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이 자는….”
“트러블러 가문의 가주입니다.”
“이자가 트러블러 남작…!?”
얼마나 얻어맞은 것인지 피떡이 된 얼굴. 트러블러 남작을 아는 카시야스도 그를 못 알아볼 정도였다.
“이게 대체…!”
그때 레스타드 길드장이 서류 뭉치를 꺼내 카시야스 앞에 놓았다.
“트러블러 남작을 포함. 그간 테이머 길드와 불법 노예거래를 해온 대부호들과 귀족들의 명단입니다.”
레스타드가 건넨 명단을 살피던 카시야스 법관의 눈이 부릅떠졌다.
레스타드가 제출한 명단 공개에 수도는 그 어느 때도 없던 태풍이 휘몰아쳤다.
거기엔 트러블러 남작을 포함한 고위 대신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황궁에 때아닌 역병이 돈 것이었다.
***
다음날.
날이 밝게 무섭게 리갈 상단과 페리온 상단이 숙소 앞에 줄지어 섰다.
테이머 길드 사건으로 이든이 며칠간 수감되느라, 출발이 꽤 늦어졌다.
하지만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올바른 일을 했기 때문이다.
빈 수레와 상단 길드. 그리고 유니콘 길드원들이 칼스테인 영지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를 서둘러 마치던 그때, 그곳에 레스타드 길드장이 찾아왔다.
“아무튼, 자네의 그 오지랖 덕분에 우리 길드도 꽤 곤욕을 치르게 생겼어. 여기저기서 날 불러대고 난리라고.”
레스타드의 한탄에 이든이 웃었다.
“후회하십니까.”
“아니. 후련하네.”
“훗.”
어쩐지 성격부터 웃는 것까지 닮은 것이 많은 둘이었다.
그때, 살짝 웃던 이든의 얼굴이 찬찬히 굳었다.
“케인 대장께 들었습니다. 카르엘씨는 수도에 남기로 했다면서요.”
이든의 물음에 레스타드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연달아 겪은 사건 때문에 국경 밖으로 나서는 것이 두려운 모양이야. 해서 본부에서 사무일을 돕기로 했네.”
“그렇군요.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잘 좀 보듬어 주십시오.”
“걱정 말게.”
그때, 대화를 나누던 둘 사이로 로브를 깊게 눌러쓴 사람이 다가왔다.
일전 재판 때 증언을 도운 엘프 여인이었다.
“이든님.”
이든의 고개가 돌아 그녀를 향했다. 이든이 가볍게 고갤 숙였다.
“재판 때는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아니요. 감사의 인사는 제가 드려야 함이 마땅하죠. 일전엔 너무 경황이 없어서…. 정말로 너무 감사했습니다. 이든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전 지금쯤 어찌 됐을지….”
듣던 이든이 멋쩍은지 머릴 긁적였다. 애초에 구할 생각이 없던 대상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그녀 덕분에 본인 역시 큰 도움을 받았다.
이든이 웃으며 입을 뗐다.
“…고향에 돌아가실 땐, 저희 길드장님께서 최대한 도와주실 겁니다. 모쪼록 무탈히 고향에 도착하시길 바랍니다.”
“네.”
처음 대면했을 때, 전음으로 주고받던 쌀쌀맞은 음성과 달리, 지금 이든의 말투는 상당히 부드러워진 상태였다.
확연히 달라진 그의 모습에 엘프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그녀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이든에게 쥐여줬다.
“저기. 이거….”
“음? 이게 뭡니까.”
“예로부터 저희는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빚진 은인에게 이것을 드렸습니다. 이건…. 저희 가문에 인장이 적힌 표식이에요.”
“이것을 왜 제게?”
“혹… 레온하르트 영지에 오실 일이 있으시거든, 제국 국경 밖에 있는 저희 숲에 들려주세요. 이게 있다면 세상과 단절된 저희의 문이 이든님께는 열렬히 환영할 거예요. 빚진 은혜를 꼭 갚고 싶습니다.”
“아니, 별로 한것도 없는데….”
‘받어…!!!’
그때, 옆에서 레스타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받으라고…!!!’
결국, 레스타드 길드장의 닦달에 이든은 엘프가 쥐어준 그녀의 선물을 품 안에 고이 넣었다.
“알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꼭 이든님을 다시 뵙길 기원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고향까지 무사 귀환하시길.”
재차 고갤 깊숙이 숙이곤, 몇 발짝 물러나는 엘프족 여인, 레스타드가 이든의 어깰 두들겼다.
“자네. 그거 소중히 간직하게.”
“이게 그렇게 귀한 겁니까?”
“귀하다마다 엘프들이 사는 세상에 초대된 인간은 정말 손에 꼽히니까. 흔치 않은 기회라고.”
“흠.”
그때, 레스타드의 눈이 뒤를 향했다.
어느새 상단과 길드원들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더는 붙잡아둬선 안 되겠군. 그럼 다음 호송 때 또 보세나.”
“예. 도중에 저만 쏙 빠져 죄송합니다. 제가 싸지른 똥. 잘 좀 치워주십시오.”
