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250)

69화.

근래 며칠 사이. 레온하르트 영지는 오래간만에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심심치 않게 영지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국경 밖 몬스터들이 돌연 자취를 감춘 것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

성 주변은 그간의 전투로 황폐한 모습 그대로였지만, 매일같이 토벌을 나서던 병사들과, 살아 돌아오길 날마다 빌던 그들의 가족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이었다.

근래 보기 드물던 한적함으로 성벽 위의 병사가 나른한 얼굴로 보초를 서던 무렵.

건조했던 그의 무표정이 차츰 변하며 눈이 가느다랗게 뜨여졌다.

“응…? 뭐지?”

그의 시야가 향한 곳.

국경 쪽. 먼발치에서 점점이 다가오는 사람의 형태가 보였다.

“…몬스터?”

라고 하기엔 그 수가 고작 셋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껏 이 주변을 어슬렁거렸던 몬스터들은 항상 무리로 다녀갔었다.

겨우 저 정도 수준이었다면 애초에 레온하르트 영지가 이리 황폐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점점이. 더욱 가까워지는 의문의 형태들.

그러나 이내 이를 바라본 병사의 동공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 설마!!!”

헛바람을 집어삼키던 병사가 급히 외벽 아래 성문 인근에서 보초를 서던 동료에게 소릴 질렀다.

“야, 야야!!!”

“뭐야. 갑자기?”

“그, 그럴 게 아니라. 빨리! 빨리 성문 열어!!!”

성문 옆 병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너무도 놀란 나머지 마음은 급한데 말은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성벽 위의 병사가 답답한 가슴을 팡팡 치며 외쳤다.

“생존자!!!!”

“엉?”

“학생 생존자들 돌아오고 있다고!!!”

“뭐어!?”

내내 감감무소식이던 탓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행방불명된 학생들이 돌아온 것이다.

쿠구구구궁.

굳게 닫혔던 성문이 돌아오는 귀환자들을 향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

“뭐…!?”

내내 한숨 제대로 자지 못했던 제라드 단장의 퀭한 눈이 돌연 병사를 향했다.

“…학생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예. 틀림없이 육안으로 확인했습니다. 지금쯤이면 성안으로 들어서고 있을 겁니다!”

벌떡.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제라드의 눈에 일순 생기가 돌았다.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었다.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성문 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웅성웅성.

그새 소문이 퍼진 걸까.

열린 성문 앞엔 어느새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성문 앞 사람들을 훑던 제라드 단장이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한 얼굴 몇몇이 보였던 탓이다.

유니콘 길드의 길드원이었다.

“단장님.”

“대장님들께서도 오셨군요.”

대장들을 바라보던 제라드가 일순 고갤 갸웃거렸다.

‘응?’

수척해 보이는 제라드와는 달리 대장들은 크게 걱정 따윈 없었던 모양인지, 케인과 베리의 얼굴엔 그간 푹 쉬었는지 생기가 돌고 있었다.

더군다나 저들의 표정. 사지에서 귀환한 동료와의 재회를 앞둔 모습이 하기엔 당연히 돌아올 줄 알았단 얼굴이다.

제라드가 참다 참다 대장들 둘에게 물었다.

“두 분께선 아무 걱정 없으셨습니까…?”

“예? 뭘 말입니까?”

“아, 아니… 동료가 무사히 귀환했는데, 걱정되지 않으셨습니까?”

“누가 누굴 걱정을요? 쟤를요?”

“…….”

옆에서 베리와 제라드의 얘길 듣던 케인이 껄껄 웃었다.

“허허헛! 제라드 단장님께서 재미난 농도 하실 줄이야. 저 친구가 죽긴 왜 죽습니까. 껄껄껄!”

잠깐 겪어 본 베리도 그랬지만, 특히나 케인 같은 경우엔 더더욱 그랬다.

그간 옆에서 이든을 지켜봐 온 것이 있기에 딱히 이든이 잘못되리라 걱정은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하지 않던 그였다.

오히려 숲의 몬스터를 걱정했다면 모를까….

이는 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든과 함께하는 호송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지금껏 그가 보여 준 모습을 생각하면, 오히려 걱정이 쓸데없는 것이었다.

베리와 케인의 반응에 제라드가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지?’ 하는 얼굴을 하고 있던 사이.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사람들 틈 사이에서 나오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산만 한 등치에 허허실실 웃고 있는 발리스타와 이런 분위기에서도 여전히 차가운 분위기를 훌훌 풍기는 아스테어.

그리고 착 감긴 눈에 어쩐지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에 이든이 거기에 있었다.

그 인파 속에서 어찌 알아낸 것일까.

이든의 고개가 케인과 베리. 그리고 제라드 단장을 향했다.

