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막바지의 겨울도 이제 물러간 것같다. 살을 에던 추위는 떠나고, 봄기운이 피부로 와닿았다.
그리고 이든의 입가에도 그 따듯한 봄기운만큼이나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더 없이 만족스럽다는 얼굴.
그간 아무 생각 없이 쉬면서 내상을 완전히 회복한 덕분에 자연히 지어지는 웃음이었다.
“시간이 널널한 게 이럴 땐 또 다행이야.”
가부좌를 틀던 이든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그의 고개가 수도 국경 쪽을 향해 돌려졌다.
“슬슬 도착했나 보군.”
그가 말하는 것.
다름 아닌 유니콘 길드가 호송하는 수레를 가리킨 것이었다.
이미 진즉에 국경 밖에서 들어올 때부터 익숙한 동료들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산책도 할 겸. 미리 마중 나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든이 산뜻한 걸음으로 운기하던 장소에서 벗어나 길드원이 있을 곳을 향해 한참 걷던 무렵.
그의 걸음이 덜컥 멈추었다.
대로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무인들의 기척.
그 가운데에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든 형!”
반가운 목소리.
다름 아닌 발리스타였다. 그가 저 멀리서 이든이 있던 쪽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학교에 있어야 할 양반이 여긴 어쩐 일이오?”
마음은 반가운데 나가는 말은 어째 곱질 못하다.
허나, 이든 앞에 착한 친구는 그의 말투에 별달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에헤이! 이든 형 거 소식이 느려도 한참 늦는 것 아니오?”
“음?”
“우리 지금 토벌 나가는 중이오.”
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토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오?”
“레온하르트 영지 말이오. 그쪽이 지금 꽤 곤욕을 치르고 있는 모양이요. 원래부터 치안이 좋지 않던 곳이긴 했는데, 근래 들어 국경 밖에 몬스터들이 문제를 하도 일으킨다고 하더이다. 얼마 전엔 그쪽으로 보내던 군수물자도 전부 약탈당하고… 해서 올해 기사 학교 삼학년들을 실습을 핑계로 토벌 보낸다는 결론이 났소. 지금 우린 그쪽으로 가는 중이었고.”
“그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면 학생들이 아닌 황실 병력을 동원해야 함이 맞지 않소?”
“그렇긴 한데, 무슨 일인지 황실 병력이 움직이진 않는다고 하더이다.”
발리스타가 머릴 긁적였다.
“뭐,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소. 실전도 쌓고 좋은 일도 하고 일석이조인 것 같소.”
“…”
“적어도 난 말이오.”
“내부 여론은 썩 좋지 않은가 보군.”
“그럴 수밖에… 왜냐하면 토벌에 나가는 대부분이 평민들이오. 귀족 출신 학생들은 이미 학교 측에서 손을 써서 다른 곳에 실습을 보낸 상태요.”
“하…”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질 않는다.
헛웃음을 내뱉던 이든이 문득 고갤 갸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저쪽엔 칼라슈가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맹인 같지도 않은 이든의 물음에 눈이 보이질 않는다는 걸 그새 잊은 건지 발리스타가 엄지로 뒤쪽을 가리켰다.
“그렇지 않아도 인기 만점이요. 안 가도 되는 것을 굳이 친구들과 함께 가겠다고 난리를 피워서.”
“역시. 인물은 인물이라니까.”
그때, 어느새 멀어진 무리에서 대열에서 이탈한 발리스타를 부르는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거기서 뭣 하고 있어. 빨리 뛰어오지 못해!”
“이크! 이거 또 혼나겠구만.”
“훗. 어서 가보시오. 괜히 교수 눈 밖에 나지 말고.”
“알겠소. 그래도 또 간만에 이든형 얼굴 보고 떠나니 기분은 좋구려.”
이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문득 밀려오는 걱정에 호선을 그리던 눈매와 힘이 차츰 굳었다.
“몸조심하시오.”
발리스타가 고갤 끄덕였다.
“이든 형도 모쪼록 잘 계시오. 기회가 되면 또 보겠지.”
짧지만 반가웠던 만남.
하지만 발리스타가 저만치 멀어지기 무섭게 하나의 걱정으로 다가왔다.
“토벌이라. 다들 몸 성히 다녀와야 할텐데….”
***
간만에 길드원 모두가 가운데에 탁자를 두고 둘러앉았다.
그간 호송 내내 이든이 빠진 채로 임무를 해온 탓일까.
다들 죽는소리로 앓아대며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
“풉.”
고생한 길드원들에게 건네는 말치곤 참으로 담백하기만 하다.
하지만 반가움이 더 컸던 탓일까. 그의 말에 하나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실없던 대화를 나누던 와중에 케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보다 길드장님의 일은 잘 처리된 건가?”
