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250)

76화.

타닥타닥.

밤은 이미 진작에 깊었건만, 잠이 오질 않아 연신 뒤척이던 노인은 결국엔 일어나 밝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모닥불을 바라보는 노인의 표정은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하아….”

문득 긴 한숨을 내쉬던 노인의 시선이 옆에 세상모르고 자는 손자를 향했다.

‘못돼 먹은 짓인 줄은 알지만…. 이 아이를 먹여 살리려면….’

침중하게 가라앉은 노인의 눈이 내내 손자에게 떠날 생각을 못 했다.

먼저 떠난 못난 자식이 남긴 핏줄.

이제 남은 생을 여유롭게 보낼 줄로만 알았지….

일흔을 바라보던 이 노인은 뒤늦게 보살피게 된 손자로 다시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스윽.

노인의 거친 손이 연신 손자의 머릴 쓰다듬었다.

“하아….”

눈앞의 손자와 양심의 가책 사이에 갈팡질팡하던 노인은 땅이 꺼질 듯 연신 한숨을 내뱉었다.

펑크 상단의 길드장이 약조한 금액이면 앞으로 십 년간은 먹고 사는 데 부족함이 없을 돈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약조한 것 또 하나.

자신의 사후에도 손자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

그것이 제일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 때문에 사람으로서 할 짓이 못됨을 알고서도 내내 입을 닫고 있던 것 아니었나.

그런데….

노인의 뇌리에 줄곧 한 청년의 얼굴이 떠나지를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이든이라 불렀다.

호송 내내 줄곧 눈을 감고 있던 맹인 청년….

손자 녀석이 상단에서 지급한 부실한 식사에 투정을 부리며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 때.

잡아 온 식량으로 가장 먼저 이 아이를 챙겨 주었던 따뜻한 청년.

그리고 몬스터의 기습으로 위험에 처했을 때. 나서서 자신들을 지켜주었던 그 청년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돈도 돈이지만 그래도… 그 청년이 아니었다면 우린 이곳에 있지도 못했을 거야….’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노인이 다시금 잠든 손자를 바라보고 있을 무렵.

저벅.

문득 들려온 기척에 그의 시선이 발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자네는….”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기척의 주인.

노인의 시선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굳게 감겨 있는 눈.

그럼에도 미소와 자신감을 잃지 않는 수려한 외모의 청년이 거기에 있었다.

노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불침번을 서는 중이셨구먼.”

“예.”

“나도 잠이 안 와서 말이야. 괜찮다면 여기 옆에 앉아 말동무나 해 주지 않겠나?”

“좋지요.”

이든이 밝게 웃으며 옆에 앉았다.

그런 그를 힐끔 바라보던 노인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고마웠네….”

“뭘요.”

무엇이 고마웠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이든, 그 역시 이 노인과 아이를 가장 우선시하여 살핀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노인이 재차 입을 뗐다.

“아까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말이야…. 정말이지 자네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죽고 말았을 거야.”

노인이 처음 화제로 꺼낸 것은 검은 늑대의 기습 때였다.

문득 노인의 눈길이 다시 손자를 향했다.

“이 아이가 자넬 무척이나 좋아하더군. 자기 직전까지 쉴 새 없이 자네에 대해서 떠들어 댔어.”

노인의 말에 이든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렇습니까?”

“고맙네. 챙겨 주어서.”

“뭘요. 아직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니까요.”

노인 역시 마주 웃었다.

그러다 불현듯 다른 얘기를 꺼냈다.

“한낱 짐승도 은혜를 아는 법이지.”

“……?”

뜬금없던 그의 말에 이든이 고갤 갸웃거렸다.

노인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자네들을 도와줄까 하네.”

“…….”

내내 살짝 미소 짓고 있던 이든의 얼굴이 차츰 굳어졌다.

얘기하는 내내 침중히 가라앉아 있던 노인의 눈.

하지만 거기엔 굳은 결심이 빛을 내고 있었다.

노인이 오직 옆의 이든만 들리도록 낮은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이번 상단행. 계약 파기하시게.”

“어째서 말입니까?”

“함정일세.”

“함정이요?”

이든이 되묻자 노인이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펑크 길드장이 노리는 것은 자네들이야. 애초에 상단행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단 말일세.”

“…….”

이든은 말없이 노인의 말을 경청했다.

“수레에 쌓인 물건들 역시 속임수일세. 중요한 것은 수레의 물건들 안에 숨겨진 다른 것이지.”

