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사무관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캐, 캐슬롯 후작입니다…!!!”
직접 서류를 작성했으니 모를 리 없었다.
“캐슬롯 후작?”
“예. 제, 제가 서류를 작성했고,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냥 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두 눈으로 봤다며 확신까지 시켜 주는 모습에 이든이 만족스런 얼굴을 했다.
“후작 작위면 영주 아니야?”
“마, 맞습니다…!”
“그 영주, 지금 수도에 있냐?”
“예, 예…! 얼마 전 있었던 테이머 길드 사건으로 모든 영주들이 화, 황궁에 소집되었다고 합니다.”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을 시 어찌 되는지 본보기를 확실히 보여주니, 술술 잘 불어댄다.
“그렇단 말이지…”
이든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최종적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이 궁 안에 있다면, 계획이 틀어진다. 황궁에 가본 적도 없거니와 설령 간다고 하더라도 일면식 없는 상대이니 찾을 방도조차 없는 것이다.
‘젠장. 하필이면 황궁 안에 있다니…’
캐슬롯의 처리 방법을 강구하던 이든이 무언가 떠오른 것인지 다시 사무관을 불렀다.
“너.”
“예, 예!”
“임무를 완수하면 의뢰인에게 소식은 어떤 식으로 전달하지?”
“저, 저희 쪽 사, 사람을 보냅니다.”
“그렇단 말이지.”
이든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군….’
이미 한번 실패했던 의뢰였다.
의뢰를 한 캐슬롯 후작이란 자 역시 소식을 듣자마자 확인차 이곳으로 달려올 가능성이 컸다.
“캐슬롯 후작인지 뭔지 하는 그 새끼한테 당장 사람 보내. 레스타드 길드장을 처리했으니, 당장 와서 확인해 보라고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이든의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무관이 호다닥 움직여 길드 내부에 있던 줄 하나를 잡아당겼다.
당겨진 줄은, 어디론가 연결되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잠시 후.
똑똑.
문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든이 이번엔 검집이 아닌, 검의 날을 사무관의 등 뒤로 가져다 대곤 조용히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했다간, 그 후에 일은 어찌 될지 네놈 상상에 맡기겠다.”
“네, 네…!”
사무관이 떨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부여잡고,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문을 살짝만 열어젖혔다.
“캐, 캐슬롯 후작에게 전하게. 레스타드 길드장을 처리했으니 와서 확인해 보시라고.”
“알겠습니다.”
하달은 간단히 이루어졌다.
사무관이 문을 다시 닫고는 이든이 등 뒤에 겨눈 검을 치우기를 기다렸다.
“저, 전달했습니다.”
“그래. 괜히 사무관이 아니지, 상황판단이 빠르군.”
“하하… 가, 감사합니다.”
그때, 이든이 고갤 돌려 한쪽에 처박아두었던 길드장을 향했다.
아혈을 찔러 말도 못 한 채 눈만 껌뻑이던 길드장의 얼굴이 점차 흑빛으로 물들었다.
이든의 입가 양쪽이 씩 올라가며 더없이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사무관.”
이든이 호명하자, 사무관이 기합이 바짝 든 채 대답했다.
“예!”
“나 좀 도와줘야겠다. 방금 좋은 생각이 났거든.”
“예…?”
***
새벽 늦도록 캐슬롯 후작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듀란드 공작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고 생각했는데, 칼스테인 백작이 테이머 길드와 관련된 자들의 명단 공개를 요구하며, 확실한 처벌을 원했기 때문이다.
레스타드 길드장이 제출했던 명단은 모두 듀란드 공작의 지시로 폐기되었지만, 혹여 황제의 의중이 변하는 날엔 레스타드 길드장을 불러내 혹시 따로 있을지도 모를 사본이 공개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명성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둘째치고, 자칫 목마저 날아갈 판이었다.
벌떡.
캐슬롯 후작이 침대에서 박차고 일어나 제자리를 맴돌았다.
‘대체… 이 새끼들은 의뢰한 지가 언젠데 여태 소식이 없는 거야.’
칼스테인 백작은 듀란드 공작과 함께 황제가 총애하는 사람 중 하나다.
현 제국 제일의 검사, 그리고 그의 아들 칼라슈 또한 기사 학교 학생으로 당시에 아버지 못지않은 기량을 보여주는 천재가 아니던가.
만약 그가 고집하여 명단에 포함된 모든 사람의 완벽한 처벌을 바란다면 제아무리 듀란드 공작이라도 칼스테인 백작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생각이 다시 바뀔 듯한데, 날이 밝기 전에 어서 레스타드 그놈을 처리해야 하는데 말이야…’
그의 불안감이 점차 커질 무렵.
똑똑.
그가 있던 별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에, 그것도 황실에서 웬만한 일이 아니고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그의 눈에 이채가 띄며 한걸음에 문 쪽으로 걸어갔다.
벌컥.
문이 열리자, 시녀 한 명이 밖에 서 있었다.
