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
마주 보는 둘 사이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김이 모락모락 났던 차도 이젠 식어 찬 맹물이 되었다.
비싼 찻잎으로 우린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차나 마시자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침묵만이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묘한 침묵이 감돌던 그때, 로브를 깊게 눌러쓴 한 인형(人形)이 입을 열었다.
“레온하르트 영지에서 생각보다 일을 말끔히 처리한 모양이오. 술법을 걸어 놓은 몬스터 상당수가 연결이 끊겼소. 다 죽었다는 거지.”
“…….”
“변수가 그들을 도왔소.”
쾅.
소음이 방 안 가득 메아리쳤다.
주절주절 떠들어 대던 인형의 맞은편, 상대방이 차가 놓인 탁자를 내려친 것이다.
부르르….
탁자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던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악물던 상대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난 바로 물리라 하였소. 그런데 왜 물리지 않았던 거요.”
“하아….”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이 말이 나올 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단 얼굴이었다.
“흑마법은 보통의 마법과 다르오. 술자가 흑마법을 회수한다 한들. 이미 주술에 걸린 놈들은 흑마법에 정신이 잠식된 상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소. 미리 설명해 드리지 않았소이까?”
“…내 손자가 있었소.”
로브를 쓴 이가 가볍게 고갤 끄덕였다.
“예. 들었습니다. 그랬다고 하더군요.”
“자칫 손자가 죽을 뻔하였소!”
“결론은 죽지 않았지요.”
흥분한 이를 앞에 두고도 로브를 뒤집어쓴 이는 여전히 여유로운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만큼 강한 심력의 소유자라는 뜻.
로브의 사내가 화제를 돌렸다.
“…무튼 애초에 우리가 원하던 결과는 아니지만, 손자 되는 분께서도 무사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공작께서 약조하셨던 레온하르트 영지 탈환은 더 힘들게 되었지만요.”
뒤집어쓴 로브 속 번뜩이는 눈이 맞은 편 앉아 있는 이를 향했다.
작은 창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달빛 한줄기가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맞은편에 앉아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듀란드 공작이 시퍼렇게 날이 선 눈으로 로브 쓴 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약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것이오. 단 손자를 그곳에서 빼내 온 다음에 말이오.”
“가능하겠습니까. 제가 듣기론 칼라슈 도련님은 의리가 깊어 동료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두텁다 들었습니다. 그런 그가 동료들을 사지에 내버려 두고, 홀로 오겠습니까?”
“…지 아비를 닮아 쓸데없이 착해 빠져선. 아무튼 칼라슈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빼낼 것이오. 그전까지 레온하르트 영지를 건들지 마시오. 혹…. 약속을 어길 때엔.”
“…….”
듀란드 공작이 말끝을 흐리자, 로브 속의 무심한 눈이 맞은편 그를 향했다.
공작이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차디찬 음성을 내뱉었다.
“그땐. 나와 당신 간에 약조했던 것 모두 물거품이 될 줄 아시오.”
“…명심하겠소.”
“후우.”
듀란드 공작이 앞에 놓인 다 식어 버린 차를 벌컥 들이켰다.
그사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로브를 쓴 이가, 뭔가 떠오른 듯 화제를 돌렸다.
“캐슬롯 후작 건에 관해서 말입니다.”
캐슬롯이 거론되자, 찻잔을 탁자에 놓으려던 듀란드의 손이 중간에 멈칫했다.
로브를 쓴 이가 말을 재차 이었다.
“황실에선 어떻게 하기로 결정 났는지요?”
“사망 처리로 결론 났소.”
“그랬군요. 시신 역시 못 찾았다 들었습니다.”
“우리 사정을 훤히 알고 있군.”
“우리의 눈과 귀가 없는 곳은 없으니까요.”
“하.”
듀란드 공작이 허탈한 표정을 했다. 자신의 눈앞에 로브를 뒤집어쓴 이는 이미 제국의 상황을 다 알고 있다.
그냥 화제를 돌릴 겸 예의상 물어본 말이란 뜻.
더군다나 의회장에서 오가던 얘기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꽤 오래전부터 세작을 심어 두었다는 뜻이리라.
자신들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저자의 무심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내심 화가 밀려왔으나, 이들과 내통하는 자신이 따질 상황 역시 아니었다.
듀란드 공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곤 화제를 돌렸다.
“차라리 캐슬롯 영지는 어떻소. 레온하르트 영지는 결속이 강한 편이오. 기울던 곳이라곤 하지만, 레온하르트라는 이름은 가벼이 볼 것이 아니오. 영주가 종적을 감춘 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그 유지를 잇는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지. 하지만 캐슬롯 영지는 다르오. 결속력도 한참 부족하고. 게다가… 캐슬롯 가문은 현재 여러 가지로 위태해서 멸문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오. 해서 오히려 이곳을 취하는 편이….”
