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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60/250)

60화.

일검, 일검(一劍)의 위력이 남다르다. 비록 기습을 허용하여 팔 하나를 잃었지만, 인간과 다른 타고난 신체에서 나오는 괴물 같은 근력은 역시 쉬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붉은 광채들, 이든이 손에 쥔 흑색 검을 번개와 같이 휘둘렀다.

카강카강카가가강!

쾌속의 검격이 상대의 숨통을 노리며 공방을 주고받는데, 도저히 몇 번을 휘두르는 것인지 범부들은 두 눈 뜨고도 쫓을 수가 없다.

이는 비단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오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든과 우두머리 오크가 치열한 싸움을 하는 사이, 빈틈을 노리던 오크들이 몇이나 비명횡사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덕분에 이든의 주위엔 떨어진 오크의 수급이 한가득 뒹굴고 있었다.

휙.

“꾸엑!!!!”

또다시, 이든의 틈을 노리며 급습하던 오크 한 마리의 목에서 초록 피를 내뿜으며 머리가 바닥을 구른다. 이든의 입가가 삐죽 올라갔다. 무미건조한 얼굴에 핀 흔치 않은 미소, 그와 검을 주고받던 오크 우두머리가 눈을 크게 떴다.

파밧!

그때, 오크 우두머리가 땅을 박차곤 이든의 검격을 피하며 멀찍이 뒤로 떨어졌다.

놈이 다시 천둥과 같은 괴성을 질러 댔다.

“크오오오오!!!”

다 똑같은 괴성으로 들리건만, 뭔가 남다른 의사소통이 있는 모양이다. 우두머리의 포효에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며 이든을 노리던 오크들이 급히 성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신을 둘러싸곤 목숨을 노리던 기척이 일제히 움직이자, 이든이 입을 열었다.

“대어를 잡지 못할 바엔 피라미들이라도 잡아 보겠다. 그거냐? 근데 어쩌지?”

“……?”

“난 대어와 피라미 모두 놓칠 생각이 없거든.”

“……!”

파앗!!!

아차 싶을 땐 이미 늦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든의 신형은 어느새 발길을 옮기던 수백의 오크 무리로 향해 있었다. 신법을 밟고 쏜살같이 쏘아져 어느새 오크 무리 위에 올라선 이든의 모습에 오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씨익.

이든의 입가에 피어오른 섬뜩한 미소. 그것이 놈들이 눈 안에 담았던 마지막 장면이었다.

콰르르르릉! 쿠르르릉!

마치 오크 무리 위에 검은 먹구름이 몰려든 것만 같았다.

이든의 검신에 피어오르는 검은 마기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리고….

마치 번개처럼, 검은 섬광이 오크 무리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꾸에에에엑!”

목표물을 상정해 두지 않은, 그저 대지를 향해 쏟아 내는, 마(魔)의 검기(劍氣)는 눈 깜짝할 새에 수십에 당하는 오크들을 도륙해 버렸다.

난자당했다는 말이 이만큼 잘 어울릴 수가 있을까.

오크의 피로 흠뻑 적셔진 대지에 악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쿠오오오오오!

쿠웅. 쿵. 쿠웅.

찰나의 순간에 수십의 수하들이 끔살당했다. 보다 못한 오크 우두머리가 땅을 박차며 달려왔다.

거구의 몸에서 나오는 엄청난 힘에, 대지가 지진이 난 것처럼 요동을 쳤다.

이든의 고개가 근접해 오는 우두머리를 향했다.

“쿠오오오오오!”

거친 포효와 함께 붉은 섬광이 이든을 향해 내려찍듯이 덮쳤다.

콰아아아앙!

하지만 이내 붉은 섬광은 허공을 가르고 자욱한 연기만 피워 댔다.

뿌옇게 일은 먼지 속에 오크 우두머리의 붉은 안광이 연신 주변을 살폈다.

“멍청한 것. 날 죽이겠다고 수하들이 있는 곳으로 냅다 검을 휘두르다니.”

먼지가 일은 곳 반대 방향에서 들리는 익숙한 음성. 어느새 뒤를 점한 이든이 혀를 차고 있었다.

“……!”

이든이 아닌, 애꿎은 수하들만 잡아 댄 우두머리의 검이 재차 이든의 음성이 들린 곳을 향해 홱 돌아 날아가던 그 순간.

쐐애애애애액!

허공 섭물을 일으킨 이든의 흑색 검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오크 우두머리의 등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

오크 우두머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놈의 눈이 자신의 허리를 향했다.

