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250)

65화.

이든의 기감은 줄곧 세계수 열매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의 예상이 맞는다면 세계수에 열린 저 무수히 많은 열매 중 단 하나만 취해도 필시 전생의 경지에 필적할 수 있었다.

‘와…. 진짜 더도 말고 한 개만 얻고 싶다.’

어차피 그 이상은 과욕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영약이라 한들 한사람이 흡수할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으니까.

특히나….

이든의 앞의 저것.

대환단과 거의 동일한 기운을 뿜어내는 저 세계수 열매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대환단이 소림의 보물로 불린 이유가 무엇인가.

다름 아닌 그 안에 담긴 어마어마한 기운의 양 아니던가.

특히나 대환단은 난다 긴다 하는 모든 영약 중에서도 최고라 할 수 있을 만큼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무가지보였다.

지금 이든의 성장이 정체된 이유는 다름 아닌 깨달음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내공이었다.

천마심공이 심법 중에서도 궤를 달리하는 신공이라 한들 내공을 쌓는 데 있어 시간 투자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무진이 이든의 삶을 살고서 그의 나이 이제 겨우 열여덟.

이 나이에 신검합일 경지라는 것도 말도 안 될 만큼 대단히 빠른 성장 속도였다.

하물며 거진 백 년간 쌓아 올렸던 전생의 경지까지 도달하는 데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겠는가.

그런데.

그 시간을 단축해 줄 영약이 코앞에, 그것도 무수히 많이 널려 있다. 이든이 그것에 눈이 돌아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꿀꺽.

이든이 입맛을 다시듯 침을 꼴깍 삼켰다.

‘…하나만 슬쩍할까. 어차피 모를 텐데?’

“이든 님?”

실비아가 그를 불렀다.

이든이 그답지 않게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예?”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길래. 불러도 말이 없으셔요?”

“아, 부르셨습니까?”

“무슨 고민이라도…?”

“아아… 아닙니다.”

아니긴.

불경한 생각을 하긴 했지.

아마…. 젊은 시절의 무진이었다면 고민은커녕 진즉에 그의 주머니로 스윽 챙겼을 것이다.

들키면 어쩌냐고?

‘그래 훔쳤다. 왜!? 뭐 어쩌라고? 배 째!!!’란 식으로 나갔겠지.

젊은 시절의 무진은 강자존이라는 무림의 규칙을 그런 식으로 이용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는 철없던 시절의 무진이 아니었다.

참 오래도 살 만큼 살았던 노인이었고, 한때는 등선을 코앞에 두고 만인의 존경을 받던 천하제일인 아니었던가.

쪽팔리게 슬쩍할 순 없지.

이든이 고갤 휘휘 저었다.

‘그냥 대놓고 하나 달라고 하면 모를까. 등선을 목표로 한다는 놈이 그런다면 애초에 자격 미달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미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까짓거 한번 질러 봐?’

어? 훔치려고?

‘설마 그럴 리가.’

행동은 빨랐다.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이든은 곧장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실비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든 님? 어, 어디 가세요?”

“왕을 만나러 갑니다.”

“아버지를요?”

“예.”

“무슨 일이신데요?”

이든이 손가락으로 세계수를 가리켰다.

“저것 하나만 달라 하려고요.”

“네에!?!?!?”

실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컥.

그사이, 성큼성큼 향하던 이든이 들어왔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문 앞을 지키던 수문장이 깜짝 놀라 소릴 쳤다.

“뭐, 뭐야. 당신!”

놀랄 만하지….

들어올 땐 몰래 들어와 놓고 나올 땐 대놓고 나왔으니 문을 지키던 그로선 돌연 문을 열고 나오는 이든의 모습에 적잖이 식겁했을 것이다.

“놀래켜서 미안합니다. 수고하십쇼!”

“…이, 이 무슨!”

수문장이 벙찐 얼굴로 이든을 바라보던 그때, 뒤이어 불쑥 나오는 실비아의 모습에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놀라게 해서 미안!”

