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마기…?”
“그래. 앞으로 널 강하게 만들어 줄 힘의 원천이지. 우선 그것부터 익숙해지도록 하자.”
“아… 네!”
엄중했던 그의 모습과 혹독한 과정에 잔뜩 기죽어 있던 릴리의 머릴 이든이 쓰다듬었다.
“고생 많았다.”
“…”
보일 리 만무한데, 릴리가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고생했단 한마디에 죽을 만큼 아팠던 고통도 씻은 듯이 낫는 기분이었다.
그 사이 이든이 자릴 털고 일어났다.
“아까 외우던 것. 오늘 저녁까지 다 외우거라.”
“네? 그걸 전부 다요?”
“당연하지. 그것도 다 못 외워?”
“그치만 엄청 길었던 것 같은데…!”
“그까짓 거 몇 글자나 된다고. 길어도 반복되는 구절이 많으니 금방 외울 게다. 기억 안 나는 부분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고.”
아무리 단조로운 구결에 심공이라지만, 당일 다 외우라니 릴리 입장에선 당연히 어처구니없을 수밖에 없었다.
“뭐해? 너도 어서 일어나. 감기 걸릴라.”
릴리도 이든의 눈치를 보며 쭈뼛 일어섰다.
툭툭.
그때, 이든의 손이 릴리의 엉덩이를 털어주었다.
릴리가 화들짝 놀랐다.
“스승님! 어딜 만지는 거예요!”
릴리의 반응에 이든이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을 했다.
“응? 난 그냥 혹시 모래 묻었을까 털어주는 건데?”
“제가 알아서 털 수 있거든요. 그리고 모래 얼마 묻지도 않았어요!”
이든이 혀를 찼다.
“나참.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이지 왜 성질이야. 그리고 엉덩이 좀 털어준 게 뭐 어때.”
이 정도 둔한 거면 답도 없다.
릴리가 처음으로 이든에게 질색을 했다.
“으휴! 정말 숙녀에 대한 예의가 눈곱만큼도 없으신 거 아녀요?”
릴리가 획 하니 돌아 집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세상 다 산 노인 특유에 무신경함이래도 이 정도면 중증이다.
이든이 무안한 듯 머릴 긁적이다가 돌아가는 릴리의 등에 한마디 더 던진다.
“이따 시험 볼 거니까 꼭 외워놓거라!”
“알았어요!!”
아무래도 단단히 삐진 듯하다.
왠지 한동안은 한 집 안에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릴리에게 음마심공의 구결을 외울 시간도 줄 겸. 마침 볼일이 생각난 이든이 걸음이 옮겨 어디론가 향했다.
***
“이리아 씨.”
“어…? 이든 씨!”
호송 업무가 추가되어 일이 늘어난 탓에 눈앞에 서류에서 종일 시선을 떼지 못하던 이리아의 눈이 익숙한 목소리에 처음으로 다른 곳을 향했다.
이리아가 벌떡 일어나 이든에게 다가갔다.
당장에 눈앞에 쌓인 일보다 오랜만에 이든을 만난 반가움이 배로는 더 컸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거진 3주 만이었다. 이든이 활짝 웃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뭐…. 항상 똑같죠.”
오랜만에 보는 이든의 미소에, 그간 쌓였던 피로가 풀리는 듯 이리아가 베시시 웃었다.
벌컥!
그때, 이리아 뒤로 지부장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린다.
“어어! 이게 누구야! 우리 지부 에이스 아니야?”
지부장 게럴드였다.
귀는 어찌나 밝은지 둘의 대화 소릴 듣고는 일도 내팽개치고 냉큼 뛰어나온 것이었다.
“아 예. 잘 지내셨죠?”
어쩜 반응이 이리도 다를까.
이리아에게 인사를 건넬 때와는 확연히 다른 무뚝뚝한 말투.
마치 바위가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게럴드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뭐야. 이리아랑 얘기 나눌 때랑 왜 이리 달라?”
중년의 투정이란 이래서 무섭다.
별것도 아닌 것에 잘도 삐지기 마련이다.
이든이 한숨을 푹 쉬다가 강제로라도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 보고 싶었습니다.”
입은 부르르 떨리며 호선을 그리지만, 눈매는 요지부동에 어투는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그 기괴한 모습에 이리아와 게럴드가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풋. 자자 이럴 게 아니라.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하지. 이리아랑은 이따 얘기해도 늦지 않잖아?”
“그렇게 따지면 지부장님과 얘기 나누는 것도 나중으로 미뤄도 늦지 않은 것 아닙니까.”
이든의 말에 빈정이라도 상한 걸까. 게럴드가 인상을 팍 구겼다.
“자네 정말 그러긴가.”
“하아…. 알겠습니다.”
질투라도 하는 걸까. 이럴 줄 알았다면 기척이라도 줄이고 오는 것이 나을뻔했다.
