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250)

63화.

태사의에 앉아 있던 엘프의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벅저벅.

산뜻하다 느껴질 만큼 가벼운 발걸음.

하지만 걸음에 담긴 기운은 절대 가벼이 볼 것이 아니었다.

한 폭 내디딜 때마다 묵직한 태산과 같은 기운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다.

어느새 이든 앞에 선 엘프의 왕.

이든은 상대에게 느껴지는 기도에 절로 감탄이 일었다.

‘대단한데?’

이는 비단 이든뿐만이 아니었다.

그 앞에 선 엘프의 왕 역시 묘한 눈으로 앞에 선 인간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제법이야.’

발리스타와 아스테어를 바라보는 눈빛엔 흥미롭단 기색이.

‘놀랍군.’

그리고 이든을 바라보는 눈엔 흥미를 넘어선 경이로움이 차 있었다.

이든이 그랬던 것처럼. 왕 역시 눈앞에 사내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말없이 뚫어지라 느껴지는 시선에 이든이 눈살을 찌푸릴 때쯤.

왕이 아차 싶은 표정을 했다.

“아, 이거 미안하네. 자네처럼 강한 인간은 오랜만이라서 말이야. 인간 세상에선 이를 두고, ‘물건’이라 한다지? 자네 정말 물건이군.”

“……?”

“…허.”

왕답지 않은 경박한 말투.

발리스타와 아스테어가 입을 쩍 벌렸다.

표현은 안 했지만, 엘프들의 표정에도 난감하단 기색이 역력했다. 이든 역시 그 못지않게 어처구니없다는 얼굴.

하지만 곧 들여온 이든의 대답은 왕 못지않았다.

“내가 원래 한 물건 하오. 근데 그쪽도 꽤 한 물건 하는 듯 보이오?”

“커헙!”

“쿨럭!”

참으로 가관이지 않은가.

듣던 엘프들이 저마다 헛바람을 삼켰다. 예의라곤 어디다 말아먹었는지 일절 없는 대답.

아무리 종족이 다르다지만, 왕은 왕이다. 그리고 조금 전, 그의 말은 절대 왕 앞에서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듣던 엘프 왕의 얼굴엔 내내 웃음기가 떠나지 않는다.

참으로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후후. 암, 그렇고말고. 내 딸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지. 자네 자랑을 엄청나게 해 대더군. 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그리도 쉬지 않고 칭찬을 해 대나 했더니…. 과연 그럴 만해. 가히 나조차 승부를 예측하기 힘들 만큼.”

이든 역시 순순히 고갤 끄덕였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가히 저들의 왕이라 불릴 만하군요. 지금껏 봐온 사람 중에 가장 강하십니다.”

한낱 인간이 자신들의 왕을 평가한다. 엘프들이 저마다 눈총 쏘아댔지만, 정작 당사자인 왕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든이 재차 입을 뗐다.

“사담은 이쯤 하시고.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시죠. 보아하니 마냥 고마워서 칭찬하겠답시고 데려온 것 같지는 않고. 여기까지 우릴 데려온 이유는 뭡니까.”

엘프의 왕이 어깰 으쓱였다.

“처음엔 숲을 그 지경으로 만든 것을 두고 따끔하게 혼내 주려고 불렀는데, 그게 딸을 구해 준 은인인지라 지금 막 생각을 고쳐먹었네.”

“…그 말인 즉슨 처음엔 따님의 은인인 것을 모르고 불렀단 말이군요.”

“그렇지. 그런데 자네가 우리 왕가의 인장을 가지고 있더군.”

“인장?”

“일전 우리 딸에게 증표랍시고, 무언가 받은 기억이 없나? 목걸이 같은 것 말이야.”

“아….”

비로소 떠오르는 기억.

이든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우웅. 우웅. 우웅.

마치 앞에 선 엘프의 왕에게 반응하듯, 목걸이 중앙에 달린 보석에서 푸른 빛이 명멸하고 있었다.

