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250)

55화.

제라드는 욱신거리는 골을 부여잡았다.

“하아…. 시국이 어느 때인데, 황궁의 지원은 왜 이리 늦는 것인지…!”

근래 들어 제국 국경에서 다발적으로 넘어오는 몬스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로 인해 입은 물질적 손해와 막고자 생긴 인명 피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황궁에서 오기로 약조했던 군수 물자 지원까지 끊긴 상황. 그의 탁자에는 영지에서 일어난 각종 보고로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재해 있었다.

본래는 영주가 해야 할 업무들. 하지만 이곳의 본래 주인이었던 레온하르트 공작은 십수 년 전 아무 말도 없이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이것들을 처리하고 현장으로 가 봐야….”

할 일은 태산에 현장과 집무실을 바쁘게 오가다 보니,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곤 갑옷을 벗어 본 적이 언제였는지 잊어버릴 정도였다.

서류를 훑으며 서명을 하는 갑옷을 입은 사내. 제라드의 머릿속엔 오로지 현장의 일뿐이었다.

벌컥.

그때, 두드리는 소리도 없이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예의의 어긋난다지만, 그의 얼굴엔 불편한 기색이 하나 없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리된 것도 오래된 탓이다.

여전히 서류를 향한 시선은 고정된 채로, 문을 열고 들어온 병사를 향해 제라드가 입만 뻥긋거렸다.

“무슨 일인가.”

“단장님. 지금 성밖에…!”

자동적으로 제라드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하아. 또 몬스터 출몰인가?”

“아, 아니. 그것이 아니라. 지금 성 밖에 스파이크 상단이 와 있습니다.”

서명을 하던 그의 손이 덜컥 멈추었다. 제라드가 흔들리는 눈으로 병사를 홱 돌아보았다.

“성 밖에 상단이…!?”

“예. 게다가 황궁의 군수 물자까지 같이 와 있습니다!”

“뭐라고!?”

상단이 온 것만 해도 두 손 벌려 환영할 일인데, 황궁의 지원까지 같이 와 있단다.

덜컹!

의자가 뒤로 발라당 넘어질 정도로 제라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지. 어서 가지.”

탁자 위에 쌓여 있던 서류는 더는 안중에도 없다. 그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외면하던 이 시국에 어려운 걸음을 해 준 손님을 맞기 위해서였다.

***

레온하르트 영지가 처한 곤혹을 해결하고자, 실습을 빌미로 황궁에서 급파하다시피 한 기사 아카데미의 학생들.

토벌을 진행한 지 고작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모두 지쳤는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다. 그 가운데에 유독 튀는 한 사람.

“후우. 힘들군.”

한숨을 푹 내쉬는 칼스테인 가문의 칼라슈. 그가 수통에 물을 벌컥 들이마시곤 외벽에 기대어 섰다. 칼라슈의 눈이 같이 참전한 학생들을 훑었다.

‘다들 지쳐 있군.’

예비 기사라지만, 아직 애들이었다. 난전과도 같은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잠 한숨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꼬박 며칠을 버텼으니, 심신이 지칠 만도 했다.

‘게다가 많이 혼란스러울 테지.’

학생들을 훑던 칼라슈의 눈이 일순 흔들렸다. 그의 시야가 담던 학생들.

죄다 하나같이 귀족은 고사한 오직 평민 출신으로만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애초에 이번 토벌회에 귀족 출신들은 제외되어 있었다.

출신을 떠나 무도 대회에서 오직 자신의 기량만 가지고 선출된 아이들만이 이곳에 강제로 징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같은 현실을 이 아이들이라고 모를까.

싸우기도 전에 한풀 꺾인 기세였다. 그나마 자진해서 지원한 칼라슈의 모범으로 이 모양새가 유지되고 있는 것. 만약 칼라슈마저 없었더라면….

‘아마 제풀에 지쳤거나, 혹은…. 기량도 발휘하지 못하고 비명횡사했거나….’

칼라슈의 눈이 허공으로 향했다. 그의 아버지와 쏙 닮은, 강철같이 변함없던 그의 눈에 허무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사박.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발소리. 허공을 응시하던 그의 눈이 스륵 옆으로 옮겼다.

갑옷으로 가려도 드러나는 균형 잡인 몸매. 앳된 얼굴이지만 날카롭게 선 눈빛. 군데군데 시꺼멓게 때가 탔지만 가려지지 않는 하얀 피부.

이번 토벌회에 자진해서 지원했던 한 학년 아래의 학생이었다.

“아스테어.”

