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250)

57화.

교수를 필두로 육십에 달하는 기사 아카데미 학생들이 말을 몰고 대지를 달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잇단 전투로 첫인상 때와 달리 꾀죄죄한 모습이었지만, 황궁의 정예가 될 예비 기사들의 기세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쿠구구구구궁.

땅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는 우렁찬 지진 같고, 전신에서 일렁이는 푸른 기세는 성난 파도처럼 황량했던 대지를 일순 파랗게 물들었다. 선두에서 한참을 달리던 교수의 눈에 순간 이채가 띄었다.

국경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오크들의 모습이 육안으로 정확히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오크들의 수는 어림잡아 백은 훌쩍 넘어 보였다. 그가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로 외쳤다.

“숫자에 겁먹지 마라. 그래 봤자 오크일 뿐. 속전속결로 놈들을 짓밟는다!”

끄덕.

굳이 답하진 않았지만, 고갤 끄덕이며 따르는 학생들의 얼굴에 비장함이 깃들었다.

표정에서조차 드러나는 바짝 날이 선 기세만 보면, 삽시간에 토벌을 끝낼 모양세였다.

드르르륵. 콰앙.

히이잉!

그때, 선두로 달리던 교수의 말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자연히 타고 있던 교수도 안장에서 중심을 잃고 붕 날아가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기사는 기사, 예상치 못한 급습임에도 가까스로 지면에 안착해 치명상은 피했다.

“큭. 갑자기 이 무슨!”

교수의 눈이 말이 쓰러졌던 곳을 훑었다. 은폐되었던 사슬 줄이 숲과 숲 사이에 길목에 높게 솟아 있었다. 교수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어째서 이곳에 함정이…!?”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교수가 말에서 떨어져 구른 것을 보고 학생들이 부리나케 말을 몰고 달려오고 있었다. 교수가 황급히 외쳤다.

“아, 안 돼! 함정이다. 오지 마!”

“……?”

가장 앞서서 교수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칼라슈의 눈에도 순간 당혹스러운 빛이 일었다.

푸르르릉! 히이잉!

칼라슈가 급히 말을 멈춰 세우곤 고갤 돌려 소리쳤다.

“이 이상 앞으로 가면 안 돼!!!!”

고래고래 지르는 칼라슈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우레와 같던 말발굽 소리에 가려져 들릴 리 만무했다. 더군다나 교수가 위험에 처한 직후, 더욱 속도를 올려 달리던 학생들이었다.

쿠구구구구구.

교수가 있던 곳으로 점차 다가오는 학생들. 그리고 흙바닥에 엄폐한 채 내내 모습을 숨기던 남은 함정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히이이잉!

삽시간에 길목 한가운데에 불쑥 튀어 오른 사슬 줄.

난데없는 함정에 이를 확인하지 못한 학생들의 말들이 이에 걸려 바닥을 굴렀다.

“억…!”

“흐헙!”

“…….”

쿠구궁구궁.

앞서가던 학생들이 걸려 넘어지고, 뒤이어 달려오던 학생들마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연쇄로 넘어진다. 어처구니는 없는 상황에 교수는 입이 떡 벌어지고야 말았다.

다행히 뒤늦게 달려오던 학생 몇이 급히 말을 세워 더 이상의 사고는 막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피해는 막심했다. 육십 필에 말 중 반이 넘는 수가 즉사하거나, 바닥을 구른 후 바로 도망을 가 버린 것이다. 다수의 학생들이 바닥을 구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때.

희번뜩.

국경선 넘어 풀숲 사이에서 느껴지는 살기. 미처 상황을 수습하지 못한 교수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버럭 소리 질렀다.

“어서들 정신 차리고 전투 준비!!!”

전투 준비라니?

바닥을 구르고 앓는 소리를 내던 학생들이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스스슥.

풀숲을 헤치고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녹색의 거인. 오크였다.

“쿠오오오오오!”

푸드드득!

숲속의 새들이 하나같이 공중으로 부상하며 자릴 피했다.

그 어떤 맹수보다 강렬한 포효에 학생들의 안색이 일순 창백해졌다. 날카로운 예기를 머금던 거친 파도 같은 기세는 진즉 사라진 지 오래. 어느새 오합지졸의 모습으로 돌변한 그들이었다.

저벅저벅.

천둥과도 같던 포효 후 메아리만이 무심히 울리던 그때.

남은 오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크르르….

짐승과 같은 으르렁 소리와 붉은 안광에서 쏟아지는 살기들. 교수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으며 쏟아지는 오크들의 수를 헤아렸다.

“무슨 오크들 수가…. 다, 다들 전투 준비를….”

고작 백여 마리 정도가 아니었다. 대충에 시야에 잡히는 오크들의 수 만해도 수백에 이르는 상황. 교수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입이 옴짝달싹하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때.

