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다음 날.
이든은 차가운 새벽공기를 한껏 들이키며 집 앞 공터에 나왔다.
정신을 맑게 해주는 것이 기분이 꽤 좋았다.
그렇게 몇 번 숨을 크게 들이키던 이든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오는군.’
그의 기감에 릴리의 기운이 잡혔다. 기척을 잡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릴리에게서 느껴지는 미세한 마기를 느낀 것이다.
고작 하룻밤 새 운공을 열심히도 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든이 손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앉거라.”
이제 앉으라 하면 당연하단 듯이 가부좌 자세를 튼다.
처음 자세를 잡을 때보다는 한껏 편한 얼굴이다.
“오늘도 등 걷기 편한 옷으로 입었어요.”
“오늘은 걷을 필요 없다.”
그냥 잘했다. 한마디면 되는 것을 야박하기 그지없다.
릴리가 잠깐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어제 했던 것 그대로 해보거라.”
“아, 예…!”
릴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음마심공의 구결을 외웠다.
우웅.
‘음.’
이든이 손을 릴리의 등, 옷 위에 살포시 올려놓곤 살짝 휘저었다.
그의 손끝에 뻗어 나오는 천마심공의 마기가 릴리의 일주천을 돕기 시작한다.
음마심공의 마기에 천마심공을 살짝 덧씌운 격이기에 어제완 근본적으로 다른 일주천이었다.
물론 릴리는 아직 그 차이를 느낄 만큼에 수준은 아니었다.
이든이 릴리의 등에서 손을 뗐다.
더 주입하면 음마심공을 운기하는 것이 아니라 천마심공을 운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정도면 릴리의 수준이라도 마기를 느끼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얼마나 흘렀을까.
“헛…!”
문득 릴리가 번쩍하고 눈을 떴다.
겨울의 막바지라지만 아직 새벽이면 어두컴컴했다.
릴리가 눈을 떴을 땐 이미 태양이 빼꼼히 고갤 내민 지 한참 뒤였다.
릴리는 난생처음 무아지경을 경험한 것이다.
“어떠냐.”
“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던 소감 말이다.”
“아…!”
비로소 이든의 말을 이해한 릴리가 곰곰이 떠올렸지만, 이 생소했던 기분을 딱 부러지게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요….”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이든이 웃었다. 전생의 젊은 시절 자신 또한 그랬기 때문이다.
그때, 머뭇거리던 릴리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렇지만…. 뭔가 기분이 좋았어요.”
운공이란 것이 그렇다.
단순히 수련을 넘어서 시간을 잊고 무아지경에 빠져 자신을 관철한다.
자신의 수준을 깨닫고 힘의 원천을 쌓고 쌓는 것.
그것이 정도(正道).
빠른 성취를 보이는 마도의 수련법도 있지만, 그리하면 반드시 부작용을 수반하게 되고. 언젠가는 폭주하는 힘을 다스리지 못해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전생의 자신도 어느 순간부터 정도의 수련법을 따랐고, 역대 천마들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부턴 마도에서 정도로 선회하였다.
그들이 마도의 수련법을 버리고 정도의 길을 택한 이유.
오롯이 자연경. 등선이라는 하나의 목표만 두고 그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편법으로 얻은 힘은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오지만,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거대한 벽에 가로 막힌다.
그리고 그것을 넘겠답시고 힘을 폭주시키다 주화입마에 빠져 광인이 되고 마는 것을 무진은, 그리고 역대 천마들은 수도 없이 보았다.
결국, 수련의 편법은 부질없음을 신교의 역대 지도자들 모두가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든 역시 릴리가 처음부터 차근히 힘을 쌓기를 바랐다.
“그 정도면 되었다.”
이든이 릴리의 머릴 쓰다듬었다.
릴리가 쑥스러운 얼굴로 붉히던 것도 잠시.
이든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자. 심법 수련은 나중에 마저 하고, 이제 본격적인 수련으로 들어가겠다.”
지금까진 전초전이었다.
릴리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더 뭐가 남은 거예요…!?”
“그럼 임마. 강해지는 게 거저 얻는 건 줄 알어? 어서 일어서.”
단호하게 말하던 이든이 몸을 풀었다.
우득. 우득.
소리 한번 섬뜩하다. 릴리도 따라 하겠답시고 몸을 푸는데 별소린 나진 않았다.
“일단 미리 말해두는데, 앞으론 너도 꽤나 고생할 거야.”
“네…!?”
“자. 따라 해봐.”
이든이 다릴 직각으로 굽혀 기마자세를 취했다.
부르르…,
릴리가 따라 하는데, 시작하기 무섭게 다리가 후들거렸다.
릴리가 끙끙거리며 입을 뗐다.
“이, 이거…. 수, 수련하는 거 맞죠? 기합받는 거 같은데…!”
이든이 피식 웃었다.
“원래 기합과 수련은 한 끗 차이란 거 몰라? 본인이 원해서 하면 수련이고, 강제로 마지못해서 한다면 기합이지.”
