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이든은 이미 진즉에 기막을 형성해 연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케인이 연신 기침을 해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쿨럭…. 우린 괜찮네만….”
케인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기감으로 주변을 살피던 이든도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 곳곳에서 느껴지는 혈향. 이쪽에도 꽤 많은 사상자가 있었다.
“실수였습니다. 차라리 이 자릴 지켜야 했는데….”
“아니야. 오히려 적의 지원을 미리 끊은 것이 피해를 줄인 것일 수도 있네. 자책하지 마시게.”
이든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곤 스파이크 길드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큰 인명 피해가 있었지만, 다행히도 길드장은 무사했다.
“스파이크 길드장님,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스파이크가 고갤 끄덕이다가 차디찬 바닥을 나뒹구는 죽은 무사들을 향했다.
“전 괜찮습니다. 다만…. 상단 무사들의 피해가 크군요.”
데려온 오십 명의 상단 무사 중 열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호송 초입부터 큰 피해를 본 것이다. 왠지 자신의 실수인 것 같아 이든은 차마 고갤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판단을 잘못했습니다.”
“아닙니다. 이든 대장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단 우선 상황을 빨리 수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이대로 자책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심경이 복잡할 만한 상황에서도 스파이크는 상단을 이끄는 기둥답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든!”
이든이 상황을 수습하려던 그때, 동료 로즈가 이든에게 급히 달려왔다. 허겁지겁 달려오는 걸음걸이에 심상치 않은 낌새가 느껴졌다.
“로즈 씨, 무슨 일이십니까.”
“리아가…! 리아가 없어졌어…!!”
“리아 씨가요?”
리아가 사라졌다는 말에, 옆에서 듣던 동료들이 저마다 경악했다. 이든이 급히 길드원들이 있던 곳으로 고갤 돌려 물었다.
“리아 씨와 같은 조 누구였습니까.”
“저, 저였습니다…!”
잔뜩 기죽은 목소리로 쭈뼛쭈뼛 손을 든 사내, 손을 든 사내의 얼굴 한쪽은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오늘 낮, 임시 대장직을 맡았던 이든에게 하극상을 일으켰던 사내 중 한 명이었다.
베리가 인상을 썼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있던 거야. 팀원이 사라지는 줄 지금까지 몰랐다는 게 말이 돼!”
전후 사정이 어찌 됐든 본인 팀원의 부주의로 생긴 일이었다.
날카롭게 선 베리의 목소리에 사내는 차마 고갤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케인이 그녀를 말렸다.
“혼내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일단 사라진 동료를 찾는 것부터가 급선무야.”
이든 역시 그와 생각이 같았다. 그때, 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기감에 숲속 저편에서 미세한 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놈들의 위치, 찾았습니다.”
“정말인가…!”
위치를 알아낸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음?”
이든이 당장 발을 떼려던 그때, 그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이것들 도망친 게 아니라. 잔꾀를 부리고 있었군.’
기척의 이동이 느껴지던 곳.
그곳과 완전히 반대 방향에 또 다른 무리의 기척이 포착된 것이다.
지금껏 이든의 기감에 걸리지 않았던 것을 보면 작정을 하고 은신한 모양이었다.
멈춰 선 이든에게 케인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인가.”
“아무래도 놈들이 한 번 더 수작을 부리려나 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영문을 알 수 없던 케인이 재차 물었다. 이든이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리아 씨를 데리고 간 무리가 저곳으로 이동 중입니다. 그리고….”
이번엔 이든이 반대편 숲속을 가리켰다.
“또 다른 무리가 저곳에서 이곳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리아 씨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찢어지려는 틈을 타 이곳을 재차 습격할 요량인 것 같습니다.”
“뭐라고…?”
함정 속에 함정이었던 것. 케인이 인상을 썼다.
“어찌하면 좋겠나.”
이든의 기감이 이곳에 동태를 주시하는 괴인들을 한 번 더 살핀다. 그의 입가에 작게 미소가 걸렸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
먼 곳의 상단을 주시하던 가면 속 괴인의 눈이 빛났다.
‘끌끌…. 움직이기 시작하는군.’
이채를 띄는 괴인의 눈가에 주름이 졌다. 웃고 있는 것이다.
‘멍청한 것들, 함정인 것도 모르고 용병 전체가 움직이는군. 음…?’
