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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84/250)

84화.

레스타드 길드장의 장례가 마무리되고, 며칠 뒤 유니콘 길드의 간부 회의실에 각 영지의 지부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당장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남은 탓이다.

쿵!

현재 공석인 길드장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차기 수장을 뽑는 자리에서 듀란드 공작의 영지 지부장 카일이 앞에 놓인 회의실 탁자를 신경질적으로 내리쳤다.

당연히 모든 이목이 그에게 쏠릴 수밖에….

카일이 혀를 차며 구시렁댔다.

“쯧. 이렇게들 마음들이 맞지 않아서야.”

일곱 명의 간부들이 저마다 무기명 투표를 진행하였고, 투표 결과가 공교롭게도(?) 각 지부장이 한 표씩 나눠 가졌다.

쉽게 말해, 각자 본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냈다는 의미.

잠깐.

그러면 카일도 결국 제 이름을 썼다는 얘기잖아?

뭔가 대꾸라도 나올 만하건만….

“크, 크흠!”

정적 속. 어째 하나같이들 무안한 듯 헛기침만 연발했다.

그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게럴드는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이 씰룩거릴 지경이었다.

‘하나같이들 헛된 욕심만 가득해서는….’

뭐,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게럴드 역시 본인을 찍긴 했지만.

괜찮은 후보만 있었다면 그는 아무런 욕심 없이 그를 찍었을 것이다. 다만….

이든에게 내부의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안전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때, 적막을 깨고 누군가 다시 제안하듯 입을 열었다.

오벨슈타인 후작 영지의 지부장을 맡는 이였다.

“그럼. 다시 투표를 진행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퍽이나 결과가 달리 나오겠소?”

카일이 비아냥대며 말을 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앞으로 길드를 이끌어 갈 수장을 뽑는 자리요. 근데 다들 제 욕심에 눈이 멀어 이러신단 말이오!”

카일의 언성에 대부분의 지부장들이 얼굴을 붉히며 감히 대꾸를 하지 못했지만, 게럴드는 그의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우 같은 양반. 아주 자길 뽑아 달라 난리로군.’

차마 대놓고 말하진 못하니, 어찌 돌려 돌려 다른 지부장들을 탓하지만. 카일의 속내는 결국 이것이다.

‘시간 그만 끌고 다들 날 뽑아라.’

물론 게럴드 말고도, 그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이가 없을 리 없다.

다만….

그럼에도 누구도 카일을 비난할 수 없던 까닭은 그가 다른 곳도 아닌, 바로 듀란드 공작 영지의 지부장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최근엔 그 기세가 오른 칼스테인 영지에 최대 실적을 빼앗기긴 했지만, 그럼에도 카일의 영향력이 조금도 줄지 않은 까닭은 유니콘 길드 창설 이래 수십 년간 수도를 제외한 가장 큰 성과를 냈던 곳이 바로 듀란드 지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니콘 길드가 각 영지에 지부를 둘 수 있던 것도, 듀란드 지부에서 활약한 카일이 있었기에 지금에 이른 것이다.

앉았다가 일어서길 반복하며 성을 내던 카일이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씩씩대던 목소리까지 가라앉히고 나서야 카일이 다시 입을 뗐다.

“이대론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단 다들 피곤하실 터이니 잠시 휴식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 어떻소?”

“네, 좋습니다.”

다들 카일의 말에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길드장의 장례로 며칠을 내리 고생했으니 다들 지친 기색들이 역력해 보였다.

지부장들 대부분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자릴 비울 무렵.

힐끗.

게럴드의 시선이 어느 한곳으로 향했다.

다른 지부장들과 달리 유독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젊은 지부장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 신설된 레온하르트 공작의 영지 지부장 크리스였다.

“크흠!”

“……?”

그의 긴장을 조금 풀어 줄 생각이었는지 게럴드가 낮게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레온하르트 영지의 젊고 잘생긴 지부장이 생겼다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그 얘기가 사실이었구려.”

“하하… 가, 감사합니다.”

“난 칼스테인 영지의 지부장 게럴드라고 하오.”

“아…!”

최근 끝 모르게 상승세를 타고 있던 칼스테인 영지를 모르는 이는 결코 없었다.

