.

“저, 정말인가?”

한두 푼이 아닌 저 귀하디귀한 엘프를 이따 있을 자리에 제공한다는 데 좋지 않을 리 없다.

“제가 대장님께 어디 두말하겠습니까.”

록을 향해 웃던 이든의 얼굴이 다시 단쪽으로 향한다.

그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얼음장 같은 한기가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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