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250)

62화.

중간에 뚝 멈췄던 이든의 흑색 검이 다시 움직였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움직이면 어쩔 건데.”

기어코 무시하며 어느 지점을 향해 멈추는 이든의 칼끝.

검을 겨눈 이든이 재차 입을 열었다.

“나름 기척은 잘 숨겼다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그쪽이 대장이지?”

-……!

대답은 없었지만, 눈치가 없지 않은 이상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대장이라며 지목했던 이든의 칼끝이 움직이며 주위를 살폈다.

“서른 명이라. 고작 나 하나 잡겠다고 많이도 왔군.”

-…….

주위를 빙 두르던 이든의 칼끝이 재차 대장 쪽을 향했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을 보니 몬스터는 아닌 것 같고. 그런데 나를 침입자 대하듯이 하는 것을 보니 여기서 사는 사람들 같은데. 악취미군. 이딴 곳에서 살고 싶냐. 너희들은.”

-…….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다만 대답 대신 화살 하나가 이든을 향해 쏘아졌을 뿐이었다.

쐐애애액! 퍽!

엄청난 속도로 날아든 화살.

하지만 이든은 가볍게 몸만 틀어 어렵지 않게 피해 냈다.

-놀랍군. 도무지 맹인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야.

“사람이 대화로 풀려 하면 응당 말로 할 것이지, 다짜고짜 화살이라. 이거 선제공격이라 봐도 되겠나?”

-선제공격이 아니다.

“음…?”

-협박이라면 모를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하지만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벅저벅.

한쪽에서 이곳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이든의 고개가 기척이 이는 곳으로 향했다. 곧이어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하, 하하하… 이든 형.”

“발리스타?”

“본의 아니게 계속 이든 형에게 폐만 끼치는구려.”

이든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이오?”

“그렇게 됐소.”

“…….”

발리스타 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도망쳤던 아스테어 역시 이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인질이라. 너무 계획적인데.”

-당신은 우리에게 위험인물로 인식되었다. 단신으로 숲을 이렇게 만든 괴물에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다가갈 정도로 우린 어설프지 않아. 허튼짓하는 순간, 친구들의 몸에 화살 구멍을 새겨 주지. 좋은 말로 할 때, 칼 버려.

“…….”

이든은 말없이 주위를 살폈다.

사방을 둘러싼 의문의 기척들. 저마다 살기는 느껴졌지만, 그 살기가 향한 곳은 자신이 아닌 오롯이 발리스타와 아스테어를 향해 있었다. 제아무리 이든의 실력이 신검합일에 이르렀다 한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이들을 지켜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제대로 당했군.”

이든이 검에서 손을 놓았다.

챙그랑.

흑색 검이 바닥을 나뒹굴고, 주변을 에워싸던 의문의 인형들이 여전히 경계하는 얼굴로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슥.

바닥을 구르던 흑색 검을 회수한 인형 중 하나가 이든의 목을 향해 단도를 겨누었다.

“이게 의미 있겠나 싶지만, 명심해 둬. 허튼짓하면 네 친구 목숨 보장 못 해.”

“나도 충고 하나 할까.”

“……?”

이든을 향해 고정되었던 인형의 눈이 부릅 떠졌다.

이든의 전신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마기. 그의 목을 겨누던 단도 칼끝이 점차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살기였다.

사람의 것이라고 믿기 힘든 농도 짙은 살기가 사방에 밀집한 인형들의 정신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이든이 천천히 입을 뗐다.

“자칫 실수해서 친구들 건드렸다간 그땐 너와 일행들을 포함해 이 숲 어딘가 있을 네놈들의 사돈의 팔촌까지 씨를 말릴 줄 알거라.”

“…새겨듣지.”

스스스….

전신에서 피어오르던 마기가 서서히 가라앉는다.

동시에 살기에 노출됐던 인형들 역시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든의 살기에 꽤나 숨이 턱 막혔던 모양이었다. 이든이 재차 입을 뗐다.

“그래서 인질까지 단단히 준비하고 이리 접근한 거면 뭔가 목적이 있단 소린데. 어쩔 생각이지?”

“알 것 없고. 조용히 따라오도록.”

이든의 숨통을 담보로 잡는 것은 더는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걸까. 이든에게 겨눴던 단도를 회수한 인형들의 대장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이든 역시 말없이 따라가고 그 뒤로 발리스타와 아스테어가 바짝 붙어 따랐다.

