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여기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이가 있다.
훤칠하다는 기준을 넘어 거대한 키.
다부지다의 기준을 넘어선 태산마저 짊어질 듯한 우람한 체격.
그리고 등 뒤에 걸친 거대한 대검은 위압적인 분위기마저 훌훌 풍기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할 것 같은 체격이지만, 그의 선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은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체격과 대비해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앳된 얼굴로 주변을 연신 살피던 사내가 볼을 긁적였다.
“흠. 여기가 맞겠지…?”
사내의 시선이 향한 곳.
다름 아닌 길드의 현판이었다.
수도 내에서도 상당히 큰 편에 속하는 길드답게 건물의 크기도 크기지만, 현판에 그려진 웅장한 문양과 용사 비등한 필체로 쓰인 이름이 길드의 위엄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사내가 저도 모르게 현판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유니콘이라….”
씨익.
이내 중얼거리던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곳에 이든 형이 길드장으로 있다, 그 말이지… 이든 형 출세했네!”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잘도 떠들어 대는 사내, 발리스타가 거기에 있었다.
발리스타가 고갤 휘휘 저었다.
“이럴 게 아니지. 자, 그럼 어서 들어가 보실까!”
발리스타가 길드의 무거운 문을 활짝 열어젖히곤 쩌렁쩌렁 울릴 듯한 커다란 음성으로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신입 길드원 발리스타입니다. 으하하핫!!!!”
그래. 첫인상은 패기지. 패기!
…응?
웃어젖히던 발리스타의 눈이 길드 안을 훑었다.
사무관들이 잔뜩 움츠러든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 정적 끝에 발리스타가 멋쩍게 웃었다.
“아, 안녕하세요…? 하하하….”
급 소심해진 발리스타의 인사에도, 쩍 벌어진 사무관들의 입은 도무지 닫힐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음.”
“…….”
“하아….”
이든이 낮게 침음성을 뱉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니까….”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은 이, 발리스타가 힐끗힐끗 이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평소 그답지 않게 기가 죽어 있었다.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기사 아카데미에서 제 발로 나왔다?”
“그렇소.”
이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이라니!”
발리스타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성을 냈다.
“모두가 토너먼트에서 필사의 노력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했소. 한데 그 안에서 귀족과 평민을 나뉘어 다르게 취급하다니요. 이게 말이나 되는 것이오!!!”
제 발로 자퇴한 발리스타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일전 레온하르트 영지의 위기 때 그들을 구하겠답시고 토벌을 보냈던 기사 아카데미 학생들 역시 하나같이들 평민 출신이 아니었던가. 뭐, 칼라슈야 스스로 토벌에 지원했다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진 분명히 평민들이었다.
발리스타는 아카데미 내에서 대놓고 신분을 차별해 대는 것을 못 참고는 결국엔 제 발로 나온 것이다.
이든이 지끈거리는 골을 부여잡았다.
“해서 학교 때려치우고 한다는 말이 여기에 취직시켜 달라?”
“맞소.”
발리스타가 씩 웃었다.
“아카데미까지 때려치운 마당에 내가 갈 곳이 어딨겠소. 그러다 문득 길드장이 됐단 이든 형의 소식이 들리더이다. 그 길로 내 바로 달려왔소!”
“…대책 없구만.”
이든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발리스타가 애써 밝게 말했다.
“이든 형!”
“왜!”
어느새 평소 존대가 아니라, 발작적으로 하대가 나오는 이든이었다.
“친구 좋다는 게 뭐요! 나 좀 취직시켜 주시오! 갈 데도 없단 말이오.”
기어코 이든의 입에서도 큰소리가 나왔다.
“아니, 갈 데도 없다는 양반이 그렇게 무작정 아카데미를 때려치운다는 게 말이 돼!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차별한다 한들 어떻게든 참고 버텼어야지. 거길 어떻게 들어간 곳인데!”
“아 몰라!!! 아무튼, 이미 나왔다고!!! 책임져!!! 취직시켜 줘!!! 재워 줘!!!”
어느새 바닥의 드러누워 배 째라는 식의 발리스타였다.
이든이 양손으로 골을 짚었다.
“이, 이이!!! 당장 나가아아아아!!!”
이든의 일갈에 유니콘 본부가 들썩였다.
“후우….”
