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250)

37화.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난 이든은 아침상을 차리곤 곧바로 릴리의 방으로 향했다.

벌컥.

아직 열여섯밖에 안 됐다지만, 어찌 됐든 숙녀의 방을 두드리지도 않고 벌컥벌컥 잘만 열어댄다.

“음냐… 음….”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릴리를 이든이 흔들어 깨웠다.

툭툭.

“어서 일어나라.”

“으음…. 벌써 아침이에요?”

“아침은 아니고.”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다.

릴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새벽이잖아요.”

“널 가르치려면 시간이 빡빡하다. 어서 나와.”

‘…응?’

가르친단 말에 아직 잠도 덜 깬 얼굴에 릴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이든이 집 앞 공터로 나오고, 그 사이 릴리도 옷을 잔뜩 껴입고 밖으로 나왔다.

곧 봄이 오겠지만, 아직은 겨울 끝자락이라 그런지 새벽 공기가 제법 매섭다.

“으으 추워. 이렇게 일찍부터 뭐 하시려는 거예요?”

“릴리.”

이든의 표정은 한껏 진지했다.

그의 얼굴에 릴리의 투정도 쏙 들어갔다.

“내가 싸우던 모습. 기억하느냐?”

이든의 물음에 릴리는 자연스레 테이머 길드의 사건을 떠올렸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싸움이라고 부르기조차 힘들었던, 일방적인 학살의 현장.

이든의 지금과 그때의 모습은 괴리감이 상당했다.

릴리는 고갤 끄덕였다.

“네….”

잊고 있던 그의 모습에 절로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보이지 않음에도 그녀가 겁먹었음을 목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었다.

분위기를 풀고자 이든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흔치 않은 모습.

“그것을 무공이라 한단다.”

“무…공?”

“그래. 무공. 한번 배워보겠느냐?”

“무, 무공을요…?”

“…”

이든이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릴리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전생 무림을 평정했던 절대자의 가르침.

무림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일생일대의 기회일지라도 릴리에겐 선뜻 두려움이 더 앞서는 것이었다.

이든은 충분히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한참 고민하던 릴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세상에 적응하는데 무공을 꼭 배워야 하는 건가요…?”

이든이 솔직하게 고갤 저었다.

“그건 아니다. 다만…. 힘이 있으면 최소한 손해는 안 보고 살 수 있다.”

“힘…?”

“너 자신을 지킬 수단. 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단 말이다.”

“…”

릴리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매혹적인 제안이었지만, 무공이란 것을 쓰던 이든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것을 쓸 자신의 모습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없단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든은 충분히 이해했다.

“강요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 말거라. 중요한 건 배우고 싶어 하는 너의 의지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릴리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싶었다.

단지 릴리가 딱해서…?

그것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릇 스승도 제자를 가르침에 있어 배울 것이 많다 하였다.

신검합일에 오른 지금, 이든은 그간 해온 수련 외로 새로운 경험을 느끼고 싶었다.

후학양성.

전생의 교주였을 당시에도 마땅히 눈에 차는 아이가 없어, 부 교주만 두었지 따로 후임인 소 교주를 둔 적이 없었다.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도 부 교주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었다.

그것이 두고두고 후회로 남았다.

그리고 이번 생엔 후학을 남김으로써 전생에 미처 경험 못 한 다른 깨달음도 얻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고자 하는 릴리의 의지였다.

이든이 제아무리 욕심이 난다지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웃으며 릴리의 머릴 헝클다시피 쓰다듬었다.

“우선 아침부터 먹자꾸나. 고민해 보거라.”

이든이 발을 돌려 집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릴리의 한마디가 그의 걸음을 잡았다.

“…배우고 싶어요.”

“응?”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지켜주고 싶어요!”

“…훗.”

힘든 결정을 해준 릴리가 기특했다.

앞으로 제자가 될 아이를 바라보는 스승의 마음이란 이런 것일까.

이든의 입가에 절로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전생의 시절을 포함해 그의 첫 제자였고, 첫 제자임에도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없단 사실에, 눈이 보이지 않음을 너무도 아쉬워했다.

미소짓던 이든의 얼굴이 차츰 굳었다.

아마 엄한 스승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바로 이것이다. 싶을 그런 표정이었다.

“결정해주어서 고맙구나. 하지만…. 무공을 배우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힘들고, 배워야 할 것도 많지. 그래도 괜찮으냐?”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겠어요. 어렸을 적부터 워낙 힘들게 자라서 생각보다 잘 버틸걸요?”

“그래?”

아직 수련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개는 마음에 들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네!…. 저 근데요.”

이든이 따르던 릴리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걸음을 멈췄다.

