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게럴드는 사석에선 평소와 다름없이 편하게 이든을 대했다.
“자, 이거 받게.”
게럴드가 이든에게 뭔가를 건넸다.
“이건….”
이든의 물음에 게럴드가 미소 지었다.
“일전 자네가 나에게 부탁했던 것일세.”
게럴드가 이든에게 건넨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이든의 부모가 그에게 보낸 서신이었다.
본래는 전서구를 통해 보냈어야 할 서신이지만 급하게 회의가 잡힌 터라 게럴드가 직접 가져온 것이다.
편지를 건네받은 이든의 표정이 묘했다.
기쁜 듯하면서 슬픈 듯 보였고, 찰나 미안한 기색도 느껴지는 표정.
이든이 볼을 긁적였다.
“저…. 실례지만 지부장님. 혹 읽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게럴드가 아차 싶은지 이든에게 건넸던 편지를 도로 냉큼 받았다.
“아 참. 내 정신 좀 보게! 하하… 당연하지! 그럼 내 읽어 주겠네.”
“부탁드립니다.”
게럴드의 눈이 서신의 내용을 훑었다.
그의 낮지만 부드러운 음성이 한줄 한 줄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아들아, 오랫동안 집으로 오질 않아 혹여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너무도 걱정이 많았단다.
하루하루 애태우며 너의 소식을 기다릴 때쯤, 지부장님을 통해 네가 길드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곤 우리 둘 다 얼마나 놀랐는지….
밥은 끼니마다 잘 먹고 있는 것이냐?
어디 아픈 곳이나 다친 곳은 없고?
우린 잘 있단다.
릴리 그 아이가 얼마나 붙임성이 좋은지, 너희 엄마가 진짜 딸이 생긴 것 같다며 어찌나 좋아하는지….
아들아, 새삼스럽지만 걱정과 달리 부쩍 훌륭하게 자란 네가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아느냐.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해 준 것도 별로 없고, 어린 시절부터 늘 고생만 시킨 것 같은데….
그럼에도 너는 불평불만 없이 어엿하게 자라 주었지.
그래서 우린 항상 너에게 고맙고, 미안하단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는 바쁘게 하루를 달려가고 있겠지.
열심히 사는 것도 좋지만, 이따금 얼굴이라도 비춰 주려무나.
너희 엄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아들의 얼굴이 너무도 보고 싶다.
꼭 한번 들러 주렴.
사랑한다. 자랑스러운 아들아.
- 브라운 -
“…….”
이든이 시큰해진 코를 긁적였다.
편지를 모두 읽은 게럴드가 힐끗 그를 보더니 물었다.
“울었나…? 자네?”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냥 콧물이 나와서 그런 겁니다.”
게럴드가 고갤 갸우뚱했다.
“콧물…? 감기 한번 안 걸려 본 자네가?”
이든이 괜히 헛기침해 댔다.
“크흠! 아무튼 알았습니다.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든이 게럴드가 들고 있던 편지를 뺏다시피 했다.
그런 이든의 모습이 이색적이었는지, 별일이란 표정을 짓던 게럴드가 넌지시 물었다.
“그럴 게 아니라. 부모님을 수도로 모시는 것은 어떻겠나? 그럼 자주 볼 수 있을 텐데.”
“…그렇긴 한데. 수도의 집값이 어디 보통 가격입니까? 해 봤자 외곽의 작은 집 정도나 구할 수 있을 텐데요.”
“흠… 하긴 갑자기 좁은 집으로 오시면 불편하실 수도 있겠지. 그래도 한번 생각이나 해 보라고. 자네 부모님도 이제 연세가 있으시지 않은가? 앞으로 사실 날이 얼마나 길겠는가. 그럴수록 조금 더 부모님 옆에 붙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죠….”
“아무튼, 생각 있으면 말하게. 무리가 된다면 내 돈이라도 꿔 줄 테니. 설마하니 길드장이란 사람이 꿔 간 돈도 안 갚지는 않겠지.”
“훗.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살짝 미소 짓던 이든의 얼굴에 다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동안 너무 무심하긴 했다. 부모님을 수도로 모신다라….’
왜일까. 오늘따라 생각이 많아지는 그였다.
***
“이상 무관 학교가 세워질 토지 목록입니다.”
“음.”
“어떠세요?”
“흠….”
카르엘의 물음에 이든이 볼을 긁적였다.
“글쎄요. 직접 봤으면 싶은데, 보이질 않으니 솔직히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아….”
카르엘이 들고 있던 서류를 재차 훑었다.
