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250)

34화.

“트러블러 가문이라고 아십니까.”

수도와 관계된 것이라면 빠삭하게 알고 있는 레스타드가 고갤 끄덕였다.

“음. 요즘 정계에 떠오르는 가문이지. 근데 트러블러 가문은 왜…?”

“경매 초반 미처 구하지 못한 소녀들이 있는데, 그놈이 그들을 사 갔습니다.”

“그랬군. 그럼 그 일은 우리가 맡도록 하지.”

의외의 대답에 이든이 놀란 얼굴을 했다.

“괜찮겠습니까? 상대는 귀족인데요.”

“어차피 공론화시킬 일이라면 크게 판을 키우는 것이 낫지. 케인.”

가야 할 길이 정해지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게 어째 비슷한 면이 있는 두 사람이었다.

레스타드의 시선이 케인을 향하고, 달리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뜻을 알아차린 케인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트러블러 가문 일은 케인 쪽에서 맡을 것이고, 난 나대로 따로 준비할 것이 있네. 자네는 어쩔 셈인가?”

레스타드의 물음에 이든의 고개가 테이머 길드 쪽을 향했다.

“아직 끄나풀이 남아 있을 겁니다. 그것들을 모조리 잡아들일 생각입니다.”

“끄나풀?”

“예. 록이 그러더군요. 로즈 씨가 몰래 빼냈던 여자들을 수색하라고 명령을 내렸었답니다. 움직인 지 한참 됐으니, 분명 록에게 보고하러 테이머 길드로 올 겁니다.”

“그렇군. 그럼 현장에 남은 일은 자네가 맡도록 하지.”

레스타드가 본부로 발길을 돌리다가 걸음을 멈추곤 돌아섰다.

“혹시 모르니 하는 말인데, 그들마저 죽이진 말고 반드시 생포해놓게. 죄의 유무를 따지려면 벌 받을 놈들은 남겨둬야 할 것 아닌가.”

“예. 순순히 따른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어째 불안했지만, 이든이 그 정도로 무대책이라 생각지는 않았기에 믿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레스타드가 본부로 향하는 사이, 이든도 남은 끄나풀을 잡기 위해 다시 테이머 길드로 향했다.

***

록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던 국경수비대원들이 테이머 길드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컴컴한 내부. 누군가 중얼거렸다.

“…왜이리 어두워?”

경매가 끝나고, 한창 마감으로 분주해야 할 내부가, 평소와 다르게 조용했다.

내부가 워낙 어두웠던 탓에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던 그 순간.

어디선가 나는 피비린내에 들어온 이들이 저마다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냄새야. 마치 피 냄새 같은….”

일순 어둠에 익숙해진 그들의 눈에 서서히 내부의 참상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바닥에 낭자한 혈흔과 주검들.

국경수비대의 눈이 지진이 난 것마냥 흔들리던 그때.

“왔냐.”

어둠 사이로 낯선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장님…?”

록의 목소리치곤 앳된 목소리.

그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대장님이 아니신데…?”

“응?”

거기엔 끔찍한 참상이 벌어진 현장에 팔자 좋게 앉아 있는 한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뭐야? 너는, 여기서 뭣 하고 있는 것이냐!”

국경수비대의 물음에도 말없이 자신들을 향해 비릿하게 웃고 있는 청년.

그때, 청년이 한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그들 발치에 던졌다.

휙! 데구르르르.

툭.

정확히 그들 발치까지 떨어져 굴러온 그것은 다름 아닌.

“응…?”

바로 혀를 쭉 내민 채 죽은 록의 인두(人頭)였다.

“흐, 흐이이익!”

“뭐, 뭐야! 네, 네가 벌인 짓이냐!!!!”

스릉!!!

국경수비대원들이 기겁하고는 곧바로 검을 빼내 들었다.

그 모습에 청년, 이든이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그렇게 나와줘야지.”

처음부터 속 시원히 이렇게 나와주길 바랐다.

그리고 잠시 뒤.

테이머 길드 내부에선 거친 타격음과 외마디 비명이 사방에 울렸다.

이든이 남은 끄나풀마저 잡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다음날.

