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유니콘 길드는 제국의 모든 영지에 남다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길드가 제국에 가지는 영향력의 지표라 한다면, 길드가 가진 자금력과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분쟁 시 대처할 수 있는 전투력으로 비교하곤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고 하니.
길드 간에 분쟁이 발생하여 최악의 상황으로 번졌을 때.
결국엔 자금력을 통해 얼마나 많은 전투 인원을 동원하느냐로 승패가 갈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실 자체에서도 길드 간에 발생하는 분쟁에 관해선 끼어들지 않으려 하는 것도 한몫했다.
그 점에서 본다면 유니콘 길드의 자금력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냐마는.
전투력은…?
유니콘 길드는 자금력에 비해 전투 요원이 그다지 많은 곳도 아니었다.
호송 업무가 추가되고 나서야 전투 요원이 근래 들어 급속히 늘어났지만, 말 그대로 최근이었다.
그런 길드가 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곳이 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서신의 배송부터 물건의 운송.
그리고 근래 추가된 상단의 호송까지.
일상과 관련한 모든 유통이란 유통은 총망라하여 수도를 포함하여 모든 영지를 콱 틀어쥐고 있으니, 모든 업종을 포함해 여타 길드와 비교해도 유니콘 길드만큼 가파르게 성장하고, 유니콘 길드만큼 영지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길드는 없다는 말이다.
해서 레스타드가 길드장이었던 시절엔 귀족들이 그에게 잘 보이겠답시고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던가.
게다가….
현재에 이르러선 레온하르트 영지까지 지부를 넓혀 정말 모든 영지에 지부를 가지고 있으니.
당연코 귀족들의 관심이 이든을 향해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저벅저벅.
이든이 태연자약하게 사람들의 이목을 지나쳐 어느 한 곳에 섰다.
옆에 있던 카르엘이 그만 들릴 듯한 조용한 음성으로 나직이 말했다.
“아스란 제국의 황제 폐하이십니다.”
듣던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그의 기감이 눈앞에 사람을 향했다. 수많은 인파 속, 별다른 설명이 없음에도 정확히 상석에 앉은 황제의 기운을 찾아낸 것이다.
스륵.
장포가 땅에 닿았다.
이든이 한쪽 무릎이 땅에 닿도록 다릴 굽힌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포권.
무인에게 있어 더없는 존경의 표시로 예를 갖추던 이든이 입을 뗐다.
“아스란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간소한 말이었지만, 몸가짐은 더없이 훌륭했다.
목소리도 쩌렁쩌렁 울리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었으나, 이든의 목소리는 기파를 타고 사람들 귓가에 또렷이 울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절도의 극치.
길드장의 모습이라기보단 한 사람의 무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곳곳에서 감탄이 쏟아지고, 역시 흐뭇한 표정으로 온화하게 웃던 아스란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니콘의 이든 길드장, 얘기는 많이 들었소. 세간에서는 그대를 심안의 무사라 부른다지요?”
“부끄러운 별호이나 그렇사옵니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무도 대회에서 큰 활약을 보여 주었고, 일전엔 테이머 길드와 관련된 황실의 치부를 밝히는 데 큰 공을 세워 주었소.”
황궁의 치부를 드러냈음에도 도리어 이든의 행보를 극찬했다.
듣던 이든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스란 황제가 재차 입을 열었다.
“게다가 위기에 빠졌던 레온하르트 영지를 구한 것도 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소.”
“황공하옵니다.”
“그곳에 기사 아카데미 학생들이 토벌에 파견되었다는 말을 듣곤 근심이 가득하였는데, 그대의 활약 덕분에 모두 무사히 돌아올 수가 있었소. 정말 고맙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스란 황제가 고갤 끄덕였다.
이든을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만연해졌다.
“읏차…!”
아스란 황제가 팔걸이를 짚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옆에 있던 신하가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했지만, 황제의 얼굴엔 힘든 기색일랑 느껴지지 않았다.
“영웅이란 언제 봐도 즐거운 법이지.”
