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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40/250)

40화.

날이 저물고 릴리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든은 그간 소홀했던 본인의 수련에 매진할 겸. 집 앞 공터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냐.”

“어? 기다리고 계셨어요?”

이든이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막 일 끝내고 온 사람한테 하기엔 미안한 말이다만 바로 저녁 훈련으로 들어간다.”

“저녁 훈련이요…!?”

지금 막 정신없이 일을 끝내고 왔는데, 바로 저녁 훈련으로 들어간다는 말에 릴리가 식겁한 얼굴로 입을 뗐다.

듣던 이든이 피식 웃었다.

“겁먹은 게냐?”

“거, 겁은요. 무슨!”

“걱정 말거라. 아침만큼 힘든 수련은 아닐 테니. 자, 저녁 먹으러 가야 하니까 어서 이 앞에 서도록 해.”

릴리가 이든이 가리킨 곳에 섰다. 그때, 릴리의 시선이 땅바닥을 향했다.

“이건…. 발자국 아니에요?”

릴리가 선 자리 앞엔 이든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 지금부터 너에게 보법을 가르치려 한다.”

“보법…?”

“보법은 모든 무공에 근간이 되지. 즉, 이것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앞으로 배우게 될 다른 모든 것에도 영향을 끼치겠지.”

그만큼 심법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보법이다.

이든이 손가락으로 발자국들을 가리켰다.

“눈앞에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밟아 보거라.”

이든이 새긴 보법 앞에선 릴리의 다리가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 몰라한다.

“어, 어떻게 밟으면 되는 거죠?”

“앞에부터 차례대로.”

이든의 말대로 릴리는 발자국을 차례로 밟기 시작했다.

그때, 발자국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던 릴리의 몸이 기우뚱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바닥에 나뒹군다.

“아얏…!”

“생각보다 몸이 둔하구나.”

“그렇지만 너무 어려운걸요…!”

“음마심공의 구결 외우면서 하나씩 차근히 밟아 봐.”

“음마심공의 구결을요…?”

보법 하나에만 집중해도 힘든 판에 음마심공 구결까지 외우라니, 릴리가 놀랄 만하다.

“속는 셈치고 해봐.”

다른 사람도 아닌 이든이 하는 말이니 흘려들을 수도 없다.

릴리가 몸을 털고 일어나 다시 발자국 앞에 서서 음마심공의 구결을 외웠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하나씩 발자국을 밟기 시작한다.

휙. 휘익. 휙!

릴리의 몸에 마치 날개를 단 것처럼 유유자적 움직인다.

보법 밟던 릴리가 순간 덜컥 멈춰 섰다. 그녀의 얼굴이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방금… 뭐한 거죠…? 제, 제 몸이 아닌 것 같아요…!”

이든이 릴리 옆에 서서 남은 보법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밟는다.

발자국을 따라 움직이는 이든의 몸짓이 마치 물 흐르듯, 춤을 추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어느새 보법 끝에 서 있다.

“…!”

“이게 보법이다.”

보법이란 것이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아름다운 춤처럼 보이지만,

여기에 살수가 더해지면 전장을 휘젓는 돌파력을 갖게 된다.

“자. 다시 앞에 서거라. 이번엔 집중해서 끝까지 해보는 거야.”

“아, 예…!”

릴리가 다시 발자국 앞에 섰다.

앞에선 릴리의 표정엔 왠지 비장함이 깃들어 있었다.

릴리가 천천히 첫발을 내딛고,

사뿐.

그리고 이어 남은 반대편 발을 내디디며 음마심공의 구결을 외우는 순간,

이든 만큼은 능숙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 못지않게 부드러운 몸짓으로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무희 같았다.

휘익. 턱.

발자국 끝에 선 릴리가 고갤 돌려 자신이 남긴 흔적들을 바라봤다. 조금씩 엇나간 발자국들, 아직은 훨씬 더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네가 남긴 발자국이 어떻지?”

“하나같이 여기저기 삐져 나왔어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결과를 보니 그것이 아니었단 생각에 릴리가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잘했다.”

미세했지만, 릴리의 마기가 보법에 반응을 보이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해볼까요?”

“아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네…!? 하지만 엉망인걸요.”

릴리의 욕심은 누구보다 이든이 잘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젊은 시절 그녀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새겨진 발자국과 자신이 밟았던 보법을 일치시키겠다고 수백, 수천 번을 반복했다.

꾸준함이 방도라지만, 방법이 틀렸다면 무용지물임을 이든은 이미 진작에 경험해서 알고 있었다.

“보법은 여러 번 한다고 해서 익혀지는 것이 아니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지.”

“그게 뭔데요?”

“아침에 했던 훈련 기억하느냐?”

“아…!”

