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해가 완전히 지고, 하늘마저 어둑해진 늦은 밤.
모든 길드와 상점들이 문을 닫고 하루를 마감하는 그 시각에, 유독 인산인해를 이루며 소란스러운 곳이 한 곳 있었다.
“와… 전국팔도에 사람들은 여기 다 모였나?”
“유난은….”
톰슨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로즈가 질색을 했지만, 그녀도 내심 유니콘 길드 규모에 놀란 참이었다.
로즈의 시선이 회의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훑었다.
레스타드 길드장의 장례로 각 지부에서 모여든 길드원들.
대충 훑어만 봐도 지부당 그 수가 오십을 훌쩍 넘어 보였다.
물론 레온하르트 영지의 경우엔 호송 업무가 추가되지 않았고, 단순 배송 업무만 하고 있어 길드원이 스무 명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모인 길드원들의 수를 총합하니 삼백이 훌쩍 넘는다.
중요한 것은 각 지부에 상주 중인 길드원은 따로 있다는 것.
이 역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수도에서 대기 중이던 각 지부의 길드원들이 모두 집합했습니다.”
“으음.”
사무관의 말에 주변을 훑던 카일이 고갤 끄덕였다.
현실적으로 각 지부에 대기 중인 길드원까지 전부 모일 수는 없는 노릇.
이 정도만 모이는 것으로 합의점을 잡았지만….
그런데도 새삼 느껴지는 것이지만어마어마하게 많은 길드원 수였다.
카일이 한 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크흠.”
헛기침을 한 카일이 어수선했던 분위기에서 단번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모두 바쁜 와중에 우리 지부장들의 변덕스러운 부탁을 들어주어 고맙소. 이미 들었겠지만, 차기 길드장을 선출하는 과정에 여러분들의 의견도 듣고자 이리 모이게 되었소.”
“역시 그것 때문에 우릴 부른 거였군.”
“그럼 우리도 투표에 참여하는 건가?”
웅성웅성….
카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마다 웅성거리는 길드원들.
짝짝.
“자자. 주목.”
소란이 끝날 것 같지 않아지자, 카일이 손뼉을 쳐 다시 이목을 모았다.
“계획대로 현재 일곱 명의 지부장들 가운데 차기 길드장을 선출할 것이고, 여러분들은 그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하게 된 것이오. 자, 그럼 본격적으로 투표를 시작하기에 앞서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거수하여 주십시오.”
의견이랄 게 있나?
애초에 이런 자리 자체가 처음인데. 의견을 내도 뭘 알아야 내지.
대부분이 이곳에 자리한 것만 해도 얼떨떨할 지경인데, 의견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모두 하나같이들 눈만 말똥히 뜬 가운데 카일이 재차 투표를 진행하기 위해 입을 떼려던 그 순간.
스윽.
누군가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카일의 눈에 찰나 불편한 기색이 비쳤지만, 이내 황급히 지웠다.
“게럴드 지부장, 무슨 일이오?”
손을 든 사람은 다름 아닌 칼스테인 영지의 게럴드 지부장이었다.
사람들의 눈이 카일에게서 게럴드로 옮겨졌다.
“듣다 보니 한 가지 더 의문이 생겨서 말입니다.”
‘또 무슨 딴지를 걸려고….’
게럴드의 말을 듣던 카일의 눈썹이 절로 꿈틀거렸다.
카일이 게럴드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좋소. 말씀하시오.”
“차기 길드장을 굳이 지부장들 가운데에 선출할 필요가 있습니까?”
뭐…?
저 양반이 지금 무슨 얘기를….
카일의 눈이 부릅떠졌다.
“게럴드 지부장, 그게 무슨 말씀이오? 그러니까 당신 말은…. 길드원들 가운데에서도 길드장 후보를 뽑자…. 그 말이오?”
“예. 그렇습니다.”
표정 하나 까딱이지 않고 말하는 게럴드의 모습에 카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게럴드 지부장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니오만, 다른 자리도 아닌 길드장을 선출하는 자리요. 그런데 그런 자리를 길드원분들께서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시오?”
“우리 자리가 뭐 별거입니까?”
“…응?”
“지부장이란 직책도 따지고 보면 별것 있느냐 이 말입니다. 바쁜 것은 언제나 길드장님이셨지, 솔직히 말해 우리 지부장들이 한 것이 뭐 있습니까. 길드장 자리가 중요한 것은 압니다만, 그럴수록 직책을 따지지 않고 능력 있는 사람을 선출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카일 지부장님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
뿌득.