“마지못해서 하는 건 아닌데, 이건… 누가 봐도 기합 같은데요…!?”
“습. 조용. 말 많이 하면 다리 더 후들거린다.”
마치 의자에 앉은 듯 편해 보이는 이든과 달리 릴리의 몸은 후들거리다 못해 흔들거리기까지 한다.
그때, 릴리의 몸이 뒤로 갸우뚱하더니 엉덩방아를 찧는다.
쿵!!!
“아야!”
릴리의 꽥하는 소리에 이든이 혀를 찼다.
“쯔쯧. 대체 얼마나 체력이 저질이면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넘어지는 거야?”
“이잇!”
이든의 한소리에 릴리가 벌떡 일어나 기마자세를 취했다.
이번엔 좀 더 오래 버텨보겠다고 입 뻥긋 안 하다가 문득 궁금한지 물었다.
“그, 근데 이거 있잖아요. 수련에 이게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당연하지. 힘의 근본은 하체에서 나온다. 하체가 부실하면 뭘 하든 쉽게 무너지지.”
“스승님은 대체 이런 훈련을 얼마나 해오신 거예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구나….”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이든의 모습에 릴리가 그의 허벅지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흠. 튼튼한 하체라…. 그런데 스승님 다리는 길쭉길쭉한 느낌은 있지. 튼튼해 보이지는 않는데….”
“이놈 보게. 직접 본 적도 없으면서, 확인시켜주랴?”
쿵.
이든의 말을 듣던 릴리가 놀라더니 다시 발라당 넘어졌다.
“무, 무슨 말이에요!”
“왜 이리 과민반응이야.”
“바, 방금 만져보라 하셨잖아요.”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내가 언제 만져보라고 했어?”
이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음탕한 놈. 이상한 생각 했냐?”
“으, 음탕!? 지금 제자한테 음탕한 놈이라 한 거예요! 그리고 무슨 이상한 생각이요? 그런 적 없거든요!”
벌떡.
릴리가 시침 뚝 떼고 다시 벌떡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보다시피 엄…청! 열심히…! 하고 있다구요!”
“보긴 뭘 봐. 안 보이는구만.”
“그거…. 웃자고 하는 말이죠?”
“무슨 말인지. 원.”
이든이 기마자세에서 원래 자세로 섰다.
“자, 휴식.”
이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릴리가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별 것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한겨울에 그녀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후하!”
“다시 운공.”
“응? 휴식이라 하시지 않았어요?”
“음마심공을 운공하면 그냥 쉬는 것보다 체력 회복이 훨씬 빠를 거야. 속는 셈 치고 해보거라.”
마음 같아선 두 다리 쭉 뻗고 쉬고 싶은데, 릴리가 마지못해 음마심공을 운기한다.
우우웅.
그 힘들었던 가부좌도, 기마자세를 하고 나니 세상 편하다.
한참을 운공하던 릴리가 놀란 얼굴을 하곤 눈을 떴다.
“음?”
“왜?”
“…뭔가 몸이…날아갈 듯 편해진 듯한 기분이 드는데…. 이게 뭐죠!?”
“그치? 거봐. 내 말 들으면 손해 안 본다니까. 무공에서만큼은.”
이든을 못 믿던 것은 아니었다.
스승이란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든을 향한 릴리의 눈빛은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릴리의 얼굴은 필시 용한 스승을 보는 제자의 모습이었다.
“후우….”
재차 운공을 하던 릴리가 숨을 깊게 들이 내쉬었다.
이든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호오.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숨쉬는 법을 본인 스스로 터득했잖아.’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하는 아이들이 있다.
보통은 무공을 익힌 지 얼마 안 될 때, 구결을 읊는 데 정신이 없어 호읍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릴리는 조금 달랐다.
따로 알려준 것도 아닌데, 스스로 운공에 필요한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지금껏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았던 몸이라곤 하나, 스스로 깨닫는 아이. 그것이 릴리였다.
“기상.”
릴리의 음마심공이 멈췄다. 운공을 마친 릴리가 가뿐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때. 무공이란 것.”
“신기해요. 이런 게 있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어요…!”
참 다행이었다. 생각보다 릴리가 관심을 갖고 제대로 따라와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도록 하자.”
“네…!”
수련은 반복에 연속이다.
지름길은 있지만, 결국 이게 맞는 방도인 것이다.
어느덧 시간이 꽤 흘렀다. 반복되는 수련 속에 릴리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고생했다.”
이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릴리가 이번엔 바닥에 철퍼덕 앉는다.
“이상해요. 처음하고 달리 회복이 늦는 것 같아요.”
“당연하지. 이제 막 운공의 걸음마를 뗀 녀석이.”
“그런가….”
“실망할 것 없다. 생각보다 성과가 상당하구나.”
“정말요?”
조금만 칭찬해도 금방 헤벌쭉해진다.