“레온하르트 영지가 아니면 의미가 없소.”
“…….”
“재차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레온하르트 영지의 땅입니다. 다른 땅은 필요 없소.”
듀란드의 가라앉은 눈이 로브 쓴 이를 향했다.
“연유를 물어도 되겠소?”
“…….”
“그토록 레온하르트 땅에 목숨을 거는 이유 말이오.”
“전에도 말했지만, 깊게 알려 하지 마시오. 우리의 관계는 서로의 목적에 따라 원하는 것을 주고받으면 그뿐. 선을 넘지 마시오.”
지이이잉.
말투는 담담했지만, 로브 속 눈은 섬뜩하기 짝이 없는 안광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듀란드 공작이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눈이군…’
조금은 새하얗게 질린 듀란드의 안색에 로브 쓴 이가 살기를 누그러뜨렸다.
그 역시 살짝 한숨을 내뱉곤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 캐슬롯 후작 말이오. 사인은… 역시 밝혀진 것이 없겠지요?”
듀란드 공작이 고갤 끄덕였다.
“하늘로 솟구친 것인지, 시신조차 발견할 수 없었소. 물증이 없으니 사인 역시 밝혀내지 못하였소.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오?”
“혹 물증은 없더라도 심증은 없소이까?”
“심증이라.”
“있구려.”
“…말 그대로 심증일 뿐이오. 혹시 제국에 눈과 귀를 심었다면 들었을 것이오. 캐슬롯 후작이 테이머 길드와 관련해 불법 노예 거래 명단에 포함되었단 사실을.”
“들었소. 그리고 공작께선 캐슬롯 후작의 꼬리를 자르려 하지 않았소이까?”
‘훤히 알고 있군.’
자신의 속내가 들킨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듀란드 공작은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급히 표정을 수습한 듀란드가 입을 열었다.
“맞소. 본래는 그 역시 우리와 뜻을 함께하려 했으나, 인간이 영 행실이 안 좋았던 터라…. 그의 아들 되는 후임도 영 별로고, 차라리 꼬리를 자르는 편이 좋다 생각했소.”
“그 꼬리.”
“……?”
“나중에 자르시는 편이 어떻습니까?”
“무슨 말이오?”
“캐슬롯 후작이 테이머 길드 명단에 연루된 이유, 그리고 공작께서 심증으로 여기시는 것. 같은 이유이지 않으십니까?”
허를 찌르는 로브의 사내 말에 듀란드 공작이 산뜻하게 이를 인정했다.
“맞소. 바로… 유니콘 길드.”
“유니콘 길드.”
거진 동시에 나온 대답.
듀란드 공작이 놀란 표정을 하는 사이, 로브 쓴 이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우연찮게도 레온하르트 영지 전복 실패의 이유 역시 유니콘 길드였소.”
“유니콘 길드?”
“모르셨소?”
“유니콘 길드가 레온하르트 영지에는 왜?”
“스파이크 상단이란 곳에서 호송을 부탁했던 모양이오. 레온하르트 영지 전복 실패. 그리고 테이머 길드 명단 공개 건… 어째 일을 그르치는 곳마다 유니콘 길드가 연루된 것이 수상쩍지 않소?”
“그러니까 유니콘 길드가 장애물이 되고 있다?”
로브 쓴 이가 고갤 끄덕였다.
“뭐 덕분에 레온하르트 영지 전복은 실패했고, 칼라슈 도련님께서 무사하게 됐지만. 어찌 됐든 간에 유니콘 길드가 계속 거슬리더군요.”
“해서… 유니콘 길드를 치워 내자?”
“정답이오.”
듀란드가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 역시 은연중, 유니콘 길드가 내내 거슬리다 생각하곤 있었다.
하지만….
유니콘 길드는 운송업으로 제국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전투 요원은 적을지언정 저력을 무시해선 안 된다.
차근차근히 갉아 내어 유니콘의 힘을 빼내야 하는데, 그것이 쉬이 볼 것이 아니다.
“어려울 것 있겠소? 공작께서 잘라 내려던 그 꼬리를 이용하면 되지 않겠소?”
“캐슬롯 후작의 후임 말이오?”
“지금 그의 아들 역시 자신의 아비 되는 자가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소?”
듀란드가 고갤 끄덕였다.
“맞소.”
“그것을 이용하는 겁니다.”
“…설마.”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미소를 짓고 있는데, 어째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그 꼬리. 자신이 언제 잘릴까. 자신이 언제 내쳐질까 모르는 꼬리를 이용하시오. 필시 우리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겠습니까?”
“협박을 하자는 거요?”
“그렇지요. 그럼 우리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유니콘을 쳐 낼 수 있을 겁니다.”
“방법이 있겠소…?”