‘이자가 이제 하다 하다 별수를 다 쓰려 하는군. 길드장의 자리가 그토록 탐이 나더냐…!’
입을 꽉 다문 카일이 이를 갈았다. 조금 전부터 딴지를 걸며 계획에 차질을 빚게 하는 게럴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게다가….
카일의 눈이 게럴드에게서 떨어져 주변을 훑었다.
“정말 우리가 길드장이 될 수 있는 거야?”
“길드장은 얼어 죽을! 누가 널 뽑아나 주냐.”
“그래도 기회는 주겠다는 거 아냐?”
조금 전, 게럴드의 제안에 귀가 번쩍 뜨인 길드원들의 얼굴빛이 삽시간에 변한 것이다.
길드원들의 반응이 이렇게 되면 제아무리 카일의 권한이 막강하다 해도 그의 제안을 터부시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내키진 않지만, 이리된다고 해서 결과가 바뀔 일은 없다….’
사방을 살피던 카일이 입을 열었다.
“게럴드 지부장의 말을 들으니, 일리가 있는 것 같소. 단, 조건이 있소. 형평성을 위해 지부장을 포함. 각 지부마다 후보는 한 명으로 제한하겠소. 이 점에 대해선 게럴드 지부장께서 이의 없으시겠지요?”
“없습니다.”
“좋소.”
카일의 얘기는 결국, 길드원의 참여를 최소화하겠단 것이다.
눈치가 없는 길드원이 아닌 이상 지부장을 제치고 후보로 나서려는 이는 없을 것이다.
카일이 재차 입을 열었다.
“해서 여러분께 묻겠소. 혹 길드장 후보로 나가고 싶다 하는 분, 계시오?”
“…….”
카일의 물음에 회의장 안이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누구도 감히 손들 생각을 하지 못한다. 길드장이란 자리가 어디 보통 자린가?
게다가 괜히 참여 의사를 밝혔다가 지부장의 눈 밖에 날 짓을 할 만큼 눈치가 없는 길드원들은 없었다. 카일의 입가가 절로 씰룩였다.
‘네까짓 것들이 아무리 욕심내 봤자지….’
하나같이들 눈치만 보며 꿈쩍을 하지 않던 그때.
스윽.
누군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응? 누가…. 하아…. 저자가 또, 또!’
카일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곳을 향하다가 얼굴을 확인하곤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손을 든 이가 다름 아닌 ‘또’ 게럴드였기 때문이다.
카일이 이젠 체념한 듯 한숨을 한번 푹 내쉬었다.
“하아…. 예. 게럴드 지부장, 또 무슨 일이오?”
“혹 아무도 손을 든 이가 없다면 추천도 가능합니까?”
“추천?”
“예.”
“게럴드 지부장이 말이오?”
“예. 문제 있습니까?”
카일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 조금 전 내가 한 말은 못 들은 게요? 지부마다 후보는 한 명씩만 가능하오. 그리하면 게럴드 지부장은 길드장 후보로 나올 수 없다 그 말이오!”
“알고 있습니다.”
“…알고서도 그리하겠다고?”
일순, 좌중이 술렁였다.
지부장뿐만 아닌, 길드원 중에서도 후보를 가리자는 말이 나왔을 때도 충분히 놀랐는데….
자신의 후보 자리마저 포기하면서까지 추천을 한다고?
놀랍다 못해 파격적이기까지 한 그의 말에 모두가 숨을 죽이곤, 귀를 쫑긋 세웠다.
도무지 속내라곤 알 수 없는 게럴드의 말에 카일 역시 신경이 쓰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누굽니까? 게럴드 지부장께서 추천하고 싶은 후보가.”
게럴드가 고갤 뒤로 돌렸다.
의문 한점 없는, 확신의 찬 눈빛이 한 사람을 향했다.
너무도 믿음직스럽기에 보고만 있어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이.
“칼스테인 지부 소속의 길드원 이든을 후보로 추천하는 바입니다.”
게럴드가 지목하기 무섭게, 그의 뒤에 있던 칼스테인 지부 소속 길드원들의 눈이 대문짝만 하게 커졌다. 그들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목된 당사자.
이든 역시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이든이 평소 그답지 않게 더듬거리다시피 입을 열었다.
“지, 지부장님,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길드장 후보라니요?.”
사전에 얘기된 것이 아니라 미안하단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이든을 향한 게럴드의 확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듯했다.
