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250)

54화.

안내한 곳에 도착한 케인과 상단원들은 일제히 헛바람을 삼켰다.

괴인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그들의 산채는 제법 그럴듯한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공터 한쪽에는 훈련장도 마련해 두고 있었다.

작정하고 만든 조직이란 뜻이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황실에서 레온하르트 영지로 보내던 군수 물품도 그대로 있었다.

“두목의 금고로 안내해라.”

도착한 이든은 곧바로 금고의 위치를 요구했다. 수레는 나중에 옮겨도 될 일.

케인과 상단원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2조의 조장이 안내한 곳은 다른 막사에 비해 더욱 신경 써 더 갖춘 곳이었다. 바닥에 깔려 있던 양단과 집기들만 봐도, 두목이었던 자가 수하들 몫은 고사하고 자신 욕심만 채워 온 흔적들이 그득했다.

“두, 두목의 금고는 여깄습니다….”

막사 한구석. 유심히 살펴야지만 그 위치를 알 수 있는 곳에 커다란 금고가 숨겨져 있었다.

“허…. 금고라 해서 그냥 자물쇠로 잠겨 있을 줄 알았더니만….”

산 구석 소굴에 있을 법한 금고는 아니었다. 암호를 입력해야만 두꺼운 철문을 열 수 있는 기관 장치식 금고였던 것. 금고를 살피던 스파이크 길드장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이거 원…. 난감하군. 죽은 저들의 두목을 다시 살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퍼어엉.

스파이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일순 철문으로 향하던 이든의 손바닥에서 기파(氣波)가 터져 나왔다. 마치 화포가 터진 듯 요란한 소리가 났다.

금고를 열 수 없다면 부숴 버리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이든의 손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가 손을 떼자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힘없이 열려 버렸다.

그 모습에 스파이크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이, 이걸 열었네…?”

강제로 뜯어 젖힌 금고 안엔 온갖 금은보화로 가득했다. 이든이 옆에 있던 사내를 추궁했다.

“금고, 이것 말고 또 없어?”

“…예? 어, 없습니다.”

“뒤져서 나오면 어쩔래.”

“두목은 평소 의심이 많아서 자신의 막사 외에 다른 곳엔 일절 금고를 두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흠.”

저렇게까지 말하니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추궁할 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든의 손이 우악스럽게 2조 조장의 멱살을 잡았다.

“네놈들이 금은보화에만 만족할 리 없지. 여자들 잡아다 가둬 놓은 곳. 어디야?”

음성에 짙게 깔린 마기(魔氣). 그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살벌해 보였다. 단지 얼굴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2조 조장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 그곳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다른 곳은 몰라도, 거긴 샅샅이 고해야 할 거야.”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진즉에 사람의 기척을 느낀 그였다.

사람들이 금괴들을 주섬주섬 챙기는 사이, 이든과 케인. 스파이크가 사내의 안내에 따라 지하 동굴로 향했다.

“여, 여기…. 이곳입니다.”

2조 조장인 그가 안내한 지하 동굴엔 여인들 몇몇이 그곳에 갇혀 있었다. 이든과 그의 일행들을 발견한 여인들이 인기척에 지레 겁을 먹었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아마도 그간 각인된 공포 탓에 노예 상인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어째 산 도적 놈들은 하나같이 하는 짓들이 똑같은지…. 쯧.”

말세도 이런 말세도 없었다. 기감으로 여자들을 살피던 이든이 혀를 찼다.

마교라고 점잖은 신사 같은 족속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런 파렴치한 파락호 짓은 하지 않았다.

싸움과 피로 물든 일생을 사는 족속이지만, 인간 이하의 짓은 마교 내에서도 엄벌을 내렸다.

우드득.

쥐었다 펴는 이든의 손에 살벌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듣던 2조의 조장이 진땀을 흘렸다.

“저, 저기…. 저는 결코 저 여인들에게 한반도 손을 댄 적이 없습….”

“너의 동료도 곧 죽여 주마. 저승 가는 길이 심심치는 않을 거야.”

변명 따윈 들을 필요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일순 이든의 손이 휘둘러졌다.

후욱. 촤아아아!

검은 마기가 피어오르던 그의 손끝이 그 사내를 단박에 찢어발겼다.