“연줄이 닿아 있는 상단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부탁하여 캐슬롯 영지로 호송을 맡긴다면. 알아서 함정으로 기어들어 가지 않겠소?”
“…과연.”
납득하는 듀란드 공작을 두고 로브 쓴 이가 만지작거리던 찻잔을 비로소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댔다.
꿀꺽.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넘긴 그가 입을 열었다.
“꼬리는 그 이후에 잘라도 늦지 않습니다. 후후….”
***
후우웅.
흔들리는 검 끝.
검신이 되는 부분을 따라 손잡이까지 가다 보면 한 여인의 눈동자가 끝에서 끝을 주시하고 있다.
휘릭.
잠깐의 부동 끝에 다시 움직여지는 검.
마치 춤을 추듯. 움직이는 손을 따라 흐르는 검의 아름다운 선율은 감추었던 봉우리를 활짝 피워내는 한 송이의 꽃을 보는 듯했다.
천마신교의 장로 옥설화의 위화마검이 거기에 있다.
뚝.
못다 핀 꽃처럼.
우화마검의 초식이 중간에 뚝 멈추었다.
멈춰진 춤사위.
칼끝을 바라보는 릴리의 눈엔 실망감이 깃들었다.
“아쉬운데. 스승님이 한번 보여 줬던 것과 여전히 다른 것 같아….”
릴리가 한숨을 내쉬며 정면을 향했던 검을 회수했다.
짝짝짝.
그때, 들려오는 박수에 릴리의 눈이 자연스레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스승님!?”
흔들리는 릴리의 눈동자가 멈춘 곳. 거기엔 이든이 서 있었다.
“제법 검 쓰는 게 능숙해진 모양이구나.”
“스승님!”
릴리는 들고 있던 검을 내팽개치곤, 바로 이든 앞으로 달려갔다.
릴리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왜 이리 늦게 오셨어요!”
“중간에 일이 있어서 조금 늦었다. 그간 잘 지냈냐?”
“네. 잘 지내긴 했는데….”
어쩐지 말끝을 흐리는 릴리의 모습에 이든이 미소 지었다.
“수련이 막힌 게로군.”
릴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훗. 그간 차차 해결해야 할 문제고. 우선 들어가서 부모님께 인사부터 드려야겠다.”
“아…!”
아차 싶었는지, 릴리가 자신의 머릴 콩콩 두드렸다.
“어서 가요. 스승님!!”
릴리가 앞장서고, 이든이 뒤를 따랐다.
어느새 도착한 집 앞.
집 안에 들어서자 메리가 이든을 보곤 반가운 목소릴 했다.
“이든!”
이든이 씩 웃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머니.”
가족들과 간단히 식사를 마친 이든이 공터로 나왔다.
그리고 그의 뒤에 릴리가 따라 서 있었다.
“검을.”
“아, 예!!!”
릴리가 건넨 검.
그것은 일전 이든이 릴리에게 선물로 줬던 수련용 목검이었다.
손잡이를 쥔 이든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걸쳤다.
‘그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군.’
피와 땀이 밴 손잡이는 새것과 쥐었을 때 느낌부터가 다르다.
이든이 검을 쥐고서 찬찬히 입을 열었다.
“잘 보거라.”
“네!”
짧게 말한 이든이 바로 위화마검의 초식을 펼친다.
마기가 깃들지 않은, 온전히 초식 그 자체지만.
이든이 선보이니 릴리의 것과는 또 다르게 보인다.
릴리의 것이 춤이었다면….
이든의 춤 속에 숨겨진 것은 살상술이다.
피이이잉.
목검인데도 마치 쇳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이를 본 릴리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달라. 같은 초식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같은 초식이라도, 펼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고하가 정해진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릴리는 아직 그걸 알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조차 느껴질 만큼 이든의 움직임은 너무도 정교하고 완벽했다.
파앗!
시범을 끝낸 이든이 검을 역수로 쥐곤 릴리에게 다시 건넸다.
“너무 상심 말거라.”
“예?”
릴리의 생각을 꿰뚫기라도 한 듯, 이든이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같은 초식인들 너와 나의 차이가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한 거야. 더군다나 너는 무공을 익힌 지 이제 겨우 한 달 조금 넘었을 뿐이다. 그런데 너의 것과 나의 것이 비슷하면 그거야말로 스승 자격 상실 아니더냐?”
“아….”
“자. 천천히 짚어 줄 터이니. 검을 잡거라.”
“예…!”
릴리가 다시 검을 잡았다.
하지만 이든이 건넨 것은 단지 목검만이 아닌 듯했다.
제자를 향한 믿음, 그리고 조언 속에 담긴 기백까지.
밤은 진즉에 깊었건만, 이든이 건넨 목검을 쥔 릴리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의지를 불태워서일까.
어두운 공터 가운데, 그들이 선 자리만큼은 왠지 환한 빛이 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