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하아… 이제야 한숨 돌리는군.”
듀란드 공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전 캐슬롯 성 붕괴 사건으로 황궁이 발칵 뒤집힌 지 열흘 정도 지난 후였다.
유니콘 길드로부터 캐슬롯 영지와 펑크 상단의 배후였던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한 우발적으로 벌인 일이긴 했지만, 결국엔 성이 붕괴된 가장 큰 원인은 자폭충을 터트린 자신들에게 있었다.
물론 함구하기 위한 방법치곤 대가가 크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존재를 은폐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
그리고 황궁 내 의회를 통해서도 이번 일에 대해서 어찌어찌 무마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과정에 의회의 대신들에게 뇌물을 먹이는 데 큰돈이 들었다는 점이 여전히 불만이긴 했지만….
‘이제 남은 건 유니콘 길드인가.’
입술 가까이 찻잔을 가져다 대던 듀란드 공작의 입가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지금쯤이라면 모든 일이 마무리됐겠지. 이제 슬슬 소식이 당도할 때가 됐는데….’
똑똑.
때마침, 듀란드 공작이 묵고 있던 황실의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듀란드의 물음에 문 건너 밖에서 궁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조곤조곤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손님이란 말에 듀란드 공작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지어졌다.
‘왔군.’
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란 말인가.
그에게 있어 유니콘 길드는 눈엣가시, 밥상 앞에 알짱거리는 날파리 같은 것이었다.
근래 들어 번번이 실패했던 계획엔 항상 그들이 관련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런 귀찮은 것들을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치웠으니 기쁘지 않을 리가….
듀란드가 입가에 지었던 미소를 싹 지우곤 다시 냉소적인 얼굴로 돌아왔다.
그가 재차 입을 뗐다.
“들이거라.”
“예.”
궁녀의 짧은 대답이 들려오고 잠시 후.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들어왔다.
듀란드의 시선이 그 사내를 향했다.
‘카일….’
열린 문으로 들어온 사내.
다름 아닌 유니콘 길드의 지부장을 맡은 카일이었다.
그를 바라보던 듀란드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인간이란 본디 그런 것이지. 제아무리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친우라 한들, 눈앞에 쏟아질 막대한 재물과 권력 앞엔 본색을 드러내는 법이거든.’
듀란드 공작이 평소 일면식 있던 카일에게 약조한 것.
처리한 유니콘 길드의 길드장 자리는 물론이거니와 지부 확장을 위한 황실의 지원.
그리고 힘을 실어 줄 작위 수여였다.
불가능할 것 같은 얘기지만.
제국의 이인자인 듀란드가 마음을 먹는다면 실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카일 역시 레스타드라는 오랜 친구를 배신하고 듀란드의 손을 잡은 것이 아니던가.
‘후후… 이제 우리의 원대한 계획에 방해가 될 것은 없다.’
듀란드는 얼굴에 미소가 만연한 채 탁자 건너편에 마련해 둔 찻잔에 천천히 차를 따랐다.
또르르르.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듯한 차가 찻잔에 막 채워질 무렵.
듀란드가 허허로운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카일 지부, 아니 이제는 길드장이겠군요.”
듀란드가 아차 하며 급히 말을 고쳤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당연히 그가 길드장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르르.
조심히 따른 찻잔에 어느덧 차가 가득히 채워질 무렵.
듀란드가 슬쩍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거기엔 득의양양한 얼굴에 카일이 서 있어야 마땅한데….
그런데….
뭐지?
카일의 표정에 드리워진 저 그림자는?
듀란드가 차를 마저 따르다 말고 손을 멈칫했다.
‘아니, 왜 저리 똥 씹은 표정을….’
들어서기 무섭게 내내 고갤 숙이던 카일의 눈이 슬쩍 듀란드 공작을 향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겁에 질린 것처럼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의아스럽던 카일의 행동에서 언뜻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은 왜일까.
찻주전자를 들고 있던 듀란드의 손에 스르르 힘이 빠지고 기울어진 주전자가 다시 찻잔을 채워 가기 시작했다.
콸콸….
콸콸콸…!!!
이미 진즉에 찻잔을 가득 채웠음에도, 떨어지는 찻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듀란드가 넋이 나간 얼굴로 죄인처럼 서 있던 카일에게 넌지시 물었다.
“카일 길드 아니, 지부장….”
“…….”
“혹….”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쉬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
듀란드가 핏발 선 눈으로 느릿하게 다시 물었다.
“혹시 말이오… 그래선 안 되겠지만, 길드장 선거에서… 낙선한 것은… 아니겠지요?”