어느새 말을 몰고 달려온 칼라슈가 둘러싼 오크들을 비집고 달려들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전투 준비!!!”

***

성의 외벽 위. 감긴 눈으로 무엇을 보는 것일까. 성 밖을 살피던 이든이 표정을 구겼다.

‘뭐지…?’

이상했다.

국경 인근 숲 안쪽에서 느껴지던 기척에 미세한 변화가 그의 기감에 포착된 것이다.

‘수가 많아졌다?’

기껏해야 백을 조금 넘던 기척이 그것을 훌쩍 넘어 수백에 이르렀다.

“이든. 먼저 와 있었군.”

기감으로 사방팔방을 살피던 이든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케인 대장님. 오셨군요.”

“그래. 도무지 가만히 있기 뭣해서 말이야.”

“저도 마찬가집니다.”

“상황은 어때 보이나?”

“이상합니다.”

“이상하다?”

“느껴지는 몬스터의 수가 배 이상으로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아무래도 먼저 출발한 기사 학교 학생들이 퇴각하는 게 좋을 것….”

이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상황의 심각성을 확인시켜 주듯 성 밑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장설 테니, 모든 병사는 나를 따르도록!”

“예!”

성 밖을 바라보던 케인이 입을 열었다.

“자네 말대로 무슨 일이 생기긴 생긴 모양이군. 제라드 기사 단장이 병사들을 이끌고 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어. 대체 무슨 일 이기에….”

케인의 말끝이 흐려졌다. 이어 그의 눈에 당혹스런 빛이 얼룩졌다.

“이럴 수가…!”

케인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먼저 토벌을 나서던 기사 학교 학생들이 무언가에 둘러싸여 있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육안으로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림잡아 봐도 그 수가 최소 삼백이 넘어 보였다.

“어, 어떻게… 저리 많은 오크들이 저리 한꺼번에…!”

“…아무래도 제가 가 봐야겠습니다.”

“뭐라고?”

“저대로 두면 전멸입니다. 그 전에 제가 도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안 돼. 그건 우리의 관할 밖이야. 우리가 맡은 임무는 호송. 딱 거기까지. 저들의 사정은 딱하지만 정도에 벗어난 오지랖으로 길드원까지 위태롭게 만들 셈인가. 자네!”

“…….”

자칫 매정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든은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유니콘 길드원의 신분으로서 본인이 나서는 순간, 불가피하게 길드원 전체가 움직여야 한다.

이는 곧 불필요한 희생을 낳을 수도 있다는 것.

이를 알기에 이든 역시 망설이는 것이다.

크오오오오!

성벽 아래, 멀리 국경 쪽에서 들려온 오크의 포효 소리가 한차례 들려왔다.

푸드드득!

숲을 호령하는 듯한 그 소리에 국경 밖 나무에 숨어 있던 새들이 쫓기듯 날아갔다.

‘…다르다?’

포효 속에 서린 기세가 일전 호송 때 봤던 오크와는 느껴지는 것이 달랐다.

더 야성적이고, 더 과격한 기운이 내재된 살기가 그대로 녹아 있었다.

이든의 고개가 급히 기사 학교 학생들이 있던 저편으로 향했다. 제라드 단장이 병사들을 이끌고 급히 나서고 있지만, 꺾인 학생들의 기세가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알려 주는 듯했다. 이든이 이를 악물었다.

‘무사해야 한다. 모두.’

***

붉은 안광을 흘리며 사방에서 몰려드는 오크들이 주는 압박감은 전의를 상실케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학생들의 기세를 송두리째 꺾어 버린 것은 수에서 오는 압도적인 전력 차였다.

쾌속의 검을 뿌리며 근접해 오는 오크들을 막아서던 칼라슈의 눈이 찰나 주변을 훑었다.

그의 차갑던 얼굴에 흔치 않은 변화가 일었다.

칼라슈가 이를 악물었다.

‘젠장. 베어도 베어도 도무지 끝이 없군!’

전의를 상실한 교수는 정상적인 사고 판단이 불가능한 상황.

겨우 제 몸 하나 지키는 정도였다.

말을 잃은 대부분의 학생 또한 마찬가지.

그나마 함정에 걸려들지 않은 남은 학생들이 합세해 오크들이 접근해 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힘주어 검을 쥔 칼라슈의 손등에 핏줄이 잔뜩 섰다.

파바밧! 촤아아악!

기마에서 펼쳐지는 칼스테인 가문의 쾌속의 검 초식은 말 위에서도 위력이 녹슬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대규모 전술에 빛을 발하는 검술인 만큼 그 위력은 오히려 배로 강해져 있었다.