비명도 없었다.

단지 살이 찢기는 파육음만 동굴에 울릴 뿐이었다. 소리도 없이 비명횡사한 사내의 살점을 밟고 이든이 자물쇠를 단박에 부숴 열었다.

콰드득.

철컹.

자물쇠를 맨손으로 부숴 연 것만 해도 놀랄 일인데, 여자들의 얼굴엔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사람 하나를 산 채로 찢어 죽인 정체 모를 사내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이든이 뒤돌아, 여인들과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던 케인과 스파이크 길드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여자들부터 구조하여 주십시오. 제가 사람을 더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래. 그러는 게 좋겠군.”

케인의 눈이 뒤에 있는 여자들을 향했다. 잔뜩 겁에 질린 눈이다.

자신들의 정체를 떠나, 피를 잔뜩 뒤집어쓴 몰골로 괴인을 맨손으로 찢어발겼으니, 겁을 먹은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이든도 먼저 자릴 피하는 것이다.

케인과 상단의 사람들이 여자들을 진정시키고, 감옥에서 구조하는 사이, 이든은 야영지에 있던 짐꾼들을 더 불러 모았다. 옮겨야 할 짐이 상당히 많았던 탓이다.

짐을 옮기는 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두컴컴했던 새벽에 동이 트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짐을 모두 챙기고 돌아온 케인과 스파이크의 시선이 넝마가 된 채 죽어 있는 1조의 조장을 향했다.

꿀꺽.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동굴에서 괴인에게 약조했던 대로 이곳에 오자마자 이든이 그의 숨을 끊어 버린 것이다. 약속을 잘 지켰다고 감탄이라도 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 속에 그들의 눈이 다시 짐들을 향했다.

일전 황실의 군수 물자 수레까지 더하니 총 옮겨야 할 수레가 스무대가 훌쩍 넘었다.

스파이크 길드장의 얼굴에 다른 의미로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다 챙긴다고 챙기긴 했는데…. 이거 호송 인원이 많이 부족하겠군요.”

현재 짐꾼들의 수로는 턱도 없었다. 수레 하나당 두 마리씩 붙던 말들도 반씩 나눴지만,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임시 대장직인 이든과 스파이크 길드장, 그리고 케인과 베리가 머리를 맞댔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베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쉽지 않군. 레온하르트 영지는 당장 급한 상황이고, 물건을 옮길 인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수도로 돌아가 추가 인원을 데리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낙장불입인 상황. 모두가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할 때, 내내 침묵을 지키던 이든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고민에 허공을 향하던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로 쏠렸다.

“방법이 있는 겁니까?”

스파이크 길드장의 눈이 환해졌다. 호송 내내 비범함을 보이던 이든이었기에 자연히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꿀꺽.

모두가 침묵을 지킨 채, 이든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호송 중인 상단 무사들을 모두 짐꾼으로 활용하십시오. 호송은 저희 유니콘 길드원이 전부 맡도록 하겠습니다.”

케인과 베리가 경악한 표정을 했다. 옆에서 듣던 스파이크 길드장 또한 그것이 가능하냐는 얼굴이었다.

“저…. 유니콘 길드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만으로 이 많은 수레 호송이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합니다.”

이든이 단호히 대답했다. 이에 케인이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저, 저기…. 이든, 있잖은가. 아무래도 우리 길드원만으론 호송이 벅찰 것 같은데…. 자네와 나, 베리를 전부 합쳐도 길드원이 스무 명이 겨우 넘네. 그 정도 인원으로 스무 대가 넘는 수레를 호송한다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든의 답은 한결같았다.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제가 있으니 가능합니다.”

“응…?”

“……?”

케인과 베리가 의아한 얼굴을 하다,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말의 의미를 깨닫는다.

지금껏 봐 온 이든의 실력이라면. 능히 백 명 이상의 호송력을 발휘할 터.

이든이 턱을 괴었다. 그 역시 한 가지 걸리는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단, 제가 호송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면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라, 임시 대장직을 계속 맡을 수 없습니다. 해서 케인 대장님과 베리 대장님께서 다시 대장직으로 복귀하셔야겠습니다.”

“음….”

“확실히 그게 좋겠어.”

