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250)

96화.

화려한 실내.

황궁의 요리사들이 내놓은 산해진미와 진귀한 술.

거기에.

분위기를 한층 더 고급지게 만들어주는 은은하게 들리는 음악 소리까지.

황궁에서 주최하는 행사답게 명망 높은 가문의 귀족들은 모두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듯했다.

그들의 자제들이라 할 수 있는 젊은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고, 이 나라의 실권자들은 아는 얼굴이 보일 때마다 서로 말을 건네기 바빴다.

“아이구! 오랜만입니다.”

“하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공식 석상 때 잠깐 마주친 것 말고는 이리 뵙는 건 정말 간만입니다.”

밝게 웃는 얼굴들이 저마다 지금의 행사를 즐기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사교회란 본디 먹고 마시고 수다나 떨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다.

저마다 웃음 흘리고 있지만, 속에는 칼을 품고 잇속을 챙기려 드는 것이 바로 사교회의 본질이었다.

하여 분위기에 취해 자신을 놓게 된 순간, 어떤 망신을 당할지 모르는 게 바로 이곳이다.

과연 화기애애한 젊은이들에게도 그들만의 경쟁이 있었지만, 어른들의 대화는 흡사 웃음으로 가려진 살얼음판을 보는 듯했다.

황궁의 대신들이 오늘만큼은 파를 나누지 않고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서도 그들만의 이권 다툼은 여전히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한 곳.

황궁의 주요 대신들이 한 사내를 둘러싸곤 연신 입을 놀리기 바빴다.

사교회를 제안한 제국의 손님.

이웃 동맹국에서 온 대표였다.

“하하하! 벨라트릭스 국왕을 이리 직접 뵐 줄이야, 참으로 영광입니다.”

한 중년 대신의 말에 기다란 검은 장발에 홍안의 미남. 벨라트릭스 밸스커드 국왕이 살짝 고갤 숙였다.

“저도 더없이 영광입니다.”

그때, 그의 옆에 있던 또 다른 중년인이 말을 건넸다.

“나라가 많이 안정됐다 들었습니다. 감축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이게 전부 아스란 제국의 황제 폐하와 대신분들께서 어려운 결정을 해 주신 덕분이지요.”

“하하하. 사실 지금에 와 얘기하는 거지만, 우리가 애를 많이 쓰긴 했지요. 하도 저쪽에서 어찌나 강경하게 나오는지.”

그 중년인의 말에 근처의 다른 중년인의 얼굴이 금세 새빨개졌다.

“크흠! 거 사람 참, 다 지난 일을 왜 다시 꺼내나!”

중년인이 연신 헛기침을 하며 밸스커드를 황급히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말이 사실이긴 하나, 저희도 듀란드 공작님과 긴밀히 협의하여 부단히 노력했다는 점 알아주십시오.”

밸스커드 국왕이 미소 지으며 고갤 끄덕였다.

“아무렴요. 여기 계신 모두가 저희의 나라를 위해 힘써 주신 것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하하.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무안한 얼굴로 웃어넘기는 중년인을 향한 밸스커드의 눈에 찰나 서슬 퍼런 빛이 반짝였으나, 이내 삽시간에 지우곤 다시 눈웃음을 지었다.

“모두 여기 계셨군요.”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다가 얼굴을 확인하곤, 하나같이들 급히 고갤 숙였다.

황제를 제외하면 아스란 제국의 명실상부한 일인자, 듀란드 공작이 그들 사이로 걸어왔다.

듀란드 공작이 먼저 안부를 건넸다.

“잘 오셨습니다. 밸스커드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듀란드 공작님.”

언뜻 보기엔 화기애애한 장면 같지만, 허공에서 맞부딪친 두 사내 눈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미묘한 빛이 오갔다.

“이 자리에서 이렇게 보는 것도 또 새롭군요.”

“그러게요. 혹 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아니요. 나름 신선하니 재밌습니다.”

밸스커드의 말을 듣던 듀란드 공작이 피식 웃었다.

하기야….