이름이 불린 그녀가 칼라슈와 일순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에게 하는 인사치곤 예의 있다 보기 어렵지만, 칼라슈는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후배를 훑던 칼라슈의 눈에 묘한 빛이 일었다.

‘대단하군.’

과연 이학년의 기둥 같은 존재라 해야 할까. 모든 귀족을 제치고 무도 대회에서 우승한 그녀를 가리켜 세간은 폭풍설의 여제라 불렀다. 썩 어울리는 별호였다.

꽃 같은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롭게 선 예기를 보이는 눈빛만큼이나 표정이란 것이 있기나 한 건지 일말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

그녀의 외모만 보고 수작을 부리려 접근하던 남정네들 역시 숱하게 많지만, 이 한설(寒雪) 같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줄행랑을 친 이들 또한 적지 않다.

아스테어와 칼라슈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남자라면 질색을 하는 그녀가 웬일로 눈을 피하지 않는다.

그녀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칼라슈의 눈 안에 깃든 감정.

그것은 여인을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이 아닌, 무인을 바라보는 무인의 눈빛이었다.

칼라슈만큼이나, 무겁던 그녀의 입술이 차츰 열렸다.

“편히 쉬지 않으시고요.”

살가운 인사 대신 건네는 말이지만, 어투는 참 차갑기 짝이 없다. 그녀를 훑던 칼라슈의 눈이 다시 허공으로 향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안 쉬고 어딜 돌아다니는 거지?”

“잠깐 짬 내서 수련을 했습니다.”

“수련을?”

칼라슈 또한 마찬가지로 표정으로만 치면 그녀 못지않은 돌부처나 다름없었다. 허공을 향했던 그의 얼굴에 흔치 않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칼라슈의 반응을 아스테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수련한 게 그리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말만 들으면 걱정하는 것 같지만, 표정은 무심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아스테어는 전혀 신경 안 쓰는 눈치다.

칼라슈가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면, 아스테어 눈은 끝이 없는 정면을 응시하는 듯 보였다.

“토벌에 참전한 이후로 실전 감각은 첨예하게 선 것 같지만, 경지는 예전과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학교에서 배우던 수업과 현장에서 싸워 보며 느끼는 괴리감에 오히려 혼동만 옵니다.”

“그런가.”

“…….”

후배의 고민을 들었다면 뭐라도 한마디 조언이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겉모습만 멀쩡한 이 멋대가리 없는 선배는 참으로 무심하기 그지없다.

애초에 아스테어 역시 무언가 조언을 바라고 했던 말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무(武)에 대한 욕심은 얼음장 같던 그녀마저 일순 뜨겁게 만들었다.

정면을 응시하던 그녀의 눈이 칼라슈를 향해 힐끗 움직였다.

“다른 말은 없는 건가요?”

“음?”

“하아….”

아스테어가 그녀답지 않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재차 말을 이었다.

“선배는 제 목표였습니다. 제 나이 때에 선배가 이룩한 것을 저 역시 똑같이 이루고 싶었죠.”

“꿈이 소박하군.”

“소박이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다른 전우들도, 그리고 저 역시.”

“진짜 강한 사람을 보지 못했군.”

“우리 또래에 선배보다 더 강한 사람도 있습니까?”

“…있다.”

“……?”

있다? 거짓말 같았다. 누가 들으면 농담하지 말라며 웃고 넘겼을 얘기.

하지만 아스테어의 눈이 향한 칼라슈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스테어가 그랬던 것처럼 정면을 향한 그의 눈은 마치 거대한 무언가를 앞에 둔 사람 같았다.

자신이 칼라슈에게 그런 것처럼, 칼라슈 역시 누군가를 목표로 두고 있는 듯한 그런 모습.

저벅.

벽에서 등을 뗀 칼라슈가 걸음 옮겼다. 그때, 뒤에서 울린 아스테어의 음성이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뭐를?”

“제 나이 때에 선배가 느꼈던 벽, 그것을 어찌 깨부쉈냐는 말입니다.”

“…지금의 너처럼. 나 또한 그랬다.”

“……?”

“벽을 깨고 강해지는 데 방법 같은 건 없어. 끊임없는 실전과 수련. 그리고 언제나 항상 날을 세우는 것. 지금 네가 하는 것처럼. 그렇게 꾸준히 갈고 닦다 보면 자연스레 눈앞의 벽도 깨게 될 것이다.”

칼라슈를 향한 아스테어의 차가운 눈이 찰나 흔들렸다. 칼라슈를 향한 동경일까. 아니면, 자신의 방법이 틀리지 않았다는 환희 때문일까. 마저 걸음을 옮기던 칼라슈가 멈칫해서 다시 고갤 돌렸다.