비로소 이해한 듯 릴리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래. 하체 힘이다. 보법의 정확성과 힘은 하체에서 나온다.”

“하체 힘…”

릴리는 그제야 이든이 그토록 하체훈련에 공을 들였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럼. 아침의 했던 훈련은 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단 내일 출근해야 하니 무리는 하지 말고.”

“네…!”

“일단 밥부터 먹고 할까. 출출하구나.”

“헤헤… 그럴까요. 그럼?”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릴리는 곧바로 방안에 틀어박혀 하체단련에 돌입했다.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밤늦게까지 낑낑거리며 하체단련과 운공을 반복한다.

벽 하나 건너 옆 방에 있던 이든이 미소를 지었다.

‘녀석… 참으로 열심이군. 보법을 밟을 때 그리도 좋았나.’

이든의 기감에 잡힌 릴리는 처음 음마심공을 가르쳤을 때보다 그릇에 크기가 미세하게나마 커진 듯했다. 아직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지만 성장의 속도는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다.

보통의 무인들은 감히 꿈꿀 수 없는 성장 속도.

이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법과 보법은 가르쳤고, 이제 검법만 남았나.’

이든은 릴리에게 어떤 검법을 가르쳐야 할지 고민을 거듭했다.

욕심 같아선 자신의 검 초식을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음마심공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던 이든이 미세하게나마 고갤 끄덕였다.

‘역시 옥설화. 그녀의 검술을 가르쳐야겠지?’

무공의 노(老),소(小)가 이겠냐마는 남(男),녀(女)의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물론 남자가 여자의 무공을, 여자가 남자의 무공을 익히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끝을 보았을 때 따라오는 성취는 분명히 달랐다.

무공의 근간은 인(人)이다.

세상의 수많은 인간상이 있듯,

무림에 범람하는 무공의 존재 이유는 사람의 체질에 있다.

각자에게 맞는 무공이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음기가 강하며, 대체로 근골이 가녀린 릴리는 옥설화의 검술이 잘 부합됐다.

옥설화, 그녀 또한 음마심공을 익혔던 장로 중 한 사람이었다.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여제가 아닌, 검제란 칭호를 얻은 고수로 전장 한가운데서 그녀의 춤사위가 펼쳐지면 그 일대는 적들의 피바다가 되었다.

검(劍)에서 만큼은 무림 제일이라 불러도 손색없던 옥설화의 비기 ‘위화마검’蘤蘤魔劍)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릴리가 이것을 제어할 수 있을까.’

옥설화, 그녀는 외견과 달리 잔혹한 손속으로 유명했다.

그녀의 미모만큼이나, 검술 또한 만개하는 꽃을 연상하듯 화려한 검무를 보여줬는데,

아름다운 춤사위 속에 숨겨진 초식은 상대의 숨통을 노리는 잔혹한 살초로 가득했다.

장미에 숨겨진 날카로운 가시처럼, 옥설화 또한 가시를 숨기며 살아갔다.

‘명색이 첫 제자인데, 일개 하급 마인들의 검술을 가르치는 데에 만족할 수는 없지. 후에 생길 일은 그 후에 걱정한다.’

이든이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오래전 기억을 되짚으며, 옥설화의 검술을 떠올렸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사람은 잊혀져도 고강한 무공은 잊지 못하는 법이다.

릴리의 하체단련이 모두 끝나고, 그녀가 잠들 때까지 이든은 줄곧 가부좌를 유지하며 옥설화의 검술을 복기했다.

초식의 구결은 알고 있었다.

휘하의 무공 비급서 열람은 오직 교주만의 특권이었으니까.

허나, 구결만 알고 있는 것으론 부족했다.

수십 년간 갈고 닦은 고수의 움직임은 정형화시킨 구결을 상회하기 마련이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찾아올 무렵, 복기를 끝낸 이든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걸렸다.

‘됐다…!’

이든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빛이 돌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위화마검의 초식과 옥설화의 초식을 일치시킨 것이다.

이든이 침대에서 일어나 집 앞 공터로 나왔다.

옥설화의 위화마검 초식을 구현하느라 잠 한숨 못 잤건만, 이든의 얼굴은 피곤한 기색 하나 없었다.

잠시 후. 릴리도 늦지 않게 공터로 나왔다.

사박. 사박.

‘호오.’

릴리의 걸음 소릴 듣던 이든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가볍다.’

무공을 익힌 자와 범부는 걸음에서부터 그 차이가 드러난다.

릴리의 걸음 소리가 달라진 것이다.

아직 극미한 차이였지만, 이든의 예민한 기감엔 그 변화가 분명히 잡히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잘 가르친다지만, 이건 성장이 빨라도 너무도 빠른데?’

릴리 본인이 가진 음기와 음마심공의 궁합. 그리고 일주천을 도왔던 이든의 천마심공이 더해져 빠르게 그릇을 키우니, 성장 속도가 어마무시하게 빨랐다.

