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카일 지부장님을 말입니까?”
“예.”
지부장들의 얘기가 들리지 않을 만무하다.
카일이 낮게 헛기침을 하곤 자릴 피했다.
멀어져가는 카일의 등 뒤를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던 버몬트 영지 지부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카일 지부장을 길드장으로 추대하자…. 즉슨, 캐슬롯 영지와 오벨슈타인 영지 지부장들께선 카일 지부장을 추대하기로 이미 정하셨다는 말이군요.”
“보시다시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자기들이 길드장이 되겠다고 난리더니, 갑자기 이제 와서 카일 지부장을 밀어주자라. 참 대단들 하시는군요. 언제 그렇게 친해질 기회가 있으셨습니까?”
“크, 크흠.”
허를 찌르는 듯한 버몬트 영지 지부장의 말에, 반대편에 두 지부장들이 무안한 듯 헛기침을 해 댔다.
“카일 지부장을 추대하자는 두 분의 말씀은 잘 알았습니다. 다만…. 저는 제가 길드장이 될 수 없다면 진정으로 유니콘 길드에 도움이 되는 이를 뽑고자 합니다.”
신경에 거슬렸던 걸까. 그의 말을 듣던 두 지부장의 눈썹이 일순 꿈틀댔다.
“그 말…. 마치 카일 지부장님이 차기 길드장 자리에 부적합하다는 뜻으로 들리오만?”
“그리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다만…. 몇몇 지부장들은 따돌리고, 구태여 투표 전에 사람 붙잡고 이리 작전을 펼치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뭐, 뭣이…!”
“게다가 이런 일은 당사자가 직접 공손히 부탁하는 게 예의가 아니오? 같은 지부장들끼리 마치 자신이 상관인 양 거들먹대는 것이 나는 영 별로외다.”
“저, 저저 저런…!”
“그럼, 난 이만 회의장으로 먼저 가 보겠소.”
“허, 허어! 저 사람, 저거!”
멀어져 가는 버몬트 영지 지부장의 등 뒤를 향해 혀를 차며 연신 손가락질을 해 대던 두 지부장의 눈이 이번엔 트럼프 영지 지부장을 향했다.
그가 어깰 으쓱였다.
“나 또한 이하동문이오. 다른 후보자들을 기껏 불러 놓고 한다는 소리가 그런 거요? 난 이 얘기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크흠!”
“허, 허허허….”
예상과 다른 지부장들의 반응에 남은 두 지부장이 그만 허탈한 듯 웃었다.
이윽고 그들의 반응은 결국, 카일의 귀까지 들어갔다.
카일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흠…. 그들이 그리 말했단 말이지요.”
낮게 침음성을 흘리는 카일의 반응에 지부장들이 성을 내며 말을 거들었다.
“참으로 무도한 자들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간 카일 지부장님께서 고생하신 공로가 있는데, 이리 몰라주다니요!”
그들의 열성인 반응에 카일이 사람 좋은 미소로 웃었다.
“자자, 그 얘긴 여기까지만 합시다.”
“하지만 카일 지부장님…!”
카일이 중간에 말을 끊으며 딱 잘라 말했다.
“어차피 두 지부장님과 우리 표만 합쳐도 벌써 반에 가깝지 않습니까? 저들이 합심하여 누굴 밀어주지 않는 이상, 예정대로 제가 길드장이 될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지부장들의 반응을 살피던 카일의 눈이 낮게, 더욱 낮게 가라앉았다.
카일의 가라앉은 눈이 다른 지부장들이 발길을 옮긴 회의장 쪽을 향했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시오. 어차피 모든 일이 끝나면, 저들 역시 치워 낼 생각이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저리 나와 준다면 죄책감도 덜하고 고맙지요.”
“그, 그렇지요.”
“하하하… 역시 카일 지부장님이십니다. 저희보다 훨씬 먼 곳을 보고 있으셨군요. 하하하…!”
멋쩍은 웃음으로 아부를 하는 지부장들의 모습에 카일이 저도 모르게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그래… 그렇게라도 고갤 숙이며 아부라도 해야지. 따지고 보면 너희도 그 쓸모없는 것 중 하나 아니더냐. 후후….’
두 지부장을 미련하게 바라보던 카일이 다시 평소대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자, 다들 가십시다. 유니콘 길드의 운명을 바꾸러.”
“좋습니다.”
“따르겠습니다. 허허….”