괴인의 시선이 한 사내에게 고정된다. 상단의 무사로 보이지 않는, 용병 한 명만이 유일하게 상단 무사들과 남아 있었다.
“큭!”
괴인이 저도 모르게 소릴 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봤자 용병 한 명. 남은 상단 무사들은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 더 볼 것도 없군.’
먼발치에서 내내 주시하던 괴인이 비로소 입을 뗐다.
“움직인다.”
끄덕.
두목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뒤로 도열해 있던 스무 명의 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상단 쪽으로 향하는 수하들의 뒷모습을 보며 괴인들의 두목도 걸음을 옮겼다.
***
푸스스.
“하아하아…. 왜 갑자기 퇴각 명령이 떨어진 거지?”
“2조에 무슨 일이 있었나 보지. 일단 예정대로 이곳에서 기다리자고.”
1조의 괴인들이 저마다 풀숲에 몸을 가리고 은신하는데, 그중 한 명이 유독 눈에 띄었다.
정신을 잃은 여자를 업고 있는 괴인. 괴인들의 시선이 저마다 그 여인의 몸을 훑는다.
낼름. 꿀꺽.
산속에서 사내들 틈에 부대끼며 살다 보니, 자연스레 잊고 지내던 욕구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는 괴인들, 상단을 털어서 챙기는 물건도, 그 과정에 얻게 되는 여자들도 그들 두목의 것이었다. 자칫 한순간에 욕망에 눈이 멀어 실수라도 하는 날엔 두목에게 모가지가 날아갈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먹이를 앞에 두고 며칠을 굶은 짐승처럼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바스락.
그때, 한쪽 풀숲을 헤치는 소리에 괴인들의 눈이 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음흉했던 눈이 경계의 눈빛으로 바뀌고 잠시 뒤, 그곳에서 2조의 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별일이군.’
은밀하게 이동하는 것만큼은 두목 못지않던 실력인 그가, 평소와 답지 않게 소릴 내어 다가오는 모습에 1조의 조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봐. 대체 무슨 일이야. 퇴각 신호는 뭐고? 2조의 수하들은 죄다 어디에 두고 온 거야?”
2조의 조장이 깊게 눌러쓰던 가면을 벗어 던지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몰살당했어.”
“뭐라고?”
몰살당했다니? 전후 사정없이 앞뒤 다 자른 한마디에 1조의 조장이 재차 물었다.
“대체 무슨 소리야. 몰살이라니?”
“하아하아…. 나 빼고, 2조 다 뒤졌다고! 새끼야…!”
“뭐? 대체 그 무슨…!?”
그때, 가면 속 1조의 조장 눈이 놀란 듯 커졌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뛰쳐 왔던 2조 조장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잔혹한 성정으로는 두목 다음가는 이가, 이토록 겁먹은 모양새는 너무도 생소한 것이었다.
1조의 조장이 재차 물었다.
“대체 뭘 봤길래….”
“귀신, 아니 마귀, 마왕…! 아니 그것이 뭔지 나도 모르겠네…! 그놈이 이곳에 올지도 몰라, 어서 도망쳐야 해…!”
“도망치다니 어딜! 두목이 상단을 터는 동안 우리가 이곳에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고.”
“그,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자칫하다간 여기 있는 사람 모두 죄다 죽는단 말이네!!!”
“개소리 집어치우게!”
1조 조장이 주먹을 휘둘러 2조 조장을 냅다 한 대 쳤다.
퍼억. 쿵.
한 대 얻어맞은 그가 발라당 뒤로 넘어지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1조 조장의 눈에서 차디찬 한기가 비쳤다. 그가 말을 이었다.
“더는 못 들어 주겠군. 2조 수하들을 죄다 잃은 것도 모자라, 개소리나 지껄여? 오늘 일은 모두 두목에게 고하도록 하지. 목숨을 내놓을 각오 하게나.”
바르르….
그의 말을 듣기는 한 걸까.
앞으로 있을 두목의 처분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인지, 2조 조장은 연신 주변을 살피며 애처롭게 떨고 있었다.
바스락. 바스락.
그때, 괴인들이 있던 풀숲 인근에서 사람의 기척이 들려왔다. 소리가 난 곳으로 향한 가면 속 괴인들의 눈이 저마다 흉흉하게 변했다.
