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아스테어가 탔던 말에 교수를 태우고, 칼라슈는 급히 전투 현장을 벗어났다.
말을 몰고 달리는 내내 그의 얼굴은 도주로를 확보하고 후방을 지켜 주는 동료들을 향했있었다.
다시 고갤 정면으로 돌린 칼라슈의 눈에 동료를 두고 떠난 비통함이 어렸다.
바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던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모두를 구했을 텐데…!’
푸르르륵, 히이잉!
전력을 다해 달렸던 말이 어느새 성문 앞에 달했다.
성벽 위의 병사가 둘을 발견하곤 급히 소리쳤다.
“지금 당장 성문 열어! 빨리!!!”
구구궁.
애초에 둘만 급히 수용하면 되는 상황이라 살짝만 열렸다.
금세 열린 성문 틈 사이로 칼라슈와 교수가 황급히 들어왔다.
“괘, 괜찮으십니까…!”
문을 열었던 병사가 안절부절한 얼굴로 물었다.
칼라슈는 여전히 안색이 창백한 얼굴로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아군이 위험합니다. 어서 지원병을….”
“그래. 그거야!”
그때, 뒤에서 들려온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라슈와 병사들의 눈이 그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지원병. 지원병을 내오거라!”
넋이 나간 얼굴. 부정확한 초점. 누구에게 말을 건네는지도 모르겠다. 혼이 나간듯한 교수가 의미 모를 웃음을 터트리며 재차 말을 이었다.
“지원병만 있으면 돼. 바, 방금은 그래! 내가 방심한 거라고! 빌어먹을 함정에 걸리는 바람에…! 그래서 그랬던 거라고, 추가 지원병만 있으면 놈들을 쓸어 버릴 수 있다.”
“…….”
“지원병, 지원병을 내와라! 지원병이 없으면 계집이든 늙은이든 싹다 긁어 모아서 검을 채우고 방패를 들게 해. 내가 이끌겠다. 내가 저것들을….!”
퍼억.
“억!”
쿠웅.
그때, 허공을 향해 중얼중얼 떠들어 대던 교수의 몸이 ‘억’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을 향해 앞으로 굴렀다.
교수가 넘어졌는데 그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다.
칼라슈의 시선이 자연스레 교수가 서 있던 곳 뒤쪽에 발을 치켜든 사내를 향했다.
“무능한 지휘관은 적보다 위험한 법이지. 안 그런가?”
“이든….”
이든의 발길질에 퍼뜩 정신을 차린 교수가 핏발이 가득 선 눈으로 부라렸다.
“네, 네놈! 감히 용병 나부랭이 주제에 나를 걷어찬 것이냐…!!!!”
“입 닥쳐.”
일순 교수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감긴 눈, 여전히 무미건조한 얼굴에 나온 음성치곤 그 살기가 굉장히 짙었다.
이든의 마성(魔聲)에 교수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패배한 장수가 어디서 큰소리야. 보는 눈만 아니었다면 네놈의 혀와 눈알을 산 채로 뽑았을 것이다. 그러니 입 조심하도록. 알겠나?”
듣기만 해도 참으로 섬뜩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말에 교수는 저도 모르게 곧장 입을 잠갔다.
칼라슈가 한심하단 기색으로 교수를 바라보다 다시 이든에게 시선을 돌렸다.
“면목 없군. 패배한 장수를 모셔온 나 역시 달리 할 말이 없다….”
“…….”
이든의 기감이 칼라슈의 단전을 훑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기도.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기(氣)만으로도 지금 칼라슈의 상태가 어떤지 알아차린 그였다.
“아니. 자네는 최전선에서 내상을 입을 만큼 치열하게 싸웠어. 도리어 동료들을 두고 왔을 자네의 심정이 어떨지도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지금은 한가로이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닌 것 같군.”
이든의 말을 듣던 칼라슈가 고갤 끄덕이곤 다시 성문을 지키던 병사를 향해 고갤 돌렸다.
“혹. 출병할 수 있는 병사들이 더 있습니까?”
병사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제라드 단장님께서 대동하신 삼백의 병사가 전부입니다. 성안에 상주 중인 병사들은 예비 부대로,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하고 징집된 아이들이거나, 노인들이 전부입니다.”
즉슨 대동해 봤자 도리어 방해 요소만 될 수 있다는 것. 칼라슈가 이를 악물었다.
“젠장….”
칼라슈가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나 분했으면 힘을 준 그의 손에서 피가 주륵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말없이 굳은 얼굴의 이든.
힘이 부족하여 분해하는 사내와 힘이 있음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돕지 못하는 사내의 침묵은 그토록 무겁기만 했다.