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수레 안에 숨겨진 다른 것.

호송을 나서던 첫날. 그 역시 수레 안쪽에서 익숙한 냄새를 맡지 않았던가.

물론 그것이 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아 당시에는 그냥 지나쳤었지만….

“역시 수레 안에 뭔가 있긴 있었군요.”

이든의 말에 노인이 놀란 얼굴을 했다.

“…알고 있었나?”

이든이 고갤 저었다.

“그냥 짐작만 했을 뿐 무엇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뭡니까? 그것이.”

이든의 물음에 노인은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편일세.”

“아편? 마약 말입니까?”

“그렇네….”

냄새의 정체를 알아낸 이든이 비로소 이해했단 얼굴을 했다.

‘그랬군. 아편의 미세한 그 풀 냄새. 개코가 아닌 이상 아무리 나라도 그건 알아차리기 힘들지.’

신교의 사업 중 하나가 아편 사업이었다.

관의 눈을 피해 불법으로 벌이던 사업이었지만, 큰 수익을 내는 사업 중 하나였다.

아주 오래전, 신교의 사업장을 시찰 중 찰나 맡았던 그 미세한 풀 냄새를 기억해 냈던 것이다.

여기라고 다를까.

이곳 역시 아편은 명백히 불법으로 취급하는 물건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든이 입을 열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가는군요.”

“…응?”

“숨겨 놓은 아편을 빌미로 국경 수비대에게 우릴 압송시키려 했던 것이군요. 그렇죠?”

“…맞네.”

“물론. 펑크 상단은 진작에 그쪽과는 얘기를 끝내 놓은 상태겠죠. 압송 후 자신들은 중간에 스리슬쩍 빠지고 유니콘 길드원들에겐 절차를 거쳐 죄를 물은 다음 죽인다…. 이게 펑크 길드장의 계획 아닙니까?”

이든을 향한 노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전부 다 맞는 말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차마 고갤 들 수 없었던 노인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미안하네…. 용서하시게….”

자신을 향해 시원하게 욕이라도 뱉어 줬으면 좋으련만,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어르신께서 미안해하실 일이 아닙니다.”

“……!”

노인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이든을 바라보았다.

“어르신 말고도 짐꾼들 모두가 각자 사정이 있던 것이겠지요.”

노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그가 고갤 끄덕였다.

“맞네…. 모두가 궁핍한 삶을 살다가 펑크 길드장의 제안에 솔깃해 나선 이들이지.”

“…펑크 길드장이 무슨 제안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미련 버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응?”

“압송에서 풀려나는 것은 펑크 길드장과 그의 무사들뿐입니다. 여러분들 역시 제거 대상이라, 이 말입니다.”

노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다.

“그, 그게 무슨….”

그때, 대화를 나누던 그들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노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유니콘 호송 대원들의 대장 케인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엔 한 서신이 들려 있었다.

케인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 우선 이것부터 보시죠.”

***

펑크가 고갤 갸웃했다.

‘이상하다.’

펑크의 날카로운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분위기가 달라졌는데.’

펑크의 시선이 향했던 곳.

다름 아닌 주위의 사람들이었다.

뭐, 용병들이야 원체 알다가도 모를 놈들이니 그렇다고 쳐도.

펑크의 눈이 다시 힐끗 짐꾼들을 향했다.

‘저것들. 눈이 왜 저래?’

짐꾼과 마부들의 무표정한 얼굴 속에 찰나 비치는 눈빛이 묘하게 이전과 달랐다.

‘알아차린 건가?’

짐꾼들에겐 국경 수비대에게 압송 후에 몰래 풀어 준다 언질을 해 놨지만, 이는 거짓말이었다.

‘풀어 주긴 개뿔이.’

혹여 나중에 말이 나올 것을 대비해 증거 하나라도 더 없애야 하는 판이었다.

결코 저들을 살려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 저들이 계획을 알아차린 걸까.’

고민하던 펑크는 고갤 휘휘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가 이토록 자신하는 이유.

고용한 짐꾼들과 마부 모두가 생계에 쪼들려 궁핍한 삶을 연명하는 이들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약조한 보수는 저들이 앞으로 먹고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철저한 사전 조사 후에 골라낸 이들인 만큼 펑크의 기준에서 보면 그들은 냉철한 판단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설령 냉철한 판단을 했다 하더라도… 어쩌라고?

‘죽이면 그만이지… 크큭.’

