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250)

100화.

“…….”

사람이 극도로 흥분을 하면 본의 아니게 본모습이 나온다고 했던가.

간혹 무모한 모습을 보여 주긴 하지만….

그래도 굉장히 쿨한 사람인데.

스파토이를 곱게 다지는(?) 과정 중에 보인 이든의 남다른 모습에 카르엘이 입만 쩍 벌리고 바라만 보던 그때.

우뚝.

검집을 휘두르던 이든의 손이 덜컥 멈추었다.

“후우….”

이든이 검집을 축 늘어뜨리곤 숨을 한번 크게 내뱉었다.

카르엘의 시선이 그의 발치 근처에 쌓인 자루들로 향했다.

“세상에….”

장장 한 시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검집을 휘두르며 작업했던 그였다.

워낙 그 뼈가 단단한 놈들이었고, 숫자도 많다 보니 가루로 다지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스파토이의 뼛가루를 담아 넣은 자루들이 쌓이고 쌓여 스무 자루나 되었다.

카르엘이 찰나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번개처럼 쏘아졌던 이든의 신형.

그리고 빛처럼 휘둘러진 그의 손.

그 화려하고 대단한 움직임도 어느 정도껏 해야지.

한 시진이 넘도록 그 짓을 해 댔으니 제아무리 이든의 경지가 지고하다 한들 그 역시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할 짓이 못되었다.

얼마나 지루한 작업이었으면, 카르엘이 그 와중에 옆에서 깜빡 졸기까지 했을까.

거친 숨을 몰아쉬던 이든이 잠시 뒤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됐다.’

그의 시선이 한쪽 귀퉁이에 쌓인 자루들로 향했다.

‘저것들이 말로만 듣던 드래곤 뼈다, 그 말이지.’

이든이 입맛을 다셨다.

내공을 늘려 줄까. 혹여 눈을 뜨게 해 줄까.

벌써부터 저것이 어떤 효험을 줄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상당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기, 길드장님.”

카르엘이 쭈뼛거리며 그의 곁에 다가갔다.

“고, 고생 많으셨어요.”

“…네. 오늘만큼은 제가 생각해도 참 고생한 것 같습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작업이군요.”

“하, 하하….”

카르엘이 어색하게 웃던 그때.

기감으로 황궁 주변을 살피던 이든이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작정하고 우릴 황궁에 초대했던 듯싶습니다.”

“뭐가요?”

“보세요.”

이든의 손이 방 안 사방을 향했다.

“이리 난장을 피웠는데, 병사들 한 명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 소란을 피웠는데, 어떻게 사람 한 명 찾아오지 않을 수가 있는지 의아스럽다.

마치 이 널따란 객실 건물을 그들만 쓰는 것처럼 말이다.

빠드득.

이든이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도 잠시. 무미건조하던 그의 얼굴에 점차 비릿한 미소가 말려 올라갔다.

그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 이 짓을 계획한 놈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

***

쪼르르르…. 뚝.

찻주전자에서 유려하게 떨어지는 물줄기가 끊어지며 덜컥 멈추었다.

주전자를 들고 있던 밸스커드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밸스커드 전하?”

앞에서 차를 한 모금 들이켜던 듀란드 공작이 그 모습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밸스커드가 덜덜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찻주전자를 힘겹게 탁자에 놓았다.

탁.

잠시 뒤,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스파토이가…. 소멸한 것 같소.”

“……?”

듀란드 공작이 고갤 갸웃거렸다.

대뜸 스파토이가 소멸하다니?

쉬이 이해가 가질 않는 말이었다.

듀란드가 재차 물었다.

“스파토이가 소멸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밸스커드의 홍안이 창밖 너머 객실 쪽 건물로 향했다.

찰나 그의 눈동자가 타오르듯 번쩍이다 이내 가라앉는다.

“스파토이의 사념이 전혀 느껴지지 않소.”

“…….”

“아무래도 실패한 듯 보이오.”

“…….”

불사의 전사 스파토이가 임무를 실패한 것도 모자라 소멸했다고?

말도 안 되는 얘기인 것 같지만, 그냥 하는 소리일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비록 드래곤의 이빨을 매개로 소환되었다곤 하나, 그 과정엔 필시 밸스커드의 흑마법이 개입되어 있었다.