이든의 말투는 묘했다. 의견을 제시하는 듯했지만, 사실상 강요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케인과 베리는 그 점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이든이란 존재가 더는 일개 길드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든의 의견에 따라 상단의 무사들이 호송에서 운송으로 업무를 바꾸었다.

호송에서 그만큼 부족한 인력은 이든과 더불어 유니콘 길드원이 메꾸는 식으로 변경되었다.

그때, 이든이 몸이 케인과 베리를 향해 돌려졌다. 둘이 의아한 눈으로 이든을 바라보았다.

“그간 모자란 임시 대장의 말을 따라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앞으로 남은 호송 잘 부탁드립니다.”

한 치의 모자람도 없는 예의. 그간 대장으로서 길드원들을 이끌며 익숙히 봐 온 모습이지만, 이든이란 인물의 저런 모습은 색다른 의미를 선사했다. 케인과 베리가 헛바람을 삼키다가 이내 서로 마주 보며 씩 웃었다.

다시 고개를 든 이든 역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피를 뒤집어쓴 몰골로. 미소가 썩 어울리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간에 좋은 징조였다. 이번 일을 계기로 깊었던 두 사람의 골이 조금이나 채워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이든은 그렇게 생각했다.

***

“하아….”

이든이 그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들이 내쉬었다. 구반문촉(扣槃捫燭)이라 했던가.

섣부른 판단이었다. 이제 좀 사이가 좋아지려나 싶었는데, 케인과 베리는 같이 붙어 있기가 무섭게 여전히 티격태격이었다.

적은 인원을 활용한 효과적인 호송을 위해 이것이 맞네, 저것이 맞네를 주고받으며 입씨름을 하였다. 하지만 이내 보일 듯 말 듯 하게 지어지는 작은 미소.

현 호송 과정의 위험성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오해가 해소된 것인지. 길드원 간에 으르렁거리던 기 싸움은 없었다.

‘그래도 일보 발전한 셈인가.’

그래도 이만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게다가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일전의 소동 이후. 남은 호송 기간 중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험준한 곳이라 자자한 길목에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그렇게 며칠간 조용히 넘어갔으니 긴장이 풀어질 만도 하건만, 적은 호송 인원인 만큼 케인과 베리가 내내 길드원들의 긴장을 바짝 조여 주었다.

그렇게 이든과 더불어 노련한 길드원들의 호송 아래 무탈하게 레온하르트 영지 국경에 다다른 일행들. 영지의 국경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람들의 얼굴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것은 이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겨우 국경에 인근에 도착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혈향이 진동을 한다. 게다가…. 탄내까지.

전운(戰雲)이라 하기도 힘든, 이미 한차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황폐한 대지.

그들이 보는 레온하르트 영지의 모습은 그러했다. 이든이 입을 열었다.

“탄내가 심하게 납니다. 무슨 일입니까.”

“숲을 태운 것 같네.”

“숲을요?”

“응. 아무래도 영지 입장에선 그편이 좋겠지. 적의 기습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으니….”

탄내의 정체.

음산함마저 풍기던, 나무와 풀이 무성했던 그 숲이 맞기나 한 건지 의문이 들 만큼 영지를 중심으로 반경 내에 있던 사방에 나무와 숲은 모조리 태워 버린 것.

혈향도 혈향이지만, 시꺼멓게 탄 나무들의 초라한 모습은 레온하르트 영지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간접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어째 전에 왔을 때 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은 것 같소.”

“음….”

유니콘 소속 길드원들이야 꺼리던 곳이긴 해도 이따금 몇 번 왔다 갔다 하던 곳이니, 이전에 봐 왔던 모습과 지금처럼 사기(死氣)로 득실한 땅으로 변해 버린 모습에서 오는 괴리감이 더욱 믿기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멈춰 선 걸음.

내키지 않더라도 어찌 변했든 간에 이 땅 안으로 들어서야만 했다. 케인이 뒤돌아서고, 그와 마주한 스파이크 길드장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부탁합니다.”

“예. 가시죠. 후… 출발!!!”

애써 불편한 기색을 떨쳐 내려는 듯, 황량한 대지에 케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외쳤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무거운 발걸음들. 이때만 해도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 영지가 처한 위기가 어찌나 크고, 어두웠는지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