가히 일당백의 모습으로 선봉에서 맞서는 그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전선을 꿋꿋히 지켜 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질릴 만도 하건만,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오크들의 안광에는 여전히 독기가 일렁였다. 칼라슈의 손에서 펼쳐지는 일렁이던 푸른 검기가 오크를 향해 무자비하게 휘둘러지는 그때.

“크읍…!”

이를 악문 칼라슈의 입에서 피가 왈칵 터져 왔다.

내상(內傷). 힘을 아끼지 않은 전력의 기세로 백에 가까운 오크들의 시신을 산처럼 쌓아 놨던 그였다.

아무리 칼스테인 가문의 검술이 일대다 전투에 능하고, 칼라슈의 실력이 일가를 이룬 황실 기사 수준이라 해도 온 힘을 쥐어 짜낸 상태에서 장기간의 전투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칼라슈의 입가 가장자리에 주룩 흘러내리는 실 핏물.

쾌속으로 몰아치던 그의 검이 일순 느려졌다.

가까스로 냉정을 고수하던 그의 눈이 덩달아 흔들렸다.

‘뭐, 뭐지. 갑자기 움직임이 둔해졌다…?’

처음 느껴 보는 내상의 부작용.

숱한 대련과 몇 번의 실전이 있었지만 모든 것이 단숨에 끝낸 일대일의 대결이었다. 내상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는 환경이었다.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일대다 전투.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전력을 쏟아 낸 자신의 검.

제아무리 천재라 한들 실전이 주 는 감각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었다.

한풀 꺾인 칼라슈의 기세를 알아차린 것일까. 근접해 오던 오크들의 걸음이 더욱 과감해졌다.

쿠구구구궁!

“선배!!!”

숨통을 노려오는 오크들 틈 사이를 뚫고 들려온 까랑까랑하지만, 차가운 음성.

파바바박!

지면을 박차고 오크 무리를 비집고 들어온 목소리의 주인공이 지나간 자리엔 마치 차가운 한기가 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파밧! 휘리릭 촤아악!

칼라슈만큼이나 빠른 쾌속의 검이 휘둘러지며, 에워싸던 오크의 머리가 바닥을 나뒹군다.

“괜찮으세요. 선배!”

아스테어가 칼라슈 옆에 섰다.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군. 고맙다.”

“살다 보니 선배에게 그런 소릴 듣는 날도 왔군요.”

칼라슈가 쓴웃음을 삼켰다.

호선을 그리던 그의 입가에 다시금 실핏물이 흘러내렸다.

농을 하는 와중에도 느려질지언정 쉬는 적은 없던 그의 손.

검을 휘두를 때마다 깊어지는 내상에 속에서 끌어오르는 피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더는 무리다…!’

짙은 푸른색을 띠던 칼라슈의 검기가 희미해질 때, 구원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모두 공격! 기사 학교 학생들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한다. 어서!”

파바바바바박!

제라드 단장의 외침이 들려오고, 빗살처럼 쏟아 내리는 화살이 근접해 오던 오크들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다들 괜찮은가!”

제라드 단장이 급히 달려와 학생들 옆에 섰다. 제라드의 눈이 빠르게 학생들과 교수를 살폈다.

‘이런 다들 얼어붙었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방을 예의주시하던 제라드의 눈이 힐끗 옆을 향했다.

검붉은 선혈을 쏟아 내 창배해진 안색에 칼라슈가 보였다. 그 모습에 제라드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

“미안하네.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늦었군.”

“아닙니다. 단장님 그보다 우선…! 교수님을!”

칼라슈의 말에 제라드의 시선이 다시 교수를 향했다.

바르르 떨리는 다리, 지진이 난 듯 흔들리는 동공. 얼어붙은 팔이 도무지 기사라곤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제라드의 눈에 한심하단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 있게 적진으로 뛰어들어 학생들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 것도 모자라 아무 도움도 되질 못 하는 그야말로 지휘자로선 실격인 자였다.

제라드가 급히 고갤 돌리곤 외쳤다.

“이곳의 지휘는 내가 맡겠네. 칼라슈 자네는 교수를 데리고 퇴각하게!”

“하지만…!”

그때, 옆에 있던 아스테어도 제라드 단장의 말에 동의했다.

“단장님 말씀이 맞아요. 선배!”

그때, 아스테어가 자신의 말에서 급히 내렸다.

“교수님을 태우고 어서 가세요. 단장님이 있으니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에요.”

“아스테어…!”

“칼라슈 형!”

그때, 전신에 녹색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발리스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곁으로 다가왔다.

“이곳은 우리가 맡을 테니. 어서 가쇼! 제라드 단장님하고 우리가 있는데 뭐 큰일이야 있겠소.”

칼라슈가 이를 악물며 고갤 떨궜다.

“모두 무사히 돌아와라.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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