“혹시 길드장님께서 따로 원하시는 사항이 있으시면 제가 거기에 맞춰 목록을 추려 보겠습니다.”
“음….”
이든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역시 넓은 것이 가장 좋지 않겠습니까?”
“아….”
이든의 얘길 듣던 카르엘이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이든이 고갤 갸우뚱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뇨. 딱히 문제라고 할 건 없는데… 그게요….”
말끝을 흐리던 카르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목록들 가운데, 유독 넓은 곳이 하나 있긴 있어요. 토지의 넓이도 본부와 숙소를 합친 것의 세 배 가까이 되구요.”
“잘됐군요. 그런데 뭐가 그리 걱정이십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그곳이 기사 아카데미 근처라….”
“그래요?”
“네. 기사 아카데미는 수도 중심부에 있습니다. 목록의 그 토지 역시 수도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근방에 황실을 왕래하는 귀족들 역시 그곳 근처에 거처를 많이 잡고 있다는 겁니다.”
“음.”
수도의 중심부는 황궁을 필두로 해서 귀족들의 거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중심에서 조금 벗어나야, 길드나 상단이 즐비했고, 좀 더 벗어나 외곽으로 빠지면 여관이라든지, 주점 있는 시장과 함께 백성들이 머무는 거처들이 즐비한 부지가 있는 것이다.
황실과 귀족 간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기사 아카데미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무관 학교를 만들겠다는 취지는 좋으나….
아무리 그래도 그 근처에 터를 잡는다는 것이 카르엘 입장에선 영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이든은 도리어 그곳이 마음에 든다는 반응이었다.
“더 볼 것도 없겠군요. 그곳으로 하시죠.”
“정말 여기로 결정하시게요?”
“네. 바로 추진해 주십시오. 이런 일일수록 바로 진행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카르엘이 고갤 끄덕이곤 이든이 결정한 부지의 서류를 따로 정리할 때쯤.
똑똑.
그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이든의 목소리에 잠시 후, 열린 문으로 사무관 한 명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길드장님, 황궁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황궁에서요?”
황궁에서 서신이라니?
이든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무관이 건넨 서신을 받아들었다.
옆에 있던 카르엘도 이든이 받아 든 서신을 재빨리 훑었다.
카르엘이 고갤 끄덕이곤 이든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네, 그럼 이만.”
사무관이 고갤 숙이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서신을 살피던 카르엘이 말을 꺼냈다.
“길드장님, 이건 초대장이에요!”
“초대장?”
“예.”
황궁에서 보내는 서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붉은색 황실 문양으로 봉인한 서신은 초대장을 뜻했다.
이든이 카르엘에게 서신을 건넸다.
“한번 읽어 봐 주시겠습니까?”
“네.”
카르엘이 봉입을 뜯고는 조심히 서신을 꺼내 들었다.
서신 안에는 용사비등한 문체로 쓰인 초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카르엘이 서신을 읽어 내려갔고, 듣던 이든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교회…?”
“아무래도 황실에서 큰 행사가 열리나 봐요. 벨라트릭스 국왕도 초청되었다는데요?”
“그럼 국가 간의 행사란 것인데, 굳이 왜 저를….”
자신을 왜 초대한 것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이든의 말에 카르엘이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듣기론 과거, 레스타드 길드장님께서도 황실이 주최하는 사교회에 자주 참석을 하셨다고 해요. 황실에서도 유니콘 길드의 길드장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 테니, 한번 얼굴도 볼 겸 부른 게 아닐까요?”
“흠….”
“어떻게… 초대에 응하실 생각이신가요?”
“사교회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정확히 보름 후에 이틀간 진행이 된다 명시되어 있습니다.”
“보름 후에 이틀간이라….”
이든이 낮게 침음성을 냈다.
여러 가지로 일이 산적해 있어 일정이 바쁜 지금.
그 와중에 이틀 동안 시간을 내기가 영 쉽지 않았던 탓이다.
게다가 황실 내부에 유니콘 길드를 노리던 적을 둔 시기에 참석한다는 것이 영 꺼림칙하기도 했다.
이든이 넌지시 물었다.
“이럴 때 레스타드 길드장님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카르엘이 반사적으로 답했다.
“당연히 참석하셨을걸요?”
“…….”
하긴….
그 양반 성격에 이런 행사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지.
꽤 닮은 두 사람이었지만, 이 부분에선 다른 모습을 보이는 둘이었다. 카르엘이 살짝 미소 지으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참석하세요.”
“카르엘 씨?”
“신사업도 신사업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니콘 길드가 아직 건재하다는 걸 보여 주는 것 아니겠어요?”