“공주님…!? 대체 언제 들어오신 겁니까. 아니, 그보다 저 인간은 대체 뭡니까!”

“나중에 설명할게. 아버지 만나러 가는 중이야!”

“…….”

수문장이 넋이 나간 얼굴로 둘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발리스타와 아스테어가 마저 식사를 끝내고 자릴 비웠을 무렵.

홀로 남은 겔러하드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저, 저기! 그렇게 함부로 막 들어가시면 안 됩니…!”

“아! 잠깐만 얘기한다니까 그러네!”

문 건너 들려오는 소란에 겔러하드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곳을 향했다.

벌컥.

왕실 앞을 지키던 병사의 만류도 뿌리치고 다짜고짜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든이 불쑥 말을 꺼냈다.

“저, 소원 들어주십시오.”

“으, 응? 뭐라고?”

겔러하드가 넋이 나간 얼굴로 되물었다.

“따님 구해 드렸으니 소원 하나만 들어 달라고요. 밥 한 끼로 어물쩍 넘어가려 했던 것은 아니죠?”

그렇긴 하지…?

근데 보통은 이쪽에서 먼저 소원이 뭐냐고 묻는 게 순서 아니던가…?

겔러하드가 볼을 긁적였다.

“아… 뭐, 소원이야 원래부터 들어주려 했다만, 이리 들으니 조금 황당하구만.”

“그래서 들어줄 겁니까. 말 겁니까.”

겔러하드가 씩 웃었다.

“좋아. 말해 보게. 자네가 원하는 소원이 뭔가?”

“세계수 열매. 하나만 주십쇼!”

“뭐, 뭐라고?”

겔러하드가 표정을 구겼다.

“대환단, 아 아니지. 세계수 열매 하나만 달라고요.”

“…….”

등선을 목표로 둔 예비 신선으로서 훔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고….

그래서 생각해냈다는 것이 고작 이것이다.

넋 나간 눈으로 떼를 쓰듯 하는 이든을 바라보던 겔러하드가 천천히 입을 뗐다.

“…세계수 열매는 어찌 알고… 설마, 거길 들어간 건가?”

“예.”

“정예병들이 지키고 있었을 텐데?”

“몰래 들어갔지요.”

“허 참. 자네… 정말이지 대책 없구만.”

“압니다. 저도 답 없는 놈이란 거, 아무튼 그래서 주실 수 있습니까?”

헛바람을 집어삼킨 겔러하드가 머릴 긁적였다.

화를 내야 정상인 상황인데… 이건 뭐, 따박따박 야무지게 대답을 하니, 화가 난다기보단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그전에 들어간 것도 들어간 거지만, 저리 당당히 대놓고 달라고 말할 수가 있나…?

이걸 대담하다 해야 할지. 아니면 무식하다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겔러하드가 재차 입을 열었다.

“세계수 열매는 우리 왕가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것이지. 열매 하나하나가 워낙에 굉장한 힘을 담고 있는 탓에 세간엔 다시 없을 보물이라 일컫지만, 자칫 아무런 지식도 없이 잘못 다뤘다간 큰 화를….”

“폐인이 되지요?”

불쑥 들어온 이든의 한마디에 겔러하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네가 그걸 어찌 알고….”

세계수 열매는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진귀한 보물이다. 그러다 보니 간혹 이를 노리고 엘프족 영역에 침범하려 했던 이 또한 적잖았다.

지금에 이르러 엘프족 영역이 철통보안에 가까운 방범을 유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지만….

세계수 열매에 관한 철저한 감시는 비단 침입자에 한해서만이 아니었다.

같은 엘프족에게 한해서도 철저하게 접근을 불허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고 하니.

열매, 그 안에 담긴 힘 때문이었다.

워낙에 큰 힘을 품고 있기에 사전 지식도 없이 섭취하였다간 그 힘을 다스리지 못하고 폐인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릇에 맞지 않는 넘치는 힘을 취하게 되었을 경우 생기는 부작용.

