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250)

67화.

“으, 응!?”

발리스타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같이 싸우러 왔는데 부상자부터 옮기라니?

그의 눈이 일순 사방을 살폈다. 대지에 가득히 쌓인 몬스터의 시신 사이사이에 미세하게나마 숨이 붙어 있는 엘프들이 보였다.

그때, 다시금 쩌렁쩌렁 울리는 이든의 목소리.

“빨리!!! 힘 조절해 가면서 싸우는 것도 이제 한계야!!!”

아…!

발리스타가 눈을 부릅떴다.

이든이 고전하고 있던 이유.

생존자들이 혹여 싸움에 휩쓸릴까 염려한 나머지 힘 조절을 하며 시간을 벌고 있던 것이다.

찰나 발리스타와 아스테어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히고.

끄덕.

그와 동시에 현장으로 쏜살같이 날아드는 둘의 신형.

파밧!!!!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그 난잡함 속에서 잘도 생존자를 찾아 들쳐 메 옮기기 시작했다.

같은 엘프도 아닌, 인간이 목숨을 걸고 자신들 동료를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둘의 모습에, 지휘관이 뒤에 늘어서 있던 정예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들도 이 틈을 타 생존자들 구출한다. 남은 병력은 구조자의 안전을 확보하도록!!!”

“예!!!”

마치 한번 손발이라도 맞춘 것처럼, 인간과 엘프의 구조 작전은 이든이 시간을 끄는 사이 빠릿빠릿하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잠시 뒤, 발리스가 이든을 향해 소리쳤다.

“이든 형, 지금이야!!!!”

‘좋아…!’

내내 신법을 밟으며 몬스터의 시선을 끌던 이든의 신형이 덜컥 멈추어 섰다.

굳건히 대지를 밟고 선 다리.

이든의 한쪽 다리가 들리며 한차례 땅을 세게 찍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들렸던 이든의 한쪽 발이 땅에 닿기 무섭게 땅이 쩌적 갈라지며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려 댔다.

그리고 흔들리는 중심에 우두커니 서 있던 한 사람.

둑에서 물이 터져 나오듯, 이든의 전신에 검은 마기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전신전력의 개방이었다.

***

현장으로 전력을 다해 달려가던 겔러하드와 그의 수호대의 움직임이 덜컥 멈추었다.

파아아아아아앗!

성문 쪽에서 날아오는 강력한 돌풍 때문이었다.

바람의 세기가 어찌나 강한지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밀어 대는 힘이 엄청났다.

게다가….

바람 안에 깃든 섬뜩한 기운에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이 섬뜩한 기운은 대체 뭐지…?”

화등잔만 하게 커졌던 겔러하드의 눈에 경악이 어리다가 이내 차가운 안광을 토해 낸다.

고오오오오….

덩달아 수호대의 기도도 하늘로 치솟을 듯 강렬해졌다.

섬뜩한 바람이 이는 곳을 바라보던 겔러하드가 바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다가 입을 뗐다.

“모두 돌풍을 뚫고 전력으로 나아간다!”

“명을 받듭니다!”

겔러하드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의 몸이 재차 성문 쪽으로 쏘아졌다.

파아아아아아앗!!!!

전력을 다해 내달리니 금세 외성 성문에 도달했다.

도착하기 무섭게 곧바로 싸움터로 뛰어들어도 모자랄 지경에 그들의 움직임이 재차 멈추어 섰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을 향했다.

푸스스스….

전신에 검은 먹구름을 피우며 소름 끼치는 기운을 토해 내는 한 사람.

즐비한 몬스터 시신들 사이, 홀로 우뚝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이 그들의 시야에 보였다.

점차 사그라드는 먹구름 속에서 서서히 얼굴을 드러내는 사내.

착 감긴 눈.

겔러하드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든…?”

이름을 중얼거리던 겔러하드의 시선이 재차 이든 주변에 산처럼 쌓여 있는 몬스터들을 향했다.

“자네 혼자서 이 많은 것들을…?”

철퍽철퍽.

겔러하드의 눈빛은 묘했다.

구원자를 바라보는 듯하기도 했고, 학살자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복잡한 눈빛이었다.

저마다의 의미 모를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이든이 겔러하드 쪽으로 걸어왔다.

창백한 안색에 어쩐지 퀭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

무리한 탓인지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걸음에는 일말의 힘도 없어 보였다.

수차례 이어진 전투 탓에 기어코 다시 내상이 도진 것이다.

그럼에도….