날이 밝은 수도 광장에는 평소보다 유독 많은 인파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사람들의 이목이 향한 곳엔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끔찍한 광경이 펼쳐있었다.

국경수비대원들이 거진 불구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지만, 가장 참혹한 것은 넝마가 된 몸과 분리되어 바닥에 굴러다니는 록의 머리통이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황실의 귀까지 들어갔다.

황궁의 병사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땐, 한 청년이 그 사이에서 그들을 미리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너무 늦었소.”

“너는….”

청년이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들을 이 꼴로 만들었소.”

사건의 범인을 잡으려면 꽤 애먹겠다고 생각했다.

웬걸 오히려 현장에 직접 행차하시곤 자신이 그랬다고 순순히 말하는 것이 아닌가.

“같이 가 줘야겠다.”

“암요. 그래야지요.”

애초에 이든의 실력이라면 무슨 의미이겠냐마는 내민 손에 수비대원이 쇠고랑을 채웠다.

국경수비대를 때려잡은 것도 모자라. 국경수비대장 록을 끔찍이 살해한 중죄를 저지른 이든을 재판소에 세우기 위함이었다.

***

국경수비대원 부대장 록시드는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한곳에 가만히 있질 못하고는 자신의 손톱을 잘근 씹어댔다.

“씨발…. 애초에 적당히 뇌물을 받아 처먹었어야 했던 건데.”

록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테이머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록만큼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상당한 뇌물을 받았고, 그 대가로 경매의 상품이 탈출하거나 없어지는 문제가 생길 경우 록이 연락을 취하면 어떻게든 잡아서 찾아주던 것이 그였다.

록은 이미 죽어 입을 열진 않겠지만, 문제는 테이머 길드의 사람들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그간 뇌물을 받아온 자신 또한 발목을 잡힐 것 같았다. 지금 그가 이러한 난관을 돌파할 방법은 단 하나.

록 대장과 테이머 길드를 그 꼴로 만든 놈을 중죄인으로 몰아가는 것뿐이다.

“부대장님. 부대장님!”

“...”

“부대장님!!!”

밀려오는 온갖 걱정에 대원에 부름을 못 듣다가 한참 후에야 록시드가 대답했다.

“으, 응?”

“이제 가실 시간입니다.”

“으, 응. 그래 그렇지.”

수도의 문제는 곧 황실의 문제.

다만 웬만하면 자신들의 선에서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괜히 윗분들까지 신경 쓰게 하다간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몰랐다.

오후에 시작되는 재판에 맞춰 록시드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남은 테이머 길드원들과 연락은 통했나?”

“예. 문제없이 처리되실 겁니다.”

“음.”

록시드가 고갤 끄덕였다.

면목상 테이머 길드는 무기 경매 상단이었다.

실체를 아는 것은 자신과 죽은 록을 포함한 일부 사람들뿐이었다.

위증한다 한들 누구도 알 수 없었고, 실체에 대해 스스로 까발리는 이 또한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었다.

현재 수감 된 녀석만 중죄인으로 만들면 될 일이었다.

***

재판소에 도착한 록시드가 참관석 중 한 곳에 앉았다.

본격적으로 재판이 시작되면 호명 후에 증인으로 설 예정이었다.

그때, 재판소 중앙 출입문이 열렸다.

“법관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저벅저벅.

중년의 신사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중앙에 섰다.

신사를 바라보는 록시드의 표정이 편치 못하다.

공정의 대 법관, 카시야스.

사건이 사건인 만큼, 어중이 법관이 오지 않을 것을 예상했으나, 공정한 판결로 이름난 대법관이 직접 행차할 줄을 꿈에도 몰랐다.

그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단 하나.

수도 광장에서 체포된 중죄인의 죄의 유무를 면밀히 따지기 위해서였다.

법관이 손을 휘젓자, 본 재판의 참관자들이 자리에 앉았다.

카시야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중차대한 사건에 죄의 유무를 면밀히 따짐으로써 혹여 나중에 잡음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소. 하여 참관하시는 분들께서도 본 판결의 결과에 대해 존중해주실 바라오.”

굳이 대답이 필요할까.

그의 위명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누구도 그가 내리는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무언의 동의가 이어지고, 카시야스가 고갤 끄덕였다.

