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흐뭇한 얼굴로 이든을 바라보던 겔러하드의 얼굴이 일순 진지해졌다.
“세계수 열매는 우리 엘프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힘을 다룰 수 있지. 그만큼 그 안에 담긴 힘이 거대하고 다루기 힘들다는 거지. 뭐, 자네 정도 되는 물건이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주의해서 나쁠 건 없지.”
“예.”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이 어째 전혀 듣지 않은 것 같다.
그 모습에 겔러하드는 혀를 다셨다.
“쩝…. 그래. 뭐. 지금 당장 시도할 생각인가?”
“간 볼 거 있겠습니까. 도로 뺏기 전에 날름 먹어야지요.”
겔러하드가 얼굴을 구겼다.
“허 참. 나를 뭐로 보고….!”
쏘옥.
겔러하드가 한마디 하려던 그때. 세계수 열매가 망설임 없이 이든의 입에 쑥 들어갔다.
이를 본 겔러하드의 입이 쩍 벌렸다. 이리 급하게 먹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
“아, 아니! 진짜 벌써 먹어 버린 거야?”
“…….”
꽥하니 소리치다시피 한 겔러하드의 말에도 이든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경악한 얼굴을 하던 겔러하드의 눈빛도 찬찬히 진중하게 변했다.
‘세계수 열매를 섭취했던 모든 인간이 폐인을 면치 못했다. 과연 이 친구는 어쩔는지….’
스윽.
겔러하드가 조금 멀찍이 떨어졌다.
중차대한 이 순간, 누구도 이든을 방해해선 안 된다 여겼기 때문이다.
겔러하드의 가라앉은 시선이 닿은 곳. 거기엔 이든이 부동의 가부좌 자세로 자신의 내부를 관조하고 있었다.
***
새록새록 기억이 떠올랐다.
전생의 무림을 정벌하던 시절.
패도의 길을 걷던 그 시절!
사천을 우회하여 소림을 선제공격하였던 그 날.
이든. 아니 무진은 소림의 보물 대환단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가 무리하면서까지 굴지의 소림부터 공격을 강행한 이유.
오로지 이것.
대환단 하나 때문이었다.
당시 무진은 무림맹과의 싸움을 확신할 수 없었다.
무림맹의 저력보다도 당시 동수를 이루던 맹주 그 인간 하나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불확실한 싸움을 해소시킬 수 있는 것이 대환단이라 생각했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 중 하나가 속전속결이다.
빠르게 치고 올라가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모든 지휘관의 기본 덕목이 아니던가.
그런데 첫 멸문의 대상이 굴지의 소림이라니?
당시 이를 두고 장로들이 얼마나 반대를 했던가.
그럼에도 신교는 무진의 지휘 아래 공격을 강행했다.
당장에 있어 속전속결보다 자신의 경지를 높임으로써 확실한 승부를 보겠다는 것.
그리고 그의 예상은 맞았다.
당시에 그의 선택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니까.
큰 피해가 있었지만, 목적으로 두었던 대환단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을 들여 천천히 대환단의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했다.
그리고 대환단을 처음 섭취하였던 그때처럼.
그 안에 담겨 있던 무궁한 대자연의 기운이 세계수 열매에도 필시 담겨 있었다.
지금처럼.
후우우우우우우….
바람이 이는 곳은 없는데,
어째선지 바람이 불어온다.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파라라랏
그의 옷자락 끝이 펄럭이며 위로 솟구쳤다.
바람의 축복이다.
그리고 이어 살짝 붕 뜬 그의 몸에서 푸른 불꽃이 미세하게 피어오른다. 세계수 열매에 있던 화기(火氣)가 혈맥과 기맥에 전반에 뻗치는 것이 가시화되는 것.
이는 불의 축복.
뒤이어 미약하게나마 뿌연 불투명한 안개가 방안 가득 퍼지며 가시화된 화기를 천천히 잠재운다. 마치 아침에 이파리에 맺는 이슬처럼 이든의 전신에도 땀이 아닌, 물방울이 맺혔다.
뻗쳤던 기운이 갈무리되어 가는 물의 축복.
그리고.
붕 떴던 몸이 차츰 가라앉자.
그의 사방으로 지면이 미세한 떨림이 울렸다.
갈무리된 기운들이 단전으로 들어오는 개통의 과정.
거기서 오는 땅의 환호.