“모두 여기 계셨군요.”

“음?”

“허어….”

“…….”

이든을 향한 그들의 눈이 일순 흔들렸다.

각자의 직책 이전에 그들 모두 무인이었다.

그들이라고 이든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을까.

케인과 베리. 그리고 제라드가 저마다 마른침을 삼켰다.

이든의 여유로운 얼굴에서 아득히 높은 힘이 느껴진 탓이다.

이전의 이든은 태산 같은 웅장한 기운에 시퍼런 날을 잔뜩 세운 철산(鐵山)이었다면.

지금은 아득히 높은 하늘에 벼르던 날은 사라지고 사방을 품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뭔가 모습이 변한 것 같기도 한데….’

지금 이든은 뭐랄까.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전에도 수려했던 외모지만, 지금은 더없이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딱히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모든 것이 새로 태어난 사람을 보는 것 같달까….

시선을 받으며 이든이 살며시 웃었다.

“숲 안쪽에서 기이한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저의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따로 묻지도 않았는데 마치 속이라도 들여다본 것처럼 알아서 척척 대답해 주었다.

그 반응에 케인과 베리가 멍한 얼굴을 할 때쯤. 이든의 고개가 제라드 쪽으로 향했다.

“이곳에 책임자 제라드 님 맞으시죠?”

“어? 어어… 마, 맞소.”

감긴 눈으로 어디에 누가 있는지, 귀신같이 알아냈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제라드를 향해 이든이 입을 열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내게 말이오?”

“예. 앞으로 레온하르트의 앞날에 관한 굉장히 중차대한 얘깁니다.”

“음?”

젊디젊은 청년의 입에서 영지의 앞날이란 얘기가 나오는데, 어째 전혀 어색함이 묻어 나오지 않는다.

저도 모르게 고갤 끄덕인 제라드를 뒤로하고, 이든의 고개가 다시 한쪽으로 향했다.

이든의 감긴 눈이 향한 곳.

거기엔 칼라슈가 그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무사히 돌아온 친구들의 모습에 칼라슈의 표정은 한결 편해 보였다.

그를 발견한 발리스타가 환하게 웃었다.

“칼라슈 형. 다친 몸으로 여기까지 나와 주시다니 아주 감격스럽소!”

왁자지껄한 발리스타와 달리 아스테어는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살짝 웃고 있었다.

칼라슈가 가라앉은 눈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사히 돌아올 줄 알았어. 다들 고생 많았다.”

칼라슈의 얼굴에 흔치 않은 미소가 걸렸다.

소년병을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퇴각하는 병사들을 위해 한 몸 희생하려 했던 친구들이다.

언제나 차갑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더없이 따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훈훈한 분위기 속.

칼라슈의 시선이 이번엔 이든을 향했다.

“고맙다. 이든.”

“새롭군.”

“응?”

“자네의 그런 모습도 나쁘지 않네.”

“무, 무슨…!”

칼라슈의 얼굴이 빨개졌다.

“바짝 벼른 칼날도 좋지만, 때론 부드러움이 필요할 때가 있지.”

“……?”

“검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지금의 자네처럼 말이야.”

지금의 칼라슈에겐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툭툭.

이든이 웃으며 그의 어깰 두들겼다.

“나중에 막히거든, 지금의 내 얘길 떠올려 주게.”

이든이 다시 제라드 단장 쪽으로 고갤 돌렸다.

“자 그럼, 제라드 단장님.”

“아, 아아! 그래. 일단 자릴 옮기지.”

멀어지는 이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칼라슈의 멍한 눈이 다시 뒤에 친구들을 향했다.

의미 모를 말을 계속 되짚기엔 친구들의 귀환이 너무나도 반갑고 기뻤던 탓이다.

***

얘길 듣던 제라드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다.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그가 재차 물었다.

“그, 그게… 정말인가?”

“예.”

제라드로만 한정 지을 것도 없다.

옆에서 이를 듣던 케인과 베리 둘 다 그와 비슷한 표정이었으니까.

쩍 벌어진 입을 한 제라드의 얼굴에 점차 화색이 드리웠다.

요즘 같은 시국에 아직 이 말을 쓰기엔 뭣하지만, 이든이 그들에게 전해 준 소식은 분명 호재였다.

제라드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얘기가 사실이었다니….”

“……?”

모두의 시선이 일순 제라드를 향했다.

“꿈에도 몰랐소. 국경 밖에 엘프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일 줄은….”

“그런 얘기가 떠돌았습니까?”

케인의 물음에 제라드가 고갤 끄덕였다.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이야기였소. 옛날엔 그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한 우스갯소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난 그들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완전히 사라진 종족이라 생각했소. 그들의 존재 유무 자체만으로도 놀라울 정도인데, 그들이 우리 영지를 돕겠다니….”