자연스레 집으로 향하던 이든도 멈춰 섰다.

“제가 뭐라 불러드려야 할지….”

이든이 피식 웃었다.

“전엔 도련님이라고 잘만 불러대더니.”

릴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곳에서 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 그건 일할 때 잠깐 그랬던 거구요!!”

“농이다. 흠.”

그러고 보니 줄곧 이든을 저기요.라고 불렀던 릴리였다.

돌이켜보니 참으로 멋대가리 없는 호칭이었다.

꾹 다물어진 이든의 착 감긴 눈이 살짝 호선을 그렸다.

“스승님이라 부르거라.”

“스승님…!”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다만 릴리는 그것이 한없이 높고, 한없이 따듯한 이름으로 들렸다.

릴리가 웃으며 다시 집으로 들어서는 이든의 팔을 꽉 껴안았다.

얼마나 꽉 껴안는지 이든의 몸이 잠깐 휘청거릴 정도였다.

“같이 가요. 스승님!”

“원 녀석. 그런다고 봐주면서 가르치진 않을 거다. 알았지?”

기뻐 좋다는 아이에게 스승이 한다는 말도 참 멋대가리 없다. 찬물 끼얹는 데는 참으로 선수다.

그럼에도 릴리의 표정은 썩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지금껏 없던 제일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족들과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이든은 릴리를 끌고 다시 공터로 나왔다.

배가 든든히 찬 탓에 릴리도 추위를 덜 타는지 나오자마자 툴툴거리지는 않았다.

릴리가 앞서가던 이든에게 물었다.

“스승님은 안 추워요?”

두껍게 털옷을 입고 나온 릴리와 달리 이든은 달랑 무복만 걸치고 있었다.

“별로.”

신검합일에 이르면서 수화불침의 몸을 갖게 되었다.

만년설이 뒤덮인 산맥의 칼바람이 아니고서야, 사실상 추위와 더위에는 완전한 작별을 고한 셈이다.

이든이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앉거라.”

“네…? 아 네.”

릴리가 이든 앞에 앉는데,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는다.

땅에 엉덩이가 닿는 철퍼덕 소리가 아닌 무릎이 닿는 소리가 들렸다.

이든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고, 나처럼 이렇게 앉으라고.”

“아, 아아 예!”

그리곤 같은 자세로 앉는데, 편해 보이는 이든과 달리, 릴리는 자세가 영락없이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처음엔 이 자세가 꽤 힘들지. 하지만 앞으로 지겹도록 해야 하는 자세야. 시간이 지나면 너도 점차 익숙해질 거야.”

모든 무공에 원동력은 심법에서 시작된다.

이든은 지금 릴리에게 심법부터 가르칠 요량인 것이다.

이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내공이 전무한 아이군. 심지어 무공에 적합한 몸도 아니다. 하지만….’

내공을 담는 그릇은 신체다.

어렸을 때부터 수련을 습관화하지 않으면 그릇의 크기는 작기 마련이다. 아니면 아예 없거나.

릴리는 무(武)와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릇 자체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며, 지식은 전무. 스승된 입장에서 가장 까다로운 제자였다.

‘하지만 천마심공이라면 능히 가능하지.’

하지만 전생의 천하제일인으로 무림을 제패했던 패왕이 이로 골을 썩을 수는 없었다.

릴리를 살피던 이든이 입을 열었다.

“지금 자세 그대로 내게 등을 보여 보아라.”

그릇이 작다면 강제로 키우면 되고, 내공이 전무하다면 강제로 집어넣으면 그만이다.

다만 한가지 걸리는 것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마도인가. 정도인가.’

그 자신은 마도(魔道)가 아닌 정도(正道)를 고집했지만, 후학을 양성하는 데 있어 사실 마도만 한 편한 방법은 없다.

정도를 고집하는 정파와 달리, 신교는 강해짐에 있어 순리를 따르지 않고, 쉽고 빠른 길을 택하는 자들이 많았다.

물론 순리를 벗어나는 행동이기에 그에 따른 부작용 역시 존재했지만…

릴리가 낑낑거리며 그 자세 그대로 뒤로 돌아앉는 사이.

생각을 마친 이든은 고갤 끄덕였다.

‘역시… 느려도 정도가 맞다.’

신교의 절대자가 마도를 거부하다니 웃긴 얘기지만 어쩌겠는가.

단지 마도 그 자체만으로 강해지는 것에 분명 한계가 있는 것을 그가 몸소 체험하지 않았던가.

“옷을 조금 걷을 거다. 놀라지 말거라.”

“예?”

릴리가 되묻기도 전에 이미 이든의 손은 릴리의 등 쪽의 옷을 살짝 걷어내고 있었다.