일순간 찾아온 정적에 가라앉은 분위기. 이미 사정을 들은 길드원들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모두의 시선이 오직 이든에게만 집중되었다.
“일단락되긴 했습니다. 다만…”
“다만…”
“앞으로 분위기가 어찌 돌아가는지 조금 더 살펴봐야 할 듯싶습니다.”
“…길드장님을 피습했던 것, 역시 청부업 길드였겠지.”
“예.”
“누가 사주했던 건지 말해 줄 수 있나?”
케인의 눈에 시퍼런 날이 섰다. 그것은 비단 주변에 길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날카롭게 선 예기 속에서 이든은 줄곧 침묵을 유지하다 무겁던 입을 뗐다.
“...지금 당장은 곤란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
케인의 눈에 어려있던 살기가 일순 가라앉았다. 길드원들의 분위기도 따라서 잠잠해졌다.
“그 역시 길드장님의 의중이겠지.”
“그렇습니다.”
“알겠네. 그럼 더는 묻지 않겠네.”
“죄송합니다.”
이든의 말을 듣던 케인이 고갤 저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뭔가. 오히려 우리 입장에선 고마울 따름이지. 일선으로 달려와 길드장님을 지켜줘서 정말 고맙네.”
들끓는 분노가 만들어낸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는 어느새 따듯한 온기로 녹아있었다.
“아무튼, 먼저 달려와 준 이든도, 그리고 호송을 진행한 길드원도 모두 고생 많았네.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어.”
“맞아요. 그간 어떻게 이든 없이 호송을 해왔는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고요.”
로즈의 투정에 옆에서 가만히 듣던 톰슨이 혀를 찼다.
“웃기시는군. 힘들어 죽는 게 아니라.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던 거겠지.”
비수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오는 법이다. 허를 찌른 톰슨의 한마디에 로즈의 얼굴에 새빨개졌다.
“내, 내가 보고 싶어서 죽긴 뭘 죽어! 멀쩡히 잘 살아만 있구만…!”
“뭐야. 이 격렬한 반응은? 진짠가 보네 얘?”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 했던가.
로즈의 반응에 모두가 껄껄 웃었다.
이든도 가볍게 웃던 그때, 불현듯 떠오른 것이 있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하던 말 말입니다.”
“응?”
“이번에 호송을 맡았던 상단에서 칼스테인 영지로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호송을 의뢰했다고요?”
“마침 그렇지 않아도 그것에 관해 얘기하려 했지. 자, 다들 주목해주게.”
모두의 이목이 케인에게 집중됐다.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어쩐 일인지 스파이크 상단에서 추가 호송을 의뢰했다. 나 역시 그 때문에 오자마자 본부에 이를 보고해야 했지. 그런데 추가 호송을 의뢰한 목적지가…”
케인이 말끝을 흐렸다. 로즈가 궁금한지 그를 닦달했다.
“대체 어디길래 그렇게 뜸을 들여요.”
“레온하르트 영지라더군.”
“네?”
“레온하르트?”
“아 젠장…!”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
유일하게 이든만이 전후 사정을 몰랐다.
다만 그곳으로 기사 아카데미 학생들이 토벌을 나갔다는 사실만 오늘 발리스타를 통해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든이 궁금한 듯 말을 꺼냈다.
“오늘 기사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그곳으로 토벌을 나간다더군요. 대체 치안이 얼마나 엉망이길래 그러는 겁니까.”
“말도 말게.”
탁.
말을 꺼낸 케인이 앞에 있던 술을 단숨에 들이켜곤 거칠게 내려놓았다.
“일찍이 용병 생활을 하면서 제국 곳곳을 숱하게 돌아다녀 봤지만, 감히 말하건대 그곳 같은 곳은 어디에도 없을 걸세. 레온하르트 영지는 현재 무정부 상태거든.”
“무정부 상태? 영주가 없단 말입니까?”
“있었지. 단지 오랫동안 실종상태여서 문제지.”
“실종상태?”
이든이 전혀 몰랐다는 듯 되묻자 케인이 되려 정말 몰랐냐는 듯 물었다.
“자네, 레온하르트 영지에 관해 정말 모르고 있었나?”
“예. 처음 듣는 얘깁니다.”
“세상에… 벌써 수십 년도 더 된 이야기일세. 그 정도면 모르는 게 아니라. 그냥 세상 일에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끙.”
맞는 말이었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일과 수련 단 두 가지뿐이었다.
세상사에 휩쓸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사람. 그게 이든이었다.
이든이 무안한 얼굴을 하다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영주를 새로 위임하지 않고, 계속 비워두는 이유가 있습니까?”
영주가 없으면 새로 위임하면 될 일. 쉽게 해결할 수 있음에도 어떤 이유에서 계속 방치해두는가.