물론 눈이 보이지 않던 이든에겐 알 수 없던 변화였지만….

이든의 손 위에 놓인 목걸이를 보던 엘프의 왕이 씩 웃었다.

“그래. 그거야. 그것이 바로 우리 겔러하드 왕가의 증표이지.”

‘일전 엘프에게 받았던 선물이 이런 식으로 날 도울 줄이야….’

이든이 고갤 끄덕이곤 입을 뗐다.

“처음에 부른 이유야 어찌 됐든 간에 지금은 손님이라 이거군요.”

“그런 셈이지.”

“그럼 손님이면 손님답게 대접해 주시죠.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저것들의 기세가 영 거슬려서 말입니다.”

‘저것들….’

이든의 손가락이 빙 두르며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이곳을 지키던 엘프 정예병과 자신들을 끌고 오다시피 한 남은 엘프들이었다.

이든의 손가락질에 엘프들의 눈에 불이 켜질 듯했으나, 왕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고갤 끄덕이곤 손을 휘저으며 병사들을 물렸다.

“하긴. 이러는 것도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모두 물러가라.”

왕의 말에 그의 병사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예!? 저 인간과 독대하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뭐 문제라도 있나?”

병사의 불신 어린 눈이 이든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그 많고 흉포하던 숲의 몬스터가 아무것도 못 하고 참살당하고, 숲 일부를 황폐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게다가….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 위험한 부류에….”

“습.”

엘프 왕이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을 막는 시늉을 했다.

‘조용히 하라는 뜻.’

주절대던 엘프의 입이 꽉 다물어졌다.

“자네. 재밌는 말을 하는군. 즉슨 자네들이 아니면, 내가 이자에게 당하기라도 한단 얘긴가? 내가 아무리 오래 살았다지만 아직 실력이 녹슬 정도는 아닌데.”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든 맞든. 말에 신중을 기하도록. 손님에 대한 예의를 잊은 것도 모자라 나에 대한 예의까지 말아먹다니. 언제부터 우리 엘프족이 왕가에게 막 나갔었지?”

“소, 송구합니다.”

정예병이 급히 고갤 조아렸고, 왕이 손을 휘저었다.

“됐으니까. 나가 봐. 손님 앞에서 더 쪽팔리게 하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정예병을 물린 왕이 다시 씩 웃었다.

“아무튼, 정말이지 보고 싶었네. 인사가 늦었군. 난 이곳 숲의 지배자이자 이들의 왕. 겔러하드 실리우스일세.”

소개를 마친 왕이 일행을 쭉 훑었다. 발리스타가 움찔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전…!”

“발리스타.”

“엥?”

“그리고 옆에 소녀는 아스테어로군.”

“어떻게….”

벙찐 표정의 발리스타가 입을 뗐다.

“혹… 저의 명성이 이곳까지 들린 건가요…?”

겔러하드가 볼을 긁적였다.

“그, 그럴 리가.”

겔러하드의 시선이 재차 이든을 향했다.

“그리고 이든 자네의 대해선 진작에 들었으니.”

이든의 얘긴 그의 딸에게 들었다 쳐도 발리스타와 아스테어의 이름은 어찌 알고 있던 것일까.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에 겔러하드가 클클거리며 웃었다.

“너무 놀라지들 말게. 우리 엘프 왕족들은 대대로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도, 그리고 내 생각을 타인에게 전할 수도 있거든.”

발리스타가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제 생각을요…!?!? 근데 그건 그렇다고 쳐도… 본인 생각을 어떻게 타인에게 전한다는 것인지?”

“예를 들면….”

-이런 거지.

꽉 다물어진 입.

그러나 여전히 귓가에서 맴도는 갤러하드의 목소리에 발리스타와 아스테어가 또 한 번 놀랐다.