이든이 한숨을 푹 내뱉었다.
옆에서 서류 검토를 돕던 카르엘이 그를 힐끗 바라보다 넌지시 물었다.
“저… 길드장님?”
“…예?”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이든이 고갤 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골칫거리가 하나 는 것 같아서….”
“아….”
이든의 말을 듣던 카르엘이 이해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녀가 자연스레 낮에 찾아온 발리스타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든이 재차 입을 열었다.
“녀석은 어떻게 했습니까?”
“본부 숙소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카르엘의 대답을 듣던 이든이 인상을 썼다.
“숙소요? 그냥 지하 감옥에 처넣으라니깐.”
“…….”
실제로 이든은 길드원들을 시켜 발리스타를 지하 감옥에 처넣으라고 했었다.
물론 카르엘이 알아서 그를 본부 숙소에 거처를 마련해 주긴 했지만.
카르엘이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나름 괜찮지 않아요?”
“뭐가 말입니까?”
“지금 길드 사정을 생각하면 필요한 인재 아니던가요? 힘도 세 보이고, 게다가 기사 아카데미 출신이니 실력은 당연히 보장되어 있고.”
그렇기야 하지.
요즘 같은 상황에 발리스타 같은 친구만 들어와 준다면야 이든 입장에서야 두 팔 벌려 환영할 정도였다.
다만….
이든이 고갤 저었다.
“그걸 떠나서….”
“…….”
“녀석은 애가 아닙니다. 어렵게 들어간 아카데미를 한순간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때려치운 아이입니다. 조금만 참으면 졸업이었고, 황궁 기사가 될 일만 남았던 녀석이죠. 여기서 마냥 받아 준다면 애 버릇만 나빠집니다.”
카르엘이 고갤 갸우뚱했다.
애…요?
사실 카르엘 입장에선 이든이나 발리스타나 거기서 거기지만.
카르엘은 발리스타를 애 취급하는 이든의 말을 잠자코 듣는 수밖에 없었다.
카르엘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온 거…. 한번 써 보심이 좋을 것 같아요. 어쩌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 이렇게 찾아왔다는 게 운명일 수도 있잖아요.”
“흠….”
고심하는 이든을 향해 카르엘이 재차 물었다.
“네? 길드장님…!”
“알겠습니다. 고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거면 됐다.
카르엘이 활짝 웃었다.
이든과 카르엘이 남은 서류를 처리하려 할 때쯤, 문득 이든이 물었다.
“부모님께…. 서신은 아직 안 왔습니까?”
“아…! 아마 지금쯤이면 게럴드 지부장님께서도 영지에 도착하셨을 테니 조금만 기다리면 곧 서신이 당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군요.”
워낙 예정에 없이 길드장이 된 터라 미처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려 드릴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길드 상황상 당장에 자릴 비울 수도 없는 노릇, 이든은 지부로 돌아가는 게럴드에게 자신의 서신을 부모님께 전해 달라 부탁하였다.
전서구의 이동 속도라면 진즉에 도착했을 테지만, 워낙에 중차대한 일이다 보니 게럴드가 직접 서신을 전해 주는 것이 맞는다고 여긴 것이다.
“서신이 도착하는 대로 길드장님께 바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예….”
이든이 천천히 고갤 끄덕이곤, 다시 서류 하나를 집었다.
카르엘이 가까이 다가와 서류의 내용을 살펴 주었다.
마냥 가족들 걱정만 하기엔 밀린 일들이 너무 산적한 탓이었다.
이든이 마지막 서류까지 검토를 마치고, 무거웠던 입을 열었다.
“카르엘 씨.”
“네. 길드장님?”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발리스타를 불러 주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카르엘이 환하게 웃었다.
“네. 알겠습니다.”
***
쪼르르…
이든이 쥔 찻주전자가 맞은편 발리스타의 찻잔을 채웠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발리스타가 쥐자 흡사 찻잔이 아니라 작디작은 술잔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발리스타의 손이 덜컥 멈추었다.
어느새 뜨거웠던 차도 꽤 식어 있었다.
발리스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이든 형….”
“내일부터 출근하도록 해.”
발리스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말이요?”
“괜한 소리 안 해.”
“고, 고맙소. 이든 형. 아니, 길드장님!!!”