마지못해 대답하던 이든의 고개가 다시 이리아 쪽으로 돌려졌다.
“그래서 말인데, 이따 퇴근하고 시간 되십니까. 따로 드릴 말씀도 있구요.”
“따로 할 말이요?”
“예. 아무래도 이리아 씨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이든 씨에게 도움 되는 일이면 기꺼이 도와드려야죠. 알겠어요.”
“고맙습니다. 그럼 이따 뵙죠. 전 잠시 게럴드 지부장님 장단 좀 맞춰드리고 오겠습니다.”
“아, 예…!”
이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야 두 팔 걷고 나서도 모자람이 없다 생각하는 그녀였다.
이든이 지부장실로 들어간 사이, 서류로 향해야 할 이리아의 시선이 거울로 향했다.
덩달아 머리와 옷매무새를 만지는 그녀의 손도 바빠졌다.
끼익.
“뭡니까. 중년 아저씨의 그 유치함은.”
“크크. 자자 그러지 말고 어서 앉게.”
게럴드가 뜨듯한 차를 탁자에 내놓았다.
이든이 길드에 들어선 때부터 진즉에 준비해 놓은 것 같았다.
“케인에게 들었네. 수도를 발칵 뒤집어 놨다지?”
이든 앞에 앉자마자 그간 있었던 일을 묻는다.
마치 다 알고서도 묻는 그의 얼굴이 아이마냥 장난스럽게까지 하다.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크크. 길드장님께서 아주 곤욕을 치르고 계시겠군.”
듣던 이든이 혀를 찼다.
“참나. 그 얘기 하시려고 부르신 겁니까.”
“하하하. 이해해주게. 수도와 달리 여긴 지루함의 일상이잖나. 가끔씩 이런 얘기 듣는 낙이라도 있어야지.”
게럴드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영지 밖을 나가고 싶어 호송 업무를 택한 것이 아니겠는가.
차를 한 모금 들이킨 이든이 입을 열었다.
“지부장님께선 어찌 지내셨습니까. 이리아 씨도 그렇고, 사무관분들도 상당히 바쁘실 것 같은데요.”
“아아. 아무래도 호송 업무가 추가되니 할 일이 늘어난 탓이지. 사무관들도 더 추가했는데 부족할 정도야. 그래서 길드원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인원 충원이 필요하겠군요.”
“뭐. 그런 셈이지.”
그러다 문득 이든이 릴리를 떠올렸다.
“그래서 말입니다.”
“응?”
“한 명 소개해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어떠십니까?”
게럴드가 화색했다.
마을에 공지하는 것보다야 확실히 그편이 게럴드 입장에서도 편했다.
“오 그래? 누군가.”
“제 제자입니다.”
제자란 얘기에 차를 마시던 게럴드가 바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제, 제자…?”
“예. 그렇게 됐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그렇게 됐다니.”
“자세히 말씀드리긴 그렇고, 제자 녀석이 저희 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사무 쪽 머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실한 아이니 부려먹는데 괜찮으실 겁니다.”
“뭐. 그러면 나야 편하고 좋지만, 그래도 제자라면서 부려먹느니 마느니 그런 말 해도 되는 건가? 그 친구가 들으면 서운해 하겠구만.”
이든이 어깰 으쓱였다.
“글쎄요. 누구처럼 잘 삐지는 그런 친구는 아닌지라.”
“크, 크흠!”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대던 게럴드가 괜한 헛기침을 해댔다.
“아니 그보다 궁금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군. 대체 뭘 가르치길래?”
“뭐. 제가 가르치는 게 별거겠습니까. 싸우는 법이죠.”
“그럼…. 사무 쪽이 아니라 호송 쪽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아직 그럴만한 실력이 아닙니다.”
“흠…. 그래?”
“그래서 써주실 겁니까. 말 겁니까.”
게럴드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이든이 추천해 준 사람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훗. 당연히 써야지. 궁금하군. 자네 제자는 또 어떤 걸출한 인물일지.”
“그냥 뭐…. 별다를 게 있겠습니까.”
“설마 스승이 자네인데?”
“제가 스승인 게 뭐 어때서 말입니까?”
“하하하.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일세. 자자 계속 붙잡아둘 게 아니지. 이리아한테 가보라고. 나 말고 이리아 만나러 온 거 아닌가?”
후르륵.
어느 정도 식은 차를 이든이 단숨에 넘겼다.
“잘 삐지는 아저씨지만, 그래도 간만에 만나서 좋았습니다.”
“훗. 나 역시 마찬가지일세.”
듣는 사람에 따라선 자칫 건방져 보일 수도 있는 화법.
그럼에도 게럴드의 표정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만큼 서로가 스스럼없는 것이다.
이든도 그걸 알기에 시시껄렁한 농을 주고받을 땐 격 없이 대하는 것이다.