이든의 물음에 답한 것은, 케인이 아닌 다른 길드원이었다.
리아가 대신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곳에 영주 직을 맡기를 한사코 거절했거든요.”
“예?”
관료라면 응당 권력욕은 본능적으로 따라오는 것.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레온하르트 영지는 제국의 국경과 가장 인접한 곳이에요. 사람 손길이 닿고 관리되는 곳이라고 해봤자 국경 안쪽이 전부죠. 해서 그곳은 줄곧 제국의 범위 밖에서 넘어오는 몬스터들로 항상 골머리를 썩이는 곳이죠.”
“아. 그래서…”
비로소 이든은 이해했다.
레온하르트 영지의 지리적 취약점 때문에 영주의 실종 뒤로도 여전히 무정부 상태인 것.
국경 밖 오랑캐들로 골치 아파하는, 모든 나라가 갖는 고질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레온하르트라는 영주도 도망쳤던 겁니까?”
“음?”
이든의 물음에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아무 말 없는 그들의 반응에 이든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다.
케인이 허허실실 웃었다.
“아니. 전혀 반대일세. 그는 명장이었어. 오히려 레온하르트 공작이 관리했을 때만 해도 그 어느 곳보다 치안이 좋은 곳이었지.”
전혀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렇습니까? 허면 어째서 돌연 잠적을…”
“그게 의문일세.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사라져버렸거든. 그 때문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호송 업무에 관한 일로 시작해, 가볍지 않은 이야기로 마무리된 덕에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짝짝.
케인이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손뼉을 쳐 이목을 모았다.
“자자. 어쩌다 보니 말이 이쪽으로 샜는데 어찌 됐든 간에 위험 지역이라 하더라도 의뢰인이 원하는 이상 호송은 불가피할 것 같다. 나는 본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의뢰인의 준비가 끝나는 대로 업무를 시작할 거야. 그러니 다들 휴식은 취하돼, 어느 정도 만반의 준비는 하도록. 알겠지?”
“예.”
모두 마지못해 고갤 끄덕였다.
기피하던 곳에 호송을 나가게 생겼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다만 유일하게 한 사람. 이든을 제외하곤…
‘위험천만한 곳이라. 벌써부터 기대되는데…’
그의 얼굴에 묘한 호승심이 피었다.
물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
레스타드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케인은 이미 손을 놓은 것 같았고, 그의 옆에 선 의문의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줄지어 선 길드원들.
케인의 일행과 여성의 일행들이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서로 노려보고 있다.
오직 이든만이 별 신경 안 쓰는 눈치였다. 결국, 보다 못한 레스타드가 그들을 말렸다.
“하아. 아무리 서로 물어뜯고 살던 사이였다곤 하지만 이제 같은 길드원 아닌가. 인상들 좀 피게. 뒤에 애들도 좀 말리고.”
그때, 케인 옆에 선 내내 마주 본 적 한번 없이 고갤 돌리고 있던 여인이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인상 쓴 적 없습니다. 주름 생기게 제가 뭣 하러 저런 것들 때문에 인상을 씁니까.”
“저런 것?”
케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찬 바람 쌩쌩 불던 둘 사이에 이번엔 불꽃이 튀기는 것 같았다.
그때, 케인이 미묘한 눈빛을 하며 비웃는 듯한 얼굴을 했다.
“훗. 이제 와 신경 써 봤자 많이 늦은 것 같은데?”
“뭐야!!!”
대체 얼마나 사이가 안 좋으면 저리도 서로 날을 세우는지…
레스타드는 이번 호송에 이 둘을 붙여 놓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원망했다.
‘하아… 상단에 조금 더 양해를 구하고, 다른 팀과 합쳤어야 했나.’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다른 호송팀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레스타드의 시선이 다시 케인과 베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문득 과거를 회상했다.
케인과 그 옆에 있던 여인 베리의 용병단이 유니콘 길드에 합병되기 이전. 둘은 수도에서 이름 좀 날린 용병단의 단장이었다.
워낙 쟁쟁한 실력으로 소문 자자했던 두 용병단은 항상 비교 대상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지만, 딱히 마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우연한 계기로 두 용병단이 함께 호송을 맡게 된 일이 있었는데,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아 어긋났던 탓에 그만 불시에 습격한 산적들에게 모든 호송 물품을 빼앗기게 되고, 의뢰했던 상단에게 양측이 합하여 막대한 배상을 한 일화가 있었다.
그 이후로 상대 탓을 하며 물고 뜯던 것이 유니콘에 합병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것이다.
레스타드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있던 그때.
그의 눈이 한곳을 향했다.
불꽃 튀는 신경전 사이에서 유일하게 아무 생각 없는 한 사람.
이든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