그 힘없는 걸음걸이마저도 엄청난 위압감을 자아냈다.

겔러하드 앞에 멈춰 선 이든이 크게 숨이 들이 내쉬었다.

“…후우. 피곤하군요.”

이든의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비로소 사방을 내리누르던 위압감도 서서히 옅어졌다.

겔러하드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이런 일을 벌이고도 한다는 말이 단지 피곤하다니… 자네는 정말 물건이야.”

이든이 씩 웃어 보였다.

“암요.”

“자네 꼴을 보니 여기서 이럴 게 아니군. 우선 쉬는 게 어떤가. 자네 옷도… 좀 빨아야겠네.”

겔러하드의 말대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든이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동감입니다.”

이든이 마련된 거처로 걸음을 옮기는 사이, 성 밖은 겔러하드의 지시 아래 일사천리로 수습을 나섰다.

성 내에 주둔 중이던 엘프족 신관들이 정화 마법으로 오염된 땅을 씻어내고 나서야 모든 수습이 마무리될 무렵.

신관들의 관심이 오롯이 한곳으로 향한다.

몬스터들이 내침을 강행했던 마법진의 찢어진 틈.

그곳을 바라보던 겔러하드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했던 탓이다.

***

“모두 이 상황을 어찌 보시오.”

“흐음.”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음성뿐이었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는 질문을 던졌던 이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겔러하드의 표정에 드러난 착잡함이 이를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대답 한 점 없던 고요 속.

겔러하드의 입이 재차 열렸다.

“우린 레온하르트 영지가 직면한 문제를 인간들 스스로 해결하기를 바랐소. 그런데…. 유례없던 위기에 인간들에게 도움을 받았소이다.”

“…….”

“참으로 부끄럽고, 상심이 크오.”

스윽.

그때, 좌측 맞은편에 앉아 있던 1장로 안드리엘이 겔러하드를 향해 고갤 돌렸다.

“왕이시여. 그 마음은 알겠으나, 굳이 그자가 아니었더라도, 왕과 수호대만으로도 충분히 진압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도와준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마음 쓸 것 있겠냐는 물음.

과연 그랬을까.

겔러하드의 눈이 1장로와 허공에서 마주했다.

“모르겠소.”

“…예?”

“말 그대로요. 그 사내의 도움 없이 과연 나와 수호대만으로 진압이 가능했을지 의문이란 말이오.”

“억측이 심하신 것 아닙니까.”

겔러하드는 산뜻하게 인정하며 고갤 끄덕였다.

“…그럴 수도. 하지만 말이요. 이미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외성 코앞까지 뚫린 상황이었소. 자칫 외성의 주민들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단 뜻이외다.”

“…….”

생각만 해도 욱신거리는 머리.

겔러하드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허공을 향했던 그의 눈이 일순 감겼으나,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겔러하드가 자신 우측에 서 있던 엘프를 향해 물었다.

“대신관. 현 상황이 어떤지, 어떤 연유로 수호 마법진이 그 꼴이 된 건지 여기 장로들께 설명해 주시게.”

대신관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장로들의 눈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태가 매우 심각합니다.”

“무엇이 어떻게 심각하단 건지 자세히 말해 보게.”

장로의 말에 신관이 고갤 가볍게 숙이곤 재차 말을 이었다.

“저희 신관들이 몬스터가 밀고 들어온 근원지인 곳에 마법진을 면밀히 조사해 본 결과. 이는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어떤 외부의 압력에 의해 틈이 벌어진 것으로 사료됩니다.”

“외부의 압력?”

“예.”

“정확히 말해 보게.”

집중된 이목에 신관이 한참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흑마법입니다.”

“흑마법?”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흑마법이라니.

아니, 그보다 현재 흑마법의 명맥을 잇는 마법사들이 남아 있던가?

과거엔 흔하디흔한 마법 중 하나였지만, 생명의 존엄성을 해친단 이유로 그 명맥을 잇던 흑마법사들과 마녀들을 모조리 참수하여 세상에 피바람이 불었던 것이 벌써 수백 년 전이다.

그렇게 세상에 흔적을 감춘 줄 알았던 흑마법이 다시 나타났다고?

그것도 이곳에…?

대부분이 우왕좌왕해도, 1장로만큼은 여전히 냉정한 얼굴로 신관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흑마법이 확실한가.”

“남은 흔적에서 신성 마법에 격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킵니다. 확실합니다.”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외부에서 압력을 가한 흑마법의 수준을 묻는 것.

신관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찬찬히 설명했다.