주룩.

깊게 새겨진 검흔에서 초록 피가 왈칵왈칵 쏟아지고 있었다.

쿠웅.

뒤늦게 찾아온 통증에 오크 우두머리의 한쪽 무릎이 땅에 닿았다.

“크르르르….”

“참으로 대단한 몸뚱이야. 팔 한 짝이 날아가고, 등허리에 치명상을 입고도 투지가 전혀 죽지 않았어.”

“…후욱…후욱….”

“시원치 않은 놈이라면, 진작에 죽었겠지. 네놈이 사람이었다면 참으로 탐나는 인재였을 것이야.”

저벅저벅.

이든이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태산과 같은 웅장한 기운이 우두머리를 짓눌렀다.

“크르르….”

우두머리조차 이든의 기운을 버티질 못하는데, 남은 조무래기들이야 오죽할까.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깔아뭉개는 듯한 힘에 오크들이 버티질 못하고 하나둘씩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건 사람이었을 때 얘기고. 그렇지?”

화르륵!

이든의 흑색 검에서 어둠마저 삼킬듯한, 무저갱 같은 시꺼먼 마기가 피어올랐다.

“덕분에 잘 놀았다.”

쿠르르르릉!

휘두른 검신에서 마기가 쏘아졌다.

마치 집어삼키듯, 이든의 검격이 지나간 자리엔 죽음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듯 오크들이 흔적조차 없이 베어지고, 갈라지고 있었다.

“…크, 크오오오오!”

포효를 내지르며 남은 힘을 쥐어짜 내어 벌떡 일어서는 우두머리.

남은 한 손에 쥔 거대한 도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빛이, 흑색의 검격을 향해 휘둘러졌다.

정상이 아닌 몸이었음에도, 우두머리의 검에서 쏘아진 검기의 위력은 이전과 비교해도 조금도 모자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목숨을 내건 검격이었기에 그 어떤 일격보다 가장 강한 위력을 보여 주였다.

태산과 괴물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힘 대 힘의 대결은 그토록 대단했다.

콰과아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여파를 보여주듯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다.

후우우우웅.

퀴퀴한 모래바람이 걷히고, 오크들의 살점과 혈향이 장식한 죽음만이 그득한 그곳에 유일무이하게 살아남은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이만하면 한시름 놓은 건가.”

나직이 중얼거리던 이든이 초록 피로 흠뻑 적셔진 땅을 박찼다.

팍. 파아아아아앗!

그의 신형이 성 쪽으로 쏘아져 날아갔다.

***

쿠구구구궁.

철벽 같은 성문이 닫히고 나서야 비로소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모두가 하나같이 피폐하고 지친 모습들.

죽음에 늪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생존자들의 몰골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병사들은 물론이거니와, 학생들 역시 몸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모든 병사와 학생들이 마지막까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들어온 제라드 단장의 눈은 생존자들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굳게 닫힌 성벽 넘어 무언가를 응시하는 그의 눈엔 비통함이 그득했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애꿎은 젊은 아이들이 희생되었구나…!’

처음부터 교수와 학생들 먼저 보내지 않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토벌에 신중을 기했더라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제라드는 후회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단장님.”

애석해하던 제라드의 눈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거기엔 스파이크 길드장과 유니콘 길드원이 함께 있었다.

제라드와 눈이 마주친 스파이크가 침울한 얼굴을 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하아… 병사들의 희생이 너무도 컸습니다.”

제라드의 시선이 닿은 곳.

병사들이 모여 있던 곳에 성의 주민들이 달려와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온 자식의 모습에 기뻐하는 부모의 모습과, 돌아오지 못한 자식과 남편의 소식에 대성통곡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교차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제라드 단장을 어느 누구도 쉬이 위로할 수가 없었다. 이는 비단 케인과 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하를 잃은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스파이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상황에서 이만하길 참으로 다행이지 않습니까.”

“…예.”

“그나저나 마지막 희생을 자처했던 학생들이 무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떻게든 정비하는 대로 그 두 학생을 찾으러 나서고 싶지만, 지금 병사들의 상태가 저래선….”

제라드 단장의 시선이 재차 닿은 곳. 병사들도 그렇고 기사 아카데미의 학생들마저 다시 출병 가능한 상태가 안 되었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음성.

제라드 단장의 눈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칼라슈….”

“단장님. 아까 그 말… 학생 두 명이 희생을 자처했다니요?”

“…발리스타와 아스테어가 뒤처진 소년병을 구하기 위해 오크들의 추격을 막다가 결국… 성으로 돌아오지 못했네.”