법관의 신호에 중앙 출입문 반대편에 다른 문이 열렸다.

피고인의 참석을 위한 문이 열리는데, 거기에서 앳돼 보이는 청년이 걸어와 대법관 앞에 섰다.

“그대가 본 사건에 중심인 이든이오?”

“그렇습니다.”

“우선 그대 증언에 앞서 우리가 입수한 정보는 이렇소. 어제 새벽, 테이머 길드에서 무기 경매가 열렸소. 귀한 무기가 입고되었다 하여 부호들이 저마다 다퉈 입찰했고, 그대 또한 낙찰받은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들었소. 최고의 무기를 낙찰받고 남은 정산을 위해 테이머 길드장과 독대하였고, 정산 과정에 마찰이 생겨 테이머 길드장에게 폭력을 행사했소. 당시 현장에 있던 록이 그대를 말리는 과정 중에 몸싸움이 거칠어졌고, 결국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국경수비대원과 테이머 길드원들의 증언이오. 이의있소?”

이든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의? 이의를 제기할 것조차 없군요. 어디서 얻으신 증언인지는 모르겠지만 죄다 개소리만 모아오셨습니다.”

거친 발언이었다.

충분히 기분 나쁠 수도 있건만, 이를 듣는 카시야스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국경수비대와 테이머 길드의 증언 모두 틀렸다는 것이오?”

“예. 전부 위증입니다.”

“그럼 그대가 아는 것을 말해 보시오.”

“저희 길드원이 호송 중에 납치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호송엔 산적들의 산채에서 구해낸 여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거 포함된 상황 있었지요. 사라진 길드원과 여인들 찾기 위해 국경수비대에게 의뢰하니,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하더군요. 근데 웬걸 테이머 길드에서 벌거벗긴 채 노예로 경매 중이었더군요. 길드원과 여자들만 데리고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록이란 새끼가 지가 국경수비대장이라며 소개하더군요. 그간 국경수비대에서 이 같은 일을 묵과했다는 것이지요. 열이 받더군요. 그래서 잡아다 족쳤습니다. 그 과정에 록은 뭐…. 하도 열 받아서 죽여버렸습니다.”

거친 어투로 포장된 말이었지만, 그 안에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때, 참관 중이 록시드가 벌떡 일어났다.

“개소리 말거라!”

록시드의 고함이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대는?”

카시야스의 냉철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북문에 국경 수비부대장 록시드입니다.”

“그렇군. 여기 있는 이 자가 말하길 그대의 대장 록이 테이머 길드가 그간 저지른 범죄에 대해 묵과했다 하는데, 어찌 생각하시오?”

“저자야말로 위증하는 겁니다. 록 대장님께선 그런 분도 아니셨고, 애초에 테이머 길드 또한 정상 영업을 해온 길드였습니다!”

“증명할 것이 있소?”

“물론입니다.”

그때, 참관석 뒤에 있던 사람 몇몇이 일어났다.

“저들은…?”

카시야스가 묻자, 일어난 사람들이 하나씩 답했다.

“마커스라고 합니다. 스콜피온이란 이름에 작은 용병단의 대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

“철의 심장이란 용병단을 이끌고 있는 녹스입니다.”

하나같이 수도에 이름난 용병단의 단장들이었다.

듣던 카시야스가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이 뒤이어 입을 연다.

“테이머 길드의 길드원 마크입니다. 길드장님과 부 길드장님께선 아직 깨어나시지 못해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슬픔에 잠긴 목소리, 마크란 사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 모습에 참관자들이 저마다 탄식했다.

무미건조하던 이든의 입가 한쪽이 삐죽 솟아올랐다.

누가 봐도 비웃음이었다.

카시야스는 여전히 냉철한 얼굴로 일관했다.

“좋소. 마크 어제 보고 들은 것을 말해 보시오.”

“바다 건너온 괜찮은 무기들이 들어왔었습니다. 자정에 경매라니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겠지만, 아시다시피 수도에 용병분들은 워낙 바쁜 일정을 소화하시다 보니 모두를 모셔놓고 경매를 할 시간이 그때밖에 없었습니다. 저기 있는 저 사람도….”