무림에선 이를 두고 주화입마라 부른다.

큰 힘을 지닌 무가지보지만, 자격이 없는 자들은 절대 쳐다도 보아선 안 되는 것.

그 위험성을 알기에 세계수 열매는 철저하게 왕가의 감시하에 관리되고 있다.

낮게 신음하던 겔러하드가 고갤 저었다.

“역시…. 그건 좀 어렵겠구만.”

“그렇습니까?”

“나도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사항도 아니고 말이야. 게다가 자네가 달라 하는 것은 대대로 왕가에서 관리해 온 보물이야. 아마 장로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반대할 걸세.”

“흠.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얘기하시니 어쩔 수 없지요. 포기하겠습니다.”

“응?”

겔러하드가 재차 넋이 나간 얼굴을 했다.

무리한 요구를 하기에 질기게 몇 번 더 부탁할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산뜻하게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겔러하드가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포기하겠다고?”

“예. 어차피 안 될 것을 예상하고 한번 질러 본 거였습니다.”

“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변화무쌍한 성격이다.

겔러하드가 머릴 긁적였다.

“뭐, 그래 준다면야 나야 편하지만, 너무 쉽게 포기하니 그건 또 그것대로 자존심 상하는데.”

“대신 다른 소원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허무맹랑한 부탁을 할까. 왠지 모를 기대에 듣던 겔러하드가 눈을 빛냈다.

“그래. 뭔가, 그 다른 소원이라는 것은?”

“레온하르트 영지가 현재 안고 있는 문제 좀 해결해 주십시오.”

“음?”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레온하르트 영지는 쉴 새 없는 몬스터의 국경 침범으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습니다. 땅은 황폐해졌고, 사상자 또한 갈수록 늘어나는 상황이죠. 현재는 황실의 지원만으로도 벅찰 정도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 해결책을 논의하고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흠.”

잠시 고민하던 겔러하드가 넌지시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보게. 자네의 소원. 애초에 그것이었던 것 아닌가?”

“사실 뭐, 그런 셈이긴 하죠.”

대답 한번 시원시원해서 좋다.

하지만 그건 둘째치고 이든이 꺼낸 레온하르트 영지에 관한 것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다른 평범한 소원은 없는 건가? 예를 들면 막대한 금은보화라든가.”

“…이것도 어려운 부탁입니까?”

“어려운 부탁이라기보다는… 이것 역시 나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이해합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군.”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의 부탁이 겔러하드 단독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레온하르트 영지의 안전을 위해 이곳에서 힘 좀 써 달라.

이는 엘프족 전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결정이었고, 지도자인 겔러하드 입장에선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어찌 보면 이 역시 질러 봤던 첫 번째 부탁만큼이나 무리한 요구일지도 몰랐다.

잠시 고민하던 겔러하드가 무거웠던 입을 뗐다.

“이 부분에 대해선 내 장로들과 얘길 나눠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경박하고 경솔한 듯 보였던 조금전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고뇌하고 신중을 기하려는 왕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스윽.

자릴 털고 일어난 겔러하드가 걸음을 옮기려다가 다시 멈춰 섰다.

“회의하는 데 꽤 걸릴 것 같아서 말이야. 시간 충분하나?”

“무리한 부탁까지 드렸는데, 설마 시간 잠깐이야 내지 못하겠습니까.”

“좋아. 내 다녀오지. 술은 아직 많으니 그동안 천천히 즐기고 계시게.”

“예.”

“뭐, 그렇다고 결과에 너무 기대는 말고.”

“암요.”

“훗.”

겔러하드가 자릴 비우고 이든이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채우려던 그때. 실비아가 그의 손을 턱 잡았다.

“실비아 님?”

“혼자 따르고, 마시는 술은 재미없다는데. 제가 같이 있어 드릴까요?”

이든이 웃으며 고갤 저었다.

“그건 안 되지요. 그래도 명색이 공주님이신데.”