“그, 그런…!”

“미안하네. 내 부족함으로 그 아이들을 지켜 내지 못했어….”

“제가 가겠습니다.”

“…뭐?”

칼라슈가 주섬주섬 붕대를 풀었다.

“제게 말 한 필만 내주십시오. 제가 친구들을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그 성치 못한 몸으로 저 밖을 다시 나서겠단 말인가!”

“많이 회복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동료들을 찾아올 테니….”

“닥치게…!”

“……!”

“절대 허가해 줄 수 없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당연한 것을 묻는 건가. 내 불찰로 애꿎은 병사들 수십이 목숨을 잃었어! 그리고 그런 병사들을 지키겠다고 학생 둘이 나서서 추격을 막겠다고 뛰어들었네. 이 상황에 자네마저 잃는다면 내가 어찌 고갤 당당히 들고, 이들을 진두지휘할 수 있단 말인가!!!”

“……!”

크게 뜨여진 칼라슈의 눈동자가 담고 있는 제라드의 모습은 교수에겐 볼 수 없던 책임자로서의 고뇌가 담 겨있었다.

그런 제라드의 고충이 어떤지 알기에 더는 막무가내로 나서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다리의 힘이 풀리고, 칼라슈의 한쪽 무릎이 땅에 닿았다.

칼라슈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그들이 희생할 필요마저 없었을 것을…!”

부르르 떨리는 칼라슈의 손등에 핏줄이 가득 섰다.

어찌나 분하고, 어찌나 세게 쥐었으면 손등 위로 솟은 핏줄이 터질 것만 같이 검붉었다.

“누가 희생을 해?”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질끈 감겨 있던 칼라슈의 눈이, 차마 위로를 전하지 못하던 유니콘 길드원의 눈이, 그리고… 제라드의 고뇌에 차던 눈이 동시에 한곳을 향했다.

집중되는 이목 속에서 기다란 흑남색의 장발을 바람 따라 휘날리며 유유히 지면을 내리밟는 한 사내.

타박.

이든의 두 발이 사뿐히 땅에 닿았다. 모두의 앞에 선 그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희생은 또 무슨 말이고요?”

제라드가 고갤 푹 숙였다.

“면목 없네…. 자네의 그 놀라운 힘으로 시간을 벌어 주었네만, 모두를 구해 내진 못했어….”

“누가 돌아오지 못한 겁니까?”

이번엔 칼라슈가 대신 답했다.

“발리스타와 아스테어가 돌아오지 못했네.”

“발리스타가…?”

발리스타가 돌아오지 못했단 말에 이든 역시 적잖이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옆에 있던 제라드 단장이 이든의 물음에 대신 답했다.

“성으로 퇴각 중에 소년병 하나가 뒤처졌었네…. 오크의 추격으로 소년병의 생사가 위태했을 때, 아스테어와 발리스타 학생이 뛰어들어 소년병을 구하고 오크의 추격을 멈춰 세웠네. 그 후로 그 둘이 어찌 되었는지는 파악조차 되질 않는 상황이고….”

“발리스타가….”

굳어진 이든의 얼굴. 그의 고개가 돌려져 저 성벽 너머를 향했다.

꽈악 쥐어진 두 손. 당장이라도 뛰어가 구하고 싶지만, 독단적으로 할 일은 아니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지금 그의 생각이 어떤지 모를 리 없다.

옆에 있던 케인이 입을 열었다.

“이든.”

“대장님.”

“아는 친구인가.”

“예. 일전 무도 대회 때 만난 녀석입니다.”

“그랬군. 그래서 그토록 표정이 안 좋았던 거군.”

“저… 대장님. 드릴 말씀이.”

“…훗. 다녀오게.”

이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케인의 허락이 미리 떨어졌다.

이든이 흔치 않게 놀란 얼굴을 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얼굴을 봐선 어차피 내 허락이 아니더라도 구하러 나갈 기세던데.”

“…죄송합니다.”

“무작정 뛰쳐나간 자네를 걱정할 바엔, 차라리 허락을 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맞는 것 같네. 그러니 다녀오게. 나와 유니콘 길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일세. 이 정도면 충분한가?”

이든이 씩 웃었다.

“차고도 넘칩니다.”

케인도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꾸욱.

이든의 발이 땅을 밟고 다시 신법을 써서 성 밖으로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

칼라슈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이든.”

“…칼라슈?”

“친구들을 부탁한다.”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다녀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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