아스란 황제가 더없이 뿌듯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오늘 이렇게 밸스커드 국왕과 유니콘의 길드장 이든. 두 젊은 영웅들을 한자리에서 보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소. 이 자리에 우리 제국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칼스테인 백작 또한 함께했었다면 참으로 좋았겠지만, 아무렴 어떻소이까.”
황제가 손을 뻗자 신하가 당연하다는 듯 빈 잔을 건넸다.
곧 그의 잔에 술이 채워지고 연회장 곳곳에 있던 시녀와 신하들이 바삐 움직이며 다시 사람들 잔에 술을 채웠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준 밸스커드 국왕과 이든, 두 영웅을 위해 한잔합시다! 두 영웅의 찬란한 앞날을 위하여!”
황제가 잔을 비우기 시작하자, 곧 사람들 역시 저마다 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이든 또한 자신 앞의 잔을 비우는 그사이, 밸스커드의 홍안이 찰나 붉은 안광을 터트리며, 이든을 향했다.
흥미일까.
살기일까.
의미를 도무지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길드장님께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어떻게 훌륭한 무인이 되실 수 있던 거죠?”
대신과 동행한 부인으로 추정되는 중년 여인의 물음에 이든이 답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거든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예. 가령 제 앞에 계신 부인의 목소리만 듣고도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일지 훤히 그려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인이 화들짝 놀라며 웃어 젖혔다.
“어맛! 꺄르르르르륵!”
“어쩜. 목소리가 이리도 고우신지. 제 귀가 다 호강을 하는군요.”
“호호호호호!”
카르엘이 뚱한 눈으로 슬쩍 이든을 바라봤다.
입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청산유수와 같이 쏟아 내는 그의 말을 옆에서 내내 듣고 있자니, 옆에 있는 남자가 진정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이든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시간은 흘러 연회장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한쪽에서 숨을 돌리던 이든이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하아… 이것도 도무지 사람이 할 짓이 못 되는군.”
“길드장님!”
카르엘이 황급히 이든의 입을 틀어막았다.
“연회장엔 듣는 귀가 많다고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요!”
이든이 카르엘의 손을 치웠다.
그의 얼굴이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인 걸 어쩌라고요.”
“그치만….”
이든의 반응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내내 옆에서 이든을 보좌하던 카르엘도 진이 빠질 정도였으니까.
어찌나 득달같이 달려들어 말들을 건네는지. 덕담 몇 마디만 주고받은 것 같은데 평생 떠들 말을 오늘 다 쏟아 낸 것만 같았다.
이든이 넋이라도 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한숨 돌리던 그때.
“많이 지쳐 보이시는군요.”
한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카르엘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카르엘이 황급히 이든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벨라트릭스 왕국의 밸스커드 국왕이에요!”
“호오.”
다가오는 기척을 살피던 이든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밸스커드 국왕에게서 만만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이다.
‘단전은 비었다. 그럼…?’
이든의 기감이 밸스커드의 심장을 향했다.
쿵쿵. 쿵쿵.
‘심장. 그렇군… 검을 쓰는 자가 아니라, 마법을 부리는 자였군,’
오래전, 루디가 마법을 보여 줬을 때와 같았다. 그때 루디도 심장에 마나라 불리는 기운을 쌓아 두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밸스커드를 살피던 이든이 일순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기운이 어째 낯이 익었던 탓이다.
‘뭐지? 어디서 느껴 봤던 기운인데….’
“이든 길드장님?”
밸스커드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이든이 아차 하며 고갤 숙였다.
“이런,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좀 하느라….”
밸스커드가 낮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많은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절로 기운이 빠지는 법이죠. 다만…. 그럼에도 듣는 귀가 많다는 것은 유의하십시오. 사교 회의 모인 사람들은 남들 얘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거든요.”
조금 전, 이든의 실언을 두고 주의를 시키는 말이었다.
이든이 한 차례 더 고갤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하하하! 아니요. 사실 이 말이나 하고자 온 것은 아닙니다. 그냥 이든 길드장님을 꼭 보고 싶었던 터라 힘들어 보이신 와중에 무릅쓰고 온 것입니다.”
이든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를요?”
“예. 그리고 역시…. 소문대로 대단하시군요. 봐도 봐도 놀랍습니다.”
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봐도 봐도’라니?