“뭐. 닳는 것도 아닌데요.”

“그냥 말동무라도 부탁드립니다.”

“알겠어요.”

실비아가 옆에 앉았다. 말동무라도 해 달라 했지만, 술을 기울이는 내내 이든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의 무거운 침묵처럼 겔러하드가 들어선 의회장 역시 무거운 분위기로 가라앉았다.

***

“말도 안 됩니다.”

장로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확고했다. 왕의 명이라면 불 속이라도 따라나설 그들이지만, 이번 사안은 달랐다.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

전체를 훑던 겔러하드의 눈이 일순 한곳을 향했다.

“자네 생각도 그런가?”

겔러하드의 시선이 향한 곳.

장로회의 수장. 1장로 안드리엘의 자리였다.

희끗한 머리, 맑고도 올곧은 눈빛을 한 노회한 엘프가 의자에 기대던 등을 떼곤 몸을 살짝 돌렸다. 그의 눈이 겔러하드의 눈과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안드리엘이 입을 뗐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왕께선 재차 인간들과의 교류를 원하시는지요?”

겔러하드는 고갤 저었다.

“원하지 않는다.”

“저희 역시 그렇습니다.”

1장로의 잠잠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의회장에 울렸다.

“인간 세상의 문제는 오롯이 그들 스스로에게 맡겨야 합니다. 과거…. 인간들에게 아낌없이 베풀던 결과가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잘 아시지 않습니까?”

“…….”

대답은 없었다.

다만 겔러하드의 시선이 재차 장로들을 훑었다.

찰나. 장로들의 눈빛에 어린 기광에서 인간들을 향한 배신감과 분노가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인간들은 언제나 그랬지요. 우리에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우릴 내쫓고 배척했습니다. 심지어 먼 과거엔 우릴 시기하여 학살하려던 짓도 서슴지 않았지요. 자애로운 왕이시여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 현재의 저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왕께서 꼭 알아주셨으면 하는 것이 이 늙은이의 바람입니다.”

“…맞는 말이야.”

내내 고민했지만, 결국 겔러하드의 생각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들의 얘길 듣고 나니 더욱 확고해졌다.

겔러하드가 중앙 의자에 등을 기댔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이 어쩐지 흔들리는 듯했다.

“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도 사정이 있으니….”

“공주님을 구한 은인의 부탁이라 심경이 어지러우시다는 것을 저희 또한 이해합니다. 다만… 무엇보다 엘프족의 영원을 위해 힘써 주십시오. 왕께선 저희의 왕 아니십니까.”

허공을 응시하던 겔러하드의 눈이 정면을 향했다.

수많은 장로의 이목이 오롯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겔러하드가 기댔던 의자에서 등을 뗐다.

“인간 세상과의 단절을 명명했던 공표는 바뀔 수 없는바. 그대들의 뜻과 내 뜻이 일치하는 바로 레온하르트 영지의 일은 오롯이 인간들 손에 맡기도록 하는 것으로 본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소.”

***

술잔을 들던 이든의 손이 덜컥 멈추었다.

내내 한마디 말없이 술을 연거푸 들이켜던 그였다.

실비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든 님?”

“…이상하군요.”

뭐가 이상하단 걸까. 실비아가 고갤 갸웃거렸다.

“무엇이 말이에요?”

“이곳 말입니다.”

“저희 터전이요?”

“예. 지금껏 단 한 번도 침입이 없던 것이 확실합니까?”

결단코 없었다. 실비아가 고갤 끄덕였다.

“네. 인간 세상과 교류를 단절한 이후론 한 번도 없었어요. 물론 시도한 이는 과거의 몇 번 있었지만, 모두가 마법진에 갇혀 사경을 헤맸죠. 근데 그건 갑자기 왜…?”

이든의 고개가 돌려졌다.

벽 넘어 어딘가를 향한 그의 기감. 이든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오늘이 그 생각이 바뀌게 될 날이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여러분의 터전에 불청객이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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