“…앞으로 단장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음…!”

“그들의 말로는 국경 밖 몬스터의 움직임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필시 누군가의 소행이라더군요.”

제라드가 얼굴을 굳혔다.

“몬스터가 미쳐 날뛰는 것이… 누군가 꾸민 짓이라는 겁니까?”

“예. 그들 말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흑마법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흑마법?”

“아십니까?”

이든의 물음에 제라드가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들어 본 적은 있소. 하지만… 그들은 오래전에 모조리 참수당했을 텐데?”

“참수요?”

“그러니까 지금의 제국이 세워지기 훨씬 이전, 흑마법을 세상에서 지우겠다고 대대적으로 마녀들과 흑마법사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숙청을 벌이던 일이 있었습니다. 유지를 이을 사람 하나 남기지 않고 죄다 죽여 없앴으니 당시 이후로 사실상 흑마법 역시 사라진 것과 다를 것이 없었죠. 한데 흑마법이 다시 나타났다니. 참으로 믿기지가 않습니다.”

지금으로선 여기 있는 사람들끼리 아무리 머릴 맞대고 고민해 봤자 답이 안 나올 것이다.

이든이 입을 열었다.

“정확한 것은 엘프 쪽에서 조사단을 파견할 테니, 그때 이후로 진상을 파악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더는 레온하르트 영지 혼자서 저 몬스터들로 골머리를 썩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죠.”

“맞습니다. 그들의 저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필시 큰 도움이 되겠지요.”

“그간 홀로 고군분투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갤 끄덕이던 제라드의 눈이 이든을 향했다.

“모든 것이 이든 님 덕분입니다.”

“감사는 제가 아닌 이곳에 병사들과 토벌에 참가해 준 학생들. 그리고 큰 결단을 내려 준 엘프들에게 해 주십시오. 저는 딱히 한 것이 없습니다.

이든을 향한 제라드의 눈에 찰나 이채가 발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해 봤자 기사 아카데미 학생들 또래 정도로 보이는 듯한 앳된 얼굴이었지만, 이든을 향한 제라드의 눈빛은 분명 후기지수가 아닌 동등한 무인 아니 더 나아가 마땅히 존경을 표해야 할 절대 고수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때.

벌떡.

앞에 놓였던 차를 다 비운 이든이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라드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이제 가시려는 겁니까.”

“예. 슬슬 가야지요. 제 오지랖 때문에 너무 지체되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 오지랖 덕분에 우리 영지의 숨통이 트였지요.”

제라드의 말을 듣던 이든이 그를 마주 보며 웃었다.

이든이 한쪽 손바닥을 펴고, 남은 손으로 주먹을 쥐어 찔러 넣었다.

포권을 취한 이든이 제라드에게 정중히 고갤 숙였다.

그 경건한 모습에 제라드의 고개도 절로 굽혀졌다.

“부디. 앞으로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이곳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마주하며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는 두 사내 사이에, 무인으로서의 존경이 오가고 있었다.

***

출발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어 갔다. 애초에 모든 짐이 이곳에서 필요로 하는 군수 물자였고, 그것을 전부 내렸으니 달리 준비할 것도 없었다. 해 봤자 식량 정도밖에.

스파이크 길드장이 고갤 끄덕이고, 케인 역시 마주 끄덕이며 입을 뗐다.

“출발!!!”

출발!!!!

쩌렁쩌렁 외치는 케인의 선창 뒤로 길드원들의 우렁찬 복창이 영지에 가득히 울렸다.

수많은 인파의 배웅 속에 이든 역시 천천히 걸음을 옮길 무렵.

“이든.”

칼라슈의 목소리에, 이든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이든이 입을 뗐다.

“후발대가 먼저 떠나는군.”

“애초에 싸우러 온 것도 아니었지.”

칼라슈의 대답에 이든이 살짝 웃었다.

“차차 상황이 좋아질 거야. 무운을 빌지.”

“그래.”

건조하기 짝이 없는 사내들의 멋대가리 없는 대화지만,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든 형!!!”

그때, 먼발치에서 들리는 발리스타의 음성.

이든의 고개가 살짝 그곳으로 틀어졌다.

“고맙소!!!!”

발리스타의 커다란 목소리가 인파를 뚫고 이든의 귓가에 박혔다.

이든이 손을 몇 번 흔들곤 다시 수레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예정에 없던 호송.

예정에 없던 만남.

예정에 없던 위기.

그리고

예정에 없던 기연.

삶이란 게 본래 예정 없는 일의 연속이라지만, 더욱 여실하게 느꼈던 근래였다.

활짝 열린 성문 밖을 나선 이든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래서 세상 살맛 나는 것이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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