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250)

59화.

파바바바밧.

그들 근처로 다가오는 발을 구르는 소리. 발리스타와 오크의 눈이 동시에 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차가운 안광을 뿌리며 오크들을 베고 달려오는 한설의 여기사.

아스테어였다.

“아스테… 잠깐 돼지!?”

“멀뚱히 서 있지만 말고 어서!”

“어, 어어…!?”

옳거니!

발리스타가 고갤 끄덕이곤 재차 자세를 잡곤 눈앞에 오크를 향해 재차 뛰어들었다. 정정당당은 얼어 죽을!

일대일로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면 결국 답은 협공뿐이었다.

후우우우웅!

파바바바박!

발리스타의 바위와 같은 묵직한 기운과 아스테어의 첨예한 한기(寒氣)가 두 남녀의 기세를 마주하고도 위풍당당하기 그지없는 오크 우두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카아아아아아앙!

사방을 울리는 쇳소리에 고막이 터질 것만 같다.

그리고.

쿠우웅!

“으억!”

“흣!”

발리스타와 아스테어의 몸이 뒤로 주룩 밀렸다.

역시나 단 일 합이었다.

협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크가 휘두른 태도에 실린 무지막지스러운 힘을 버티지 못하고, 발리스타와 아스테어가 밀린 것이다.

후우우우우웅.

오크가 쥔 태도에서 발산하는 붉은 빛의 광채. 발리스타와 아스테어의 눈이 일순 흔들렸다.

“뭐야… 검기…?”

“오크가…?”

색깔만 달랐을 뿐. 그들이 본 것은 필시 검기였다. 아스테어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오, 오크가…검기를 피워 낼 수도 있는 거예요?”

간혹 그런 것들이 있다. 동물 중에서도 영특한 것들은 깨달음을 얻어 신수가 되지 않던가.

몬스터라고 다르지 않았다. 타고난 지능이 낮다 한들, 분명 특출난 놈들은 한두 마리씩 있기 마련이다.

그들 눈앞의 오크 또한 그런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사이, 정신을 차린 제라드 단장이 검을 역수로 쥐곤 땅을 짚고 일어났다. 발리스타의 눈이 힐끗 그를 향했다.

“너무 늦게 일어나셨습니다.”

“후우. 자네가 내 나이 돼 봐. 저런 것 맞고 바로 일어날 정도로 쌩쌩하지 못하다고.”

우아아아아아!

사방에서 울리는 함성과 절규 소리.

그들이 오크 우두머리를 상대하는 사이, 뚫린 방어선에서 쉼 없이 들어오는 오크들로 이미 서른에 가까운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마저도 기사 학교 학생들이 일선에서 버티고 있었기에 최소화할 수 있던 상황.

제라드가 이를 악물었다.

“시간이 촉박하네. 셋이서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저놈을 쓰러뜨려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서 전멸이야.”

상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란 말이 어울렸다.

어서 일 초라도 빨리 눈앞에 오크를 쓰러뜨리고, 전열을 갖춰 퇴각해야 했지만, 그러기엔 눈앞의 괴물이 너무도 강했다.

셋이서 동시에 덤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그때, 어디선가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후우우우우우웅.

오크 우두머리도, 그것을 마주한 셋도, 그리고 난전을 벌이던 오크들과 학생들, 병사들 모두의 눈이 강한 바람과 함께 찢어질 듯한 소음이 이는 곳으로 향했다.

파앙. 파아아아앙!

터억.

연달아 들리는 공기를 찢는 듯한 소음과 강한 바람.

모두의 시선을 잡던 그 돌풍이 일순에 잠잠해졌다. 그리고….

사뿐.

조금 전 요란스럽던 소음과는 어울리지 않게 지면으로 내려앉는 발은 가볍고 산뜻하기만 했다.

휘날리는 흑남색의 긴 장발. 그리고 착 감겨 있는 눈.

핏발섰던 발리스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 이든 형…!?”

“내가 너무 늦었군.”

곳곳에서 느껴지는 혈향들이 사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원인이었을 눈앞에 거대한 오크.

그곳으로 고갤 돌린 이든의 얼굴에 순수한 감탄이 일었다.

‘강하다.’

이곳에서 마주했던 상대 중 가장 강했다.

‘응…?’

그때, 기감으로 오크의 단전을 훑던 이든이 고갤 갸웃거렸다.

앞에 오크가 발산해 대는 저 기도.

왠지 낮설지가 않았다.

‘익숙한 기운인데?’

너무도 익숙한 기운이었지만, 앞에 오크는 더는 그에게 고민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쿠오오오오!”

일순 일었던 정적 속에서 놈의 포효와 함께, 사방에 재차 함성이 일었다.

재차 시작된 아비규환의 전투 현장. 그것은 마치 신호탄 같았다.