잠시 뒤, 밖을 나섰던 지부장들과 그들 소속에 몇몇 길드원들이 마치 짠 것처럼 우르르 들어왔다.
무슨 얘기가 오고 간 것일까.
들어온 지부장들과 길드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들 심상치 않았다.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카일이 주의를 끌었다.
“시간이 늦은 관계로 투표는 빠르게 진행하도록 하겠소. 사무관.”
카일의 부름에 사무관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쁘게 움직였다.
길드원들이 저마다 공백의 종이를 받았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대로 앞으로 나와 원하는 후보자의 이름을 써서 투표함에 넣어 주시오. 빠르게 진행해야 하니 미리들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소. 자, 그럼 먼저 우리 지부의 길드원부터 호명하겠소. 키드먼 대장.”
“예.”
“나와서 투표하시오.”
스슥. 스슥.
정적 속 이름을 적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투표는 빠르게 진행되어 칼스테인 지부까지 투표를 마친 상황이었다.
이제 남은 지부는….
‘버몬트 지부와 트럼프 지부. 그리고 레온하르트 지부가 마지막인가….’
남은 길드원을 바라보던 게럴드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든 타 지부의 길드원들을 구슬리려 했지만….’
게럴드의 시선이 카일을 향했다.
‘카일, 저 양반이 어떤 틈도 주질 않는군. 결국, 이대로 유니콘 길드는 저자에게 넘어가는 건가. 게다가….’
우득.
우드득.
‘아까부터 저 소리가 묘하게 거슬린다….’
게럴드의 눈이 이번엔 이든을 향했다.
우득.
어째선지 아까부터 몸을 열심히 풀고 있던 그였다.
…덜덜덜덜.
게럴드가 저도 모르게 다리를 떨었다.
‘크, 큰일이야…! 유니콘 길드가 카일 손에 넘어가는 건 둘째치고 이러다 사달 나는 거 아냐…!?’
투표가 진행될수록 이든의 얼굴이 점차 마귀와 같이 일그러졌다.
케인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 저저… 미친놈이 진짜 사고 치기 전에 어떻게든 남은 길드원만이라도 설득을 해야 하는데…!’
투표가 시작된 직후, 중간에 휴식 시간도 없이 빠르게 진행하는 것이 마치 일부로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자 그럼 버몬트 영지의 베리 대장부터 나오시오.”
“예.”
호명에 베리가 투표함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눈이 자신의 지부장을 향하다가 저도 모르게 다른 곳을 훑는다.
‘이든….’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
이든이 심드렁한 얼굴로 투표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투표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
하지만 베리는 알고 있었다.
이든이, 일전 레온하르트 영지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
그리고 그 영지의 주민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을 주었는지.
모두가 빠르게 용지에 후보자를 써 내려갔지만, 어째선지 베리의 손은 연신 머뭇거리기만 했다.
버몬트 영지의 지부장이 그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베리.”
“지부장님?”
“내키는 대로 하도록.”
지부장의 말을 듣던 베리가 그를 향해 깊이 고갤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부장님!”
“…….”
지부장의 시선이, 그리고 사람들의 이목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길드를 위해서 제 소신껏 후보자의 이름을 적으려 합니다.”
그리고 거기엔 당신이 포함되지 않는다.
베리의 뜻은 그러했다.
베리의 말을 듣던 지부장이 허탈한 얼굴을 하다 일순 표정을 바꾼다. 씩 올라가는 미소.
“마음대로 해 봐.”
어차피 카일 지부장이 다수의 표를 독점한 이상, 자신의 기회는 물 건너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럴 바엔….
베리를 기점으로 한 사람에게 표를 몰아 주었다.
지부장의 시선이 베리를 향하고, 베리가 천천히 원하는 후보자의 이름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슬쩍 베리가 써낸 이름을 보던 지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자를…?’
이름을 적어 낸 베리가 투표함에 용지를 넣곤 이든을 바라봤다.
“이든.”
“……?”
“잘 부탁한다.”
“베리 대장님?”
“훗.”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켜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써낸 후보자의 이름이 누구인지 정도는….
그녀의 발언이 기점이 된 것일까.
하나둘씩 나와 용지에 이름을 써 내려가는 길드원들이, 하나같이 이든에게 말했다.
“잘 부탁하오! 심안의 무사!”
잘 부탁한다고.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카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버몬트 영지의 지부까지 투표를 모두 마치고 트럼프 영지와 크리스 지부만이 남은 상황.