어느 정도 식은 찻잔을 들어 이든이 한 모금 들이켰다.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나이도 내가 더 많고, 길드장이고 하니 앞으로 말은 편히 할게.”
“무, 물론이오. 길드장!”
“그보다….”
탁.
이든이 찻잔을 탁자에 놓았다.
“네가 아무리 대책 없다고 해도 이리 무작정 아카데미를 그만두었을 리가 없겠지. 어렵게 들어간 그곳을 그만둔 이유가 정확히 뭐야?”
이든의 물음에 발리스타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희망이 보이질 않았소.”
뜬구름같은 이야기에 이든이 고갤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야? 다짜고짜 희망이라니.”
발리스타의 커다란 손이 연신 찻잔의 면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일전 토벌에서 귀환 후, 아카데미의 분위기가 너무도 바뀌었소.”
“분위기?”
“귀족과 평민, 신분에 따라 수업을 따로 나눠 받더이다.”
“…뭐?”
“당연히 다수의 귀족 자제들이야 황궁의 엘리트 기사였던 교수들에게 집중 지도를 받았고, 남은 소수의 평민 학생들은… 제대로 된 수업도 못 받았소. 이론 수업 역시 마찬가지요. 귀족 자제들은 군사학을 평민 자제들에겐 이론 수업 자체가 제공되질 않았소…. 뭐, 그렇다고 내가 이론 수업을 잘 듣던 것도 아니긴 하지만.”
“…알겠군.”
“무엇이 말이오?”
“견제하는 거다.”
이든의 대답에 발리스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견제…? 우릴 말이오?”
“정확히는 레온하르트 토벌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온 너희들을 말이지.”
“대체 왜….”
이든의 입에서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내뱉어졌다.
“체제가 흔들리니까.”
“…….”
“아마 아카데미에선 레온하르트를 구제할 수 없다. 판단했을 거야. 토벌을 나갔던 너희 역시 살아 돌아올 수 없거나 혹은 실패해서 귀환하리라 예상했을 거다. 하지만….”
말끝을 흐리던 이든이 차로 목을 적시곤 재차 말을 이었다.
“너무도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차별을 하다니, 그건 좀 억지가….”
“정치란 때론 유치한 편이지. 서로의 이권을 위해 파를 나누어 싸우는 이들도 한 가지에서만큼은 공통된 입장을 보이지.”
“…….”
“자신들의 체제가 흔들리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해. 그들에게 있어 공을 세워야 했던 것은 평민들인 너희가 아니라, 귀족들이었던 게지. 아마 그들은 돌아온 이들 중 칼라슈에게만 상을 내렸을 거야. 너희들에겐 대충 고맙단 말만 지껄였겠지. 아니야?”
“…맞소.”
“교육에 차등을 두는 것. 지금까지 암암리에 존재하던 격차를 다시 벌리고 확고히 하겠다는 거야. 다시는 언감생심 위를 쳐다볼 수 없도록.”
“…말도 안 돼.”
“아니. 생각해 보면 말이 돼. 실제로도 너희는 너무도 훌륭히 싸웠고 재능도 뛰어나. 너희가 이대로 성장한다면 필시 다른 귀족들을 제치고 수석으로 황실 기사가 될 수 있었겠지. 아카데미는 그것을 염두에 둔 것이고.”
“…빌어먹을. 이러면 무도 대회가 의미가 있는 것이오? 모두가 황실 기사가 되기를 꿈꾸는데, 그것을 짓밟는 것이… 황궁이 할 짓이냔 말이오!”
이쯤 되니 발리스타가 왜 저리했는지 조금 이해가 간다.
이든이 말없이 의자에 등을 기대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발리스타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이게 다 기사 아카데미가 교육기관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오. 이러니까 이런 부조리가 나오는 거지! 에잉!”
이든이 급히 의자에서 등을 뗐다.
“뭐라고?”
“응? 뭐가 말이오?”
“방금 그 말.”
“기사 아카데미가 교육기관을 독점하고 있다…?”
“그거야.”
“잉…? 뭐가 말이오?”
이든이 벌떡 일어나 발리스타의 등을 힘껏 쳤다.
팡!
“그거라고, 인마!”
“아, 따거!!! 뭐, 뭐요! 대체! 나도 좀 알고나 있읍시다!”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게 바로 그거라고.”
“…잉?”
“덕분에 새로운 사업이 구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