“저희 터전에 설치된 수호 마법진은 고대 신관들께서 오랜 시간 공들여 온 마법진입니다. 명맥을 간신히 잇고 있는 현재와 달리, 당시엔 수준 높은 마법을 구사하는 명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만든 마법진에 타격을 입혔다 함은….”

“즉슨 외부에서 압력을 가했던 흑마법 시전자 역시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그렇습니다.”

“허….”

내내 무미건조한 얼굴로 냉정을 유지하던 1장로가 결국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흑마법의 재림.

그것도 굉장한 수준이란 말에 의회장에 정적이 일었다.

눈을 감고 등을 기대던 겔러하드가 다시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화르륵.

일순 그의 눈동자에 불꽃이 점화되는 듯했다.

번뜩이는 눈으로 장로들을 응시하던 그가 무겁게 입을 뗐다.

“줄곧 평화를 유지해 온 우리 터전의 침범. 그리고 이에 맞서 목숨 걸고 싸우고 죽어 간 우리의 병사들…. 다들 어찌 생각하시오. 아직도 레온하르트 영지의 일은 그들 선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엔 변함이 없소이까?”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무슨 낯짝으로 왕의 말에 반박하겠는가.

침묵 속에서 겔러하드가 재차 말을 이었다.

“오늘 일이 시사하는 바는 크오. 더는 우리의 터전이 안전치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알 수 없는 세력이 세상의 전복을 꾀하고 있음을 뜻하는바.”

콰앙!

겔러하드의 주먹이 의자의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내리친 곳이 박살이 나며 가루로 흩날린다. 손에 서린 힘에 그의 분노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 준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던 장로들의 눈과 귀가 일제히 겔러하드를 향했다.

“나는 오늘부로 세상과 단절했던 우리 터전의 문을 다시 열 생각이오.”

“그, 그런….”

장로들 대부분의 반응은 역시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본 척도 않고 겔러하드가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더불어 레온하르트 영지 문제와 우리의 문제가 같은바. 그들과 협업하여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나아가 숲에 도사리고 있는 불순한 무리를 모조리 쓸어 내고 치안을 다시 바로 세우겠소!”

자취를 감추었던 엘프가, 다시 세상에 드러낼 것을 공표하는 순간이었다.

***

“후우….”

천마심공을 운공하던 이든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창백했던 그의 안색도 혈색이 점차 원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드높은 천마심공의 경지가 빠른 수복을 도와주고 있지만, 임시방편도 한두 번일 때나 괜찮은 것.

내상이란 것은 쉬이 볼 것이 아니었다.

몸을 점검하던 이든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칠할 정도인가…. 영약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일단은 몸을 사릴 수밖에.”

그토록 오랫동안 삼매경에 빠져 일주천을 수없이도 반복했음에도 내상의 회복은 여전히 모자라기만 했다.

이든이 재차 천마심공을 운공하려던 그때.

끼익.

그의 거처의 방문이 열렸다.

“몸은 좀 어떤가.”

“겔러하드 님이셨군요.”

이든의 말을 듣던 겔러하드가 인상을 썼다.

“이셨군요? 좀 반갑다는 기색 좀 보이면 어디 덧나나?”

“제가 입에 발린 소린 잘 못 하는 성격이라서요.”

“거 말하는 본새하고는. 그냥 가 버려?”

“흠흠. 어딜 가시려고요.”

그런데 왜일까?

겔러하드의 으름장에 어째 이든이 쩔쩔매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다?

“사람 참. 이리도 행동이 달라지다니, 그새 냄새라도 맡은 겐가?”

“이 향기. 못 맡으려야 못 맡을 수가 없지요.”

“훗. 갑자기 누가 달라던 게 생각이 나서 말이지.”

웃어 보이던 겔러하드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백색의 광채를 발하는 달걀만 한 크기의 열매가 그의 손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이든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절대 안 된다면서요. 괜찮겠습니까?”

“훗. 이깟 열매가 뭐라고, 설마하니 이곳을 지켜 준 은인에게 이것 하나 못 내 줄까.”

“…….”

이든이 조심스럽게 건네받은 그것은 다름 아닌 세계수 열매.

그러니까 이든이 대환단과 같은 것이라 여기던 그것이었다.

뭐, 아직 섭취 전이니 예상일 뿐인지만.

하지만 이 향기.

그리고 이 열매가 품고 있는 이 웅장한 기운.

다시 봐도 대환단의 그것과 너무도 대동소이했다.

대환단. 아니, 열매를 받아든 이든의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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