그때, 마크와 이든의 얼굴이 마주쳤다.

순간 마크가 움찔했다. 바라보는 사내의 눈은 착 감겨 있건만, 어째선지 감겨 있는 눈꺼풀을 뚫고 응시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저, 저 사람도 그런 용병 중 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경매 내내 싹쓸이 하다시피 낙찰을 받으시길래 길드장님께서 독대를 원하셔서 둘이 같이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다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 보여서 록 대장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엔….”

뚝…

툭.

마크의 눈가에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하아…

연이은 탄식이 주변에서 들려왔다.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정제된 연기에 참관자들 모두가 깜빡 속고 있었다.

카시야스의 냉철한 시선이 남은 용병들을 향했다.

“그대들도 그 자리에 있었소?”

모두 동시에 끄덕였다.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기 있는 저 사람이….”

마커스의 시선이 이든을 향했다.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무기를 낙찰받은 것 또한 보았습니다.”

거짓말도 그럴듯하면 진실로 위장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 명도 아닌, 여러 사람의 거짓이 모이니 완전한 사실로 둔갑한다.

기어코 이든의 입에 냉소적인 웃음이 나왔다.

록시드가 준비해온 증인이 만만치 않았지만, 카시야스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이든에게 물었다.

“잘 들었소. 이든, 반론 하시겠소.”

“예.”

이든이 끄덕이곤 록시드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갤 돌렸다.

“어찌 하나같이 저런 인간들을 잘도 모아왔군. 그간 받아 처먹은 뇌물로 구워삶았나?”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전…. 사정상 떠도는 여행자였습니다. 여행 중 호송 중인 용병단이 보여 수도까지 바래다줄 수 있겠냐고 허락을 구하고 위탁했었습니다. 그런데….”

록시드가 데려온 용병단 증인 중 한 명의 표정이 영 불안해 보였다.

“밤이 깊었을 때, 저의 팔다리를 묶고는 어디론가 끌고 가더군요. 그리고 도착한 곳은 테이머 길드였습니다. 몇 날 며칠을 지하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그곳엔 이든 님께서 말한 길드원과 다른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록시드가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짓입니다! 위증을 시키기 위해 유니콘 길드에서 섭외한 여자일 겁니다!”

록시드의 말을 듣던 이든이 헛웃었다.

“자기가 위증을 했다고 남들까지 그러는 줄 아는군.”

“뭣이!”

“그리고 남의 증언 자리에 껴들지 마. 내가 네놈들 증언 자리에 껴들든?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이, 이이이… 이놈이!”

한마디, 한마디가 걸작이다.

자신보다 새파랗게 어려 보이는 놈이 버르장머리를 운운하니, 록시드가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눈에 핏발이 가득 섰다.

“맞는 말이요. 록시드는 남의 증언에 말을 삼가시오.”

카시야스의 시선이 증인을 향했다.

“지금 증인은 본인이 테이머 길드의 노예로 팔려간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있소?”

“...있습니다.”

“무엇이오?”

“...”

그때, 여인은 한참을 망설이다 깊게 눌러쓴 로브를 뒤로 넘겼다.

“헛!”

“세상에 이럴 수가…!”

“서, 설마….”

참관석 곳곳에서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왔다.

증인을 바라보던 카시야스도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당신은…,”

은발에 하얀 피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천사의 얼굴을 한 아름다운 외모.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기다란 귀였다.

“전 엘프입니다. 제가 왜 로브로 모습을 가리고 다녔고, 제가 어째서 납치를 당해 노예 경매장에 끌려왔는지…. 이만하면 증거로 충분합니까?”

충분했다.

아니 차고도 넘쳤다.

전 종족을 통틀어 가장 비밀에 싸인 종족.

그건 아마도 그들이 가진 선천적인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탐하는 자들의 욕심 때문에, 세상과 활발한 교류를 하던 엘프들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인간들의 세상과 자신들을 단절시켰다.

교류가 끊긴 지 거진 수백 년이 지났고, 지금은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엘프.

그리고 그 기나긴 단절의 세월 끝에 공적인 자리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모두가 탄성을 자아내는 그 순간에도 몇몇 사람들의 표정은 여전히 불편해 보였다.