“하하! 어련히 안 치울까.”
듣기에 따라서 충분히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이지만, 레스타드는 이든의 그런 직설적인 화법을 좋아했다.
이든과 대화를 끝낸 레스타드가 케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끄덕.
레스타드의 신호에 케인도 마주 끄덕였다.
“자 출발하세!!!”
케인의 우렁찬 소리에 맞춰 수레가 줄지어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든도 그 옆에서 서서 걷던 그때.
“이든 씨!!!”
먼발치에서 누군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르엘의 목소리였다.
이든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카르엘이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는 소리쳤다.
“그동안 정말, 정말 고마웠어요!!!”
이든의 얼굴에 평소답지 않은 미소가 피었다.
그리고 그녀의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남아야 할 사람은 남고, 떠나야 할 사람은 길을 떠난다.
수도에 있는 내내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아 바빴던 시간들.
하지만 어쩐지 묵은 때를 벗어낸 상쾌한 기분마저 드는 오늘이었다.
***
수도에서의 정신없던 시간이 흐르고 칼스테인 영지로 돌아가는 길.
그간에 겪은 고초를 하늘도 아는 걸까. 수도로 향하던 때와는 달리 돌아가는 길은, 왔던 길이 맞는지 의심이 갈 만큼 참으로 평화로웠다.
별다른 일 없이 칼스테인 영지에 도착한 이든은 곧바로 짐을 풀러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옆엔 수도에서 데려온 릴리도 함께였다.
“흐음….”
로즈의 눈이 가느다랗게 뜨였다.
호감 갔던 남자의 집에 웬 여자가 들어가 산다는데 어느 여자가 불안하지 않을까.
“이든. 정말 그 애 데려가도 괜찮은 거야?”
로즈의 눈초리가 무서웠던 걸까.
릴리가 쭈뼛거리다가 이든 옆에 바짝 섰다.
번갈아 보던 로즈의 시선이 더욱 차가워졌다.
“예. 방 하나가 남으니 이 아이가 지내는 데 별문제 없을 겁니다.”
로즈가 말한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이든이 별생각 없이 답했다.
“언제까지 지내게 할 생각이야? 계속 데리고 산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잠깐 데리고 있을 예정입니다.”
“집에 부모님이랑 같이 계신다 했지?”
“예.”
단둘이었다면 결단코 반대했을 기세다.
부모님과 함께 있단 말에 그녀도 조금 안심이 되는 표정이었다.
“알았어. 어쨌든 데려온 아이니까 어쩔 수 없지. 어서 집에 돌아가서 쉬도록 해.”
“예. 로즈 씨도 그간 고생 많았습니다. 다음 호송 때 다시 뵙겠습니다.”
“응…! 혹시 심심하거나 그러면 길드 옆에 숙소에 있을 테니까 놀러 오고…!”
그간 소홀했던 수련에 집중할 예정이라 심심할 일은 없겠지만, 예의상 고갤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자.”
“아, 네…!”
이든이 로즈에게 가볍게 고갤 숙이곤 릴리를 데리고 앞장서 집으로 향했다.
어쩐지 같이 집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보니 다시 불안해지는 로즈였다.
***
유니콘 길드와 이든의 집까진 생각보다 거리가 상당했다.
배송하던 시절엔 신법으로 돌아다녔기에 이리 먼 거리인 줄은 모르고 지내다가 릴리를 끼고 걷다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집 앞에 도착했다.
끼익.
문은 별달리 잠겨있지 않았다.
“들어와.”
릴리가 고갤 끄덕이고, 이든을 따라 꾸물꾸물 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이든의 목소리에 그의 어머니 메리가 방에서 뛰쳐나오다시피 했다.
“이든! 드디어 돌아온 게로구… 나?”
메리의 시선이 옆에 있던 릴리에게 자연스레 향한다.
“예. 지금 막 수도에서 돌아온 길입니다.”
“아아…. 그래. 근데 옆에 이 아이는…?”
그러고 보니 막상 릴리를 데려올 생각만 했지, 부모님께 어찌 설명해드릴지 생각해두진 않았다. 이든이 어…. 하다가 머릴 긁적였다.
“수도에서 데려온 애입니다. 한동안 이곳에서 지내게 할까 합니다.”
“응?”
솔직하긴 했지만, 이유도 없이 요점만 말해버렸다.
듣는 메리도, 옆에서 쭈뼛거리던 릴리도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이었다.
보이지 않아도 읽히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이든이 낮게 헛기침을 하곤 재차 입을 뗐다.
“크, 크흠. 이따 아버님이 오시면 그때 설명하겠습니다.”
어물쩍 넘어갔으나, 어찌 됐든 부모님을 설득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
해가 지고, 브라운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든이 돌아왔단 소식을 들은 것인지 평소 그답지 않게 허겁지겁 들어왔다.
“이든! 돌아왔단 소식 들었… 응?”
집 안에 들어온 브라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의 시선이 탁자 앞에 뻘쭘하게 앉아있던 릴리를 향했다.