주변을 힐끔 살피던 발리스타가 앞장서 걷던 이든을 조용히 불렀다.

“이든 형.”

“……?”

“이것들 엘프요. 엘프.”

“엘프?”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알겠소. 귀를 보니 엘프가 확실하오.”

이든이 고갤 갸웃거렸다.

엘프라 어디서 많이 듣던 단어였다. 곰곰이 떠올리던 이든의 얼굴에 흔치 않은 변화가 일었다.

‘생각났다. 어디서 많이 들어 봤다 했더니, 일전 엘프 종족을 구해 준 적이 있었지.’

이든이 기억을 되짚는 내내 발리스타는 주절주절 떠들어 대기 바빴다.

“레온하르트 영지 근처 어딘가에 엘프 종족이 서식한단 얘긴 들어 보기만 했지. 이렇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오. 신기한데….”

신기하듯 보는 것은 비단 발리스타뿐만이 아니었다.

아스테어도 같은 반응이었냐고?

그럴 리가….

발리스타와 아스테어를 인질로 잡고 있던 엘프들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발리스타를 보며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표정이었다.

저벅저벅.

뚝.

얼마나 걸었을까.

앞장서 걷던 엘프들의 대장이 우뚝 멈춰 섰다.

“…….”

한참을 앞에 서서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이내 다시 앞장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든 역시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그때.

우우웅.

그의 기감에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이는 비단 이든만이 느낀 것이 아니었다.

내내 아무 말 없이 걷던 아스테어도 이든과 같은 표정이었고, 발리스타는…. 역시라고 해야 할까.

재차 입 밖으로 떠들어 댔다.

“이든 형. 형도 방금 느꼈소? 이거 나만 느낀 거 아니지? 뭔가 이상한 걸 쓱 지나간 듯한 느낌이었는데?”

“나 역시 느꼈소.”

“그, 그렇지? 근데… 뭔가 이상한데, 아까 그 이상한 감촉 이후로 뭔가….”

“다른 숲을 걷는 느낌이군요.”

내내 침묵을 지키던 아스테어의 무거웠던 입이 비로소 열렸다.

그녀의 차가운 눈이 사방을 훑어대기 시작했고, 이든 역시 동조하듯 고갤 끄덕였다.

“그래. 익숙한 느낌이어서 무언가 했더니 이제 알 것 같군. 마치….”

진법 안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과거 무진이었던 시절.

무림에서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숱하게 봐 왔다.

구파일방의 구파가 그러했다.

화산부터 곤륜, 무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대 문파가 침입자에 대비해 사방에 진법을 설치해 두지 않았던가. 비단 이는 신교라고 다르지 않았다.

“마치 뭐요?”

발리스타가 궁금한 듯 물었으나. 이든은 단지 주의만 주었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허튼짓은 하지 마시오. 그럼 꽤 골치 아파질 것 같소.”

앞서가던 엘프 대장이 듣고는 놀란 얼굴을 하며 입을 뗐다.

“감이 좋군. 네 말대로다. 들어선 이상 괜한 허튼짓 했다간 이곳에서 영영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역시 그랬군.”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이용한 기문진법은 아니겠지만, 그와 비슷한 것이리라.

사방에 둘러싸인 묘한 분위기를 뚫고 앞서가던 엘프의 걸음이 재차 멈추었다.

“이, 이건….”

무엇을 본 걸까.

발리스타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한곳을 응시했다.

이는 아스테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설마 말로만 듣던 엘프 숲 궁전….”

발리스타와 아스테어의 흔들리는 눈이 고정된 곳.

거기엔 높이를 헤아릴 수 없는 커다란 성문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높이만 해도 하늘에 닿을 진데, 그 두께는 얼마나 두꺼울까. 그야말로 철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이렇게 커다란 성이 어떻게 여태 인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거지…?”

“아까 다른 숲을 걷는단 느낌이 든다 했을 때, 그 이유와 같은 것이겠지. 안 그런가?”

발리스타의 물음에 답한 것은 이든이었지만, 이든 역시 재차 확인하듯 앞장선 이들의 대장을 향해 물었다. 그가 고갤 끄덕였다.

“맞다. 성을 중심으로 숲 사방에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지. 안에서 밖을 볼 순 있어도, 밖에서 우리 성을 알아차릴 순 없어. 설령 들어서도 발동된 마법진에 갇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지. 반대로 우리의 도움 일절 없이 이곳에서 나가려들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우리 엘프 종족이 세상과 단절된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던 이유다.”