그중 하나가 록시드였다.

‘빌어먹을! 엘프라니. 이것에 관해선 들어본 적도 없었다고…!!!’

록시드의 핏발 선 눈이 마크를 향했다.

그의 시선을 느낀 마크가 딴청을 피우듯 고갤 돌렸다.

참관자들과 마찬가지로 넋 놓고 바라보던 카시야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엘프님께서 이곳까지 힘든 걸음을 하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절 구해준 은인께서 곤경에 처하셨는데, 가만두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은인?”

카시야스의 시선이 이든을 향했다.

“여기 있는 이든이 당신을 구해준 것입니까.”

엘프가 고갤 끄덕였다.

“예. 제 도움을 무시하실 수 있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절 구해주셨습니다.”

가만히 얘길 듣던 카시야스가 의아한 듯 물었다.

“도움은 어찌 요청하셨습니까. 당신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서로 대화를 나눌 순간이 있었습니까?”

엘프가 머뭇거리다가 이내 결심이 선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했습니다.]

카시야스도 그리고 참관자들 모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번이 두 번째인 이든도 여전히 놀란 눈치였다.

이든이 고갤 돌려 엘프의 음성이 들린 곳으로 향했다. 그의 기감이 그녀를 살폈다.

‘볼 때마다 신기하군.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몸으로 전음이라니.’

웅성웅성….

난생처음 겪어 본 전음에 모두 놀란 눈치였다.

“놀랍소.”

재판 내내 냉철한 표정을 일관하던 카시야스의 표정이 변할 정도면 그녀의 능력은 필시 예사의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그럼 다시 본론에 앞서 합류하기로 하였던 용병단에 납치가 되었다고 하셨는데, 어느 용병단인지 기억이 나십니까?”

자칫 힘든 기억을 끄집어내야 하는 물음에 카시야스의 목소리도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엘프는 천천히 고갤 끄덕이곤, 주변을 훑었다.

“이곳에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웅성웅성….

엘프의 시선이 뚝. 멈춘 곳.

그곳을 따라 참관자들이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다 이윽고 엘프의 눈이 멈춘 곳에 참관자들의 이목이 쏠렸다.

스콜피온 용병단의 단장. 마커스였다.

그는 마치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듯 표정을 전혀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카시야스의 차가운 시선도 마커스를 향했다.

“마커스. 테이머 길드에 일반인을 납치해 노예로 공급한 사실이 있소.”

“그, 그런 사실 없습니다!”

입은 없다 하지만 안색이 하얗게 질려있는 것이, 말과 얼굴이 따로 놀고 있다.

누가 봐도 거짓을 말하는 것 같았다.

모두가 의심의 눈초리로 보지만, 카시야스만큼은 예외다.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그였다.

“그럼 이것은 어찌 설명하실 거요.”

유니콘 길드장 레스타드가 참관석에서 걸어 나와 카시야스에게 뭔가를 건넸다.

“이건…. 테이머 길드장의 장부입니다. 가장 마지막 장을 보시면 마커스 단장에게 얼마 전 지급했던 금액이 적혀져 있습니다.”

“그, 그건! 우리가 테이머 길드에게 납품받은 무기에 대한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이천 금이나 말이오?”

마커스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무슨 무기를 얼마나 납품받길래 이천 금이나 지급했단 말이오. 내 알기로 스콜피온 용병단은 이만큼의 금액에 해당하는 무기를 사용할 규모가 안 되는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테이머 길드장이 당신에게 지급한 금액인지, 당신이 테이머 길드장에게 지급한 금액인지도 구분 못 하는 바보로 아시오?”

“그, 그건….”

증인을 섭외해 위증하고, 없는 죄를 꾸며내 위기를 모면하려 했더니, 오히려 죄가 밝혀져 독박 쓸 판이었다. 록시드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지금 레스타드 길드장은 본 재판과 관련 없는 이야기로 제가 데려온 증인을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왜 관련이 없습니까. 당시 납치당했던 당사자가 범인을 지목했고, 이와 관련된 증거를 보여드린 겁니다.”