“그, 그 괴물이 온다. 다들 도망쳐!!!”
그때, 바닥을 나뒹굴던 2조의 조장이 황급히 일어나 다시 풀숲을 헤치고 도망을 치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1조 조장이 가면 속에서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했다.
“저 병신이….”
바스락. 저벅저벅. 바스락. 저벅저벅.
점점 커지는 기척, 괴인들의 손이 저마다 등에 차고 있던 검으로 향했다.
잠시 뒤.
화악!!!!
괴인들이 몸을 숨기던 풀숲으로 수십의 인영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목표물이 있던 장소에 도착한 괴인의 두목은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었다.
휘잉.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텅 빈 공터. 오직 수레만 있고, 사람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이 무슨….”
분명 이곳에 오기 전, 동태를 살필 때만 해도 용병 한 명과 상단의 무사들이 남아 있는 상태였었다.
그런데 막상 기습을 강행하려던 목표 지점에 도착하니, 있어야 할 사람들은 없고 수레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푸흐리이힝! 푸르르.
고요한 정적 속에 무심히 울리는 말들의 울음소리,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연신 주변을 살피던 괴인들의 두목이 마른침을 삼켰다.
[누굴 찾지? 뭘 그리 두리번대지?]
흠칫.
그때, 괴인들과 짐마차만 있던 텅 빈 야영장에 섬뜩한 목소리가 귓가에 박혀 울려 퍼졌다.
괴인들의 고개가 바삐 움직이며 사방을 살핀다.
“누구냐!”
“…….”
“…….”
묵묵부답.
귓가에 꽂혀 울리는 의문의 목소리에, 괴인의 두목이 냅다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자신의 메아리뿐이었다.
부르르.
마치 놀란 괭이처럼 온몸에 털이 곤두서며 소름이 끼쳐 왔다.
지금껏 셀 수 없을 만큼 도적질을 해 왔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야영장에 들어선 순간, 알 수 없는 음산한 기운에 압도되어 눈앞에 물건들을 두고도 안중에도 없다. 괴인들의 두목이 이를 악물었다.
어떤 몬스터의 위협에도 굴한 적 없고 지금껏 이곳을 호령해 왔던 그였다.
최상위 포식자인 자신이 겁을 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질 않았다.
괴인의 두목이 호랑이와 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이놈! 어서 모습을 썩 드러내지 못할까!!!”
어두운 숲속에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인근에 있던 몬스터도 지레 겁먹을 만큼 압권이다.
과연 스스로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라 생각할 만도 했다.
괴인의 두목이 연신 씩씩거리며 서슬 퍼런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그때.
의문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뭐, 원한다면….]
푸스스.
야영장 한쪽 풀숲에 어둠이 걷히고, 거기엔 한 사내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달빛마저 닿지 않는 음영 진 곳에 그 사내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근데 어쩌나. 내 얼굴값이 좀 비싸서 말이야. 값을 지불해 줘야겠는데.”
농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
듣던 괴인의 두목이 가면 속에서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했다.
“무슨 개소리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쐬애애애애애애애액!
괴인들의 뒤쪽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유영하더니, 이내 닭살 돋게 만드는 음향이 들려왔다.
푹. 펑! 푹. 펑! 펑펑펑!
피의 향연 속에서 살이 터지고, 박살이 나고, 뼈가 부서지는 전주곡엔 일말의 비명도 없었다.
외마디 비명조차 지를 새도 없던 끔찍한 파육음(破肉音)과 함께, 남은 괴인들 틈 사이를 뚫고 무언가 홱 지나가더니 이내 사내의 손에 잡혔다.
끔찍했던 살육의 화음을 만들어 낸 당사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사내의 손에 얌전히 날아와 잡힌 것은 흑색의 검이었다.
뚝. 뚝.
지금 막 적신 뜨듯한 핏물이 검신을 타고 바닥을 흐르고 있었다.
그때, 나무에서 등을 뗀 사내가 걸음을 옮겨 괴인들을 향했다.
음영이 져 보이지 않던 사내의 얼굴에 달빛이 비치고, 비로소 얼굴을 드러냈다.
훤칠한 키에 하얀 피부와 탄탄해 보이는 몸. 누가 봐도 잘생긴 얼굴이지만,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표정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기괴하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자. 얼굴을 보였으니 남은 잔금을 받아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