매번 단둘이 비밀 회담을 가질 때마다, 그의 개인 집무실에서 로브를 뒤집어쓰고 만나 댔으니, 이렇게 얼굴을 드러내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새롭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었다.

그때, 밸스커드 국왕이 사교회 한곳에 자리한 용상의 빈자리를 보며 말을 꺼냈다.

“폐하께선 여전히 편찮으십니까?”

밸스커드의 물음에 듀란드 공작이 작게 고갤 끄덕였다.

“노회하시다 보니 예전 같지 않으신가 봅니다.”

“하루빨리 쾌차하셔야 할 텐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언뜻 황제를 걱정하는 대화 같지만, 말이 오가는 내내 마주하는 두 사람의 눈엔 흉흉한 빛이 일었다.

물론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주변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그때, 밸스커드가 공작의 가까이 다가가 그만 들릴 듯한 음성으로 나직이 물었다.

“그가 올 것 같습니까?”

“분명 오지 않겠습니까? 황실에서 주최하는 행사입니다. 간 큰 놈이 아니고서야 황실의 초대를 무시할 순 없겠죠.”

“하기야….”

대외적으론 벨라트릭스 왕국과 아스란 제국의 친교를 위한 행사였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사교회를 빙자한 듀란드 공작과 밸스커드 국왕의 진정한 목적.

그것은 다름 아닌, 새로 취임한 유니콘의 길드장 이든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아직 초반이었지만, 초대한 이들 대부분이 속속들이 모이며 얼굴을 보이었다.

이대로라면 필시 유니콘 길드의 이든이란 사내도 모습을 드러내리라…,

사교회의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어 갈 무렵.

연회장의 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한 사내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떠나갈 듯 외쳤다.

“정숙하여 주십시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끌벅적하던 연회장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다른 이도 아닌, 제국의 지존이라 할 수 있는 아스란 황제의 등장이니 당연한 모습이었다.

잠시 뒤, 열린 연회장 문으로 아스란 황제가 부축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노화한 얼굴. 그리고 마른 몸에 구부정한 허리.

과거 위풍당당했던 황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초라한 노인의 모습만 보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엄연히 제국의 황제였다.

저벅저벅….

고요한 정적 속, 무심히 들려오는 그의 발걸음.

자신을 향해 고갤 숙이며 예를 갖추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용상에 자리한 황제가 주위를 훑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 갑작스러운 초청에도 이리 모여 주어 참으로 고맙소….”

마치 화답하듯, 객들이 저마다 작게 고갤 숙였다.

그 모습을 온화하게 바라보던 황제가 한 사내를 가리키며 재차 입을 열었다.

“오늘 있는 행사는 우리의 더없는 동맹국이자 형제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벨라트릭스 왕국의 벨라트릭스 밸스커드 국왕의 제안으로 열리게 된 것이오.”

황제에게 가리킨 사내, 밸스커드가 자신을 향한 이목에 작게 고갤 숙이며 일일이 화답했다.

“다들 알다시피 밸스커드 왕국은 수십 년 전의 전화로 큰 고통을 받았소이다. 아름다웠던 땅은 황폐해졌고, 수많은 백성들이 피를 흘렸소. 그래도 우리 제국과의 국교를 통해 차츰 상황은 나아지고 있소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약탈을 일삼던 주변 소수 부족들을 정리한 행사를 통해 세를 불려 나가 최근엔 그 기세가 만만치 않다고 하더이다. 그야말로 벨라트릭스 왕국의 제2의 전성기라 할 수 있지 않겠소이까?”

황제의 물음에 곳곳에서 밸스커드 국왕을 향해 축하의 말을 건넸다.

아스란 황제도 가볍게 고갤 숙이며 치하했다.

“진심으로 감축드리오. 밸스커드 국왕.”

밸스커드가 황제를 향해 깊이 고갤 숙였다.

“모든 것이 자애로우신 폐하의 결정 덕분입니다. 폐하와 제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 말해 주어 고맙소.”