“스스로 혹사하지는 마라.”

“…네?”

“실전과 수련에 필수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휴식이다. 지금처럼 하면 필시 빠르게 강해질 수 있지만, 결국 스스로 부러지고 만다.”

“새겨듣겠습니다.”

칼라슈의 고개가 다시 정면을 향했던 그때.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음?”

다가닥다가닥.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칼라슈의 눈이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엔 기사단장 제라드가 자신의 말을 몰고 어디론가 급히 이동하고 있었다.

‘뭐지. 토벌을 마친 지 얼마나 됐다고 어딜 저리 급히….’

“칼라슈 형. 무슨 일이오?”

등에 대검을 찬 거구의 사내, 발리스타가 어느새 그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모르겠소. 방금 제라드 기사단장님께서 급히 북문으로 가셨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듯한데, 움직여 봐야겠소.”

제라드가 사라진 곳으로 칼라슈 역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발리스타와 아스테어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역시 뒤따랐다.

***

사람들의 이목이 온통 북문 쪽에 쏠렸다. 최근 토벌을 나갈 때를 제외하곤 한 번도 열린 적 없던 성문이 열린 것. 관심이 쏠리는 것이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삼엄한 경비 속에 거대한 성문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차츰 열렸다.

구구구궁. 쿵.

느리지만 장엄하게 열리는 성문 틈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귀인(貴人)들. 오래간만에 찾아온 영지의 손님들이 열린 성문을 지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덜그덕덜그덕.

끝도 없이 들어서는 수레의 모습에 영지 인들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세상에…. 수레가 몇 대여. 어림잡아 봐도 스무대가 훌쩍 넘어 보이는 데?”

“징집된 옆집 아들내미한테 물어보니까. 오는 길에 산도적 놈들을 만났는데 그놈들이 글쎄 황궁에서 오기로 했던 물건들을 싹 다 가지고 있었다네? 그래서 그 도적놈들 다 때려잡고 죄다 가져오는 거라잖아.”

“참 대단도 허이…. 어찌 저리 적은 인원수로 이 험준한 곳까지 뚫고 왔을꼬. 이름이 뭐라고?”

“스파이크 상단하고 그…. 유니콘 길드라고 했던가?”

짐 마차가 모두 들어오는 데까진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병사들이 북문 앞에서 혹시 모를 만약에 사태를 대비해 눈에 불을 켜고 밖을 살피고 있었다.

구구구구궁. 쿵.

모두 들어오기 무섭게 다시 북문이 닫히고, 소식을 듣자마자 이미 진즉에 와있던 제라드가 말에서 내려 누구보다 그들을 열렬히 맞았다.

“내 친구 스파이크.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와 주어 정말 고맙소!”

“지부에 상단원에게 상황이 급박하단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늦지 않은 것 같아 정말 다행입니다.”

스파이크 길드장과 인사를 나누던 제라드의 눈이 뒤를 향했다. 상단이 여기까지 온 데 막대한 공을 세워 준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상단원들이 수레에 가득 쌓여 있던 짐들을 내리는 사이.

가장 선두에 있던 케인과 베리가 말에서 내려 어느새 그들 옆에 섰다.

“이분들이군. 험준한 이곳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함께 해 준 영웅들이…!”

“유니콘의 케인입니다.”

“유니콘의 베리입니다.”

“어서들 오시오. 정말. 정말이지 너무 반갑고, 고맙소!”

제라드가 연신 베리와 케인의 손을 잡고 흔들어댔다.

생각지도 못한 열렬한 환영에 그간 상황이 정말 좋지 않았음을 깨닫곤 둘은 어색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아, 내 정신 좀 보게. 그래도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여기 이렇게 계속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자자 어서들 드시오! 내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소!”

시국이 시국이라 한들 귀빈에게 차 한잔 대접할 시간 없을까.

제라드의 안내를 따라 각 길드의 대표들이 걸음을 옮기고, 북문에 도착한 발리스타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오. 상단에서 왔나 보오.”

“그런 것 같소. 근데 떠드는 말을 듣기론 유니콘 길드가 왔다고 한 것 같은….”

순간, 말끝을 흐리는 칼라슈. 무엇을 본 것일까. 정면을 응시하던 그의 눈빛이 지진이 난 것처럼 심하게 요동쳤다.

“칼라슈 형 뭐 아는 사람이라도 본 거요? 왜 말을 하다 말고….”

혀를 차던 발리스타의 음성이 차츰 작아진다. 두 사내의 시선이 한곳에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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