아는 얼굴을 하던 크리스가 자세를 바로 하고는 고갤 숙였다.

“미리 못 알아봬서 죄송합니다.”

“그게 무슨 죄송할 일이오! 내 심심하기도 하고, 지부장님과 말 좀 섞어 보고 싶어 얘길 걸어 봤소!”

게럴드의 말이 도움이 된 걸까.

크리스의 얼굴에 긴장이 풀리며 밝은 미소가 지어졌다.

“감사합니다.”

‘훗.’

게럴드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긴 그간 길드장의 장례식 내내 누가 먼저 나서 말을 걸어주는 이가 있기를 하나, 더군다나 레온하르트 영지라 하면 최근에야 사정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국경 밖 몬스터로 악명이 자자한 곳이 아니던가.

세력, 성과, 영지 상황 등등….

모든 것이 악조건인 레온하르트 영지에 관심을 가질 이는 결코 많지 않았다.

조금은 긴장이 풀어진 크리스를 마주 보며 웃던 게럴드가 그를 향해 고갤 빼꼼 내밀고는 들릴 듯 말듯 한 음성으로 넌지시 물었다.

“크리스 지부장께선 누굴 뽑으셨는가?”

“크, 크흠!”

게럴드의 물음에 사레라도 들린 것인지 크리스가 연신 기침을 해 댔다. 그 모습에 게럴드가 너털 웃었다.

“사실 크리스 지부장에게만 말하는 거지만, 난 날 찍었소!”

“…네?”

“음? 왜 그리 보시오?”

넋이 나간 크리스의 모습에 게럴드가 도리어 의아한 듯 묻자, 크리스가 볼을 긁적였다.

“그… 무기명 비밀 투표인데… 말해도 되는 겁니…까?”

“풉! 크리스 지부장님, 우리 까놓고 얘기합시다. 각 지부장이 한 표씩 받았으면 사실 서로 자기들을 찍은 것 아니오? 크리스 지부장님도 본인을 찍지 않으셨소?”

“그, 그건….”

얼버무리며 말끝을 흐리는 것이 천성이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다. 게럴드가 씩 웃었다.

“그리 당황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연한 거니까.”

“…당연하다고요?”

“길드의 미래가 달린 일이오. 솔직히 터놓고 말해서 요즘 같은 세상에 남 믿기가 쉽소? 차라리 날 믿는 것이 낫지! 크흠!”

“…….”

배를 쭉 내밀며 근본 없는 논리를 내뱉는 게럴드의 모습에, 넋이 나갔던 크리스가 결국엔 웃음을 터트렸다.

“푸훕…!”

“훗. 웃으니 보기 좋소.”

“고맙습니다.”

“뭘.”

게럴드 덕분에 긴장이 한껏 풀어졌던 크리스의 얼굴에 점차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길드장님께서 이리 허무하게 가실 줄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난데없이 피살이라니. 지금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레스타드 길드장의 죽음은 그에게 너무도 크게 다가왔다.

비록 아무도 수장으로서 맡지 않으려는 레온하르트 영지 지부 특성상 초고속 승진이었지만, 그래도 레스타드의 신임을 받았던 그였다.

상황이 점차 나아지고 있던 레온하르트 영지가 비로소 활기를 찾아갈 무렵. 비로소 그의 신임에 보답할 수 있으라 생각했던 찰나에 이런 사달이 난 것이었다.

크리스의 모습에 게럴드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게럴드가 작게 고갤 주억거렸다.

“…맞소. 이렇게 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지.”

마치…. 시대의 풍운아였던 레스타드의 얼굴을 떠올리듯, 허공을 응시하던 게럴드의 시선이 다른 지부장들이 나간 출구 쪽을 향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카일 지부장이 저들 모두를 설득했을 것이오.”

“…….”

“크리스 지부장님은 어떤 것 같소? 카일 지부장 말이오.”

게럴드의 물음에 크리스는 어렵다는 표정으로 고갤 저었다.

“…흠.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처음 뵌 터라.”

“…음? 아직 인사도 나누지 않은 게요?”

“인사는 드렸었는데, 그것이…. 별로 달갑지 않아 하시는 눈치였습니다.”

“흠.”