말을 마친 그가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고 성문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이에 반응하듯 문 안쪽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쿵. 쿠웅. 철컹. 철컹.

밖으로는 진법이, 성문엔 기관진식이라도 걸려 있던 모양이다.

그야말로 철통 보안이 따로 없었다.

구구구구궁….

거대한 성문이 열리는 장면은 웅장하다 못해 압도적이다.

마치 외부인을 철저하게 거부하듯 위압감마저 풍기고 있었다.

쿵.

완전히 열어 젖혀진 성문 안으로 들어서니, 비로소 셀 수 없이 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대충 느껴지는 기척의 수만 놓고 보면 제국의 수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성문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마을이었다. 시장통 같은 풍경이 아닌, 말 그대로 엘프들의 보금자리만 있는 마을의 모습.

그리고 길을 따라 더 안쪽으로 들어서다 보면 또 다른 내성이 보인다.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외성과 내성을 나누어 신분 차이를 두는 것.

‘호오. 기세들이 하나같이 대단한데.’

내성 앞에 선 이든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든의 기감이 훑고 지나간 곳. 그곳엔 엘프 정예병이 내성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첨예한 기도 앞에 발리스타와 아스테어 역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척.

내성 성문 앞에 보초를 서던 정예병 둘이 양옆에 서서 창을 가로질러 더 이상의 출입을 제지했다.

“이 이상은 용건이 없을 시 더 이상의 출입은 불가합니다.”

“왕의 명을 받고, 죄인을 이송하고 오는 길이오. 소속 패를 확인해 보시오.”

정예병에 제지에 앞장서 있던 엘프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보이자, 양쪽에 정예병이 일제히 창을 치웠다.

“확인됐습니다. 들어오십시오.”

구구구궁.

내성 성문이 열리고

길을 튼 성문 길목 사이로 걷던 발리스타가 구시렁댔다.

“아니, 우리가 왜 죄인이야? 안 그래. 다들!?”

“…….”

아스테어도 말은 않았지만, 상당히 기분 나빠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와 달리 여전히 무미건조한 표정을 고수하던 이든의 얼굴엔 흔치 않은 변화가 일었다.

‘안쪽은 더 훌륭한데?’

내성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날카롭게 날이 선 기도(氣道).

외부인을 향한 경계심으로 비롯된 그 예기는 지금은 단지 기운뿐이지만, 언제든 그들을 향해 시퍼런 칼날을 들이밀 것 같았다.

내성을 안쪽을 한참 걷던 중.

앞서가던 이의 걸음이 덜컥 멈추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움직임 역시 멈추어 섰다.

무언가라도 느껴진 걸까.

마치 응시하듯이 고갤 든 이든의 착 감긴 눈이 어느 한곳을 향한다. 그의 기감이 향한 곳.

거기엔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된 태사의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는 한 엘프가 있었다.

털썩.

“고귀하신 숲의 왕을 뵙습니다.”

가장 앞장 서 있던 엘프가 한쪽 무릎을 꿇고 외치자. 발리스타와 아스테어에게 검을 겨누던 다른 엘프들 역시 마찬가지로 따라서 예를 갖춘다.

그 모습에 태사의에 앉아 있던 이가 손을 저었다.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다.

그들의 왕의 시선은 오롯이 한곳을 향해 있었다.

그가 태사의에 기댔던 등을 떼고는 기대의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됐다. 그보다… 당신이었군.”

내내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엔 무미건조한 얼굴로 마주 선 사내가 있었다.

왕의 눈이 담고 있던 사내, 이든이 입을 열었다.

“숲을 저 꼬라지로 만든 놈을 말하는 거면, 나 맞소.”

“…뭐, 그것도 그거지만. 내가 말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오.”

“……?”

“수도에서 우리 딸 구해 준 게 당신이지?”

“…응?”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딸을 구했다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엘프의 왕이 재차 입을 열었다.

“딸이 아무 말도 없이 가출했다가 인간 세상에서 큰 위협을 당했지. 납치까지 당해 노예 상인에게 붙잡혀 팔릴 뻔한 것을 당신이 구해 줬다 들었소.”

‘설마….’

이든이 입을 쩍 벌렸다.

왕이란 작자의 말을 듣다 보니,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일전 테이머 길드에서 구해 줬던 엘프.

이든의 얼굴에 보기 힘든 경악이 어렸다.

‘그때 그 엘프가… 저 양반의 딸이라고? 그것도 왕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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