수풍지화(水風地火). 대자연의 기운들이 이든을 통해서 표현되고, 보여지고 있었다.
조용했지만, 화려했고.
빨랐지만, 정교했다.
두 번째 생.
처음 대환단을 섭취했을 때보다 아득히 높은 깨달음과 경험으로.
일모의 낭비 없이 모든 기운이 그의 단전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단전의 변화는 곧 그릇의 변화.
더 크고 높게 쌓인 그릇은 그의 신체에도 작은 변화를 주었다.
내상은 진즉에 회복됐다.
몸 전반에 자잘히 있던 흉터들이 사라졌고, 머리카락은 더욱 윤기가 나는 듯했으며 하얗던 피부는 백색의 진주처럼 광채마저 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긴 눈은 뜨이지 않는다.
일말의 기대였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곧 그의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
그 안에 갈무리된 기운들이.
잠깐의 변화 동안 쌓인 그의 기운들이 일전과는 비교를 불가한다.
과거 전성기 때와 비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 끝 모를 힘에, 도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후우우우우….”
이윽고 내뱉어지는 이든의 숨결.
길었던 변화 속에서 처음 내뱉는 숨결은 그 자체만으로도 태산의 기운을 품는 듯했다.
“…어, 어떻게….”
겔러하드가 아닌, 여인의 목소리.
이든의 기감이 향한 곳엔 믿기지 않는 듯 연신 흔들리는 동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스테어가 서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죠?”
이든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
움찔.
아스테어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녀를 향한 감긴 눈이.
마치 자신을 또렷이 응시하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비치는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저 웅장한 기운.
태산 같았던 기운은 광활한 하늘을 품은 듯 아득히 높고, 또 높아 보였다.
아스테어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이든의 무거웠던 입이 천천히 열리고, 그의 음성이 또렷히 퍼졌다.
“세상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하지.”
“……?”
뜬금없는,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말이었다.
“지금 자네가 날 보는 것 역시 광활한 힘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
이제는 태산을 아득히 뛰어넘는 천공의 힘을 품고 있음에도 자신을 낮추는 이든과, 그런 그를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아스테어.
이든이 살짝 웃으며 입을 뗐다.
“너도 욕심이 많을 것 같구나. 나처럼.”
“…….”
“내가 해냈으니 너 역시 시간을 들으면 할 수 있다. 조급해하지 말고 주어진 것을 정확하게 직시해. 그럼 가능하다.”
일전 칼라슈가 해 준 조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무게감이 다르다.
와 닿는 느낌이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하늘에 닿은 듯한 그의 말은 그녀의 뇌리에 깊이 들이박혔다.
아스테어가 천천히 고갤 숙였다.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음.”
이든 역시 가볍게 고갤 숙이곤 그녀의 인사에 대답을 대신했다.
무엇이라도 깨달은 걸까.
의미 모를 표정으로 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간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겔러하드가 문득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방금 그 소녀… 뭣 때문에 자네 방에 왔던 거지?”
생각해 보니….
아스테어, 그녀 역시 우연히 이든의 변화를 목도하다 본래 목적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나간 것일 거다.
이든이 가볍게 웃어 보였다.
“별것 아닙니다.”
“응?”
“발리스타. 그 친구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제가 원체 꼴이 엉망이었으니 걱정됐던 모양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건가? 듣지도 않았지 않나?”
“…듣지 않아도 압니다.”
“정신 전달?”
전음을 주고받았느냐 묻는 것이다. 이든이 웃으며 고갤 저었다.
“아닙니다.”
“흠….”
이든을 바라보는 겔러하드의 눈이 미묘하게 변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잠깐 사이에 많이 변한 것 같구만.”
“그렇습니까?”
“으음. 뭔가 여유가 생겼달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전생의 이미 경험했던 깨달음이지만, 새로운 몸으로 한 번 더 경험하니 역시나였다.
깨달음으로 인한 변화는 신(身)뿐만 아니라 심(心)에도 변화를 주었다.
한층 더 강해진, 한층 더 단단해진 심신의 변화.
사람 자체가 성장했단 것이다.
겔러하드가 벽에 기대던 등을 뗐다.
이든의 변화 말고도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듯한 표정이다.
“아 그리고 말인데, 한 가지 더 좋은 소식이 있네. 뭐냐 하면….”
“문을 열기로 마음을 굳히셨군요.”