“혹 저희가 만난 적이 있습니까?”
이든의 물음에 밸스커드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설마요. 뭐, 오가다가 한 번쯤 만났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오가다가?
‘당신과 내가 오가다가 만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허투루 들을 순 없었다.
이든 역시 그에게서 익숙한 기운을 느끼지 않았던가.
물론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는 게 문제였지만….
‘대체 내가 이 양반을 어디서 봤더라….’
잡념 때문에 내내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도 모르는 사이, 밸스커드가 재차 입을 열었다.
“어찌 됐든 이렇게 뵐 수 있어 참으로 영광이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선 이틀간 행사를 보내시지요? 부디 뜻깊은 시간 되셨으면 합니다.”
밸스커드의 인사에 이든이 살짝 고갤 숙여 보이며 물었다.
“전하께선 오늘 돌아가시는 겁니까?”
“예. 아쉽게도. 뭐, 운이 따른다면 다시 볼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아, 예….”
“그럼 두 분 모두에게 행운이 함께하길.”
밸스커드가 웃으며 가볍게 고갤 숙이곤 걸음을 옮겼다.
멀어져 가는 밸스커드의 등 뒤를 바라보던 카르엘이 그만 들릴 듯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뭔가… 특이하신 분 같죠?”
“…….”
이든이 카르엘을 향해 고갤 돌렸다.
“카르엘 씨.”
“예?”
“사교회엔 듣는 귀가 많다구요. 크흠!”
“…이잇!”
받았던 말을 그대로 카르엘에게 돌려주는 이든이었다.
***
연회장의 사람들이 한두 명씩 빠져나가고, 축제 역시 소강상태를 보이며 마무리되어 갈 무렵.
황궁의 넓디넓은 정원 한구석.
그곳에 검은 로브로 온몸을 둘둘 둘러맨 사내가 땅에 무언가를 연신 뿌려 대며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죽음마저 비껴갈 용사여. 내 부름에 답하소서.”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한참이나 중얼거리던 사내의 손에서 일순 검붉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스스스….
마치 피를 연상시키는 선명한 붉은빛.
일순 허공을 수놓던 핏빛이 푹 가라앉으며 정원 사방에 줄기줄기 뿌려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부르르르르.
피가 뿌려졌던 흙바닥에 모래가 튀며 진동해 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몸을 떨어 대던 정원에서 무언가가 흙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푹.’
비집고 나온 그것은 마치 하얀 꽃을 연상시켰다.
대뜸 정원 한가운데에 피어난 하얀 꽃 한 송이.
하나.
푹. 푹. 푹푹. 푹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 주변으로 연달아 하얀 꽃이 흙을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비집고 나오던 꽃들은 이내 수십 송이로 피어나 있었다.
사방에 꽃이 피어났으니 당연코 아름다운 풍경이 떠올라야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꽃치곤 푸른 잎 하나 없이 앙상하기 짝이 없었다.
피어난 꽃들을 바라보던 사내의 로브 속에서 붉은 안광이 터져 나왔다.
“오오. 일어나시오. 위대한 자의 용사들이여…!”
마치 사내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꽃들이 움직여 댔다.
덜거덕.
꽃들이 움직일 때마다 요사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뼈가 맞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이윽고 꽃들이 거칠게 움직이며 그 안의 뿌리를 드러냈다.
덜거덕. 덜거덕.
재차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
꽃이라 생각했던 그것.
하나.
그것은 꽃이 아닌 백골의 손이었다.
이윽고 흙을 비집고 나타난 그것의 실체.
백골들이 시퍼런 안광을 흘리며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후우우웅.
사기(死氣)를 풍기며 일어선 괴물들은 풍기는 분위기 자체만으로 아름다웠던 정원을 한순간에 지옥도로 만들었다.
살아 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죽어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지 분간이 가질 않는 그 백골들을 바라보며 로브의 사내가 붉은 안광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자아… 가서 그놈을 죽여 주시오!!!!”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십 구의 백골들이 재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정원을 가로지르던 백골들이 황궁의 벽을 타고 기어오르더니 어느 창가 쪽으로 향했다.
사교회에 참석한 손님들이 머물고 있던 객실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