느리지만, 천천히 씹어 뱉듯이 말하는 듀란드의 물음에 내내 쥐 죽은 듯 서 있던 카일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송구합….”
칼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이미 넘칠 대로 넘친 찻잔.
듀란드는 모든 것을 쏟아 낸 텅 빈 주전자를 카일이 서 있던 곳으로 내던졌다.
휙!
쨍그랑!!!!
홧김에 던진 찻주전자가 깨지며 비산했던 조각이 카일의 볼을 스치고 생채기를 냈지만, 그럼에도 카일의 몸은 거기에 박힌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더더더덜….
카일의 몸이 조금씩 떨려 왔다.
듀란드 공작의 노기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듀란드가 악다문 입을 천천히 뗐다.
“혹… 지금 일을 그르쳤다. 그 말을 하는 것이냐…?”
“…….”
존대는 진작에 갖다 버린 모습.
으르렁거리듯 입술을 짓씹던 듀란드의 입에선 날 선 하대가 뱉어졌다.
지금껏 카일에게 보여 온 온화한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된 말투였다.
“…며, 면목 없습니다….”
“이, 이이…!!!”
거친 숨까지 내뱉던 듀란드 공작 입에서 다시 불을 뿜듯 거친 말투가 쏟아져 나왔다.
“내 손수 사람들까지 줘 가며 레스타드를 처리하는 데 힘을 써 줬거늘!!!”
듀란드의 눈이 충혈되듯 핏발이 그득 섰다.
“그리 지원을 해 줬거늘, 손바닥에 안까지 들어온 다 잡은 물고기를 이리 놓쳤단 말이야. 이 멍청한 것아!!!!!!”
듀란드의 노기가 객실을 넘어 황궁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듯 했다.
듣는 귀가 많다 보니 조심해야 할 듯싶건만.
사실상 황제 다음가는 권력인 그가 이 정도로 눈치를 볼 일은 없었다.
그 거센 듀란드의 노기의 파도를 정면으로 받던 카일의 얼굴이 점차 흙빛으로 물들었다.
카일이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떠듬떠듬 말했다.
“죄, 죄죄… 죄송합니다. 고, 공작 각하… 저,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오만…. 이, 일이 예상치 않게 흘러가는 바람에…!”
“…….”
연신 씩씩거리던 듀란드가 이내 두 다리에 힘이 풀리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분노할 땐 용암 같았다면, 지금은 한기가 느껴질 만큼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듀란드의 눈이 서슬 퍼런 살기를 드리우며 차디찬 음성을 내뱉었다.
“누구냐.”
“…….”
“계획을 망친 놈이.”
“…….”
“네놈을 대신해 길드장에 오른 망할 놈이 누구냐 묻고 있다.”
듀란드의 물음에 카일은 마른 침을 삼켰다.
어차피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말해야 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말이라는 것이 아 다르고 어 다르지 않던가.
같은 말이더라도 말하는 방법에 따라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카일의 두뇌가 재빠르게 회전하며 굳어 있던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공작 각하의 계획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누가.”
“…칼스테인 지부의 지부장 게럴드와 레온하르트 영지의 지부장 크리스였습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방해를 했단 말이지?”
“크리스 지부장이 의견을 제시하기를…. 지부장들끼리의 투표는 의미가 없다며 수도에 있는 모든 길드원의 참여를 제안했습니다.”
“…해서 실패했다?”
“물론 이 변수도 실패의 원인 중 하나였지만…. 문제는 더 있었습니다….”
“말해라.”
“…칼스테인 지부의 지부장 게럴드가….”
칼스테인 지부란 말에 듀란드의 눈썹이 발작적으로 꿈틀거렸다.
지금껏 계획들이 무산된 것에 모든 원흉의 근원지가 칼스테인 지부임을 듀란드가 모를 리 없었다.
카일이 재차 말을 이었다.
“길드원들이 모두가 모인 그 자리에서… 지부장 외 길드원의 후보 선출도 가능토록 제안하였습니다.”
“…길드원이 후보로…?”
“예… 해서 형평성을 위해 각 지부의 한 명의 후보만 나올 수 있도록 선을 그었는데…. 게럴드 그자가, 자신의 길드원을 추천하였습니다.”
“누군가. 그놈이.”
듀란드의 물음에 카일이 듀란드의 눈치를 한번 살피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이든입니다. 세간엔 심안의 무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이든이냐…?’
이든의 이름을 그라고 모를 리가 없다.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눈엣가시인 칼스테인 지부 중에서도 가장 원흉을 꼽으라면 당연코 이든, 그자였다.