릴리는 감정변화가 상당한 아이였다. 이런 아이들이 스승의 지도에 따라서 성장의 폭이 다르기 마련이다. 때문에 흥미를 잃지 않도록 이든이 잘 이끌어주어야만 했다.
‘이런 것이군. 스승의 마음이라는 것이….’
자신의 수련일 때는 앞만 보고 달리면 그만이었지만, 제자를 이끄는 것은 그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누군가를 이끌 땐 앞만 보고 가다간 뒤따라가는 이가 지쳐서 넘어지기 마련이다.
애초에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지만,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이든이 옆에서 붙잡아줘야 했다.
이든이 릴리의 등을 토닥 두들겼다.
“새벽부터 수련하느라 고생 많았다.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자.”
“네!”
게눈 감추듯 식사를 마치고, 잠시 숨을 돌리던 이든이 찻잔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탁.
릴리의 눈이 자연스레 이든을 향했다.
“자 가자.”
“수련이요?”
이젠 당연하다는 듯이 수련을 먼저 입 밖으로 꺼낸다. 그러나 이든은 고갤 저었다.
“아니.”
“그럼요?”
“제자의 제대로 된 첫 직장.”
“제 직장이요…?”
이든이 먼저 자릴 털고 나서고, 릴리가 졸레 따라갔다.
한참 걷던 중 익숙한 길에 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긴 처음 집에 왔던 길 아녀요? 분명….”
“그래. 유니콘 길드로 가는 중이다.”
“유니콘 길드요…!?”
릴리가 화들짝 놀랐다.
“뭐 그리 놀래?”
“저, 전 싸움 못 하는데요…!?”
“누가 너 호송시킨대?”
“그럼요?”
“길드엔 현장일 외에도, 사무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도 있어. 너에게 소개시켜주는 게 그 일이지."
현장 일 보다야 훨씬 덜 부담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급 말이 없어진 릴리의 등을 이득이 툭 쳤다.
“쫄았냐?”
“쪼, 쫄긴 누가 쫄아요!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훗. 그 기백으로 열심히 해봐라.”
***
게럴드의 눈에 비친 릴리의 모습은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자네가 릴리구만.”
"네…!"
수련의 영향일까. 목소리에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다.
그 모습에 게럴드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목소리가 시원시원한 게 마음에 드는군. 난 이곳에 지부장 게럴드일세. 잘 부탁하네. 릴리양."
“네!”
씩씩하게 외쳐대던 릴리의 눈이 또르르 이리아를 향했다.
허공에서 부딪친 두 여인의 시선, 이리아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게럴드가 그녀를 소개했다.
“여기 있는 이 아가씨로 말하자면, 앞으로 릴리양의 직속 상관이 될 분이지.”
“반가워요. 릴리 씨.”
이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릴리를 반갑게 맞아준다.
게럴드가 옆에서 쓰잘데기 없는 소릴 더 꺼내기 전까지는.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든을 좋아하고 있다네. 후후후….”
“지부장님!!!”
이리아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릴리는 깜짝 놀라더니 이리아와 이든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든이 인상을 구겼다.
“거 이리아 씨 좀 그만 괴롭히십시오.”
이든의 질책에 게럴드가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었다.
“크하하! 자네가 있으니 내 또 이런 재미 좀 보는구먼. 자네 호송 그만두고 다시 배송 쪽으로 올 생각 없나? 자네가 없으니 영 심심해서 말이야.”
“그게 지부장님께서 할 소립니까. 길드장님께서 들으시면 참으로 좋아하겠습니다.”
실없는 농을 주고받는 사이, 게럴드의 시선이 릴리를 향해 옮겨졌다.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이참에 오늘부터 일을 배워보겠나?"
“아,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게럴드의 시선이 다시 이리아에게 옮겨졌다.
“마침 비서실 업무도 바빴는데 잘 됐군. 이렇게 된 것 교육 좀 잘 해보게. 이리아.”
“네. 알겠습니다.”
그때, 게럴드가 의미 없이 소곤거리며 다 들리도록 말을 꺼냈다.
“혹시 아나. 릴리양에게 잘 보이면 이든과 잘 될지 말이야. 후후후….”
“지부장님!”
이리아가 재차 꽥하니 소릴 질렀다.
“아이쿠! 이거 더 놀리면 지부장이라도 한 대 때릴 기세구만. 자, 이제 이리아와 릴리양은 바빠질 테고, 이든 자네는 여기까지 온 김에 내 말 상대나 해주고 가지 그래?"
“하아…. 그럼 차나 한잔 부탁드립니다.”
“훗. 동의했다고 생각하겠네. 자 어서 들어오게.”
게럴드가 이든과 함께 지부장실에 들어가고, 이리아는 앞으로 릴리가 쓸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이든과의 대화에서 릴리에 대해 대략적인 얘기를 들었기에, 이리아는 첫 사무 일을 배우는 그녀가 익히기 쉬운 것부터 차근히 가르쳤다.
쌓여 있는 서류들과 교육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