“내 아직 들은 게 없다만 길드장님께서 자넬 아주 좋아하시겠군.”
게럴드의 물음에 이든이 씩 웃었다.
“아무럼요.”
***
이리아의 얼굴이 그의 얘길 듣곤 일순 경악한다.
“제자요!?”
“예.”
그래도 로즈의 반응을 한번 경험했다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 못 알아차리진 않는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평생 눌러사는 것도 아니고. 수련이 끝나고 자릴 잡으면 독립시킬 생각입니다.”
“그러면…. 다행이지만요.”
“모쪼록 이리아 씨가 그 녀석의, 사무 쪽 스승님이 되어주십시오.”
“제, 제가 사무 쪽 스승…?”
“예.”
이든이 가볍게 두 손을 모은 후 이리아에게 포권을 했다.
“못난 제자 잘 부탁드립니다. 이리아 사부.”
장난인 것 같으면서도 진심인 듯한 가벼운 손짓.
그 모습에 이리아가 웃으며 마주 포권했다.
“한번 열심히 가르쳐볼게요.”
***
집으로 돌아온 이든은 자연스럽게 릴리의 방으로 향했다.
멈칫.
아침처럼 릴리의 방문을 벌컥 열려던 이든이 멈칫했다.
그녀가 아침에 했던 말 때문에 신경이 쓰였던 탓이다.
똑똑.
끼익.
문이 열리고, 릴리의 동공이 커졌다.
반가움의 빛이었으나, 이내 그녀의 얼굴이 뚱해졌다.
아침에 있던 일이 아직 덜 풀린 탓이다.
“오셨어요.”
딱딱한 말투에 이든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쩝. 아직 덜 풀린 게냐.”
“조금요. 그래도 아주 깨달은 게 없진 않으신 것 같네요.”
릴리의 투정에 이든이 웃었다.
살다 보니 무공 외에 이런 깨달음도 얻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웃는 것도 잠시 그의 얼굴이 다시 전처럼 돌아왔다.
“외우라는 것은 다 외웠겠지?”
어쩜 표정 변화에 저리 온도 차가 심할까. 바위 같은 무미건조한 스승을 마주하고도 릴리의 얼굴은 꽤 자신만만했다.
“훗. 보고 놀라지나 마시죠.”
“음?”
스승과 제자는 닮는다 했던가.
어째 이든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낸다.
잠시 후, 릴리가 침대 위에 가부좌 자세로 앉고는 물었다.
“아침에 앉았던 대로 앉으면 되죠?”
“그래.”
하나를 가르쳤더니 둘 내지 셋까지 척척 알아서 한다.
이든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가부좌한 릴리가 이든이 일러줬던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우우웅….
이든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구결을 읊는 릴리의 몸에서 미세하게나마 음마신공의 마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미세하긴 하지만, 처음치곤 제법이다.’
구결이 끝나가고, 릴리를 살피던 이든이 입을 열었다.
“느껴졌느냐.”
“네?”
“아침에 내가 느끼게 해줬던 몸 안에 돌던 그 묘한 기분 말이다.”
릴리가 고갤 갸웃했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게 느껴지는지….”
“음.”
안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아침에 릴리의 몸에 일주천 시켰던 것은 이든의 천마심공에서 나온 중후한 마기였다.
애초 음마심공을 터득한 지 하루도 안 된 새내기가 느끼기엔 그 기의 양이 턱없이 적었다.
하지만 이 또한 큰 수확이다.
생각보다 릴리의 머리가 영특한 탓에 구결도 틀리지 않고 잘 외웠고, 미세하다 싶을 아주 적은 양이었지만, 반나절 만에 마기를 일주천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 모든 과정이 이든이 옆에서 도왔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그만하면 훌륭하구나.”
이든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아마 그것은 제자를 향한 스승의 인자한 미소일 것이다.
“우선 잠들기 전까진 계속 그것을 반복하거라. 그러다 보면 분명 미세하게나마 아침에 느낀 것을 잡아낼 것이다.”
“네…!”
배려라곤 쥐똥만큼도 없고, 찬물 끼얹는데 선수에 눈치도 둔하지만, 무공을 가르칠 때만큼은 이든이 아닌, 무진의 모습과 같다.
릴리의 몸에 절로 기합이 들어갔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니 너무 늦게까진 하지 마라.”
“네!”
이든이 발길을 돌리는 그때, 릴리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저 스승님!”
“응?”
릴리의 입이 우물쭈물하다 작게 열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너도 잘 자거라.”
이든이 방문을 닫고 나가다가 다시 발을 돌려 들어왔다.
“릴리.”
“네!”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자기 전에 인사하고.”
“아 예!”
휙.
평소 무신경한 거 같다가도 이럴 때 보면 가족을 엄청 챙기는 것 같기도 하다.
릴리의 눈에 스승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