“…다녀오게.”
익숙한 목소리에 이든의 고개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케인 대장님.”
“…훗. 자네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어차피 명령이건 뭐건 다녀올 것 같거든. 사라진 자네를 허둥대며 찾을 바엔 허락해 주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 말이야. 단 어떠한 유니콘의 지원 없이 자네만일세. 자네 혼자서도 충분히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믿기에 보내는 거야.”
케인을 향한 이든의 입가에 비로소 퍼지는 미소.
현 유니콘 길드원을 이끄는 대장으로서 어려운 결정을 해 준 그의 선택이 고마웠다.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도와주신다 해도, 제 쪽에서 사양입니다.”
“사람 참 말하는 거하고는.”
케인의 허가가 떨어졌으니, 우물쭈물할 이유가 없었다. 이든이 칼라슈가 있던 쪽으로 고갤 돌렸다.
“칼라슈. 자네의 동료들은 내가 무사히 데려올 테니 큰 걱정 말게.”
“…면목 없지만 부탁하네.”
칼라슈의 수척했던 안색이 조금이 밝아진 것 같다.
그만큼 이든의 실력을 알고, 신뢰하고 있단 뜻이기도 했다.
“저, 그럼 지금 당장 성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내내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가 성문을 열려던 그때, 이든이 고갤 저었다.
“그럴 필요 없소.”
“예?”
쾅. 파아아아앗!
그 한마디를 끝으로 땅을 박차고 쏜살같이 날아가는 이든의 신형.
하늘로 솟은 그의 모습에 병사의 입이 쩍 벌려졌다.
칼라슈의 눈이 이든이 점점이 사라진 쪽을 향했다.
“부탁한다. 이든.”
***
제라드의 지휘 아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학생들의 전방을 막아섰다.
콰아앙! 콰앙!
오크들의 둔탁한 둔기가 전방에 도열한 병사들의 방패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큭!”
“무너지면 안 돼! 신호가 떨어지기 전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한다!”
제라드의 외침에 병사들이 이를 악물곤 전방에 세운 방패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사이, 대부분이 공황상태로 제 기량을 내지 못하던 기사 아카데미 학생들 역시 정신을 차리곤 태세를 갖추었다.
전방에 병사들에게 힘을 보태던 발리스타가 소리쳤다.
“단장님! 이대론 안 됩니다. 우선 병력을 뒤로 물리고 수성을 하는 쪽이 좋겠습니다. 더 이상은…!”
‘누군 그걸 모르는 줄 알고!’
콰아아앙!
전방에 병사들을 향해 들이박다시피 하는 오크들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대열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대열이 무너진 상태에서 퇴각은 몰살당하는 지름길이다. 전열이 무너진 상태에 퇴각은 의미가…!’
콰아아앙!
그사이, 다시금 방패 병들을 향해 돌진하는 수십의 오크들.
휘어엉청.
그 무지막지한 기세에 다시 한번 대열이 크게 흔들렸다.
나서서 힘을 보태던 발리스타가 다시금 소리쳤다.
“단장님!!!!”
“젠장! 모든 병사는 대열 그대로. 유지한 채 성 쪽으로 이동한다. 기사 학교 학생들도 가만히 보고 있지만 말고 힘을 보태도록!”
제라드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학생들이 바삐 뛰어가 발리스타와 마찬가지로 방패 병 뒤에 서서 힘을 보태기 시작한다.
“궁병들은 따로 신호하기 전까지 쏘는 것을 멈추지 마라!”
파바바바밧!
푹푹! 푸욱! 푸욱!
빗살처럼 쏘아져 내리는 화살들.
그럼에도 달려드는 오크들의 수는 줄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늘고 있었다.
오크라는 족속 자체가 인간과는 신체 구조가 확연히 다른 것들이라 화살 한두 발 가지곤 쓰러지지 않았다.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오크의 수보다 뒤에서 합류하는 오크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결과적으로 힘에 부치는 것이다.
“크오오오오오오오!”
그때, 저 멀리서 재차 들려오는 포효소리. 다른 오크보다 배로는 큰 체격에 검은 갑주를 둘러맨 우두머리가 발을 구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쿵쿵쿵쿵쿵쿵.
한 걸음 내디디며 달려올 때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울리고 요동을 쳤다.
흔들리는 중심에 자연히 대열도 덩달아 움직였다.
제라드가 이를 악물었다.
“이런…! 다들!!! 정신 바짝 차려! 절대 뚫리면 안 된다!”
달려오는 그 거대한 괴물의 모습에 제라드의 외침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새하얘진 병사들과 학생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죽는다…!’