오크 우두머리에 태도에서 다시 붉은 광채가 어렸다.

우우우웅.

이든이 이곳에 온 뒤로 오크 우두머리의 안광은 줄곧 그를 향해 있었다.

놈 역시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이곳에 가장 강하고, 위험한 이가 누군지.

후우우우우우우웅!

어렸던 붉은 광채가 순간적으로 이든을 향해 날아들었다.

사람 몸뚱이만 한 거대한 크기의 무기와 어울리지 않는 재빠른 검격이었다. 아차하면 그대로 몸이 두동강 났을 것이다. 하지만.

카아아아아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오크의 태도가 뒤로 훅 밀려났다.

맞부딪힌 강한 힘과 힘이 일으킨 파장이 전투 현장에 다시금 퍼졌다.

오크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마비라도 된 듯 태도를 쥔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후우우우웅!

대지에 몰아친 엄청난 돌풍과 함께 싸움터를 휩쓴 먼지바람 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뛰쳐나온다.

“…해!”

필시 이든의 목소리였다.

제대로 듣지 못한 발리스타가 재차 물었다.

“뭐라고. 이든 형!?”

“이 틈에 퇴각하라고 멍청이들아!”

“……!”

휘둥그레진 발리스타의 눈동자가 찰나 제라드와 아스테어의 눈과 허공에서 부딪혔다.

끄덕.

이든의 의중을 깨닫고,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라드 단장이 황급히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로 외쳤다.

“퇴각!!!! 퇴각하라!!!!!!”

제라드 단장의 외침과 함께, 눈치만 보던 병사들도 이내 상황을 파악하곤 삽시간에 흩어지기 시작한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난데없는 상황에 오크들은 처음으로 어리둥절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멍청하게 서서 멀뚱거리는 오크들을 향해 오크 우두머리가 버럭 소릴 질렀다.

“크오오오오오오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분명 멍청히 서 있지만 말고 도륙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우두머리의 외침과 동시에 정신을 퍼뜩 차린 오크들이 괴성을 질러 댔다.

크오오오오!!!!

도주와 추격이 한데 뒤엉킨 아수라장 속에서 이든과 오크 우두머리는 고요히 마주할 뿐이었다.

이든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었다.

“그래. 그래야지… 네놈도 날 두고 어딜 갈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는군.”

“크르르….”

알아들은 것일까. 으르렁거리던 오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때, 이든의 입이 재차 열렸다.

“근데 말이야.”

“……?”

“내가 네놈들의 추격을 놓아둘 만큼 자비롭진 않거든.”

쾅!!!!

이든의 발이 땅을 내리찍었다.

쿠르르릉.

발이 닿은 곳을 필두로 지면이 흔들리고 거미줄처럼 쩌억쩌억 금이 갔다. 흔들리는 지면에 병사와 학생들을 쫓던 오크들의 움직임이 휘청거리며 멈추어 섰다.

오크 우두머리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주춤하던 그때.

파밧!

어느새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이든의 흑색 검이 우두머리 오크의 숨통을 노리고 쏜살같이 다가오고 있었다. 허를 찌르는, 생각지도 못했던 검격에 막을 틈이라곤 없었다. 우두머리 오크가 황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쿠우웅!!!

착지를 염두에 두지 않은 본능에 가까웠던 회피.

몸을 날렸던 오크 우두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크르르르….”

“빗나갔나?”

툭.투둑.

이든의 검신에 초록 피가 떨어지며 땅바닥을 적시었다.

바닥을 굴렀던 오크의 팔 한 짝이 몸뚱이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아쉽군.”

검신에 흐르는 피를 털어 내던 이든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대단한데, 피하지 못했다면 네놈 목이 떨어졌을 것이야.”

“크르르르르…. 크오오오오오오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도 친 것일까. 오크의 괴성은 흡사 천둥소릴 떠올리게 했다.

우두머리의 괴성을 가까이서 듣던 몇몇 오크들은 귀를 부여잡았다.

사자후의 일종으로 내기(內氣)가 담긴 음파(音波)에 고막이 찢어진 것이다.

이든은 이미 진즉에 기막으로 귀를 틀어막은 후였다.

이든이 검을 고쳐 쥐었다.

“얼마든지 덤벼. 기꺼이 상대해 주마. 괴물.”

***

우르르르!

숨이 막히는 추격전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치는 병사들과 이를 뒤쫓는 오크들.

그리고 오크의 추격을 최대한 막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학생들의 모습은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다가오는 그들의 모습에 성벽 위에 있던 병사가 밑으로 소릴 질렀다.

“제라드 단장님께서 오신다. 어서 성문 열어!!!!”

“하, 하지만 오, 오크들이 들어오면 어쩌려고!”

“야, 이 멍청한 새끼야. 병력들 몰살되면 우리까지 뒤진 목숨이라고, 빨리 쳐 열어!!!”