“자네가 그걸 어찌….”
겔러하드가 벙찐 표정을 했다.
마치 미리 들은 것 마냥 이든은 술술 말문을 열었다.
“그편이 좋겠습니다. 흑마법이 뭔지는 모르지만, 저 역시 왠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진상 파악과 함께 몬스터 토벌을 위해서라면 레온하르트 영지와 협업하는 것이 확실하겠죠.”
“…내 생각을 읽은 건가!? 우리 왕가의 능력처럼…?”
“비슷한 것이겠죠.”
“허 참.”
전생에 등선을 앞에 두었던 그 경지. 이든이 이룩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입신(入神) 경지는 이토록 대단하기만 했다.
“욕심나는군.”
“……?”
하지만 아무리 입신의 그라도 겔러하드의 저 말은 의미를 알아차리기 힘들 것이다.
“자네 말이야.”
“저의 힘 말입니까.”
“아니. 그것 말고 자네 말이야. 자네.”
“취향이라면…. 존중해 드리겠습니다.”
“자네. 내 딸에게 관심 없나? 우리 딸은 자네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던데.”
“…아직은 저 스스로만 생각하기도 벅찹니다.”
“하긴. 그렇겠지.”
겔러하드 역시 왕 이전에 한 명의 무인이기에, 이든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겔러하드가 고갤 끄덕였다.
“훗.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더 떼쓰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는 무슨.”
이든이 내내 유지하던 가부좌 자세를 풀고 자릴 털고 일어났다.
이를 본 겔러하드가 짐작하듯 입을 열었다.
“이제 가려는 겐가?”
“슬슬 가 봐야죠. 영지에 있을 동료들이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하긴. 이곳 일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됐지. 어서 가 보세.”
“예. 그전에….”
“음?”
이든이 한쪽 옆에 개어 놓은 무복을 집었다.
“갈아입고 가야죠.”
“참! 그렇지. 그럼 입고 나오게. 난 배웅할 준비를 해 놓지.”
“뭘 배웅까지 하십니까.”
“그래도 우리 터전을 지켜 준 영웅 아닌가. 상황이 상황인지라 성대하게는 못 해 주겠지만, 인사는 제대로 해야지.”
“…그럼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
발리스타와 아스테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든 역시 별반 다를 것 없는 반응.
이든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저기… 충분히 성대한 것 같은데요?”
“애들 입단속이 영 별로인 모양이군. 그새 소문이 났는지 이렇게 많이들 모였군.”
발리스타와 아스테어의 휘둥그레진 눈이 향한 곳.
거기엔 이곳 터전에 주민들이 성문 앞에 상당수 모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그들의 활약상을 전해 들은 주민들이었다.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일제히 터전을 지켜준 영웅들을 향했다.
이목을 한 몸에 받던 그들 곁으로 겔러하드와 실비아가 몇 발짝 다가왔다.
실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시는군요.”
“예.”
“더 제대로 모시고 싶었는데….”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때 뵙지요. 그리고….”
이든이 갈아입은 본인의 무복을 손으로 쓸어 보였다.
이든이 그답지 않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 옷. 직접 깨끗이 해 주셨다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뭘요.”
실비아가 얼굴을 붉히며 볼을 긁적이던 그때.
스윽.
둘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 속에 겔러하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참. 어울리는 데 말이야. 아깝단 말이지….”
“…아빠!”
“훗.”
부녀의 가식 없는 대화에 이든이 살짝 웃었다.
눈치 없고 능글맞은 것이 어째 누군가를 똑 닮은 것 같다.
‘다들 잘 계시려나.’
이든이 찰나 지부장과 길드장을 떠올렸다.
그때, 겔러하드가 손뼉을 마주치고는 다시 주변을 환기시켰다.
누가 뭐래도 지금의 주인공은 눈앞의 청년들이었기에.
겔러하드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한없이 인자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모두 고마웠네. 기회가 된다면 다시들 보세.”
끄덕.
환하게 웃는 발리스타.
아스테어 역시 흔치 않게 미소 띤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든 역시.
“많은 걸 얻고 갑니다. 고마웠습니다. 모두.”
정예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국경 근처까지 온 이든과 일행들.
다행히 몇 차례 있던 소동으로 인근에 몬스터는 씨가 마른 듯 보였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별 탈 없이 레온하르트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두를 놀라게 해 줄 부푼 희망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