즉. 스파토이를 움직이게 만드는 사념의 원천은 밸스커드의 흑마법.

멀찍이 떨어졌다곤 하나, 스파토이와 밸스커드 사이엔 연결 고리가 있는 셈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

이는 스파토이가 통제를 벗어났거나, 소멸했음을 뜻했다.

하지만….

통제를 벗어났으면 필시 소란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무슨 일이 있냐는 듯 너무도 조용하지 않은가.

듀란드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다.

스파토이가 소멸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것이다.

“…스파토이가 소멸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외까…?”

밸스커드가 고갤 저었다.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그만한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

그것도 상상도 못 할 어마어마한 힘이…!

드륵.

흔들리는 동공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밸스커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하…?”

“내 생각이 짧았소. 아무래도…. 우리가 상대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것 같소.”

“상대를 잘못 보다니요. 설마… 이든 그자를 말하는 것이외까?”

밸스커드가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현 유니콘의 길드장 이든, 요주의 수준을 넘어 아무래도 우리에게 있어 가장 성가신 적이 될 것 같소이다.”

듣던 듀란드가 고갤 갸웃거렸다.

물론 스파토이를 쓰러뜨렸단 말을 듣고 그 역시 적잖이 당황한 것은 맞지만….

이든, 그자가 가장 성가신 적이 될 것 같다는 밸스커드의 말엔 쉽사리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이는 듀란드가 스파토이가 얼마나 대단하고 성가신 존재인지에 대해서 전혀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너무 예민하신 것 아니오…?”

“예민?”

듀란드의 말에 안색을 굳힌 밸스커드의 홍안이 일순 화륵 타올랐다.

듀란드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말씀을 삼가시오. 듀란드 공작. 내가 지레 겁을 먹고 이러는 줄 아시오?”

“크, 크흠…! 오해가 있으신 듯하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듀란드 공작이 밸스커드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놀리며 진땀을 빼던 그때.

밸스커드가 그의 말을 잘랐다.

“듀란드 공작께서는 특히 주의하시는 게 좋겠소.”

“네…?”

“저 이든이란 자가, 배후에 듀란드 공작이 있음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 않소?”

“…….”

그렇지.

현 유니콘 길드장, 이든은 레스타드 길드장 죽음의 배후 중 하나가 듀란드 공작임을 자백받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가 그 사실을 정말 알고 있다면, 지금껏 이든이란 작자의 행보로 봤을 때 필시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듀란드 공작이 마른침을 삼키며, 밸스커드의 시선이 향했던 곳.

창밖 너머 객실 건물로 눈을 돌렸다.

그곳을 한참이나 응시하던 듀란드 공작이 천천히 입을 뗐다.

“…그가 어찌 나올 것 같습니까?”

밸스커드가 고갤 저었다.

그 역시 예상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모르겠소. 다만…. 예상치 못할 변수를 불러올 것은 자명한 일이오. 특히, 연회는 내일 조찬까지 이어지지 않소?”

듀란드가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마무리 단계만 남았지만, 연회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이든이란 작자가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아침에 있을 조찬 때 어찌 나오는지를 지켜보면 될 일이었다.

스륵.

자리에서 일어나있던 밸스커드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몸이 검은 안개로 화하며 차츰 희미해지고 있었다.

“나는 곧장 이 사실을 주군께 알릴 것이오. 공작께서도 그때까지 자중하시오.”

사라져 가는 밸스커드를 애써 붙잡듯 듀란드가 황급히 말을 꺼냈다.

“그냥 지켜볼 것이 아니라,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어리석은 소리!”

밸스커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스파토이도 못한 것을 누구를 시켜 저자를 없앤단 말이오? 그대의 사위인 칼스테인 백작에게라도 부탁할 셈이오?”

“…….”

오직 이 나라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충신, 제국의 제일 검. 칼스테인 백작이…?

그럴 리가 없지….

듀란드 공작이 아무 말 못 하고 입을 꾹 다문 사이,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그의 모습에서 희미한 음성만이 울려 퍼졌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시오… 상대는… 우리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인물이…오.