비록 버몬트 영지 길드원들의 돌발 행동 덕에 적잖이 당황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카일의 표정엔 여유가 흘러넘쳤다.
‘저것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나의 예상 득표수는 거진 반이라고 반! 흐흐흐…!’
라고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던 카일의 얼굴이….
점차…. 점차 경악으로 물들고, 일그러졌다.
‘저, 저것들이….’
카일의 시선이 이름을 써 내려가는 트럼프 영지의 길드원들을 향했다.
“투표는 흐름이지. 흐름!”
“암암!”
“에잉! 귀찮아! 걍 남들 하는 거 따라 쓰지 뭐~!”
“저 베리가 추천할 정도면 꽤 괜찮은 사람 아니야!?”
카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시시각각 변해 갔다.
핏발 선 눈, 이마 가득 솟은 핏대.
차기 길드장의 유력한 후보로서 여유는 이미 진즉에 사라진 뒤였다. 카일이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저, 저 미친놈들이…!!! 투표가 장난이야? 이것들아!!!’
투표는 빠르게 진행되고 크리스 지부의 투표만 남은 상황.
덜덜덜….
“지부장님?”
덜덜덜덜덜….
“카일… 지부장님?”
“으, 응?”
“괘, 괜찮으십니까…?”
“그, 그럼요. 하하… 괜찮습니다. 괜차아아아안… 고 말고요.”
“…….”
괜찮다고 말하지만, 어째선지 카일의 눈이 말하는 내내 중간중간 크리스 지부의 길드원들을 향했다.
어디로 향하는지 도무지 예상이 가질 않던 투표의 흐름에 카일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런 미친! 젠장!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크리스 지부장과 친분을 틀 것을…!!!!’
그사이, 유난이었던 트럼프 영지의 길드원과 달리 크리스 지부장 소속의 길드원들은 조용히 용지에 이름을 써 내려갔다.
슥슥.
이미 훨씬 전부터 누굴 쓸지 정한 모습들이었다.
그렇게 모든 투표가 끝나고, 차기 길드장 발표만이 남은 상황.
“…….”
자신이 차기 길드장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카일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아, 아니… 아직 모른다. 아직 몰라…!!!!’
미궁으로 빠진 투표 상황.
그림자가 드리워진 카일과 달리 이든의 얼굴엔 알 수 없는 여유가 엿보였다.
씩.
이든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대체….
왜?
‘이미 결과는 나왔다.’
투표를 마치고 결과가 나온 텅 빈 회의장.
“…….”
카일이 넋이 나간 눈으로 투표 결과 용지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하…하하… 말도 안 돼.”
마치 꿈이라는 듯.
이 말도 안 되는 악몽에서 한시라도 빨리 깨어나야 한다는 듯 연신 고갤 휘휘 저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
힘을 워낙 세게 준 탓에 부르르 떨리는 두 손이 애처롭게 투표 결과가 적힌 종이를 붙잡고 있었다.
카일 175표.
그리고.
또르르….
카일의 눈알이 구슬프게 구르며 옆에 나란히 적힌 또 하나의 이름을 향했다.
이든 204표.
‘…응? 나머지 한 표는 어디 갔어…?’
고작 그 한 표가 결과를 바꿔 주지는 않겠지만, 카일은 뭐라도 홀린 것처럼 남은 한 표의 행방을 찾았댔다.
카일의 눈이 두리번거리다가 무효표 처리된 표를 꺼내 집었다.
“톰슨…?”
후보 중엔 톰슨이란 사람은 없었다.
‘지부장 중엔 이런 이름이 없는데….’
난생처음 보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에 카일이 고갤 갸웃거리다 이내 떠오른 듯 멍한 눈으로 무효표 처리된 것을 바라봤다.
‘…이, 이이 이 새끼 설마… 지 이름 적어 낸 거야?’
카일이 뒷골을 잡으며 눈깔을 위로 뒤집었다.
‘이, 이이이! 이 무식한 새끼는 투표도 할 줄 몰라! 내가! 내가 이런 얼빵한 놈들한테 길드장 자릴 뺏기다니! 이 내가! 이 카일이!!!!!!!!!!!!!!!!!!!!!’
카일의 눈에 핏발이 가득 섰다.
아, 아아아!
혈압!
혈압이!!!!!!
“그르르르르….”
붉으락푸르락하던 카일이 어느 순간 게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