어느새 릴리가 근처까지 다가오고, 이든의 고개가 그쪽으로 향했다.

“어제 열심히 단련하던 것 같던데, 근육통은 없느냐.”

“예! 말짱해요!”

“그럼 한번 다시 해보겠느냐?.”

이든이 턱 짓으로 바닥에 발자국을 가리켰다. 앞에 선 릴리의 표정이 사뭇 남달랐다.

“후…”

릴리에게서 숨을 깊게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든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무턱대고 달려들 땐 아무 생각도 없다가 만전을 기하는 순간에 긴장이 밀려오기 마련이다.

그것은 곧 준비를 철저히 했다는 얘기.

뜸을 들이던 릴리의 첫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히얍!”

어제는 보법의 첫발을 사뿐히 밟았다면 이번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

휘이익!

이든 만큼 눈 깜짝할 새는 아니지만, 분명히 아주 빠른 움직임으로 보법 끝에 서 있었다.

보법을 마친 릴리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어제만큼 엉망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든이 궁금한 듯 물었다.

“어떠냐.”

“역시… 아직은 삐져나온 곳이 많아요.”

“그래도 잘한 거다.”

“정말요?”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수천, 수만 번을 밟아봤기에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완벽히 해낸다면 그게 이상한 거다.”

릴리가 쑥스러워하며 머릴 긁적였다.

“그럼 바로 하체단련 시작할까요!?”

“아니 오늘은 다른 것을 알려줄 생각이다.”

이든이 목검 하나를 릴리에게 건넸다.

“목검이네요?”

“어렸을 적 내가 쓰던 것이지.”

“헤에…”

“이번에 보여줄 것은 검법이다. 지금부터 시범과 함께 구결을 외울 테니 읊으며 따라해 보거라.”

“네!”

이든의 흑색 검을 검집째 쥐어 들었다.

릴리의 눈이 이든의 고정되며 그의 동작을 주시했다.

스륵.

옆에 선 이든이 위화마검의 초식을 한 단계씩 펼쳤다.

그리고 릴리가 이든이 하던 것을 그대로 따라 한다.

각 단계마다 구결과 자세를 점검.

자세를 고정하던 릴리가 기마자세 때 만큼이나 끙끙대며 입을 뗐다.

“한 자세를 계속 유지한다는 게… 엄청… 힘들어요!”

한 동작, 한 동작 끊어가며 구결을 가르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기마자세 훈련과 비슷한 모양새가 됐지만, 이든이 딱 잘라 말했다.

“모든 동작을 정확히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 검술이 펼쳐지는 것이다.”

내공을 키우는 데는 영약이란 편법이 존재하지만, 초식의 정교함엔 타협 같은 것은 없다.

이든의 단호한 말에 릴리의 투정이 다시 쏙 들어갔다.

시범을 보이던 이든이 릴리의 엉성한 자세를 교정하기 위해 그녀의 몸을 짚었다.

한 손은 허리에 반대편 손은 허벅지를 더듬으며 자세를 고치는데, 이상하게 부르르 떨리는 몸.

어째 릴리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이내 배를 까뒤집는 것이 아닌가.

“꺄하하하!”

“뭐, 뭐야. 갑자기.”

이든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왜 자꾸 더듬어요! 간지럽잖아요!!”

“더듬긴 누가 더듬었다는 거야. 자세 교정해 주고 있구만.”

“그치만 간지럽단 말이에요!”

“그럼 참아야지. 훈련 중에 간지럽다고 누가 이렇게 발라당 넘어져.”

“치…”

릴리가 다시 목검을 쥐곤 자세를 잡았다.

볼 수 없기 때문에 자세가 정확한지 알려면 만져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간지럼을 참으며 초식의 마지막 자세를 끝낼 때쯤 릴리가 깊은숨을 내뱉었다.

“후!”

“뭐가 이리도 유난인지.”

“전 간지럼에 약하단 말이에요!”

“아무튼, 지금 알려준 것은 검술의 극히 일부다. 우선 이 동작과 알려준 구결만이라도 완벽히 숙달하자. 앞으로 상시로 내가 준 목검 들고 다니고 틈날 때마다 연습하도록.”

“틈날 때마다요?”

“그래. 새벽에도, 쉬는 시간에도, 바람 쐴 때나 잠자기 전에도 그냥 늘 들고 다녀. 그래야 하게 된다. 비단 검술뿐만 아니라 보법과 하체단련도 말이다.”

“네…! 근데 오늘 뭔가 가르쳐주시는 게 서두르시는 느낌이 들어요.”

릴리의 물음에 이든이 피식 웃었다.

“서두르는 게 당연하지. 이제 곧 수도로 떠나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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