밸스커드가 텔레포트로 단숨에 자취를 감추고, 듀란드 공작의 불신 어린 눈이 재차 객실 쪽 건물을 향했다.

그곳을 향한 듀란드 공작의 눈동자에 서슬 퍼런 흉흉함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든, 내 네놈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어찌…!!!”

***

다음 날.

날이 밝기 무섭게 조찬에 참석을 앞두고 이든은 의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있었다.

카르엘 역시 서둘러 준비를 마치곤 이든을 기다리던 그때.

문득, 이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젯밤 있던 일에 대해선 적당히 둘러대는 것이 좋겠습니다. 특히 스파토이인지 뭐시깽이인지 하는 것들은 더더욱 말입니다.”

카르엘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갤 갸웃했다.

“어째서요…!?”

“여긴 적의 소굴입니다. 새벽에 그 난리를 쳤는데, 경비병 한 명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것을 보면 뻔하죠. 저 혼자라면 몰라도 카르엘 씨와 함께 있는 지금은 몸을 사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듣고 보니 그렇다.

새벽에 그리 난리를 쳤음에도 아무런 소란 없이 이리 지나갔다는 것은 황궁을 통제하는 저들의 아귀가 생각보다 크다는 방증이다.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게다가… ‘드래곤의 이빨’이라니. 저들이 그걸 믿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하긴.

직접 겪은 카르엘 자신도 선뜻 믿기 힘들 지경인데. 듣는 이들은 오죽할까.

아마 둘을 미친 사람 보듯 할 것이 뻔했다.

모든 준비를 마쳐갈 때쯤, 이든과 카르엘이 있던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네, 들어오셔도 됩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황실의 궁녀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곤 막 입을 떼려던 그때였다.

“길드장님, 궁에서 조찬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채비하시겠…. 꺅! 세상에…!”

궁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객실 안을 훑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궁녀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난장판이 된 객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이든과 카르엘의 모습이 보였다.

“아, 그게….”

카르엘이 무어라 둘러댈지 우물쭈물하던 그때, 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장 강도가 들었습니다.”

“…네? 무장… 강도요?”

“…….”

궁녀가 지금 자신이 들은 게 맞냐는 식으로 되물었다.

‘저기요. 길드장님…? 황궁에 무장 강도요…????’

옆에서 듣던 카르엘조차 그게 뭐냐는 눈빛을 했지만.

알게 뭐람.

이든이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네. 저기, 저쪽 창을 깨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든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따라 궁녀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창이 깨져 있었다.

어떤 간 큰 도둑이 병사의 눈을 피해서 황실까지 들어올 생각을 한 것인지 여전히 의문이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궁녀가 황급히 고갤 숙였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시고요…!?”

“예. 보시다시피 저희는 멀쩡합니다만…. 너무 죄송하게 됐습니다. 놈들이 흉기로 위협하던 터라 저항하는 나머지 황실의 기물을 파손시키고 말았습니다.”

궁녀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뇨! 다치지 않으신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입니다. 우선 알겠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궁에 알려야 해서, 다른 궁녀에게 부탁해서 여러분을 조찬실로 안내토록 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궁녀가 황급히 문을 닫고 부리나케 나가는 것을 확인한 카르엘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무장 강도요…?”

“왜요?”

“황실에 무슨 무장 강도가 들어요!”

“어쨌든 스파토이에 관해선 적당히 둘러대지 않았습니까.”

“하아….”

카르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음에 또 이런 일 있거든 먼저 상의라도 해 주세요.”

“나 참. 알겠습니다.”

이든이 입을 삐쭉 내밀 듯이 하자, 카르엘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때, 그녀가 재차 물었다.

“그런데 저희를 노린 게 정말 황실의 사람이라면 대체 누굴까요?”

아직 이든이 말을 꺼내지 않은 터라. 카르엘은 일전 레스타드 길드장의 죽음에 관해 제대로 들은 바가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아는 것이라곤 각 지부의 몇몇 지부장들이 그 일을 꾸몄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이든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하얀 이를 드러냈다.

새하얀 이를 드러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작이 가는 인물이 있긴 한데… 가서 슬슬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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