“이 아이는 누구냐?”
“마침 말씀드릴 참….”
“네가 데려온 색시냐?”
릴리를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저것이다.
릴리의 얼굴이 어쩔 줄 몰라하며 빨개졌다.
“아닙니다.”
릴리와는 참으로 상반된 반응. 이든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자세히 말씀드리긴 힘들지만, 못된 놈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녔던 불쌍한 아이입니다. 수도에서 인연이 닿아 만난 아이인데, 갈 곳도 없고, 취직도 새로 시켜줄 겸 데려왔습니다. ”
“흠….”
뭔가 부족한 듯한 설명이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평소 이든의 성격을 알기에 더는 물을 수 없었다.
“그래. 아들이 데려온 아가씨는 나이가 어찌 되는고?”
“여, 열여섯입니다….”
지금껏 색욕 가득한 아저씨들만 보다, 인자한 브라운을 보니 이것대로 낯설던 릴리의 목소리가 한없이 기어들어 갔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겠구나…,”
듣진 않았지만, 그녀가 겪을 고초를 이해한다.
브라운이 넌지시 건넨 말은 마치 부모의 감정과 같았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그 감정에 릴리는 적응을 못 하다가 이내 눈물을 터트렸다.
“흑… 훌쩍…. 흑!”
처음. 이든을 따라나섰을 때만 해도 세상 밖으로 나선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다.
그런데 막상 아늑한 공간에 따듯한 어른들을 마주하니 서릿발 같던 마음이 녹아내리고, 이내 눈물이 되어 흐른다.
메리도 말없이 그저 그 어린아이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때, 이든이 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데려오긴 했지만, 무전취식 시킬 생각 없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참으로 산통 깨는 말.
릴리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훈훈했던 분위기에 제대로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흠흠…, 아무튼, 우리로선 좋은 거 아니요? 오래전부터 딸 하나, 아들 하나 이렇게 가지고 싶어 하지 않았소?”
브라운이 메리의 손을 잡았다.
메리도 릴리가 싫진 않은지 고갤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럼 이왕 이리된 것 잘 지내보자. 아가.”
메리의 한 손이 릴리의 한 손을 살포시 덮었다.
주름진 손에서 느껴지는 따듯한 온기.
릴리의 차갑던 마음이 다 뎁혀진다.
그때, 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간만에 제가 저녁 차려드리겠습니다.”
이든이 팔을 걷어붙이자 릴리가 도우려 일어섰다.
“저, 저도 도와드릴게요.”
“주방일 해본 적 있어?”
“조, 조금요?”
이든이 채소 몇 개를 꺼내 릴리에게 건넸다.
“재료 손질만 도와줘. 요리는 내가 할 테니.”
“요리도 할 줄 아시는 거예요?”
“먹고 깜짝 놀라지 마라.”
오래간만에 서본 주방이건만 이든은 능숙하게 재료를 손질했다.
그에 반해 릴리는 많이 어설펐다.
아들과 릴리를 바라보는 브라운과 메리의 눈에 따듯한 온기가 비쳤다.
신혼 때 그토록 바라던 가정의 모습을 일흔이 넘은 나이에 비로소 그들 두 눈에 담는 순간이었다.
간만에 모인 가족들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오래도록 식사를 했다.
릴리는 별다른 말 없었지만, 이 자리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마저 끝낸 뒤, 이든이 릴리가 지낼 방으로 데려갔다.
“자, 여기가 한동안 네가 지낼 방이다.”
브라운과 메리의 젊은 시절, 처음 집을 지을 당시 부부의 방과 아이들의 방을 하나씩 만들어뒀었다.
오랜 시간 비워두었던 남은 방에 릴리가 온 순간, 비로소 온기가 채워진 것이다.
“이곳이…. 제 방이요?”
줄곧 길드에서 임시로 마련해준 단체 숙소에서 지내온 릴리에게 자신만의 방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비로소 주인이 생긴 침대부터 책상까지 가구들을 어루만지던 릴리에게 이든이 입을 연다.
“공짜 아니다. 일해야 한다.”
또 다시 찬물을 끼얹는다. 줄곧 참던 릴리가 휙 하니 돌아보곤 째려봤다.
“저도 눈치라는 게 있거든요. 아까부터 자꾸 일! 일!”
“크흠.”
이든이 무안한 듯 괜히 헛기침했다.
“이 또한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이다. 누가 들으면 일 못 시켜서 안달 난 사람인 줄 알겠구먼.”
“안달 나 보이거든요.”
잔뜩 토라진 목소리. 줄곧 그를 어려워하던 릴리가 비로소 편한 모습으로 대했다.
“어쨌든 오늘은 일찍 자라. 내일부터 많이 바빠질 거다.”
“바로 일하는 곳 소개해 주시는 거예요?”
릴리가 놀란 얼굴을 했다.
“이놈이 진짜 날 일 못 시켜서 안달 난 사람으로 보네. 따로 할 일이 있다.”
“따로 할 일이요?”
“그래. 지금의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게 뭔데요…?”
“스스로 독립할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