아스란 황제의 눈에 찰나 아련한 빛이 어렸으나, 이내 다시 온후하게 웃으며 재차 말을 이었다.

“해서 오늘은 베라트릭스 왕국의 안정과 앞으로의 발전을 미리 축하하고자 행사를 열게 된 것이외다. 그러니 이틀간 진행할 이 축제 기간 동안 경들은 모든 것을 잊고,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해 주길 바라는 바요.”

“감사합니다. 폐하.”

“황공하옵니다. 폐하.”

연회장 곳곳에서 황체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아스란 황제가 작게 웃으며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주변을 훑던 아스란 황제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여 내 경들을 위해 짐이 건배사를 제안할까 하는데, 다들 어찌 생각하시오?”

“오오! 영광입니다. 폐하!”

사람들이 저마다 눈을 빛냈다.

황제의 건배사 자체가 쉬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특히나 아스란 황제 같은 경우엔 건강 문제로 이리 많은 사람이 모인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너무도 오랜만이었다.

연회장에 곳곳에 배치해 둔 시녀와 신하들이 발에 땀이 나랴 분주히 움직이며 손님들의 잔에 일일이 술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사이, 황제 역시 팔걸이를 힘주어 짚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있던 그의 직속 신하가 급히 그에게 다가와 잔을 건네곤, 술을 채웠다.

쪼르르.

자리한 모든 이의 잔에 술이 채워지자 사방 곳곳에 술 향기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시녀와 신하들이 손님들 잔에 술을 채운 것을 일일이 훑으며 확인하던 아스란 황제가 잔을 높게 치켜세우고 다시 입을 열었다.

“동맹국, 벨라트릭스 왕국의 무구한 번영을 위해. 그리고 얼마 전 떠나간 우리의 친구 레스타드 경을 추모하며. 건배…!”

밸스커드와 듀란드의 눈썹이 순간 움찔했다.

황제의 건배사에 유니콘의 전 길드장 레스타드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꿀꺽꿀꺽.

황제가 잔을 말끔히 비워 내자, 지켜보던 이들도 단번에 잔을 비웠다.

옆에 있던 신하가 빈 잔을 수거하고, 아스란 황제가 다시 용좌에 앉았다.

그가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거리더니 근처에 있던 듀란드 공작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유니콘 길드의 새 주인에게도 초대장이 보내진 것으로 아는데, 자리하였소이까?”

황제의 물음에 가장 근처에 있던 듀란드가 나서 고갤 저었다.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사옵니다.”

“음….”

아스란 황제가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지… 유니콘 길드는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니.”

황제의 말을 듣던 듀란드 공작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 사교회의 목적이 무엇인가.

벨라트릭스 왕국의 번영을 축하하려고?

얼어 죽을.

그의 계획은 이든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아무도 모르게 처리할 계획이었다.

한데 황제의 말을 들으니 정말 그가 이곳에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듀란드가 고갤 휘휘 저었다.

‘아니, 오지 않을 리가 없다. 게다가… 우리의 예상이 맞는다면 놈은 레스타드를 죽이라 시킨 윗선이 나임을 이미 알고 있을 터. 필시 나를 보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올 것이다….’

그의 예상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시 뒤, 연회장의 문이 다시 양옆으로 열렸다.

저벅저벅.

양쪽으로 활짝 열린 문 사이로 한 쌍의 남녀가 걸어 들어왔다.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의 이목이 저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순간 찾아온 정적.

착 감긴 눈에 기다란 흑남색의 머리를 작게 흩날리며, 붉은 비단의 장포를 걸친 사내.

그 안의 훤칠한 키에 단단한 체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연회장의 모인 사람들의 약식과는 확연히 다른 유별나 보이는 의복이었지만, 이를 입은 사내의 모습은 퍽이나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선 여인 또한 그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등장한 사내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모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때.

연회장의 그를 소개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유니콘의 길드장, 이든 님이십니다!”

길드장 취임 이후, 세상에 자신을 알리는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수려한 이든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피었다.

‘자,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챙길 것은 다 챙겨 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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