동의를 구하기도 전에 손을 쓴 것이다. 릴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드러난 릴리의 새하얀 등으로, 이든이 손을 가져다 댔다.

“지금부터 내공을 주입할 거다. 놀라지 말거라.”

“예?”

줄곧 알 수 없는 말만 하니, 릴리는 되묻는 것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러나 곧 말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었다.

스읍. 우우웅.

릴리의 등을 짚은 이든의 손끝에서 천마심공의 마기가 릴리의 맥을 타고 흐른다.

대부분 기맥이 막혀있지만, 상관없었다. 막혀있던 기맥은 강제로 뚫으면 그만이었다.

“조금 아플 거다. 참아.”

“윽!”

이든의 말대로 전신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릴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움직이면 안 돼. 무조건 참아.”

릴리가 이를 악물곤 기맥이 강제로 뚫리는 과정을 참아낸다.

“크읏.”

기맥이 뚫리고 혈맥까지 재구성되는 과정이니 당연히 수반되는 통증은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진기가 아닌, 마기는 그 반작용이 더 크게 다가온다.

여자아이가 참아내기엔 실로 큰 고통, 이를 악물던 릴리의 입에서 가느다란 실 핏물이 흘렀다. 어찌나 주먹을 세게 쥐고 있는지, 몸까지 부르르 떨려왔다.

당장에 뛰쳐 도망가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고통을 끝내 참아내고 있는 것이다.

기맥과 혈맥을 재구성하고, 전무한 단을 강제로 생성하고, 그릇의 형태를 잡는다.

범부에서, 무인의 태를 수련 한번 거치지 않고 강제로 교정하고 있는 것이다.

“끄흑!”

그때, 실핏줄이 흐르던 릴리의 입에서 기어코 피가 왈칵 쏟아졌다.

치이이….

뜨듯한 핏물이 얼어붙던 땅을 적시자, 일순간 김이 모락모락 새어 나온다.

이든의 이마에서도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제자의 고통을 옆에서 듣는 스승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에서 멈출 순 없었다. 한 번에 끝내야 이겨내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편했다.

다행인 것은 그간 이든의 경험과 천마심공의 심오함이 생각보다 기맥을 빠르게 뚫고 있다는 것. 물론 릴리에겐 그마저도 억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후우….”

이든이 숨을 크게 뱉어냈다.

이겨낸 릴리도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지만, 이든도 상당히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내긴 했지만, 타인의 기맥을 뚫는다는 것은 필요 이상의 집중력과 기소모를 요했다.

“고생 많았다.”

“하아…. 하아….”

이를 악물며 참던 릴리가 비로소 거친 숨을 들이 내쉬었다.

릴리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그때, 이든이 재차 입을 뗐다.

“다시 자세 잡아.”

“예?”

릴리가 식겁한 얼굴을 하는데, 그녀의 기분이 어떤지 목소리만 들어도 눈치챌 수 있었다.

이든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걱정 마. 지금의 것은 아까처럼 아프진 않을 테니.”

“네…!”

마음을 다잡은 릴리가 아까와 같은 자세를 취한다.

이든이 다시 그녀의 등을 짚고는 위아래로 팔을 휘젓는다.

“헙…!”

이든이 팔을 휘젓자 릴리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천마심공의 마기가 뚫린 그녀의 기맥을 타고 일주천하는 생소한 느낌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을 따라서 말하도록 해.”

“예…!? 예…!”

“천천히 말할 테니. 당황하지 말고 따라 외워.”

곧이어 이든의 입 밖으로 생소한 단어들이 뱉어 나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음마심공의 구결이었다.

일반적인 마인들이 익히는 심공이 아닌 여성 마인들이 익히는 심공으로 특히나 음기가 유독 강한 릴리에게 퍽 잘 어울리는 심공이었다.

릴리의 기맥에 마기를 일주천시키고, 동시에 음마심공의 구결을 알려준다.

그러나 정작 이든 본인은 천마심공을 동시 운용하니, 그와 같이 끝을 봤던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시도조차 못 할 고도의 작업이었다.

릴리가 느리지만, 천천히 이든의 말을 따라 했다.

처음 듣는 생소한 언어임에도 생각보다 잘 따라 하는 탓에 모두 읊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음마신공의 구결은 여자 마인들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심공이었기에 조금만 노력만 한다면 외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만큼 단조로웠다.

일주천을 끝낸 이든이 등에 짚은 손을 떼고 옷으로 다시 덮어주었다.

이든이 다소 피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방금 그 느낌을 잘 기억하거라. 그것이 바로 내공, 그중에도 마기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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