그에 반해 이든은 일전 그의 딸이 전음과 비슷한 것을 행했던 것을 경험해 본 바가 있어 달리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젊은이들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쳐다보던 겔러하드가 아차 싶었는지 입을 뗐다.

“아! 이럴 게 아니라 손님으로 모셨는데 계속 세워 둘 순 없지. 같이 식사라도 하겠나?”

“식사는 됐고, 저희는….”

“네! 밥 좋죠! 허허!”

이든이 됐다고 손사래 치려는 사이, 발리스타가 재빨리 대답을 낚아챘다.

그 모습에 겔러하드가 웃으며 손을 마주쳤다.

짝짝.

“여봐라. 손님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오거라!”

겔러하드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령 되는 진수성찬들.

발리스타가 힐끗 뚱한 얼굴에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멋쩍은 듯 머릴 긁적여 댔다.

“…하하. 다들 밥 생각이 없으셨나 보오…?”

그때, 겔러하드가 눈치를 보던 발리스타의 등을 토닥 두들겼다.

“입맛이 없기는! 막상 앞에 내놓으면 다들 걸신들린 것처럼 맛있게들 드실걸세. 그리고 이든 자네 말이야.”

“……?”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네. 자네가 그냥 가 버리면 은혜를 입은 우리는 뭐가 되나?”

“딱히 무엇을 바라고 따님을 구한 것은….”

“아니다? 미안하지만 우리 엘프족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들이라. 자네가 이해 좀 해 주게.”

“…….”

은혜를 갚는다곤 하나, 이건 뭐 거의 강요나 다름없다.

이든 역시 마지 못해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마침 배도 고팠으니 실례 좀 하겠습니다.”

듣던 겔러하드가 씩 웃었다.

“잘 생각했어. 자자, 다들 이쪽으로들 앉지.”

겔러하드가 손짓으로 음식이 놓인 커다란 식탁을 가리켰다.

발리스타와 아스테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든이 자리하는 사이. 그들이 있던 곳에 문이 벌컥 열렸다.

“마침 내 딸도 왔군.”

열린 문 사이로 숨을 헐떡이며 들어오는 엘프 여인.

안에 들어선 그녀의 시선이 이든을 향해 고정된다.

“이든 님…!”

“훗. 자네가 어지간히도 보고 싶었나 보군.”

이든이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예정에 없던 초대였고, 더욱이 예상치도 못한 만남이었으나, 황당함보단 그래도 반가움이 컸다.

이든이 반가운 얼굴로 가볍게 고갤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고향에 무사히 귀환하셨군요.”

“덕분에요. 이든 님께서도 잘 지내셨나요?”

“예.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저….”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입술만 옴짝달싹할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그녀의 아버지 겔러하드는 ‘요것들 봐라?’ 하는 눈빛을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테어 역시 그 묘한 기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 발리스타야 상에 차려지는 음식들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지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하지만 이든 역시 눈치 없긴 매한가지였다.

결국, 그녀가 고갤 휘휘 젓고는 배시시 웃으며 말을 꺼냈다.

“아, 아니에요…! 그보다 이 먼 곳까지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이곳에 오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라….”

이든이 눈치 없이 말을 뱉어 내려던 그때. 겔러하드가 황급히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자자, 주인공들이 어서 자리에 앉아야. 남은 이들이 어서 식사를 시작할 것이 아닌가. 어서들 앉게나!”

아스테어와 발리스타 역시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사실 말은 안 했지만, 그간에 고생으로 무척이나 허기진 상태가 아니었던가.

특히나 눈앞에 차려진 진수성찬들을 보고 있자니 당장에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었다.

남은 이들이 자리하고 겔러하드가 웃으며 상을 가리켜 손짓했다.

“자, 어서들 드시게.”

그리고 그것이 신호탄이 된 것처럼 눈치를 보던 발리스타와 아스테어가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든 역시 별 거부감 없이 식사하던 때였다.

옆에서 겔러하드가 잔을 건넸다.

“한잔하겠는가?”