카일의 행동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시기가 적절치 않았다.

아무리 레온하르트 지부가 다른 곳과 달리 제대로 된 형식을 갖춰진 곳이 아니라곤 하지만….

그래도 차기 수장 투표를 앞둔 지금은 하나의 표라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것을 빤히 알고 있음에도 달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왜일까.

‘…이미 서로 합심한 세력이 있다. 그 말이겠지. 거기에 크리스 지부장이 낄 틈은 없다는 것이고.’

하지만

굳이 왜?

‘굳이, 크리스를 내칠 이유가 있을까?… 있다면 딱 하나, 합심한 세력 간에 밀약이 오갔다. 그리고 그것을 크리스 지부장이 알면 안 되는 상황인 것이고….’

게럴드의 눈이 각 지부장의 빈 좌석을 향했다.

‘저 다섯 중…. 배신자가 있다. 누구냐…. 대체!’

시간이 한참 흐르고, 오후의 해가 슬슬 저물어갈 무렵.

길드장들이 하나둘씩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다들 하나같이 복잡 미묘한 표정들인 가운데, 카일만이 득의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전 회의 때보다 조금 밝아진 얼굴로 카일이 입을 뗐다.

“자, 그럼 다시 차기 길드장 선별을 위한 투표를 진행토록….”

“잠깐만요.”

‘내가 얘기 중인데 감히….’

카일이 불편한 시선으로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갤 돌렸다.

거기엔 크리스 지부장이 손을 들고 있었다.

카일이 한숨을 한번 푹 내쉬었다.

“하아… 크리스 지부장, 무슨 일이오?”

“아무래도 선출 방식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지금, 차기 길드장 결정을 위해 투표하는 이 방법이 말이오?”

“예.”

“무엇이 잘못됐단 말이오?”

“차기 길드장을 선출하는 중차대한 자리입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과연 지부장들만의 의견만으로 결론 짓는 것이 옳은지 의문입니다.”

카일의 눈썹이 꿈틀댔다.

얼굴은 무표정한 모습 그대로였음에도 찰나 움직이는 눈썹만큼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그였다. 카일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크리스 지부장.”

어리숙해 보이던 그의 얼굴에 일순 단호한 빛이 어렸다.

“각 지부 모든 길드원의 참석을 요구합니다.”

“…뭐, 뭐요!?”

“그런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보시오. 크리스 지부장,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린지 알고나 계시오!”

“왜 말이 안 됩니까.”

“……?”

크리스의 의견에 성을 내던 각 지부장들의 이목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

끼어든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다름 아닌 게럴드 쪽이었다.

“저 역시 내내 의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크리스 지부장의 말을 듣고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길드의 수장을 정하는 이 자리에 과연 우리 지부장들만의 의견을 듣는 것이 맞는가 하는 크리스 지부장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유니콘 길드는 지부장들 홀로 이끄는 곳이 아닙니다. 지부장님들도 아시겠지만, 유니콘 길드는 모든 길드원이 각고의 노력으로 이끄는 곳 아니겠습니까?”

“크, 크흠!”

게럴드의 말을 듣던 지부장들이 연신 헛기침을 해 댔다.

틀린 말이 없었기에, 누구도 이견을 제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럴드의 말을 듣던 한 지부장이 물었다.

“…해서 길드원 모두를 이곳으로 불러들이자?”

“뭐, 못할 것 있습니까. 어차피 길드장님의 장례식으로 대부분의 길드원이 수도에 모여든 상황입니다. 각자의 의견을 듣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어딨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카일 지부장님?”

흠잡을 것 없는 당연한 논리에, 가장 반대할 것 같은 이에게 어떠냐고 역으로 묻는다.

카일이 속으로 연신 욕을 내뱉었다.

‘이… 능구렁이 같은 새끼….’

카일은 얼굴이 절로 찌푸려질 것 같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상황이 꼬이긴 했지만, 각 지부의 지부장은 이미 대거 포섭한 상태다. 비록 변수가 늘긴 했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생각을 마친 카일이 천천히 입을 뗐다.

“좋소. 게럴드 지부장과 크리스 지부장의 말대로 하도록 합시다. 각자, 각 지부의 길드원들을 소집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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