“흠….”
그녀의 말대로 유니콘 길드의 건재함을 보여 주는 것 역시 앞으로 길드를 운영하는 데 있어 더없이 크게 작용할 것이다.
이든이 고갤 끄덕이며 참석 의사를 밝혔다.
“알겠습니다. 그럼 보름 후에 있을 황실 사교회 일정도 잡아 주세요.”
“네, 길드장님.”
“아, 혹시….”
그때, 이든이 카르엘을 불러세웠다.
“사교회엔 꼭 당사자만 참석이 가능합니까?”
“그건 아닙니다. 몇몇 귀족들은 사교회에 당사자 외에 개인 비서들도 데려가곤 합니다. 근데 왜요…?”
“잘됐군요. 카르엘 씨도 같이 가시죠.”
“저, 저도요?”
“당연하죠. 카르엘 씨가 없으면 제가 용무를 아무것도 못 보는데요?”
“어…? 그렇…네요?”
“설마 저만 달랑 보낼 생각이셨습니까?”
“그렇지만… 제가… 황실 사교회에….”
뜻밖에 제안에 카르엘 역시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황실 사교회가 어디 보통 행사인가?
어지간한 이들은 문턱도 넘지 못하는 곳이 황궁이다.
비록 동행이지만, 그런 곳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얼떨떨할 수밖에….
이든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렇게 아시고 카르엘 씨도 보름 뒤 일정 모두 빼 두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짝.
이든이 손뼉을 소리 나게 쳤다.
“자, 그럼 그전까지 예정됐던 일을 빠르게 진행해 봅시다.”
“네. 알겠습니다!”
***
“중앙의 건물은 약간의 보수만 하면 그대로 쓰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밖에 연무장과 외벽도 주문해 주신 도면대로라면 짓는 데 시일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인부의 말에 카르엘이 고갤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옆에 이든을 향했다.
“어떻게… 진행할까요?”
“뜸 들일 것 있습니까? 당장 시작하죠.”
“예.”
카르엘이 고갤 끄덕이곤 다시 인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예정대로 바로 진행해 주십….”
“아, 잠깐.”
문득 뭔가 떠오른 듯 이든이 걸음을 옮기려던 인부와 카르엘을 불러 세웠다.
“개인적으로 하나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듣던 인부가 입을 열었다.
“네.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아직 어려 보이는 젊은 친구지만, 인부는 이든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가 누구인가.
다름 아닌 명실상부 유니콘의 길드장 아닌가.
레스타드가 떠난 현재. 세간엔 유니콘 길드가 위기라 말하지만, 다시금 더 높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는 위기 속에서 피어나는 법.
이든이 그가 서 있던 쪽 바로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곳에 출입구가 들어설 예정이라 하셨지요?”
“네. 맞습니다.”
“크기는 어느 정도 됩니까?”
“외벽과 얼추 비슷한 높이로 지을까 하는데요.”
이든이 고갤 저었다.
“아닙니다. 더 크게 해 주십시오.”
“더… 크게요?”
“예.”
“어느 정도 크기를 원하시는지 구체적으로 여쭤도 되겠습니까?”
“외벽의… 다섯 배 정도 되는 크기로 부탁드립니다.”
이든의 말을 듣던 인부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다, 다섯 배라 하셨습니까?”
“예.”
인부가 건축도를 다시금 살피더니 고갤 갸우뚱했다.
“외, 외벽에 비해 문이 너무 높지는 않습니까? 뭐… 외벽이 원래부터 높게 설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다섯 배는….”
“아닙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이든이 이토록 문의 크기에 집착하는 이유.
아마도 그것은 전생의 기억에서 비롯된 영향 때문일 것이다.
신교.
대체로 높은 외벽에 세간의 시선을 거부하는 폐쇄적인 성향에 구파나 오대세가와 비교해 초라하다 할 수 있는 낮은 외벽.
이것도 나중에야 지어진 것이지.
본래는 외벽조차 없었다.
스스로를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으며 무림에 공공의 적이 되었을 때도 낮은 외벽을 그대로 두었다.
아마 그것은 마인들 특유의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한 가지.
바로 산문이었다.
외벽은 낮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지켜볼 수 있되 산문만큼은 비효율적으로 거대하고 무거웠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렇게 지었는지는 감히 짐작할 수 없지만….
당시에 무진이었던 이든은 이렇게 생각했다.
스스로 제일문이라 여기는 신교의 자부심이라고….
이든이 재차 단호하게 말했다.
“꼭 그렇게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