이든이 거절할 리 없다.

“예. 좋습니다.”

“훗. 이런 면에선 답답한 면이 없구만.”

“……?”

이든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사이, 겔러하드의 전음이 이든의 귓가에 꽂혔다.

-내 살다 살다 자네같이 눈치 드럽게 없는 인간은 처음이구만.

-무슨 말씀이신지.

이든의 전음에 겔러하드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네가 어떻게 정신 전달을…?

-전음을 여기선 그런 식으로 부르나 보군요.

-전음?

-…….

-뭐, 어찌 됐든 간에 우리 딸이 자네가 퍽 마음에 드는가 보군.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또르르르….

술잔이 채워지고 마시는 그 과정에 침묵을 일관하는 것 같지만, 겔러하드와 이든은 전음으로 주저리 떠드는 중이었다.

-어찌 생각하냐니요. 전 따님 이름도 모릅니다.

“뭣. 이름도 몰라!?”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겔러하드가 무의식중에 전음이 아닌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의 딸이 얼굴을 찌푸렸다.

“뭐에요. 지금. 이든 님하고 정신 전달로 얘기 중이셨던 거에요?”

“크, 크흠! 무, 무슨 내가 언제 그랬다고 생사람을 잡고 그러느냐.”

“훗.”

이든이 웃었다.

아마 이곳에 온 뒤로 처음으로 지어보는 미소일 것이다.

이를 본 겔러하드가 신기하단 얼굴을 했다.

“자네. 웃을 줄도 아는구만.”

겔러하드가 다시 이든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따르는 도중, 그가 전음이 아닌 육성으로 말을 꺼냈다.

“우리 딸의 이름은 겔러하드 실비아일세. 뭐, 내가 왕이니 당연하겠지만 이래 봬도 공주라고.”

듣던 실비아가 얼굴을 구겼다.

“이래 봬도 공주라니요?”

“심지어 가출 전적까지도 있는…뭐, 이런 부족한 딸이라도 자네만 괜찮다면야. 난 찬성일세.”

“아빠!”

실비아가 소릴 꽥 지르는 사이, 잔을 비운 이든이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우리 딸인가?”

“아니… 여기 이 숲 말입니다.”

“아… 참 나. 김 새는군.”

왠지… 이 겔러하드란 양반 어디서 많이 본 타입의 아저씨인데….

주책맞고 능글거리는 모습에서 어째 길드장과 지부장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든이 입을 뗐다.

“이 숲 말입니다. 꼬라지가 왜 이런 겁니까. 몬스터들이 마치….”

“반쯤 미친 것 같지?”

겔러하드의 말을 듣던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예. 딱 그겁니다. 느껴지는 살기 하며, 인간을 마치 먹이쯤으로 아는 것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더군요.”

“흐음. 꼭 인간만을 먹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야.”

“그 말은 이곳의 피해도 있었단 말입니까?”

겔러하드가 고갤 끄덕였다.

“있었지. 물론 여기 안까지 들어온 것들은 없었지만, 전에 우리도 그 문제에 대해 골치 좀 아팠지.”

“…원인을 모르시는 겁니까?”

겔러하드가 고갤 저었다.

“모르겠네. 정말 별안간 몬스터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 거거든….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긴 한데.”

“걸리는 것이요?”

“일전 우리 쪽에서 숲에 조사단을 파견해서 몬스터의 시신을 살펴본 적이 있지. 그런데 뜻밖에도 흑마법의 흔적이 있더군.”

“흑마법? 그게… 뭡니까?”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고, 죽은 자를 되살리고, 대가를 주고 강한 어둠의 힘을 얻는 뭐 그런 음산하고 기이한 능력들 있잖은가. 정말 들어 본 적 없나?”

이든의 입으로 향하던 잔이 덜컥 멈추었다.

‘…그거. 마치… 우리 거잖아?’

불현듯 이든의 머릿속에 마도(魔道)란 단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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