심지어 최근 캐슬롯 성 붕괴 사건도 그자로 인해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 아니던가.
카일의 얘길 잠자코 듣던 듀란드가 정리하듯 나열했다.
“그러니까 크리스 지부장이 길드원들의 투표 참여를 제시하였고, 몇몇 지부장들이 동의하였다. 해서 길드원들이 모두 모였던 자리에서 게럴드 지부장이 길드원도 후보로 나갈 수 있도록 밑밥을 깔았고. 길드원들 모두가 동의. 그리고… 이든을 칼스테인 지부의 후보로 내세웠다. 그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냉소적이던 듀란드의 눈에 재차 붉게 충혈이 진다.
붉으락푸르락 시뻘게진 안색.
핏발로 붉게 충혈된 눈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이내 그의 목에 핏대가 바짝 섰다.
듀란드가 앞에 놓인 찻잔을 카일을 향해 집어 던졌다.
팍!
쨍그랑!!!
비껴 나간 찻잔이 카일 바로 옆에서 깨지며 그의 얼굴에 다시금 생채기를 냈다.
“그것이 변명이 된다 생각하느냐!!!!”
듀란드의 노기 띤 외침에 카일의 눈이 잔뜩 겁에 질린 채 흔들렸다.
변명이 될 줄 알았는데, 도리어 그것이 듀란드의 심기를 건드렸단 사실에 카일이 황급히 오체투지를 하였다.
“하, 하지만 공작 각하…! 저,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닥쳐라!!!!”
듀란드가 일갈했지만, 카일의 입은 멈추질 않았다.
이곳은 다름 아닌 듀란드 공작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황궁 안이었다.
정녕 그의 말만 듣고 입을 놀리지 않는다면 필시 자신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 것임을 카일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카일이 재차 고개를 깊이 조아리며 애처로운 표정으로 입을 놀려 대기 시작했다.
“고, 공작 각하!!!! 소인의 얘기를 마저 들어 주십시오!”
“…….”
애처롭게 목청을 높여 대는 카일의 모습에 듀란드의 노기가 살짝 누그러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카일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 저는 오벨슈타인 영지와 캐슬롯 영지의 지부장을 설득하여 그들 휘하의 길드원의 표까지 독점한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수도의 길드원도 저를 지지하는 분위기에… 반에 가까운 득표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무리 없이 당선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
“그런데… 이든이란 놈의 영향력이 생각지도 못할 만큼 대단했습니다. 버몬트 영지의 지부장 휘하에 대장직을 맡은 베리란 년이 그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였고, 그 뒤를 이어 그녀 휘하의 길드원들이 그를 지지하였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트럼프 후작 영지의 길드원까지 분위기에 휩쓸려 그를 지지하였습니다.”
“…그래 봤자 동률 아닌가.”
듀란드의 물음에 카일이 더욱 깊게 머릴 조아렸다.
“문제는 최근 신생 된 레온하르트 영지의 지부였습니다.”
“레온하르트 영지 지부…?”
“예…! 공작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레온하르트 영지는 최근 그 상황이 급격히 나아지고 있습니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스스로 세상과 단절 후 자취를 감추던 엘프 종족이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다 합니다.”
듀란드의 얼굴은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가 고갤 끄덕였다.
“그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데 그 믿을 수 없는 일 뒤에 이든이란 자가 개입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네놈은 이든이란 자가 엘프족과 레온하르트 영지를 중재해 그들을 구했다?”
“그리고 약속했다는 듯 그곳 지부에 길드원들은 이든을 투표하였습니다…. 이, 이것이 그것에 대한 결과입니다….”
“…….”
카일이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듀란드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듀란드의 눈이 카일이 건넨 것으로 향했다.
그가 받아 든 것은 다름 아닌 투표 결과 용지였다.
‘카일 175… 이든 204….’
그 외 다른 후보는 거론도 없었다. 카일이 눈치 빠르게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희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저들 역시 합심하지 않았나… 사료됩니다.”
카일의 말대로라면 애초부터 불리했던 싸움이었다.
듀란드가 차츰 노기를 가라앉혔다. 냉정을 되찾은 그의 눈이 앞에 바르르 떨고 있는 카일을 향했다.
듀란드가 한숨을 크게 한번 내뱉고는 입을 열었다.
“…해서 이 상황을 타파할 방도는 있는 건가?”
듀란드의 물음에 카일이 내내 바닥으로 향했던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저를 포함하여 오벨슈타인 지부와 캐슬롯 지부 모두 유니콘 길드에서 독립한다 선언할 작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