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이든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사방이 소란스러웠다.
보초를 서던 정예병들이 어디론가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실비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이게 대체 무슨 일….”
실비아의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먼발치에서 들려왔다.
“침입자다. 모두 전투 준비!!!”
“침입자…!?”
듣던 실비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 어떻게 그런… 그럴 리가 없는데?”
그녀의 반응은 당연했다. 지금껏 이런 경우는 없었으니까.
터전에 둘러쳐진 마법진이 그간 자신들을 지켜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침입자라니?
즉슨, 터전을 지켜 주던 마법진이 뚫렸단 뜻이 아닌가.
“실비아 님은 이곳에 계세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이든 님…!?!?”
파앗.
얼어붙은 실비아를 뒤로하고 이든이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기척이 몰려드는 곳을 향해 섬광처럼 날아갔다.
***
거진 수백 년간 굳게 닫혔던 외성의 성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성문으로 쏟아져 나오는 정예병의 창끝이 향한 곳엔 숲의 몬스터가 흉흉한 살기를 드러내며 하나둘씩 안으로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몬스터의 수만 해도 대충 수백을 아울렀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터전을 지키던 마법진이 뚫린 지 상당 시간 흘렀다는 뜻이다.
하나.
“전투 준비!!!”
선두의 선 지휘관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파바바밧!
중무장한 엘프 정예병들이 신속하게 오와 열을 맞추었다.
평소 평화에 젖었다곤 하나, 이를 보면 그간 그들이 훈련에 결코 게으르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지휘관의 칼끝이 전방 몬스터들을 향했다.
“돌격!!!!”
쿵. 파아아아앗!!!!
지휘관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도열한 정예병들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휘이이이이익!!!
푸와아아아악!
푸른 기운을 머금은 창끝이 달려들기 무섭게 사방에서 괴물들의 살점이 터지고, 가지각색의 혈흔을 내뿜는다.
그야말로 일당백의 기세로 침입을 막는 정예병들.
병력의 수도, 기세도 압도적인 것이 어렵지 않게 침입을 막아 낼 수 있을 듯 보였다.
지금까지만 해도.
쿠웅.
그때, 정예병들이 서 있던 지면이 조금씩 흔들렸다.
쿠웅. 쿠우우웅.
미세했던 진동은 시간이 갈수록 차츰 커지고 있었다.
지지지직.
마치 밖에서 무언가가 마법진을 강제로 찢듯 일그러진 마법진의 틈이 점차 벌어졌다.
휘황찬란 움직이던 정예병의 창칼이 일순 멈췄다.
지지지직.
크오오오오오오!
지금껏 상대하던 몬스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괴성.
쿠우우웅.
그리고 비교를 불가 하는 스무 척에 달하는 압도적인 크기에 정예병들이 절로 마른 침을 삼켰다.
“트롤!? 트롤들이 어째서 여기까지!!!”
화등잔만 하게 커진 지휘관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트롤이 한 마리도 아닌 수십 마리가 마법진 틈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크르르….”
등장만으로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 만큼 놈들의 위압감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스윽.
들어선 트롤의 붉은 안광이 사방을 훑더니 이윽고 정예병들이 도열한 곳에 멈추었다.
“크오오오오!!!!”
정예병과 눈이 마주친 트롤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쿠웅. 쿠웅!!
달려들며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울리는 지면은 흡사 자연재해를 불러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젠장! 정예병은 뒤로 후퇴!!!”
제아무리 일당백의 정예병이라지만 수십의 트롤이라면 피해가 막심할 것이 분명했다.
지휘관이 정예병들을 일제히 뒤로 물렸다.
그의 칼끝이 재차 전방에 달려드는 트롤들을 향했다.
“궁병은 일제히 사격!!!”
뒤에 늘어선 백여 명의 궁병이 동시에 화살을 쏘았다.
쐐애애애애액
그야말로 명궁의 자손들다웠다.
수는 백여 명에 불과했지만 빠른 손놀림으로 단번에 수백 발을 쏘아내는 그들이었다.
금세 하늘을 수놓은 수백 개에 화살 비가 트롤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파바바바박!!!
“크오오오오!!!”
무방비로 화살 비를 온몸에 맞고도 놈들의 움직임은 조금도 느려질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지휘관이 재차 소릴 질렀다.
“쉬지 않고 계속 쏴!!!! 계속 쏘다 보면 놈들도 무너질 것이다!!!”
쇄애애애액!!!
파바바바박!
트롤과 몬스터들을 향해 화살 비가 쉴 틈 없이 몰아쳤다.
화살 비가 쏟아졌던 자리엔 몬스터의 시신으로 그득했다.
하지만.
왜일까. 분명 시야에 죽어 가는 몬스터의 수가 쌓여 가는 것은 보이는데, 정작 다가오는 몬스터의 물량은 도무지 적어졌단 느낌이 들지 않았다.