처음 보는 낮선 얼굴에 여자였다.
“캐슬롯 후작님 맞으시지요.”
보통 용무부터 꺼내는 것이 먼저인데, 자신이 맡는지 확인부터 한다. 내내 불안에 떨던 캐슬롯 후작의 얼굴이 간만에 밝아졌다.
“그래. 내가 맞다.”
“팬텀입니다. 의뢰를 완수했다는 소식입니다.”
“역시 그랬군.”
“확인 후, 남은 금액을 정산하고자 하십니다. 채비하시겠습니까.”
“좋다. 내 바로 준비하도록 하지.”
가장 중요한 절차가 남은 것이다. 평소 같았음 확인 따위 하지 않았겠지만, 일전에 실패했던 경험이 있어 캐슬롯 후작은 자신의 검을 챙기곤, 바로 길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가지.”
“따라오시죠.”
시녀가 앞장서고, 캐슬롯 후작이 그 뒤를 따랐다.
시녀를 따라가던 캐슬롯 후작은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비밀통로로 황궁 밖을 나왔기 때문이다.
‘놀랍군. 황궁의 이런 길이 있었군.’
앞서가던 시녀가 로브를 깊게 눌러썼다. 캐슬롯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새벽이라지만, 이곳은 수도였다. 다른 사람 눈에 띄어서 좋을 것 하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녀를 따라 한참을 걷자, 수도 외곽에 달했다. 으스스한 골목 입구에 시녀가 멈춰 섰다.
“다 왔습니다. 그럼….”
그녀의 동행은 여기까지였다.
가볍게 고갤 숙인 후, 그녀는 왔던 길로 급히 되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던 캐슬롯 후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팬텀 길드에서 보낸 첩보원이었나. 황궁을 무슨 개집 드나들듯이 하는군….’
예전 같았으면 문제 삼았겠지만, 한배를 탄 이상 넘겨둘 수밖에 없다. 골목에 들어선 캐슬롯 후작이 눌러쓰던 로브를 벗고는 허름한 길드 안으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사무관이 계셨군. 길드장님께선 어디 가셨소?”
“아 길드장님께선 잠시 안쪽에…. 곧 오실 겁니다.”
사무관의 행동이 평소와 달리 불안에 떠는 듯 어색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런 건 안중에 없는 듯, 다가오는 기척에 캐슬롯이 시선을 돌렸다.
“오셨습니까.”
안쪽 방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로브를 깊게 눌러쓴 사내가 나왔다.
길드 안에서 로브라니, 캐슬롯이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러려니 생각했다.
목소리는 누가 봐도 길드장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남은 금액을 정산하러 왔소.”
“아하하. 그렇군요.”
캐슬롯 후작이 안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려다 행동을 멈췄다.
손을 비비며 남은 정산금을 받으려던 길드장의 행동도 덜컥 멈췄다.
“단. 확인부터 먼저 해야겠소.”
일전에 실패한 이력이 있었기에 나중에 딴말하지 않도록 확실히 해두기 위함이었다.
길드장도 이해하는 듯 고갤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안쪽에 놈의 시신을 가져다 놨습니다. 들어오시지요.”
길드장의 안내에 캐슬롯 후작이 곧바로 따라나섰다.
길드장 나왔던 방 옆에 굳게 닫힌 철문. 그곳을 열자 소각장이 나왔다.
완벽한 시신 처리 방식이었다.
그리고 소각기 앞. 기다란 테이블엔 사람 몸뚱이로 보이는 것이 천으로 덮어 눕혀있었다.
“여기까지 들고 오느라 고생 좀 했겠군.”
“성당 기사단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요. 자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캐슬롯 후작이 덮인 천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죽은 사람을 확인한다는 게 께름칙하긴 했지만, 불투명한 자신의 미래가 걸린 일이었기에 캐슬롯은 망설임 없이 천을 걷어냈다.
휙.
덮였던 천이 걷히고, 캐슬롯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천 안쪽엔 당연히 있을 것이라 생각한 레스타드 대신에 너무도 익숙한 얼굴에 사내가 공포에 찬 얼굴을 하며 누워있었다.
“읍, 으읍…!”
“이, 이 무슨…!”
온몸이 굳은 채 움직이지도, 말도 못 하는 팬텀의 길드장이 바르르 떨며 아등바등하며 뉘어있는 것이 아닌가.
캐슬롯이 위험을 직감하곤 본능적으로 검을 빼내 들었다.
그리고 고갤 휙 돌려 길드장이라 생각했던 로브의 사내로 시선을 옮겼다.
“네놈. 대체 누구냐…!”
캐슬롯의 물음에 길드장의 목소리가 아닌,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이놈의 숨이 붙어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칠 인의 기사도 별 것 아닌가 보군.”
사내가 로브를 벗어던졌다.
흑남색의 기다란 장발.
눈을 감고 있는 수려한 외모의 청년. 이든이 모습을 드러냈다.