생각을 마친 펑크의 시선이 뒤쪽의 맹인을 향했다.

‘이든이라고 했던가.’

제일 걸림돌이었다.

힘도 좀 쓰고, 검을 들고 있길래 검수일 줄 알았더니 간단한 마법도 부리는 잔재주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검이 둥실 떠다니며 늑대들을 유린하던 것을.

여러모로 귀찮을 것 같은 녀석이었지만 이 역시 크게 상관없었다.

그는 어젯밤 내일이면 도착할 예정인 캐슬롯 영지에 미리 서신을 보낸 상태였다.

이미 진즉에 서신은 도착했을 것이고 그쪽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을 터.

이들이 압송에 순순히 응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응하지 않더라도 영지의 기사들과 상단 무사들 정도면 충분히 제압이 가능할 것이다.

단지 손쉽게 나중에 죽이느냐, 아니면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미리 죽이느냐에 차이만 있을 뿐. 이래저래 놈들이 죽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후후. 지금 보는 풍경들을 즐기거라. 오늘이 너희들의 마지막 날이 될 터이니.’

하지만 펑크는 이때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

캐슬롯 영지에 다가올수록 숨통이 조여지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이었음을.

다시 찾아온 공허한 밤.

예정대로라면 유니콘 길드의 용병들이 불침번을 서야 했지만, 어째선지 펑크 상단의 무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다.

펑크 길드장이 그간 고생했다며 마지막 날은 자신들에게 맡기라고 고집을 부린 탓이다.

덕분에 유니콘 길드원들은 불침번 걱정 없이 쉴 수 있게 되었지만,

어째선지 유니콘 길드원들의 눈은 말똥말똥하기만 했다.

톰슨이 옆에 로즈를 조용히 불렀다.

‘야!!!’

‘……?’

‘이든 혼자서 괜찮을까?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로즈가 차디찬 시선으로 검지와 엄지로 입을 잠그는 시늉을 했다.

닥쳐.

로즈의 속뜻은 그것이었다.

톰슨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시발. 걱정을 해도 지랄…!!!’

물론 로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괜히 자신들이 나섰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음을 톰슨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로즈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든. 잘하고 있는 거야…!?’

“…….”

요지부동인 몸에 눈알만 또르르 움직이는 것이, 보면 볼수록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저 짓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한다는 것.

연신 사방을 살피는 펑크 상단의 무사들에겐 도무지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흡사 죽은 자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모습.

스륵.

휙.

그들의 눈동자가 미세한 소리가 일던 곳으로 홱 돌아갔다.

스스슥!

벌레 한 마리가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푸르르

또다시 소리가 들린 곳으로 홱 돌아가는 고개.

그들의 눈동자가 보이지도 않는 날벌레로 향했다.

벌레 한 마리 얼씬도 못 한다는 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벌레가 내는 미세한 소리조차 놓치지 않는 그들의 눈과 귀는 이미 사람의 것으로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놓치고 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스르르르….

발이 땅에 닿기는 하는 걸까.

연신 움직이는 걸음에는 소리 한 점 들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움직임은 저 펑크 상단 무사들의 눈과 귀까지 속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의 정체. 다름 아닌 이든의 것이었다.

그의 신형이 펑크 길드장 쪽으로 빠르게 향했다.

깊게 잠들어서일까. 아니면 이든의 움직임이 그만큼 너무도 조용했던 탓일까.

펑크는 알아차린 기색 없이 잠에 빠져 있었다.

은밀하게 펑크의 곁에 다가간 이든의 손이 번개와 같이 움직였다.

휙휙.

펑크 길드장이 한쪽에 놔두었던 외투에 한 번.

길드장이 내내 타고 다니던 말의 안장 쪽에도 또 한 번.

눈 한번 깜빡할 찰나의 순간에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해냈다.

경계를 서던 상단 무사의 시선이 잠들어 있는 펑크 길드장 쪽으로 재차 돌려지기 직전.

스르르….

이든의 신형이 언제 거기 있었냐는 듯 감쪽같이 사라졌다.

안개와 같이 사라져 가던 그의 얼굴에 언뜻 하얀 이가 드러난 것 같았지만, 펑크의 무사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예상이나 했을까.

두 눈 시퍼렇게 뜬 상단 무사들의 경계를 뚫고 수작질을 했을 줄은.

그리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든의 수작이 어떤 후폭풍을 불러들일지.

그리고.

결전의 날이 밝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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