“크오오!!!!”
특히나 저 트롤.
저것들은 무식하리만치 엄청난 회복력으로 온몸이 화살로 뚫리고도 쉬지 않고 다가오고 있었다.
후우우우우웅.
어느새 성큼 코앞까지 다가온 트롤들이 한 손에 쥐고 있던 거대한 몽둥이를 정예병들을 향해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아악!!!”
커다란 방패로 전방을 철벽같이 막던 정예병들의 전열이 단번에 무너졌다.
“크오오오오!!!!”
재차 트롤의 음성이 사방을 찢어대듯 울려 퍼지고.
희번뜩.
몬스터들이 붉은 안광을 터트리며 무너진 틈을 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몰아치고 또 몰아치는 몬스터들.
정예병들의 안색이 일순 창백해졌다.
“막아!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 내!!!!”
사기를 올리기 위해 지휘관이 쩌렁쩌렁 외쳤지만, 쏟아져 몰려오는 몬스터를 앞에 두고 그의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콰과광!!!
정예병이 높게 세웠던 방패가 차츰, 차츰 서서히 벌어졌다.
돌진해 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창을 치켜세우고 뚫고 베어 보지만, 수가 줄기는커녕 점차 많아져 간다.
쿠르르릉!
“끄아아아아아악!”
엘프 정예병들의 외마디 비명이 사방에 퍼지고, 견고하던 그들의 방어벽이 무너져 내렸다.
***
“뭐라고!? 외성 정예병들이 무너져!?!?!?”
쾅.
팔걸이를 힘껏 내려쳤던 겔러하드는 어느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병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황급히 말을 꺼냈다.
“외성으로 파견된 정예병의 사상자 수가 벌써 백여 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외성이 뚫리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겔러하드가 이를 바득 갈았다.
외성이 뚫리면 그 피해는 터전에 살아가는 엘프들이 온전히 받게 된다.
자신의 터전에 살아가는 엘프들의 피해라면 죽기보다 싫은 것이 그였다.
해서 레온하르트 영지의 일도 오롯이 인간들 선에서 해결하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늘에서 벌이라도 내린 걸까.
지금껏 수백 년간 문제없던 터전의 마법진이 뚫렸고, 맹렬한 기세로 밀고 들어오는 몬스터로 인해 외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손 놓고 있다간 그 피해가 막심한 상황.
겔러하드가 넋이 나간 얼굴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때.
1장로 안드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입을 뗐다.
“정신 차리십시오!!!”
“……!?”
“그리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번뜩!
일순 겔러하드의 눈이 부릅뜨였다. 흔들렸던 동공이 차츰 가라앉으며 차갑게 식는다.
그의 몸에서 첨예한 칼날과 같은 기도(氣道)가 새어 나왔다.
“고맙소. 안드리엘 장로. 덕분에 정신이 드는군.”
겔러하드의 눈이 병사를 향했다.
“내성에 주둔 중인 정예병을 포함, 숲의 수호대 모두 외성으로 보낸다.”
병사가 휘둥그레진 눈을 했다.
이는 비단 의회장의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곧 병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수호대는 오직 왕의 안위만을 위해 움직이는 소속 아닙니까. 그들이 현장으로 출병할 리가….”
“나도 출전한다.”
“왕께서 직접 말이십니까!?”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
병사와 장로들의 눈이 재차 흔들렸다.
1장로를 제외한 남은 장로들이 하나같이 일어나 겔러하드를 향해 입을 뗐다.
“왕이시여.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지만 왕께서 직접 출전이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우리 터전을 지키기 위해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주고 있소. 그런데 왕이란 자가 적을 앞에 두고 앉아서 구경만 하란 말이오?”
겔러하드의 차디찬 눈빛에서 새하얀 광망이 터져 나왔다.
“누구의 짓인지 모르나 내 보여 주겠소. 그간 평화에 젖었다곤 하나, 과거 대륙 최강의 검이라 불린 나 겔러하드의 저력을!”
***
콰과광!!!
눈앞의 거대한 트롤을 보고 있자니, 앞선 작은 몬스터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후우우웅!
트롤이 쥐고 있던 거대한 몽둥이가 휘둘러질 때마다 정예병의 몸이 하늘로 붕 뜨며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이런 괴물 같은 힘이…!”
밀리고 밀렸던 정예병들의 전열은 어느새 외성 성문까지 닿아 있다.
외성 성문을 지키는 수비대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이성은 당장에 성문을 닫으라 소리치지만, 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정예병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마 그럴 수가 없다.
크오오오오오!!!!
트롤의 포효가 재차 울리고, 수비대의 가슴도 덜컥 가라앉는다.
‘밀린다. 무조건 밀린다…!’
후우웅! 쿵. 후우웅! 쿵.