겔러드가 웃으며 말했다.
“이든, 미리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게.”
“지부장님…!”
“길드장님의 장례를 마치고 차기 길드장 자리에 관해 줄곧 생각해 봤었네. 그분의 평소 신념과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누군지 말이야.”
“…….”
“그런데….”
이든이 입을 꾹 다물곤 게럴드의 말에 집중했다. 비단 그뿐일까.
모든 이목이 한시도 그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말끝을 흐렸던 게럴드가 재차 입을 뗐다.
“우리 지부장 중엔 그런 사람이 없더군.”
뿌득.
게럴드의 말이 거슬렸던 걸까.
카일이 이를 악물었다.
이를 악문 소리조차 생생하게 들릴 듯한 정적 속.
그럼에도 이든을 향한 게럴드의 눈빛은 한없이 올곧았다.
게럴드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를 대신해 나가 주시게. 이든.”
“지부장님….”
“그리고 말이야.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정말 기가 막히거든! 그것 때문에 내가 지금껏 지부장 자릴 꿰차고 있던 거지. 난 믿네.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는 걸. 그러니 날 대신해서 후보로 나가 주시게!”
“…….”
워낙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이든은 그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무미건조한 얼굴이 흔치 않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그때. 그의 주변에 있던 길드원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어울리네.”
“그래. 이든, 한번 나가 봐!”
“해 봐. 이든!”
“그래. 한번 나가 봐. 임시 대장직 맡을 때 보니까, 말 안 듣는 것들 맛깔나게 잘 패더구먼!”
으, 응?
중간에 이상한 소리가 하나 껴 있는 것 같은데…?
“그래! 까짓거 한번 해 보라고! 떨어지면 뭐 어때!”
퍽!
톰슨의 말을 듣던 로즈가 팔꿈치로 톰슨의 명치를 툭 쳤다.
로즈의 기습에 톰슨이 눈을 까뒤집으며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크억! 이년이 갑자기 또 왜 때려!”
“이든이 떨어지긴 왜 떨어져!”
수십에 달하는 인원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니, 회의장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그때, 그 소란 사이에 케인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려왔다.
“이든.”
“케인 대장님.”
“해 보게.”
“지부장님도 케인 대장님도 있는 데, 제가 어떻게…!”
“아니. 지부장님 말씀이 맞아. 우리보단 자네가 더 어울려.”
케인의 입가에도 게럴드의 그것처럼 진한 미소가 걸렸다.
“괜한 소리가 아닐세. 개인의 능력, 빠른 상황 판단과 통솔력까지. 물론 간혹가다 무모한 선택을 할 때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 선택이 대부분 좋은 결과를 이끌어 오지 않았나? 분명 레스타드 길드장님도 그리 생각하셨을걸세.”
케인의 말을 듣고도 이든의 얼굴은 여전히 얼떨떨해 보였다.
길드장을 살해하는 데 일조한 배신자를 찾아내는 데 집중하던 와중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내가 길드장을…?’
물론 아직 후보일 뿐이지만….
만에 하나 길드장이 된다 해도, 못할 것도 없었다.
전생에도 신교를 이끌었던 수장이었으니까.
사람을 이끄는 데는 도가 터도 한참 튼 그였다.
다만….
그럼에도 그가 이토록 망설이는 이유는….
‘내가 과연 레스타드 길드장님이 추구하셨던 대로 이곳을 이끌 수 있을까.’
모두는 어울린다고 말했으나,
이든은 누구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신교와 유니콘 길드는 엄연히 다르다….’
패도(敗道)를 걷는 자신이 과연 이곳을 제대로 이끌 수나 있을까.
그리고 이든에게 있어 삶의 목표는 무엇보다 등선이었다.
입신을 뛰어넘어, 완벽한 신이 되는 마신지로의 길을 걷는 것.
그토록 바라왔던 목적을 위해선 지금도 턱없이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하지만….
자꾸만….
마지막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며 죽어 간 레스타드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결국, 인생이란 그런 거지. 제아무리 내가 뛰어나다 한들 홀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애초에 등선이란 것도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이뤄 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고민하고, 또 고민을 거듭하던 이든이 입을 뗀 것은 한참 후였다.
“…후보로 나가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이든의 얼굴엔 왠지 자신감마저 엿보였다.
마치 패기 넘치던 젊은 시절의 레스타드를 보는 듯한 그의 모습에 게럴드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