거친 욕설이 오가고 나서야, 굳걷히 버티던 성문이 차츰 열리기 시작한다.

성안에 주둔 중이던 병사들이 일제히 밖으로 뛰쳐나와 퇴각 중인 병력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성문 앞에 도착한 제라드가 멈추어 서 병사들을 먼저 들여보냈다.

“나와 학생들이 추격을 막겠다. 어서들 들어가!!!”

제라드와 기사 아카데미 학생들의 보호 아래, 병사들이 부리나케 성안으로 들어서던 그 순간.

“크억!”

가장 뒤처져 있던 병사 한 명이 그만 바닥을 굴렀다.

“으으….”

한눈에 봐도 어려 보이는 앳된 얼굴. 성안에서 주둔 중이었어야 할 어린 소년 병사였다.

제라드가 이를 악물었다.

“젠장. 어서 일어나!!!”

들리긴 하는 걸까. 아니면 공포에 질려 몸이 얼어붙은 것일까.

앳된 소년병 뒤론 어느새 뒤를 밟은 오크들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뒤를 바라보던 소년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던 그때였다.

파바바박! 콰카카카캉!

봄은 진작에 왔건만 일순 새하얗게 얼어붙은 땅바닥.

소년병의 눈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꼬맹이!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일어나!”

소년병의 눈이 차가운 안광을 흩뿌리던 아스테어와 맞부딪혔다.

“어서!!!”

재차 소릴 지르는 아스테어의 음성에 소년병이 퍼뜩 정신을 차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성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그사이, 아스테어는 코앞까지 당도했던 오크들을 막아섰다.

휘익! 촤아아악!

그녀가 쥔 검에서 차가운 한기마저 느껴지는 검기가 휘둘러질 때마다 오크들 대여섯이 비명횡사했지만, 쓰러뜨리는 숫자에 비해 몰려오는 오크들의 숫자가 기하학적으로 많다보니, 죽여도 막아낸다는 느낌 자체가 없었다.

사방팔방 검기를 뿌리며 단신으로 오크를 막아서던 그녀의 등 뒤로 발리스타가 소리쳤다.

“아스테어! 뒤는 내가 막을 테니 너는 어서 들어가!!!”

“아니! 선배는 소년병을 지켜 주세요. 제가 최대한 놈들의 움직임을 막겠습니다!!!”

말만 들으면 몰려오는 오크들을 다 막아 낼 기세였으나, 실상은 척 봐도 역부족으로 보였다.

아스테어가 점차 수세에 몰리며 뒤로 밀리던 그때. 소년병이 성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마지막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발리스타가 땅을 박차고 아스테어가 유지하던 방어선으로 뛰어들었다. 최후의 방어선에서 고군분투하는 그들을 향해 제라드가 외쳤다.

“모두 성안으로 들어섰네! 자네들도 어서…!”

제라드의 말이 채 끝나기 전, 검을 휘두르던 발리스타가 찰나 고개를 돌리고는 씩 웃었다.

“단장님께선 어서 들어가십쇼!”

제라드의 눈이 일순 흔들렸다.

“자네들은 어찌하려고…!!!”

“저희들은 성문이 닫힐 때까지 최대한 막아 보겠습니다!”

“멍청한 소리. 지금이라도 달리면 모두 살 수 있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발리스타와 아스테어가 휘두르는 검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단 거 단장님께서 더 잘 알지 않수!”

“……!”

“어서 들어가쇼! 그 사이, 우리가 어떻게든 버텨 보려니까.”

“다들….”

“아 젠장. 어서 들어가라고요! 그래야 우리도 어떻게 살길을 도모할 거 아뇨!”

“알겠네…. 수습하는 동안 어떻게든 살아남게!”

끄덕.

발리스타가 말없이 끄덕이고, 그 사이, 아스테어의 차가운 안광은 내내 근접해 오는 오크들을 향해 있었다. 두 학생이 일당백의 기세로 오크의 추격을 막아 내는 그사이, 제라드가 마지막까지 들어서고 나서야. 성문이 철벽처럼 굳게 닫히었다.

쿠웅.

성문이 온전히 닫힌 것을 확인한 발리스타의 눈이 정면 쪽, 쉴 틈 없이 검격을 뿌려 대던 아스테어를 향했다.

“아스테어!!”

발리스타의 음성에, 아스테어가 손은 여전히 바삐 놀리며 살짝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봤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스테어의 눈은 ‘무슨 일이냐’라는 빛이었다.

발리스타 재차 다급히 외쳤다.

“튀어!!!!”

발리스타의 말을 듣던 아스테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 지만 살겠다고. 미친 돼지 선배가…!”

그사이, 발리스타는 이미 저만치 도망간 후였다.

아스테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했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 역시 어느새 발리스타를 따라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같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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