지면을 울리는 트롤의 걸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가라앉던 그의 의지가 지하 땅속까지 곤두박질쳐지려던 그 순간.
파아아아앗!!!!
그의 머리 위로 무언가 빠르게 날아갔다.
뻐어어어어억!
“꾸어어어어억!”
외마디 괴성과 함께 제일 선두에서 정예병들을 짓밟던 트롤의 머리통이 말 그대로 터져 버렸다.
어찌 된 영문일까.
달려 있던 머리가 눈 깜빡 한 사이에 사라진 트롤의 육중한 몸이 뒤로 넘어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쿠우우우웅.
“꾸에에에엑!”
20척에 달하는 거대한 몸이 나자빠지니,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이 그대로 압사당했다.
하지만 기이한 현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펑. 퍼엉. 퍼어어엉!
놈들의 머리 위로 무언가 홱 지나갈 때마다 연쇄적으로 트롤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펑펑펑펑! 퍼어어엉!!!
공중에서 흩날리는 살점과 뼛조각 그리고 쏟아지는 핏물이 마치 축제현장을 방불케 했다.
쿠웅. 쿠웅. 쿠우우우웅.
머릴 잃은 트롤이 일제히 바닥을 나뒹구니 거진 오십에 육박하던 트롤의 수가 어느새 반이 넘게 줄었다.
트롤의 머리통이 깨지는 소리가 멈추고, 공중에 흩날리던 살점과 뼛조각, 핏물이 바닥을 흥건하게 뒤덮을 때쯤.
타박.
부지불식간 공중에 있던 한 사내가 사뿐히 지면을 밟는다.
착 감긴 눈.
흩날리는 흑남색의 기다란 머리.
수려한 외모지만 입고 있는 무복에 덕지덕지 붙어 굳은 피가 묘한 공포를 자아냈다.
아수라장을 뚫고 나타난 마귀의 등장은 사방에 정적을 불러일으키며 지독하리만치 고요했다.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모두의 이목을 붙잡는다.
그 이목의 중심에 선 사내.
이든의 입가 한쪽이 삐죽 솟으며, 섬뜩한 미소가 지어진다.
“자 괴물들, 영양가 없는 애들은 이제 그만 괴롭히는 게 어때?”
마치 그의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멈칫했던 몬스터들이 붉은 안광을 터트리며 일순 몸을 홱 돌려 이든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다.
물밀 듯이 자신을 향해 쏟아져 오는 살기에 이든이 만족스런 얼굴을 했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파라라랏.
잠잠했던 이든의 옷깃이 팔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풀거렸다.
춤을 추듯 흔들거리는 옷깃 위로 그의 긴 머리카락이 하나둘씩 위로 쭈뼛 솟기 시작한다.
푸스스스….
이든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엄청난 양의 마기.
그의 손이 허리춤의 흑색 검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날카로운 쇳소리.
쐐애애애액!!!!!
언제 뽑고 언제 날린 것일까.
이든의 검은 어느새 흑색 검집에서 나와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섬뜩한 쇳소리를 울부짖으며 쏘아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신기의 가까운 허공섭물의 경지로 자신을 향한 살기를 향해 흑색 검을 쏘아 대는 이든.
퍼벅파바바바박!
흑색 검이 혀를 내두를 속도로 쉼 없이 몬스터들을 뚫고, 또 뚫고 나아간다.
손을 휘저으며 검을 쏘던 이든이 일순 신법을 밟아 몬스터들과 거리를 벌렸다.
쾅.
땅을 한번 밟았을 뿐인데 어느새 십 장 넘게 멀찍이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손을 휘저으며 허공섭물을 펼친다.
평소와 같았음 전신에 마기를 피워대고 사방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휩쓸었을 테지만, 어째선지 지금의 이든의 움직임은 묘하게 답답한 구석이 있었다.
쐐애애애애액!!!!
파바바바박!
신법을 밟고 손을 휘저으며 허공섭물을 펼친다.
그리고 다시 몬스터가 근접해 오면 다시 신법을 밟아 거리를 벌리기를 반복.
차라리 한바탕 휩쓸면 좋겠건만, 이든의 움직임은 일체 변화가 없었다.
‘젠장. 답답해 돌아가시겠군.’
이든의 기감이 주변 생존자들을 향했다.
묘하게 답답했던 그의 움직임은 사전에 계산된 절묘한 움직임이었다.
중간중간 생존자의 미세한 기가 느껴졌기에 그들이 휩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선 광범위 초식은 애초에 사용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젠장. 눈이라도 보였으면 직접 구조라도 할 텐데.’
그때.
“이든 형!!!!”
먼발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리스타가 아스테어와 그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든이 고갤 홱 돌려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발리스타!!!”
“엉!!?!?”
갑작스런 이든의 고성에 멈칫한 발리스타를 향해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어서, 부상자들부터 옮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