캐슬롯에 눈이 불현듯 크게 떠졌다.
“네놈은?”
“날 아는가.”
“네놈은 분명… 경매장에 있던 그 맹인 놈이 아니더냐….!”
캐슬롯 후작은 이든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일전 테이머 길드에서 엘프를 낙찰받았다고 생각한 순간에 이든이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불러 가로챈 것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있었다.
비로소 전말을 파악한 캐슬롯이 비릿하게 웃었다.
“네놈이었구나. 레스타드 길드장과 손잡고, 테이머 길드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회원 명단을 가로채고, 국경수비대와 황궁을 발칵 뒤집어 놓은 놈. 네놈이 그 이든이란 놈이렸다?”
“상황파악 한번 빠르군. 역시 영주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봐?”
“글쎄. 그에 반해 네놈은 상황파악을 전혀 못 하는 것 같군. 맹인 놈이 겁도 없이. 나를 함정에 끌어들이다니. 네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그때, 캐슬롯이 쥔 검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일순 타오르듯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제법 대단했다.
“호오. 과연… 부패한 후작이라 해도 그만한 실력은 있다. 그건가?”
스릉.
이든 역시 허리춤에 있던 흑색 검집에서 검을 빼내 들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드레이븐이었나. 그자 이후로 그럴듯한 상대를 보지 못했는데, 자넨 어떤가?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겠나.”
“드레이븐 남작…? 아아, 심안의 무사가 네놈이었군. 무도 대회에서 드레이븐 가문을 파멸시켰다는 그 맹인 무사가… 헌데, 비교가 잘못됐군. 감히 드레이븐 따위를 나와 비교하느냐?!”
일갈한 캐슬롯 후작이 일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푸른 검기를 머금던 그의 검이 이든이 서 있던 곳을 향해 휘둘러지고.
이든의 신형 역시 감쪽같이 사라졌다.
콰앙!
이든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자리. 캐슬롯이 검을 휘둘렀던 그곳에 날카롭게 베인듯한 모양으로 땅이 움푹 패였다.
무형의 검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이를 이용해 먼발치에서 쏠 수 있다는 검기 상인의 경지였다.
애꿎은 땅만 음푹 패인 모습에 캐슬롯이 바득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눈도 안 보이는 새끼가 잘도 피해대는구나!”
사라진 이든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연신 주변을 훑던 캐슬롯이 재차 검을 휘둘렀다.
콰과과광!
그의 검에 맺힌 푸른 기운이 사방에 쏘아지며 소각실을 엉망으로 만들어댔지만, 일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이든에겐 도무지 닿지 않았다.
그때, 캐슬롯이 쏘아대던 검기를 연달아 피하던 이든이 입을 뗐다.
“자. 이번엔 내 것도 막아보겠느냐.”
콰르릉!!!!!
이든이 일순 땅을 '쾅' 하고 밟았다.
지면이 흔들림과 동시에 이든의 신형이 번개와 같이 쏘아지며 흑색 검이 캐슬롯을 향해 달려들었다.
채애앵!
본능적으로 이든의 검을 막은 캐슬롯의 몸이 뒤로 주륵 밀렸다.
‘무슨 힘이…!’
캐슬롯이 당혹스런 얼굴을 했다.
이든의 신장이 무척 큰 편이긴 했지만, 자신의 비하면 체격 자체는 늘씬한 편이었다.
절대 힘에서 밀릴 수가 없는 상황이건만. 단 일수에 맥아리 없이 밀리는 것이 아닌가?
검을 휘둘러 단번에 캐슬롯을 몰아붙이던 이든이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뗐다.
“나약하군.”
“뭐…?”
“아무것도 깃들지 않은 날것의 힘이었다. 그간 너무 안일하게 지낸 것 아닌가. 캐슬롯.”
“이이… 건방진!”
이든의 말에 자극을 받았던 것일까. 캐슬롯의 검에 핀 푸른 기운이 더 짙게 타올랐다.
“오냐. 그리 죽길 원한다면 단칼에 모두 베어주마.”
옆에 요지부동 뉘어있던 팬텀 길드장이 식겁한 얼굴을 했다.
저대로라면 자칫 자신까지 휩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휘이익!
콰아아아아앙!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검기가 소각실을 사방을 휘감으며 휩쓸었다.
그리고 그 위력을 증명하듯 소각실 사방이 움푹 패며, 먼지로 가득 찼다.
검술보단 난도질에 가까웠던 그의 움직임이 멈추고 캐슬롯이 거친 숨을 연신 몰아쉬었다.
“하아하아…처리했나…?”
뿌연 먼지로 가득 찬 소갈실에 먼지가 점차 걷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검기로 난도질당한 팬텀 길드장의 모습이었지만, 그자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시건방진 장님의 주검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에 반하기라도 하듯 익숙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쯔쯧. 정말 형편없군.”
걷힌 먼지 사이로 이든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