죽는다는 예감이 밀려오는 순간, 전면의 방패를 쥐던 병사들의 힘이 절로 풀렸다.
발리스타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런, 멍청이들…!!!!”
무지막한 기세로 병사들의 전열을 흔들어 놓은 괴물은 어느새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그리고 달려오던 힘 그대로 방어선으로 육중한 몸을 들이박는다.
쿠구구구궁 콰아아아앙!!!
공포가 불러온 단 한 번에 방심이, 견고했던 방어선을 일순 무너뜨린 것이다.
우르르릉!
“으아아아악!”
그 허물어짐을 시작으로 뒤이어 달려오던 오크들이 무너진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크오오오오!”
방어선이 무너진 이상, 대책 없는 퇴각은 더 큰 희생을 낳을 수도 있었다. 제라드가 이를 악물며 검을 높이 치켜세웠다.
“칫… 이렇게 된 이상 모두 전투 준비!!!”
스릉.
방어선에 힘을 보태던 기사 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학생들의 검에서 일순 피어오르는 푸른 빛이 방어선 안으로 들어선 오크들을 향해 휘둘러졌다.
꾸에에에엑!
아직 어린아이들이더라도, 그들 역시 기사는 기사였다.
돌발 상황이지만, 피어오른 검기(劍氣)는 안으로 들어서려던 오크를 멈춰 세우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제라드 단장의 기세가 더해져 학생들의 날카롭던 기세에 웅장한 힘을 보탠다.
“이대로 밀어붙여! 그리고 다시 방어선을 구축하자마자 퇴각을…!”
콰앙!
선두에서 진두지휘하며 오크들을 하나씩 베어 넘기던 제라드의 신형이 무언가에 맞고 날아갔다.
날아가던 그의 몸이 어느 나무에 처박혔다.
“커억!”
“단장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발리스타의 얼굴이 제라드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갤 돌렸다.
“크르르르르….”
방어선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했던 거구의 오크 우두머리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발리스타를 마주 노려봤다.
꿀꺽.
발리스타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타고난 강한 신체, 낙천적이지만 강자에게 주눅 들지 않는 호승심. 삼학년 중에선 칼라슈 다음으로 기사 학교에서도 인정한 인재라 일컫는 그가 눈앞에 오크에게 난생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미, 미친. 눈앞의 괴물이 정녕 오크라고…?’
“크르르르르…. 크오오오오!!!!”
단지 포효일 뿐인데, 발리스타의 몸이 뒤로 주륵 밀렸다. 음성에 깃든 기파(氣波)가 그야말로 엄청났다. 발리스타의 눈에 경악이 일었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검을 고쳐 쥐고는 땅을 박찼다.
‘시발. 에라이 모르겠다!’
발리스타 정도에 강자라면, 눈앞의 상대와 자신의 수준 차이쯤은 파악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발리스타가 정면, 눈앞에 오크 같지도 않던 무지막지한 괴물을 향해 크게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정면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면 무조건 선빵이지…!!!’
후우우웅!
“이야아아아아압!”
발리스타의 거대한 대검에 짙은 푸른 기운이 일렁인다.
그야말로 혼신을 담은, 선빵필승의 묘리가 담긴 일격. 일순 그를 마주한 오크의 안광에 붉은빛이 돌았다.
휙. 카아아아아앙!
맞부딪힌 무지막지한 힘의 여파는 대단했다.
후우우우우우우!
그들을 중심으로 반경에 강렬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일으킨 먼지가 걷히고, 발리스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온 힘을 다한 일격에도 꿈쩍도 안 한 오크. 그리고 놈의 손에 들린 사람 키만 한 태도가 이내 발리스타의 대검을 밀어쳐 낸 것이다.
“끄허억!”
쾅. 주르르륵!
오크의 반격을 못 버티고, 발리스타의 몸이 뒤로 주룩 밀렸다.
“씨발.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하네. 내가 일 합도 못 버틴다고…? 오크를 상대로?”
발리스타가 핏발 선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
오크라는 종족은 필시 위험한 몬스터 중 하나지만, 그것은 단체로 움직일 경우를 전제로 한다.
오크 개개인의 전투력은 그의 수준에서 강한 수준이 아니었고, 발리스타 역시 기사 학교 입학 전에 오크를 잡아본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크들은 뭔가 달랐다.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눈빛부터가 애초에 정상이 아니었고, 특히나 눈앞에 배로는 큰 괴물 오크는 오크라고 부르기도 미안할 정도였다.
발리스타가 땀을 훔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이거 진짜 잘못하면 골로가겠는데….”
“돼지 선배!!!”
그때, 고막을 울리는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