“엘프라니 솔직히 놀라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납치당한 당사자라 어찌 단정 짓는 답니까!”

정황과 장부만 보면 충분히 의심이 갈 상황이지만, 카시야스 또한 동의했다.

“록시드 부대장 말 또한 옳습니다. 그렇지만 레스타드 길드장이 제출한 증거 또한 참고 가능한 점 모두 알아주시오.”

의심이 가지만, 그럼에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것이 그다웠다.

록시드는 순간 위기를 모면했다고 생각했다.

불리하게 돌아가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생각한 찰나,

이든이 입을 열었다.

“법관님. 저 또한 증인을 내세우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안될 것 없었다.

카시야스가 고갤 끄덕였다.

그때, 이든이 나왔던 출입구 쪽으로 여자들이 걸어 나온다.

모두가 테이머 길드에 붙잡혀있던 여자들이었다.

“이 여자들은…?”

카시야스의 물음에 이든이 간단히 답했다.

“테이머 길드에 붙잡혀있던 여자들입니다. 경매 상품으로 팔릴 뻔한 것을 구했습니다. 그녀들 또한 누군가에 습격을 받고 테이머 길드장에게 넘겨졌습니다.”

카시야스가 고갤 끄덕이곤 참관석에 엘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 붙잡혀있을 당시 같이 있던 사람들이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그럼 증인들에게 묻겠습니다. 테이머 길드장에게 넘겨질 당시 여러분을 납치했던 이들이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사람을 향한다.

철의 심장 용병 단장 녹스에게.

줄곧 의연한 척하던 그의 얼굴은 여자들이 들어선 순간, 정반대가 되었다.

그때, 이든이 입을 열었다.

“법관님. 용병이란 작자들이 아무 죄 없는 여자들을 납치하여 경매 상품으로 공급하고 그것을 사들이는 테이머 길드. 그리고 이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그간 묵과하였던 록과 록시드 부대장을 고발하는 바입니다.”

청천벽력 같은 역공에 록시드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든다.

“모함입니다!!!”

“모함? 이것을 봐도 모함이라 할 수 있소?”

이든이 팔랑팔랑 서류 한 장을 흔든다.

“이건….”

카시야스의 물음에 이든이 설명했다.

“이것은 그간 국경수비대장 록이 테이머 길드장에게 처먹어온 뇌물 장부와 뇌물의 사용처입니다! 뇌물도 뇌물이지만 이 뇌물의 사용처가 참으로 가관입니다. 테이머 길드장에게 받아 처먹은 뇌물로 여자를 사들이는데 갖다 바쳤더군요.”

이든이 제출한 서류를 살펴보던 카시야스가 물었다.

“회원증…?”

“예. 회원증엔 록과 테이머 길드장이 주고 받아온 금액이 적혀있습니다. 특히나 록은 테이머 길드장의 뒤를 봐주는 조건으로 보다 쉽게 회원이 될 수 있었죠. 불법 노예거래를 묵과하고, 도망친 노예들을 다시 잡아준다는 조건 말입니다. 바로 저기 있는 록시드와 함께 말입니다.”

이든의 손가락이 록시드를 향했다.

“예. 제가 국경수비대장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알고 있던 국경수비대원 몇몇도 병신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제가 중죄를 저지른 것입니까. 아니면, 나라의 녹봉을 처먹는 새끼가 백성을 지키지 못할망정 백성들의 위험을 묵과하고, 그것도 모자라 강간한 새끼가 중죄인입니까?”

록시드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록시드 저놈을 포함한 제가 때려눕힌 국경수비대원들은 록이 연락을 취하면 도망친 여자들을 다시 잡아다 테이머 길드장에게 갖다 바치는데 일조한 새끼들입니다.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지요.”

“이놈 닥쳐라! 국경수비대를 건드린 중죄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신성한 재판장에서 헛소리를 하느냐!”

“너야말로 개소리 그만하고, 증인 말고 증거를 가져와. 나처럼.”

이든이 들고 있던 서류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게 네놈 대장이란 작자가 그동안 받아쳐 먹어온 뇌물의 사용처다. 친필 서명과 지장도 있는데, 어떻게 네 놈 대장 손가락이라도 잘라다가 대조해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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